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30』 >
『해외편 - 130』
카메라에서 빨간불이 사라졌다.
“촬영 끝내겠습니다! 차지혁 선수 수고 많으셨습니다!”
카메라 감독의 해방감 가득한 외침에 나 역시 인사를 건넸다.
“수고하셨습니다.”
“저희야 말로 차지혁 선수 덕분에 편안하게 촬영하고 돌아가네요. 나중에 한국에 오시면 꼭 한번 연락 주세요.”
손을 내밀며 악수를 권하는 황지연 PD의 모습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손을 맞잡았다.
2박 3일이라는 촬영 기간 동안 그녀는 자신이 한 말들에 대해서만큼은 완벽하게 지켜냈다.
솔직하게 말하면 촬영 내용 중 건질 만한 부분이 얼마나 될지 의구심이 들만큼 내 일상은 지극히 단순하고, 건조했다.
반복적인 훈련으로만 이루어진 하루 일과다보니 과연 방송국에서 원하는 장면이 얼마나 될까 싶었다.
‘굳이 내가 상관할 부분이 아니지만.’
어쨌든 촬영이 끝났다는 사실에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촬영 장비들을 모두 챙기고 나서야 나는 2박 3일 동안 나를 졸졸 따라다녔던 방송국 사람들과 완전한 이별을 할 수 있었다.
“돌아가서 곧바로 편집 작업을 할 예정이니 늦어도 열흘 이내로 최종 편집 영상이 완성될 거예요. 편집 영상을 확인하시고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면 아무 때나 연락 주세요.”
“예.”
“그럼, 앞으로도 좋은 활약 지켜보며 항상 응원할게요.”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는 황지연 PD를 가만히 바라보다 다시 내 일상으로 돌아갔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홈 3연전.
밀워키 브루어스와의 원정 4연전.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원정 3연전.
마이애미 말린스와의 홈 3연전.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홈 4연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원정 3연전.
4월 한 달이 무섭게 지나갔다.
이 기간 동안 선발 로테이션에 맞춰서 4번 경기에 나섰다.
16일 밀워키 브루어스와의 2차전에서 8이닝 1실점으로 무난하게 승리 투수가 되었다.
예상대로 심심찮게 커트 작전을 구사하며 날 흔들어 놓으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구위를 믿고 정면으로 빠른 승부를 걸어 투구수를 효율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단타와 장타를 하나씩 맞으면서 1실점을 하고 말았다.
21일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3차전에서는 투수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쿠어스 필드에서 혹독한 신고식을 치루고 말았다.
7이닝 3실점.
승리도, 패배도 기록하지 못하는 노디시전이었다.
무엇보다 이날 경기에서 맞았던 2개의 피홈런들이 모두 강한 바람과 구장 특성으로 인해 담장을 넘어가는 걸 보곤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다저 스타디움이었다면 약간 깊숙한 외야 플라이에서 그칠 타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거리라면 사토시 슌과의 천적 관계가 다시 한 번 증명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3타수 무안타.
그 중 2개의 삼진을 잡아냈고, 하나의 땅볼로 사토시 슌의 타율을 또 깎아내렸다.
마지막 타석에서 삼진을 당하고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돌아서던 그의 얼굴이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26일 홈으로 돌아온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2차전에서는 지난 원정 경기에서의 실점을 만회하는 완봉승으로 콜로라도 로키스의 타선을 압도하는 투구 내용을 보여줬다.
복수의 칼을 갈고 나온 사토시 슌을 상대로 단 한 번도 출루를 허용하지 않으며 사토시 슌의 자존심을 완전하게 짓눌러버렸다.
오죽했으면 마지막 타석에서는 사토시 슌을 대신해서 대타가 나왔을 정도였다.
그렇게 4월 한 달 동안 5경기에 선발로 등판해서 3승(2완봉) 무패의 훌륭한 성적표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3월에 받았던 내셔널리그 이달의 선수상 수상에는 실패를 하고 말았다.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이었던 나를 뛰어넘은 선수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중견수 할 매케인이었다.
4월 한 달 동안 무려 0.523의 타율을 기록했으며, 11개의 홈런과 9개의 도루까지 성공시켰을 정도로 눈부신 활약으로 소위 말하는 크레이지 모드를 방불케 했다.
할 매케인의 성적이 워낙 대단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나조차도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5월의 시작을 알리는 1일에 열린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3차전에서는 8이닝 1실점으로 기분 좋은 5월의 첫 승을 거머쥘 수 있었다.
콜 머먼트 감독은 1회부터 4회까지 또 다시 커트 작전을 들고 나왔다.
다저 스타디움이었다면 다저스 홈팬들의 엄청난 야유와 원성을 들었겠지만, 다행스럽게도 샌프란시스코 홈 구장인 AT&T 파크였기에 크게 야유를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경기에서는 패배까지 하고 말았기에 다음 경기에서 또 다시 커트 작전을 구사하기란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 되고 만 콜 머먼트 감독이었다.
오죽했으면 샌프란시스코 지역 언론마저도 콜 머먼트 감독을 강도 높게 비난을 했을 정도였다.
샌프란시스코 원정 3차전의 마지막 경기를 기분 좋게 승리하고 다시 LA로 돌아왔다.
“역시 메이저리그 일정은 아주 살인적이라니까!”
형수가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소파에 몸을 내던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소파에 앉으며 피곤한 몸을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풀어줬다.
3월 20일에 시즌이 시작되고 3월, 4월 통틀어서 각각 하루 밖에 휴식일이 없었다.
그나마 5월에는 8일, 22일의 이틀의 휴식일이 정해져 있었다.
어째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동양인들을 상대로 체력적인 문제를 꾸준히 제기하는지 알만했다.
규칙적으로 정해놓은 휴식일도 없고, 장거리 이동을 밥 먹듯이 해야만 하는 메이저리그의 특성상 웬만한 체력으로는 한 시즌을 모두 소화하기가 쉽지 않았다.
형수가 소파에서 몸을 뒤집으며 말했다.
“빨리 7월 달이 왔으면 좋겠다. 그러면 정말 마음 놓고 푹 쉴 수 있을 텐데!”
IBAF 챔피언스 리그가 열리는 7월 달은 유일하게 3주가량의 장기 휴식이 보장되는 기간이다.
물론, 챔피언스 리그에 출전해야 하는 메이저리그 구단의 경우에는 여전히 빡빡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지만, 양대 리그를 통틀어 챔피언스 리그에 출전할 수 있는 메이저리그 구단은 10개 구단 밖에 없다.
챔피언스 리그 출전 권한은 각 지구 1위와 양대 리그 와일드카드 2순위까지다.
‘작년 페넌트 레이스에서 3위를 했으니 올해는 탈락이고, 내년을 노려야 하겠지.’
작년 LA 다저스의 순위는 서부 지구 3위.
그렇기 때문에 올해 7월은 다른 구단들의 경기를 구경만 해야 했다.
처음만 하더라도 메이저리그의 모든 구단들은 IBAF 챔피언스 리그를 반기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빡빡한 메이저리그의 살인적인 일정을 더욱더 타이트하게 만들어 버리니 선수나 구단 입장에서는 달가울 리가 없었다.
또한, 이미 세계 야구 대회라는 명목으로 열렸던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orld Baseball Classic), 줄여 WBC가 큰 인기를 얻지 못했기에 같은 맥락에서 IBAF 챔피언스 리그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거다.
그러나 결과는 완전히 달랐다.
IBAF 챔피언스 리그에 대한 공격적인 마케팅과 야구의 보급이 맞물리면서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인기를 얻었고, 그만큼 수익률도 또한 크게 증가를 하기 시작했다.
수익률의 증가는 자연스럽게 대회 규모의 확장, 더불어 높아진 상금의 액수, 무엇보다도 세계적으로 자신들의 구단을 홍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큰 장점을 갖춰 나갔다.
뿐만 아니라, IBAF 챔피언스 리그에 출전한 각 나라의 선수들의 실력을 직접 확인 할 수 있었기에 새로운 스타의 등용문으로도 활용되어 이 기간 동안 스카우트들은 바쁘게 움직여 다녀야만 했다.
하지만 어딜 가나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는 법.
축제나 다름없는 IBAF 챔피언스 리그와 3주가량의 긴 휴식 기간을 누구보다 불안하게 보내는 선수들도 많았다.
다른 아닌 트레이드의 달 또한 7월이기 때문이다.
축제와 동시에 메이저리그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프로 리그의 구단들은 서로 자유롭게 선수들을 트레이드 할 수 있었다.
그렇다보니 확실하게 팀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 트레이드 거부권이 없는 선수들의 경우에는 갑작스런 트레이드 통보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나마 같은 지역, 아니 같은 나라의 리그로 트레이드를 당하면 다행이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전혀 다른 나라의 리그로 트레이드를 당하기도 했기에 구단 내에서 자신의 입지가 불안한 선수들은 7월 한 달을 굉장히 불안하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오죽했으면 은퇴의 7월 달이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일까.
나이 들고, 기량이 떨어져 타국의 하위 리그로 트레이드를 당하는 선수들 중 일부는 아예 은퇴를 해버리는 경우도 꽤 있었기에 1년 중 가장 많은 은퇴 선수를 배출시키는 달이 7월이기도 했다.
“지혁아, 난 7월에 카롤리나에 갈 거야.”
뜬금없이 어딜 가겠다는 형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디?”
“카롤리나. 푸에르토리코의 도시야.”
“푸에르토리코? 거긴 왜?”
내 물음에 소파와 한 몸이라도 된 듯 누워 있던 형수가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야구 캠프가 있더라고.”
속 시원하게 한 번에 말을 잇지 않는 형수의 모습에 내가 한 마디를 하자 그제야 녀석이 알아들을 수 있게끔 대답을 해주었다.
“푸에르토리코의 카롤리나에 야구 캠프가 있는데 그곳에서 직접 야구를 가르쳐주는 코치가 야디어 몰리나라고 하더라고. 네 말대로 토렌스와 친하게 지내다보니까 알게 됐어. 그래서 알아보니까 구단에서도 어차피 챔피언스 리그 기간 동안은 경기가 없기 때문에 선수가 원하면 2주까지는 개인 휴가나 훈련을 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준다고 해서 한 번 가보려고.”
야디어 몰리나.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포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둘 수 있는 살아 있는 전설이 바로 야디어 몰리나다.
13회 연속 골드 글러브 수상.
이 한 가지의 기록만으로도 야디어 몰리나가 역대급 수비형 포수라는 것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다.
공격적인 측면에서는 역대 공격형 포수들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수비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에는 역대 최고의 포수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배출한 최고의 포수 버스터 포지가 공식석상에서 몰리나보다 뛰어난 수비형 포수가 될 자신이 없어 자신은 공격에 힘을 쏟겠다고 했을까.
2020년 38세의 나이로 화려하게 은퇴를 한 야디어 몰리나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코치 제안을 거부하고 푸에르토리코로 돌아갔다고만 알려졌다.
그런데 형수의 말을 들어보니 푸에르토리코에서 야구 캠프를 만들어 제2의 야디어 몰리나를 양성하는 중이었다.
“몰리나가 날 받아줄지 알 순 없지만, 어쨌든 부딪혀 보려고. 혹시 알아? 그곳이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변곡점이 될지.”
변곡점이라.
형수의 말에 나는 그저 희미하게 웃기만 했다.
그 말처럼 형수가 야디어 몰리나를 만나 포수로 가진 재능을 완전하게 개화를 할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미래는 불확실한 가능성을 지닌 앞날이다.
불가능이 아닌 확실하지 않지만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
그게 바로 내가 생각하는 미래이고, 그렇기에 꿈을 꾸며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거다.
그렇기에 형수가 말한 7월의 계획에 나는 적극적으로 응원을 해줄 수 있었다.
@
2, 3, 4일 동안 치러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홈 경기에서 LA 다저스는 오랜만에 꿀 맛같은 스윕을 얻어냈다. 반대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는 지난 스토브리그에서 쏟아 부었던 돈이 무색할 정도로 계속된 패배를 기록하며 끝없는 추락을 일삼았다.
야구라는 스포츠는 그 어떤 종목보다 흐름을 중요시하게 여긴다.
흔한 말로 분위기라는 걸 무척이나 민감하게 타는 스포츠 경기였기에 오랜만에 시리즈 스윕을 가져온 LA 다저스는 5, 6, 7일에 치러지는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와의 원정 경기에서도 좋은 흐름을 가져가고자 했다.
4월 내내 좋지 않은 모습으로 선발 자리마저 위태로웠던 다저스의 5선발 앤디 클레먼트가 반전의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듯 호투를 보이며 1차전에서의 승리로 연승 행진을 이어갔고, 2차전에 등판한 내가 8이닝 1실점으로 역시 연승의 바통을 다음 선발 투수인 포스터 그리핀에게 넘겨줄 수 있었다.
좋은 분위기 속에서 3차전을 맡게 된 포스터 그리핀은 7이닝 4실점으로 승패를 거두지 못했지만, 뒤이어 마운드를 이어받은 불펜들의 활약으로 가까스로 1점차 승리를 거두며 LA 다저스는 8연승을 질주했다.
8일 하루를 쉬고 5월 9일 마더스 데이(Mother's Day)에 내셔널리그 중부 지구에서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홈 구장인 부시스타디움(Busch Stadium)에서 첫 번째 시리즈의 1차전이 열렸다.
결과는 0:6의 참패.
8연승을 질주하던 LA 다저스의 기세가 완전히 꼬꾸라지고 말았다.
이어진 2차전에서는 다저스의 에이스 필 맥카프리가 마운드에 올랐지만, 그 역시 차갑게 얼어붙은 방망이의 다저스 타자들로 인해 0:2로 완투패배를 당했다.
잔뜩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호기롭게 3차전 마운드에 오른 앤디 클레먼트였지만, 그 역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불 붙은 방망이를 피하지 못했다.
8연승 이후 3연패.
무엇보다 스윕을 당했다는 사실이 LA 다저스의 분위기를 무척이나 침울하게 가라앉혔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맞이해야 할 상대는 콜로라도 로키스.
“…쿠어스 필드.”
내게 혹독한 첫 경험을 안겨주었던 투수들의 무덤에 다시 올라서야만 했다.
< 『해외편 - 130』 > 끝
ⓒ 독고진
작가의 말
2014년 마지막 연재네요.
8월 1일 첫 연재를 등록하고 오늘까지 130화를 연재했네요.
우선 지금까지 이렇게 꾸준하게 연재를 할 수 있도록 큰 힘이 되어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
2014년의 마지막 날, 즐거운 일이 있길 바라며 2015년에는 아프지 않고 항상 건강하며, 행복한 나날들만 가득하길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2015년에도 열심히 연재를 할 거며, 좋은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그런데 1일이 빨간날이네요............
연재가 될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