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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마일-132화 (132/221)

< 『해외편 - 132』 >

『해외편 - 132』

따악!

살짝 무너진 하체만 보더라도 형수가 체인지업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타이밍으로 본다면 포심 패스트볼을 노렸어.’

형수의 배트가 빨랐다.

더욱이 떨어지는 공의 궤적을 쫓기에 급급한 형수의 배트 궤적으로 봤을 때, 가라앉으려는 체인지업을 어떻게든 때리겠다는 형수의 의지도 보였다.

이건 분명하다.

그런데 상황이 묘했다.

카터 노드윈드가 던진 체인지업의 궤적 폭이 상당히 적었다.

간단하게 설명해서 10cm가 떨어져야 할 체인지업이 5cm밖에 떨어지지 못했다는 뜻이다.

거기에 구속 또한 타자의 타이밍을 뺏기에는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빨랐다.

덕분에 형수의 배트가 허공을 가르지 않았다.

떨어지는 공을 쫓아서 스윙 궤적을 내리다 보니 오히려 떨어지는 공을 올려치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타구가 순식간에 좌측으로 크게 떠올랐다.

체인지업은 분명 투수에게 있어 타자의 타이밍을 뺏기에 가장 훌륭한 공 중 하나다.

그런데 밋밋하게 던져진 체인지업만큼 위험한 공도 없다.

타자가 노리고 쳤을 때는 열에 아홉은 장타를 만들어 내기 가장 쉬운 공이 된다.

‘형수의 하체가 무너지긴 했지만, 힘으로 걷어 올렸으니까…….’

형수의 힘은 이미 LA 다저스 내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BA 평가에서도 파워만큼은 65점의 높은 점수를 받은 형수다.

말 그대로 매년 20개의 홈런을 때려낼 힘을 갖춘 선수라는 뜻이다.

평범한 구장에서 20개의 홈런을 때려낼 타자라면 극단적으로 쿠어스 필드에서는 30개까지 치솟는다.

하늘 높이 떠올라 지속적으로 뒤로 밀려나가던 타구는 기어이 좌측 담장을 넘겨버리고 말았다.

“우아아아아!”

죽어라 베이스 런닝을 하던 형수는 자신의 타구 홈런이 되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양손을 번쩍 치켜들며 소리를 내질렀다.

마운드 위에 서 있던 카터 노드윈드의 표정이 썩은 사과처럼 변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실투라고 하기엔 모자라고, 그렇다고 제대로 된 체인지업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애매한 공이 결국은 애매하게 홈런이 되어버린 셈이다.

쿠어스 필드가 아니었다면?

카터 노드윈드의 체인지업이 애매하게 던져졌을 리도 없고, 설령 형수가 지금처럼 걷어냈다 하더라도 좌익수 글러브에 잡혔을 타구였다.

결국은 쿠어스 필드가 카터 노드윈드와 형수의 승부를 뒤집어 버린 거다.

홈 베이스를 밟고 대기 타석에 서 있다가 마중을 나간 빌 맥카티와 힘차게 하이파이브를 하는 형수의 모습을 보며 나도 조심해야겠다고 다시 한 번 느꼈다.

투수와 타자의 승부를 멋대로 뒤집어 놓은 곳에서 내가 공을 던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며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형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봤냐? 오늘 아무래도 운이 좀 따라주는 날인가 보다! 흐흐흐!”

형수의 웃음 가득한 얼굴을 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홈런 축하한다.”

“이제는 네 차례다. 쿠어스 필드의 진짜 철벽이 누구인지 제대로 보여 줘버려! 흐흐흐!”

완전 기가 살아난 형수의 모습을 보며 나도 마주 웃었다.

형수와 같은 녀석은 한 번 기세를 타면 무섭게 폭발한다.

적어도 오늘 경기에서 형수가 삽질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됐다.

@

2회.

3회.

4회.

그리고 5회.

이닝이 더해질수록 체력소모가 급격하게 뒤를 따라왔다.

특히, 3회부터 5회까지 콜로라도 로키스에서 작정하고 커트를 해오는 바람에 쉽지 않은 투구를 해야만 했다.

투구수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질 않았다.

문제는 전력으로 공을 던졌을 때에 동반되는 체력소모였다.

‘인터벌 훈련으로 체력이 증가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온 몸이 축축 쳐졌겠지.’

4월 중순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해온 인터벌 훈련의 효과가 확실하게 느껴졌다.

훈련의 강도가 너무 강했기에 매일 하지 못한다는 점이 언제나 효과가 날까 싶었는데, 오늘 경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었으니 확실히 고통이 동반하는 훈련은 그 효과 또한 무척이나 달콤하다는 걸 또 한 번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스코어는 2:0.

놀랍게도 2회에 홈런을 쳤던 형수가 4회에도 다시 한 번 홈런을 터트렸다.

연타석 홈런으로 오늘 경기에서 가장 뜨거운 주목을 받고 있었다.

경기 직전 선발 명단에 넣지도 않았던 선수가 갑작스럽게 선발이 되고, 연타석 홈런으로 팀의 승리를 견인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팬들과 방송국 관계자들의 시선이 집중 될 수밖에 없었다.

오늘 경기는 전국방송으로 생중계가 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이미 전국구 스타인 내가 선발이었고, 쿠어스 필드의 철벽이라 불리며, 승률 9할에 이르는 카터 노드윈드의 복귀전이었으니 전국방송으로 중계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의외의 인물이 깜짝 활약을 펼치고 있었으니 방송국 입장에서도 이게 웬 떡인가 싶을 거다.

특히, LA 다저스 입장에서는 형수의 활약이 무척이나 반가울 거다.

특급 유격수 유망주였던 마리아 파헬슨을 내주고 데려온 선수가 형수다.

그런 형수가 활약을 해야 구단 입장에서도 트레이드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들을 잠재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 경기에서 형수가 아무리 대활약을 한다 하더라도 전국구 스타로 유명세를 떨치거나, 마리아 파헬슨의 이름을 뛰어넘기는 힘들겠지만 중요한 건 가능성이라는 거다.

장형수라는 백업 포수의 가능성을 오늘 경기에서 확실하게 보여주면 된다.

LA 다저스가 바라는 건 오직 그거 하나뿐이다.

6회 초, LA 다저스의 공격이 시작됐다.

선두 타자는 3번 타자, 코리 시거였다.

비록 2실점을 한 카터 노드윈드였지만, 그는 여전히 위력적인 공을 던지며 콜로라도 로키스의 마운드를 지키고 있었다.

이닝마다 안타를 맞고 있기는 했지만, 실점은 의외로 솔로 홈런 두 방이 전부다.

그만큼 위기관리 능력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코리 시거를 상대로 카터 노드윈드는 5구만에 3루수 땅볼로 아웃 카운트를 하나 잡아냈다.

몸 쪽으로 파고 든 슬라이더를 잡아당긴 것이 빗맞으면서 내야를 벗어나지 못한 결과였다.

‘78구.’

현재 카터 노드윈드가 던진 투구수가 78구였다.

2실점에 매 이닝마다 안타를 맞고 있음에도 고작 78구밖에 던지지 않았으니 투구수 관리를 굉장히 잘 하는 투수임에는 분명했다.

4번 타자, 마이크 트라웃이 타석에 들어섰음에도 카터 노드윈드는 굉장히 공격적으로 공을 던졌다.

몸 쪽과 바깥쪽을 불규칙적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트라웃의 스트라이크 존을 흔들었고, 결정구로는 고속 슬라이더를 바깥쪽으로 던지면서 트라웃의 배트를 이끌어냈다.

헛스윙으로 물러나며 고개를 흔드는 트라웃과 담담하게 마운드 위에서 로진백을 손 전체로 문지르는 카터 노드윈드였다.

2아웃 상황에서 미치 네이가 타석에 섰다.

오늘 경기에서 삼진만 두 번 당한 미치 네이의 얼굴은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요즘 미치 네이의 성적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다.

눈에 보일 정도로 뚜렷한 하향세를 기록하고 있었기에 그에 대한 트레이드설이 끊이질 않고 제기되고 있는 중이었다.

‘게레로 감독이 동의하는 순간 맥브라이드 단장은 7월에 있는 트레이드 기간 동안 분명 미치 네이를 트레이드 카드로 써먹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겠지.’

34살이라는 나이, 평균 이하의 수비력, 낮은 승리 기여도, 완연한 성적 하락까지 여러 가지로 평균 2400만 달러라는 거액을 챙겨줄 선수로는 부족했다.

‘댈런 브루노라고 텍사스 레인저스 산하의 라운드 락 익스프레스(Round Rock Express)라는 트리플A 팀의 선수가 있는데, 로하 로드리게스 스카우트의 눈에 제대로 찍혔다고 합니다. 차지혁 선수도 아시다시피 믿고 쓰는 텍사스산 1루수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황병익 대표가 했던 말이다.

맥브라이드 단장의 신임을 전폭적으로 받고 있는 로하 로드리게스 스카우트가 제법 적극적으로 댈런 브루노의 영입을 추천하고 있다고 했다.

텍사스에서는 터지지 않고 있지만, 그 잠재력만 제대로 터져주면 제2의 크리스 데이비스가 될 가능성이 굉장히 크다고 했으니 맥브라이드 단장으로서도 크게 아쉬울 것 없는 미치 네이를 다른 곳으로 팔아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여기는 듯 싶었다.

하지만, 가능성일 뿐이다.

가능성 가진 유망주를 영입하기 위해 현재 LA 다저스의 주전 1루수를 미련 없이 보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아무리 구단주의 신망이 두터운 맥브라이드 단장이라 하더라도 미치 네이와 같은 스타 선수를 멋대로 트레이드 시키는 일은 위험성이 너무 컸다.

퍽!

타석에 서 있던 미치 네이가 배트를 내던지며 마운드 위의 카터 노드윈드를 죽일 듯 노려봤다.

몸 쪽으로 바짝 붙이려던 슬라이더가 제대로 던져지지 않으면서 몸에 맞은 거였다.

그렇지 않아도 삼진을 두 번이나 당한 미치 네이로서는 짜증이 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주심이 미치 네이를 다독이자 그가 신경질적으로 1루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기분이 나쁘기는 카터 노드윈드 역시 마찬가지.

삼진을 두 번이나 잡은 미치 네이를 일부러 맞출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어디까지나 실투였을 뿐.

카터 노드윈드 역시 얼굴을 굳히고는 1루 베이스를 향해 걸어가는 미치 네이를 사납게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2아웃까지 잘 잡아 놓은 상황에서 몸에 맞는 공이 나오며 1루에 주자가 채워졌다.

쉽게 끝낼 수도 있었던 이닝이 끝나지 않은 것만큼 투수에게 짜증나는 일도 없다.

더욱이 미치 네이를 1루로 보내고 나서 맞이하게 되는 타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형수.

연타석 홈런을 때리며 카터 노드윈드의 자존심을 완전히 짓밟아버린 형수의 등장에 다저스 원정 팬들이 크게 환호하기 시작했다.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타석에 들어서는 형수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펴 있었다.

‘저런 거 참 좋아한단 말이야.’

질책보다는 칭찬을 해야 잘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칭찬보다는 질책을 해야 잘하는 사람이 있다. 형수는 전형적으로 전자였다.

잘하고 있을 때, 부족한 점을 지적하면 기세가 꺾이는 타입이고, 못하고 있을 때에는 잘하는 부분을 부각시켜 칭찬과 격려를 해주면 기세가 오르는 타입이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타석에 들어선 형수는 확실히 여유가 보였다.

연타석 홈런이라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한 팀의 에이스를 상대로 보여준 일이니 형수로서는 자신감이 생길만했다.

‘얼굴에서 독기가 느껴지네.’

마운드 위에 서 있는 카터 노드윈드의 표정은 글자 그대로 살벌했다.

독이 잔뜩 올라있는 독사처럼 형수를 노려보는 모습만 보더라도 연타석 피홈런에 대한 분노심이 얼마나 큰지 충분히 느껴졌다.

쇄애애액!

퍼- 엉!

“스트라이크!”

초구부터 힘이 잔뜩 들어간 강력한 포심 패스트볼이 들어왔다.

98마일.

‘저런다고 기가 죽을 놈이 아닌데.’

내 예상대로 형수는 타석에서 물러나며 스윙을 체크했다.

얼굴은 여전히 희미하게 미소가 걸려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형수는 빠른 볼에는 제법 자신을 갖고 있었다.

형수의 말에 의하면 일직선으로 쭉 들어오는 공을 왜 못 치냐는 거였다.

딱히 틀리다고 할 순 없는 말이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쓴웃음이 나올 말이었다.

어쨌든 오늘 경기 중 가장 빠른 공을 던지면서까지 형수의 기를 죽이려고 한 카터 노드윈드였지만, 형수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모습으로 다시 타석에 섰다.

‘설마 또 홈런을 의식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형수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였다.

기세도 올랐겠다, 오늘 경기에서 완벽한 영웅이 되려면 3연타석 홈런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형수였다.

카터 노드윈드의 2구는 다시 한 번 포심 패스트볼이었고, 형수의 몸 쪽을 뚫고 들어갔다.

순식간에 2스트라이크가 되면서 타자에게 극도로 불리한 카운트가 만들어졌다.

여기서 카터 노드윈드가 선택할 수 있는 최고는 뭘까?

연타석 홈런을 때렸다고 하지만 형수는 카터 노드윈드와 비교하면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후보 선수일 뿐이다.

그런 선수에게 자존심을 짓밟힌 콜로라도 로키스의 에이스 카터 노드윈드다.

어떤 그림을 만들어 내야만 그나마 무너진 자존심을 세울 수 있을까?

‘무조건 삼진. 도망가거나, 유인구는 제외. 정면으로 시원스럽게 삼진을 잡을 수 있는 공.’

순식간에 사인 교환을 끝낸 카터 노드윈드가 3구를 던졌다.

역시 내 예상대로 포심 패스트볼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지 코스는 무릎 높이로 낮았다.

빛줄기처럼 쏘아지며 새하얀 궤적의 꼬리를 남기는 카터 노드윈드의 포심 패스트볼을 노리고 형수의 배트가 경쾌하게 돌아 나왔다.

가볍고 시원스럽게 스윙 궤적을 그리는 배트와 다르게 공과 충돌할 때는 아주 묵직했다.

따- 아악!

빙글빙글빙글.

형수는 배트를 그대로 가볍게 돌리며 옆으로 던졌다.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며 1루를 향해 뛰어가는 형수와 마운드 위에서 석상처럼 굳어버린 카터 노드윈드의 모습을 번갈아보다 피식 웃었다.

“오늘 완전 날아다니네.”

3연타석 홈런.

오늘 경기는 아무래도 형수에게 넘겨줘야 할 것 같았다.

< 『해외편 - 132』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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