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33』 >
『해외편 - 133』
“오늘 기사 메인은 아무래도 장형수 선수로 뽑아야 할 것 같은데요?”
차동호는 후배인 홍석의 말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차지혁 선수도 잘 던져주고 있기는 하지만 오늘 경기를 완전히 주도하고 있는 건 장형수 선수니까.”
더해서 이제는 차지혁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는 사람들의 관심을 어느 정도는 적절하게 분산시킬 필요도 있다고 생각했다.
장형수에게 대중의 관심이 분산된다고 차지혁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야구의 전체적인 양적, 질적 팽창을 위해서라도 장형수라는 걸출한 타자의 등장은 반드시 필요했다.
문제는 과연 장형수가 기존에 메이저리그에서 활약을 했던 국내 타자들의 명성을 뛰어넘을 수 있느냐다.
박호찬, 김병환, 최상호, 유혁선.
메이저리그에서 화려하게 비상을 했었던 국보급 투수 4인방이다.
투수로는 그래도 4명이나 메이저리그에서 정상급 활약을 해주며 대한민국 국민들의 가슴속에 자긍심을 심어줬지만, 타자로는 고작 단 두 명뿐이다.
추진수, 강전호.
메이저리그에서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1억 달러를 넘어서는 초대형 계약을 이끌어 냈었던 추진수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 누구보다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한 선수다.
그리고 강전호는 국내 타자로는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직행을 했던 내야수로 2015년부터 2023년까지 8년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하며 아시아 선수도 메이저리그에서 충분히 내야수로 성공할 수 있다는 모범적인 사례가 되었다.
하지만, 추진수와 강전호 모두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타자라는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추진수의 경우 뭐 하나 흠잡을 것 없는 전형적인 5툴 플레이어였지만, 그렇다고 어느 한 부분에서 특출나다 하기에도 부족했다.
고액 연봉자로서 거기에 부족하지 않은 성적을 유지했지만, 그렇다고 경기 자체를 이끌거나 한 방을 보유한 홈런 타자로서 경기를 뒤집어 놓을 만큼의 파괴력을 갖춘 이미지가 전혀 없었기에 사람들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각인이 되기가 쉽지 않았다.
강전호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준급 내야수로서 이름을 떨치기는 했지만, 리그에서 최정상급이라 부르기엔 어려웠다.
그런 와중에 장형수는 메이저리그를 휘어잡을 수 있을 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선보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차지혁 선수와 함께 배터리를 이루면서 중심타선에 확실하게 자리를 잡는다면…….’
생각만으로도 짜릿해지는 차동호였다.
“그렇지!”
홍석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TV에서 방금 차지혁이 사토시 슌을 상대로 또 다시 삼진을 뽑아냈기 때문이다.
“천재니 어쩌니 하면서 지랄발광을 해대더니 꼴 좋네! 하하하하!”
무안타.
일본 역대급 재능을 갖춘 천재 타자 사토시 슌은 차지혁을 상대로 시즌 내내 단 하나의 안타도 기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사토시 슌의 성적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시즌 초반에 비하면 타율이 떨어진 건 사실이지만, 아직까지도 3할 7푼을 마크하고 있었으니까.
분명 루키 시즌임을 생각하면 괴물과도 같은 수준이지만, 문제는 다른 투수들을 상대할 때와는 다르게 차지혁만 만나면 타율이 수직 하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덕분에 일본 언론에서는 의도적으로 사토시 슌과 차지혁이 대결을 펼친 날에는 기사를 내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봐야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이었지만.
상황이 이렇다보니 국내에서는 모든 조롱거리를 사토시 슌에게 비교할 정도였다.
온갖 패러디가 인터넷에 널려 있었고, 반일감정이 높은 국내 네티즌들 같은 경우에는 일본과 관련된 기사마다 사토시 슌에 대한 조롱을 할 정도였다.
사냥꾼 앞에 선 사냥감이라고나 할까?
차동호가 보기엔 그랬다.
차지혁은 사토시 슌을 상대로 무척이나 여유롭게 공을 던졌다.
마치, 넌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안타를 칠 수 없다고 이미 확신하고 있는 듯 보였다.
결과적으로 약점이 존재한다는 뜻인데, 메이저리그의 특성상 이런 약점은 머지않아 철저하게 분석되어 공략을 하니 사토시 슌의 시즌 막판 타율이 3할을 넘길지조차 의문스러운 차동호였다.
“어쩌면 다음부터는 아예 사토시 슌을 라인업에서 뺄 수도 있겠는데요?”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하는 홍석의 모습에 차동호는 피식 웃었다.
일본이라면 이를 박박 갈아대는 사람 중 한 명이 홍석이었다.
조선시대에 만석꾼의 집안이었던 홍석의 집안이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일본인들에게 수많은 재산을 강탈당하고, 독립운동까지 하다가 결국은 온갖 고문을 당했다는 집안 어른들이 있어서인지 일본에 대해서는 뿌리 깊은 원한을 갖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정리가 되겠네요.”
홍석의 말에 차동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7이닝, 무실점.
투구수는 97개로 짧게는 8이닝, 길게 간다면 9이닝까지도 갈 수 있겠지만, 화면에 보이는 차지혁의 표정엔 피로감이 가득했다.
다른 곳도 아닌 쿠어스 필드라는 점이 아무래도 체력에 부담을 주는 것만 같았다.
“다저스 불펜의 필승조라면 3점차 리드는 충분히 지킬 테니 굳이 차지혁 선수가 무리할 필요는 없겠네요.”
현재 차지혁은 LA 다저스의 보물이다.
필 맥카프리라는 에이스가 존재하지만, 실질적으로 차지혁을 에이스로 여기는 팬들도 상당수였다.
투수들의 무덤인 쿠어스 필드에서 7이닝 무실점이면 아주 훌륭한 성적표였다.
선발 투수로서의 몫을 200% 해줬다고 보면 된다.
아슬아슬하게 점수 차이가 나고 있다면 모를까, 4점차의 리드는 차지혁에게 무리를 줄 필요가 조금도 없었다.
“기사 준비 할까요? 메인은 장형수 선수로 잡고, 한국 배터리가 쿠어스 필드를 정복했다는 식으로 기사를 쓰면 좋을 것 같은데 선배, 생각은 어떠세요?”
“깔끔하겠네.”
차동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홍석이 곧바로 노트북에 기사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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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만 같아라.
형수에겐 딱 그런 날이었다.
3연타석 홈런을 때리면서 모든 사람들의 집중 조명을 받고 있었다.
흔한 말로 크레이지 모드다.
타격에서 자신감을 얻으니 수비에서도 아주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평소보다 프레이밍도 좋았고, 다른 때와는 다르게 야수들을 지휘함에 있어서도 자신감이 넘쳤다.
덕분에 나 역시 편안하게 투구를 할 수 있었고, 7회까지 무사히 마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니 게레로 감독이 더 던지겠냐고 물었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그만 던지겠습니다.”
8회까지도 가능하겠지만, 굳이 무리를 할 필요는 없다 여겼다.
“수고했네.”
게레로 감독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글러브를 내려두고 아이싱을 준비하자 형수가 곁으로 다가와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벌써 내려가려고?”
“벌써라니, 내 투구수가 97개다. 이 정도면 됐지 뭐.”
“지혁이 너 체력이 좋아져서 이제 110개 정도는 충분하잖아?”
“다저 스타디움이라면 그렇겠지만, 여긴 쿠어스 필드잖아. 다음 선발 등판 상대를 생각해서라도 무리할 필요 없지.”
“다음 상대가 누구였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아~ 그래, 잘 생각했다.”
형수는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덕분에 오늘 편안하게 투구할 수 있었다.”
“지혁이 너한테 이렇게 인정을 받는 날이 오다니! 오늘 이 형님이 좀 화끈하긴 했지? 흐흐흐!”
내 옆에 앉아서 어깨동무를 하며 익살스럽게 웃는 형수의 모습에 덩달아 웃음이 나왔다.
생각을 해보니 오늘처럼 형수가 즐겁게 야구를 했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더욱이 LA 다저스에 트레이드 되어 온 이유부터 알게 모르게 받아왔을 주변의 좋지 않은 시선들까지 생각하면 아무리 좋아서 하는 야구라고 하더라도 형수 입장에서는 즐겁지가 않았을 것 같았다.
“경기 아직 안 끝났는데 한 방 더 때려. 오늘 경기 전국 방송이니까 장형수라는 이름을 미국 전역에 제대로 알려봐. 오늘 운도 잘 따라주고, 감도 좋은 것 같으니까 마지막까지 집중해서 메이저리그 홈페이지 메인을 장식해봐.”
“오오~ 메이저리그 홈페이지 메인이라 그거 죽이는데?”
하루 동안 있었던 메이저리그 경기 중 최고의 활약을 한 선수가 메인 화면을 장식하는데, 그 효과는 생각보다 컸다.
특히, 신인 선수들의 경우엔 이름과 얼굴을 확실하게 알릴 수 있었고, 선수 본인에게 있어서도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만한 일이니 그 날 경기에서 활약을 한 선수들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기대를 해 볼만 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 예상대로라면 지금 이대로 경기가 끝나면 형수가 메인 화면을 장식할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았다.
신인 선수가 3연타석 홈런을 때리며 승리를 이끌었으니까.
더욱이 상대는 쿠어스 필드의 철벽이라 불리는 카터 노드윈드이질 않은가.
화제성으로 따졌을 때에도 충분히 먹힐 만한 일이었다.
물론, 쿠어스 필드라는 점으로 인해 형수의 성적이 평가절하 되겠지만.
하지만, 형수는 이런 내 생각과는 달랐던 모양이다.
따- 악!
“…미친.”
나도 모르게 내 입술을 뚫고 말이 나왔다.
양손을 번쩍 치켜들고 방방 뛰며 베이스를 도는 형수의 모습이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확실하게 깨달았다.
한 번 제대로 걸리는 날 형수는 굉장히 무서운 타자라는 걸.
방금도 몸 쪽을 깊숙하게 찔러 들어오는 패스트볼을 형수는 그대로 넘겨버렸다.
마지막 타석에서의 홈런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거포들에게서나 볼 수 있을 타격이었다.
4연타석 홈런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기록을 세우며 형수는 미국 진출 이후 최초로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동료들이 냅다 부어대는 음료 세례 속에서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화통하게 웃는 형수의 모습이 처음으로 눈부시게 보였다.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줬다.
반짝 활약으로 끝날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의 일은 다른 누구도 아닌 형수 스스로 극복해야 할 일들이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기회가 주어졌을 때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한다.
“토렌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부상 기간이 너무 짧지는 않았으면 좋겠네.”
토렌스가 돌아오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형수에겐 지속적으로 기회가 주어진다.
지금 형수에게 필요한 건 꾸준한 출장 기회다.
어깨에서 상당한 통증을 느꼈다면 아무리 빠르다 하더라도 한 달이다.
반대로 형수에게는 최소한으로 한 달 동안 기회가 주어지는 셈이다.
그 황금 같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형수는 어떻게든 토렌스와의 경쟁력을 보여주면 된다.
오늘처럼 4연타석 홈런을 뻥뻥 때릴 필요도 없고, 바라는 사람도 없다.
리그 평균 수준의 수비력과 2할 5푼만 넘기는 타율이면 된다.
음료수를 홀딱 뒤집어 쓴 상황에서도 미모의 아나운서와 즐겁게 인터뷰를 하는 형수를 보며 나는 진심으로 녀석이 토렌스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포수가 되길 원했다.
“8주 정도라고 하네.”
형수의 말에 내가 되물었다.
“토렌스 말하는 거야?”
“응. 어깨 회전근개파열이라서 수술을 하기로 했나봐. 재활까지 최소 8주, 길면 12주에서 15주까지 보고 있나봐.”
수술이라고 해봐야 간단한 수술이었기에 큰 걱정은 들지 않았다.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이번이 네게 엄청난 기회라는 거 알지?”
“당연하지.”
형수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는 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2달에서 길게는 3달.
지금부터 8월 중순까지.
대략 60게임 정도를 주전 포수인 토렌스를 대신해서 백업 포수를 써야 하는 다저스다.
‘주력으로 형수를 쓰겠지만, 에릭 소리아에게도 분명 기회가 주어지겠지.’
게레로 감독이라면 형수와 에릭 소리아를 모두 기용할 가능성이 높다.
비중으로 따지자면 형수 쪽이 훨씬 높겠지만, 에릭 소리아에게도 출장 기회를 줄 것이니 형수로서는 눈앞의 경쟁자인 에릭 소리아보다 완벽하게 우위에 서야 한다.
만약, 형수나 에릭 소리아가 5월, 6월을 망친다면?
‘더욱 강력한 경쟁자가 트레이드되어 오겠지.’
게레로 감독이나, 맥브라이드 단장이나 7월 트레이드가 시작되면 포수부터 데리고 올 가능성이 크다.
그런 사실을 알기에 형수도 내 앞에서 진지한 얼굴로 앉아 있는 거다.
“형수야, 네 자신을 믿어. 넌 충분히 메이저리그의 포수가 될 수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형수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응원뿐이었다.
“걱정마라. 내일도 내가 확실하게 보여줄 테니까!”
내일, 그리고 다음날까지 콜로라도 로키스와 2연전이 남아 있다.
타자에게 극도로 유리한 쿠어스 필드였으니 지금처럼 좋은 기회를 형수가 쉽게 날려버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런 내 바람이 통했을까?
13일 2차전에서도 형수는 3타수 2안타 1홈런을 터트리며 전날의 상승세를 이어나갔다.
14일 3차전에서는 4타수 1안타 1홈런으로 타율은 떨어졌지만, 3일 연속 홈런과 3경기 6홈런이라는 무시무시한 장타력을 보이며 콧노래를 부르며 LA로 돌아올 수 있었다.
15일부터 시작되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4차전.
8연승을 저지하며 3연패를 안겨 주었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4연전에 다저스 선수들의 각오는 대단했다.
< 『해외편 - 13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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