< 『해외편 - 134』 >
『해외편 - 134』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3대 명문 구단 중 한 곳으로 가을 좀비로 유명한 팀이기도 하다.
현재 중부 지구 1위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으며, 내셔널리그 15개 팀 중에서는 가장 먼저 30승의 고지에 올라서며 아메리칸리그의 뉴욕 양키스의 뒤를 이어 가장 높은 승률을 기록하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근래 10년 동안 3차례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일궈냈을 정도로 전통의 강호로 불리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였지만, 항상 와일드카드로 겨우 포스트 시즌에 올라올 정도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오기도 했다.
그랬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올 시즌엔 초반부터 무섭게 승수를 쌓아 올리고 있었다.
리그 최고의 선발 투수를 보유하지도 않았고,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중심 타자도 없는 팀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다.
그러나 반대로 불안하다 싶을 정도의 4, 5선발 투수가 있지도 않았으며, 타선의 맥을 끊어버릴 정도로 실력이 떨어지는 타자 또한 없는 팀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였다.
간단하게 말하면 평균 이상의 투수와 타자들로 라인업을 알차게 채우고 있다고 할까?
공수에 있어 가장 균형이 잘 짜인 대표적인 구단인 셈이다.
페넌트 레이스 기간 동안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잡혀 있는 경기수는 7경기.
5월 9, 10, 11일에는 3연패를 당했기에 15일부터 치러지는 18일까지의 4연전은 굉장히 중요했다.
각각 중부 지구와 서부 지구로 다른 지역에 속해 있다 하더라도 같은 내셔널리그의 팀이기에 승패의 문제는 굉장히 중요했다.
특히, 지구 1위를 기록하지 못하면 타 지구의 2위 팀과 승률로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벌이기에 한 경기, 한 경기 중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15일 1차전.
LA 다저스에서는 앤디 클레먼트가 선발로 마운드에 올랐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는 제이 파브로가 등판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3선발 투수인 제이 파브로는 매년 13승은 꼬박꼬박 챙겨주는 투수로 큰 기복 없이 벌써 메이저리그에서만 7년째 선발 투수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콜로라도 로키스와 있었던 원정 3경기에서 2승 1패를 기록했기에 LA 다저스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반대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홈에서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상대로 1승 2패의 루징 시리즈로 분위기가 좋다고 할 순 없었다.
하지만, 직전에 있었던 LA 다저스 원정 경기에서 3연승으로 스윕을 했었기 때문인지 선수들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렇게 맞붙은 1차전은 예상외의 팽팽한 투수전이 펼쳐졌다.
앤디 클래먼트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타자들을 상대로 7이닝 동안 단 3개의 안타만을 내주며 올 시즌 들어 가장 완벽한 무실점 호투를 보였고, 상대 투수인 제이 파브로 역시 7이닝 5피안타 무실점으로 마운드를 지켜냈다.
양 팀의 선발 투수들이 팽팽한 투수전을 보이고 동시에 마운드를 내려가자 불펜 투수들 역시도 만만찮은 투수전으로 타자들을 완벽하게 압도했다.
결국 승부는 연장 12회에 났다.
연장 12회 말 선두 타자였던 던컨 카레라스가 볼넷으로 출루에 성공하고 이후 도루 성공과 크레이그 바렛의 진루타가 나오면서 1사 3루라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는 당연히 3번 타자인 코리 시거를 고의사구로 1루로 보내면서 4번 타자 마이크 트라웃을 상대로 병살타를 노릴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마이크 트라웃의 2루타가 터지면서 짜릿한 연장전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길고 힘겨운 승부 끝에 얻어낸 승리였기에 클럽 하우스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고무되었다.
이날 경기에서 형수는 5번 타자로 출장해서 하나의 볼넷만 얻어내는 것이 전부였지만, 공격적인 면보다는 수비적인 면에서 투수들과 아주 좋은 모습을 보였기에 게레로 감독의 신뢰가 더욱더 깊어질 수 있었다.
16일 일요일에 벌어진 2차전은 1차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경기를 보여줬다.
말 그대로 난타전.
부상 복귀 이후 지속적으로 좋은 모습을 보이며 팀의 에이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던 필 맥카프리가 선발로 나섰지만, 결과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참혹했다.
4이닝 6실점.
필 맥카프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성적표였다.
경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필 맥카프리의 컨디션은 결코 나쁘지 않았었다.
구속도 잘 나왔고, 제구력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타자들이었다.
전날의 무기력했던 모습을 잊어달라는 듯 1회부터 필 맥카프리의 공을 안타로 만들어 내는 집중력있는 모습이 섬뜩할 정도였다.
그렇게 필 맥카프리가 4이닝 동안 피안타 8개와 홈런 2개를 내주며 6실점으로 강판을 당했을 때만 하더라도 오늘 경기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가져갔다고 여겼다.
하지만, 경기를 포기하기에 4이닝은 너무 일렀던 걸까?
4회까지 아슬아슬하게 다저스 타자들을 잘 막아내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올리버 마빈은 5회 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선두 타자였던 던컨 카레라스가 안타를 치며 출루를 했고, 2번 타자 크레이그 바렛은 볼넷으로 걸어 나가며 분위기를 띄운 것.
무사 1, 2루의 상황에 이르자 24살의 젊은 투수인 올리버 마빈의 제구력이 흔들리며 3번 타자 코리 시거마저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해버렸다.
순식간에 무사 만루의 상황에 처하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더그아웃에서 감독이 직접 마운드에 오르며 올리버 마빈을 안정시켰다.
어차피 6점 차이로 크게 리드하고 있으니 1, 2점 정도는 줘도 된다고 했을 것이 분명했다.
감독의 격려가 있었기 때문인지, 흔들렸던 제구력이 다시 안정을 찾아가며 올리버 마빈은 마이크 트라웃을 내야 뜬공으로 잡으며 감독의 격려에 보답을 해주었다.
1사 만루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건 미치 네이.
결과는 깔끔할 정도로 무기력한 삼진.
무사 만루가 순식간에 2사 만루로 변하는 순간 더그아웃에서는 탄식이 나왔고, 게레로 감독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오늘 게임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모두의 머릿속에 꽉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미치 네이가 욕심으로 크게 스윙을 가져가며 삼진을 당해버렸으니 게레로 감독 입장에서는 당연히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분위기에 찬물을 제대로 끼얹은 미치 네이의 뒤를 이어서 타석에 선 건 형수였다.
쿠어스 필드에서는 무시무시한 장타력을 보여줬지만, 어제 경기에서는 무안타로 팬들에게 실망을 안겨줬던 형수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타석에 섰다.
반대로 올리버 마빈의 표정에는 여유가 엿보였다.
무사 만루 상황에서 단 1점도 실점하지 않으며 2아웃까지 왔으니 충분히 그럴 만 했다.
긴장한 타자와 여유를 되찾은 투수.
보나마나 한 결과였다.
올리버 마빈은 적절하게 스트라이크와 볼을 배합하며 형수를 상대했고, 공 4개를 던졌을 때 카운트는 2스트라이크 1볼이었다.
불리한 볼 카운트에 형수의 얼굴 표정은 돌처럼 굳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삼진을 당하거나, 어정쩡한 타격으로 아웃카운트를 만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절망스럽다 여기던 그 순간, 관중석에서 형수를 응원하는 작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you can do it!
경기의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순간에 타석에 서서 바짝 얼어붙은 신인 타자를 조롱하거나, 비난하는 부정적인 목소리가 아닌, 그를 배려하는 다저스 팬의 마음이었다.
손에 맥주잔을 쥔 흑인 남성의 외침이 하나, 둘 관중들에게 이어졌다.
순식간에 들불처럼 관중들이 형수를 향해서 큰 목소리로 응원을 펼쳤다.
관중들의 목소리에 형수는 타임을 요청하고 타석에서 물러나서 자신을 응원하는 홈팬들을 바라봤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표정이 서서히 풀렸고, 얼굴 가득 희열이 들어찼다.
입가에 미소가 퍼지고, 눈꼬리가 완만하게 휘어지더니 형수가 돌연 소리를 내질렀다.
“으아아아아악!”
갑작스런 형수의 미친 짓에 더그아웃에 있던 선수들이 웃음을 터트리거나, 혀를 차기도 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기합을 불어 넣은 형수가 다시 타석에 섰을 때, 녀석의 표정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쿠어스 필드에서 4연타석 홈런을 쳤을 때의 그 표정이었다.
올리버 마빈이 던지는 유인구를 그대로 흘려보내는 여유까지 되찾았다.
그리고.
따- 악!
86마일의 슬라이더를 그대로 때려버린 형수의 메이저리그 첫 번째 만루 홈런.
그랜드 슬램(grand slam)이 터져버렸다.
관중들은 말 그대로 난리가 났고, 프로 데뷔 첫 만루 홈런을 때린 형수는 괴성을 내지르며 베이스를 돌아 상대팀 선수들의 신경을 건드렸지만, 그런 것에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듯 홈 베이스에 모여 있던 동료들과의 세레모니도 꽤나 격정적으로 보여줬다.
“나… 떨고 있냐?”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형수가 내게 가장 먼저 한 말이다.
“엄청 떨고 있네.”
실제로 형수는 손가락까지 바르르 떨고 있었다.
온 몸이 흥분했다는 증거였다.
순식간에 4점을 따라붙은 다저스 선수들의 분위기는 역전을 노리는 용사들처럼 의지가 활활 타올랐다.
반대로 쉽게 승리를 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선수들은 쫓기는 입장이 되어 5회까지 보여주었던 모습이 살짝 변하기 시작했다.
필 맥카프리의 뒤를 이어 마운드에 오른 빅터 페르난도는 5회의 불안했던 모습을 깨끗하게 지우며 6회부터 안정적으로 투구를 펼쳤지만, 실점을 막을 수는 없을 정도로 상대 타자들의 타격감은 최고조에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LA 다저스의 타자들도 만만하지 않았다.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한 이상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6회 3점까지 달아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다시 2점까지 쫓아갔고, 7회 다시 3점으로 점수 차이가 났지만, 1점까지 바짝 따라붙으며 숨 막히는 접전을 보여줬다.
그리고 8회에 게레로 감독은 필승조까지 내세우며 필승의 의지를 내세웠다.
무실점으로 8회를 넘기자 8회 말 다저스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겨우 1점 차이.
올 시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가장 많은 홀드를 기록하고 있던 든든한 불펜 투수 엠제이 카나베일을 상대로 코리 시거와 마이크 트라웃이 연속 2루타를 터트리며 동점을 만들어 버린 거다.
마무리는 오늘 승부의 추를 원점으로 돌릴 수 있게끔 해준 형수였다.
2루에 묶여 있던 마이크 트라웃을 홈까지 불러들이는 큼지막한 2루타를 날리면서 오늘 경기의 영웅으로 확실하게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형수가 2루타를 터트리는 순간 그 누구보다도 게레로 감독이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최종 스코어 8:9.
4회에 일찌감치 승리를 예상했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는 충격적인 역전패였고, LA 다저스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짜릿한 역전승이었다.
당연히 이날 최고의 수훈 선수로 뽑힌 건 형수였다.
프로 데뷔 통산 첫 번째 만루 홈런과 역전 2루타의 주인공.
일주일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두 번이나 수훈 선수로 인터뷰를 따냈으니 형수로서는 최고의 일주일이라 불러도 좋을 만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17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리기 위해, 3연패의 굴욕을 3연승으로 되갚아주기 위해, 내가 선발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서는 날이었다.
“어때? 컨디션은 좋아?”
형수의 물음에 나는 걱정할 것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아.”
“편안하게 던져. 오늘도 이 형님이 확실하게 한 건 해줄 테니까! 흐흐흐!”
형수의 익살스러운 웃음 속에 담겨 있는 자신감에 나 역시 마주 웃었다.
“이런 거구나.”
“뭐?”
“든든하다는 말.”
“응?”
형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날 바라봤다.
지금까지 야구를 하면서 느껴보지 못한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든든하다는 감정.
별 것 아닌 것 같은 이 감정이 이상하게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날씨도 정말 좋네.”
화창한 LA의 하늘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입가에 가득 미소를 지었다.
턱.
형수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왼 주먹을 하늘 높이 치켜들며 힘차게 외쳤다.
“가자! 우리의 승리를 위해서!”
< 『해외편 - 13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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