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28』 >
『해외편 - 128』
한 경기에 두 번씩이나 기습 번트로 출루를 할 줄이야.
정말 완벽하게 당했다.
나와 토렌스를 완전히 바보로 만들었고, 덩달아 두 번씩이나 기습 번트로 출루를 한 마틴 배긴스에겐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좌타자라고 하더라도 분명 리스크가 큰 기습 번트였다.
반대로 생각하면 살아나갈 확률이 저조함에도 불구하고 두 번 연속 성공을 시킨 마틴 배긴스의 번트 능력에 대한 찬사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주 살짝 배트를 움직여서 3루로 타구를 굴려 보냈으니까.
리드폭을 여전히 넓게 가져가는 마틴 배긴스였지만, 이미 1회에 토렌스에게 허를 찔렸기에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리가 없었다.
여전히 리드폭을 넓게 가져가며 내 신경을 건드리는 마틴 배긴스였다.
‘뛸까?’
그럴 리가 없다.
마틴 배긴스의 머릿속에 도루는 분명 없다.
어설프게 도루를 했다가 아웃이 되느니, 내 눈 앞에서 날 자꾸만 훼방 놓아 타석에 선 길버트 라라에게 도움이 되려고 할 것이 뻔했다.
2점차 스코어였으니 여기서 날 흔들어 놓기만 한다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타선의 화력상 충분히 승패를 뒤집어 놓을 수가 있었다.
‘빠르게 간다.’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마틴 배긴스를 무시하고 길버트 라라와의 승부에 집중한다.
사인을 주고받기가 무섭게 초구를 던졌다.
주자를 내보낸 상태에서 커트 작전을 펼친다?
가능성 없는 작전이다.
자칫 더블 플레이를 만들 가능성이 높기만 하다.
더욱이 타석에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믿음직한 3번 타자 길버트 라라다.
아무리 각종 작전에 능수능란한 콜 머먼트 감독이라 하더라도 정면으로 승부를 보게 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미 오늘 경기에서만 3번씩이나 나와 맞상대를 했던 길버트 라라였고, 나는 100구가 넘어가는 투구수를 기록 중이다.
힘이 빠진 투수를 상대로 계속해서 회피하는 작전을 펼치는 건 아무리 콜 머먼트 감독이라도 쉽지 않았고, 무엇보다 길버트 라라의 자존심을 완전히 뭉개버리는 행위였기에 정면 승부를 허락했을 것이다.
부웅!
배트가 크게 헛돌며 길버트 라라의 상체가 무너졌다.
포심 패스트볼을 노리고 스윙을 했지만, 내가 던진 초구는 파워 커브였다.
‘역시 정면 승부네.’
피하지 않는다고 내가 무서워할까?
오히려 환영해야 할 일이다.
적극적으로 공격을 해오는 타자를 상대로 조금만 신경 써서 투구수를 조절하면 다음 이닝에도 마운드에 올라올 수가 있으니까.
초구부터 변화구를 던질 줄은 몰랐다는 듯 타석에 선 길버트 라라는 물론, 1루 주자인 마틴 배긴스도 허를 찔렸다는 듯 고개를 흔들어댔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 다 똑같은 실수는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듯 눈빛을 빛내며 나를 쏘아봤다.
가장 좋은 건 역시 더블 플레이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병살타.
지금 내 상황에서 가장 완벽한 한 수가 될 수 있다.
투구수도 대폭 줄이고, 아웃 카운트를 두 개를 잡아내면서 곧바로 이닝을 종료시킬 수 있으니까.
마틴 배긴스의 발이 빠르긴 하지만 길버트 라라의 발이 느리기 때문에 어느 정도 내야수의 수비 범위 안으로만 타구가 굴러가면 충분히 병살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컷 패스트볼.’
토렌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우타자인 길버트 라라의 몸 쪽으로 붙이는 컷 패스트볼 사인이 나왔다.
여기서 병살타가 나온다면 말 그대로 금상첨화.
1루 주자인 마틴 배긴스를 담담하게 바라보다 빠르게 공을 던졌다.
구속은 대략 90마일 초반.
평균 구속이 95마일이라는 걸 생각하면 확실히 구속이 떨어지긴 떨어졌다. 그러나 제구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무리하게 구속을 끌어올리지 않으며 정확하게 공을 던지려고 집중했기 때문인지 토렌스가 요구한 방향으로 오차없이 공이 들어갔다.
퍼엉!
“스트라이크!”
방금 컷 패스트볼은 정말 완벽했다.
길버트 라라도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현재 길버트 라라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아무리 잘 친다 하더라도 커트 밖에 할 수 없는 공이었다. 재수 없으면 어설프게 3루나 유격수 방면으로 땅볼이 나와 병살타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코스의 공이었다.
2스트라이크 노볼 상황에서 마틴 배긴스는 위험할 정도로 리드폭을 늘리며 내 신경을 긁어댔다.
타자인 길버트 라라의 상황이 좋지 못하니 어떻게든 날 자극하려는 모습이니 팀플레이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생각하는 선수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도루가 아닌 이상에야 신경 쓸 필요가 없겠지. 하지만.’
토렌스에게 사인을 보냈다.
1루로 송구를 해달라는 사인을 보내자 토렌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볼 하나를 내준다는 생각으로 바깥쪽 빠지는 코스로 포심 패스트볼을 던졌다.
주심의 판정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토렌스가 재빨리 포수 미트에서 공을 꺼내 1루로 송구했다.
촤아아악.
아슬아슬했지만, 명백한 세이프.
1루수 미치 네이는 아쉽다는 듯 토렌스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세워보이고는 내게 공을 던져줬다.
다시 한 번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되면 오늘 경기에서 승리한다 하더라도 마틴 배긴스는 얼굴 들고 다니기가 힘들어진다. 팬들에게 먹을 욕, 스스로 자책하게 될 상황까지 생각하면 며칠은 끔찍하다 싶을 정도로 악몽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조금 전보다 확실하게 리드폭이 줄어들었다.
이제 남은 건 길버트 라라였기에 토렌스가 보내오는 사인을 확인했다.
토렌스가 보내온 사인은 두 번째 공과 같았던 똑같은 코스의 컷 패스트볼이었다.
길버트 라라의 스탠스와 그 위치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는 글러브 안에서 공을 쥐었다.
‘이걸로 끝내자.’
길버트 라라를 삼진으로 잡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이왕이면 병살타를 유도하기 위해 조금 더 신경을 쓰다 보니 공을 던지는 순간 과도하게 손가락 끝에 힘이 실리고 말았다.
결과는 코스 이탈.
토렌스가 원하는 코스보다 한참이나 아래로 떨어지는 명백한 볼이었다.
그런데 타석에서 공을 기다리던 길버트 라라의 어깨가 움직였다.
‘헛스윙이다.’
컷 패스트볼의 궤적은 완전한 볼, 길버트 라라의 무릎 밑으로 떨어지는 아주 낮은 볼이었다. 보나마나 크게 배트가 헛돌며 스윙 삼진을 당할 거라고 확신이 들었다.
길버트 라라도 배트를 휘두르다 급격하게 아래로 떨어지는 공에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러나 이미 배트를 회수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는 걸 알기에 그는 오른쪽 무릎을 땅에 닿을 정도로 굽히며 스윙 각도를 조절했다.
말 그대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따- 악!
골프체가 공을 걷어 올리듯 완전한 어퍼 스윙으로 타구를 날려버리는 길버트 라라였다.
“…하!”
급히 고개를 돌려 타구를 바라보니 좌익수를 보고 있는 마이크 트라웃이 타구를 따라 뒤로 달리다가 펜스에 어깨가 닿자 가슴까지 올렸던 글러브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첫 번째 피홈런.
그것도 말도 안 되는 볼을 그대로 걷어 올린 것이니 내가 잘 못 던졌다기보다는 괴물 같은 파워와 감각적인 스윙으로 홈런을 만들어 버린 길버트 라라를 칭찬해야 할 일이었다.
때때로 하이라이트 장면처럼 TV에서 보여줬던 말도 안 되는 홈런을 맞은 거다.
두 손을 불끈 쥐며 베이스런닝을 하는 길버트 라라를 바라보며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2점차 리드가 순식간에 동점으로 맞춰지고 말았다.
더그아웃에서 지시를 받은 토렌스가 마운드로 올라왔다.
“운이 나빴어.”
토렌스가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걸 홈런으로 만들다니 할 말이 없군.”
코리 시거도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할까? 그만 내려갈래?”
그러겠다는 말 한 마디면 토렌스는 더그아웃에 신호를 보낼 것이고, 그럼 감독이 투수 교체를 하기 위해 나올 것이다. 이미 한 차례 마운드에 올라왔었기 때문에 또 다시 올라오면 무조건 교체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토렌스가 대신해서 내 의중을 물어보는 거였다.
이 정도의 호의를 받는 신인 투수는 없었다.
“7회까지는 마무리 하죠.”
내 말에 토렌스는 물론, 내야수들도 군소리 없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후우우우.”
처음으로 홈런을 맞으며 실점까지 했지만, 생각보다 상태는 멀쩡했다.
아무리 투수가 잘 던져도 타자가 잘 치면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이미 맞아버린 홈런에 대해서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투 아웃만 잡고 내려가자.’
오늘 경기를 마무리하기 위해 로진백을 주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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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 연속 완봉승 실패.
아쉽게도 메이저리그 기록인 6회 연속 완봉승을 코앞에 두고 멈추고야 말았다.
1968년 돈 드라이스데일이 세웠던 6회 연속 완봉승을 눈앞에 두고 마침표를 찍은 거다.
그러고 보니 돈 드라이스데일도 다저스에서 영구결번이 되어 있는 대선배다.
샌디 쿠팩스와 함께 활약했던 다저스의 전설적인 투수 중 한 명으로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 옛날부터 다저스는 투수력 하나만큼은 정말 최고 수준이라 불러도 좋았다.
7이닝, 112구.
그리고 2실점.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도 46.1이닝에서 끝이 나고 말았다.
“괜찮냐?”
형수가 곁에서 조심스럽게 날 바라봤다.
“문제없어.”
“그럼 다행이고.”
내 대답에 형수는 어색하게 웃고는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더그아웃에 있는 그 누구도 내 곁으로 다가오지 않고 있었다.
그럴 것이 굵직했던 두 가지의 기록이 깨져버렸으니 눈치 없이 내게 다가올 선수가 있을 수 없었다.
대기록들이 깨져버린 것에 대해서는 나 역시 아쉬운 감정이 컸지만, 이제 막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올라온 나였다.
벌써부터 실망해서 안타까워하며 좌절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까지 5경기를 던졌다면 앞으로는 400경기 이상을 던지고자 하는 나였으니 기록 따윈 언제든 다시 달성할 수 있다 여겼다.
부상과 슬럼프에 빠지지 않는 이상 1년 동안 30경기는 꾸준하게 출장을 할 수 있다.
그렇게 15년이면 450경기다.
내 나이가 36살이 된다 하더라도 앞으로 4년 정도 더 활약한다고 했을 때에는 게임수가 줄어든다 하더라도 500경기는 무난하게 소화를 할 수가 있게 된다.
물론, 선발 투수로서 기량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40살이 넘어서도 선발 투수로 활약했던 투수들을 생각하면 나라고 못 할 이유도 없었다.
앞으로 내게 남은 경기는 수백 경기고, 그 기간 동안 내가 달성하게 될 기록들은 무궁무진하게 많아질 수밖에 없다.
오늘 경기에서 홈런을 맞아 연속이닝 무실점 기록과 연속 완봉승 기록이 깨졌다고 실망할 이유도, 그러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무엇보다 오늘 경기에서 난 아주 중요한 경험을 했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타자들이 나에 대한 공략법을 제시했고, 난 그걸 돌파해야 한다는 것과 타자의 컨디션에 따라서는 내가 던진 말도 안 되는 볼도 홈런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까지.
아직 내가 성장해야 할 길은 까마득하게 멀었으며, 조금만 주춤거리면 경쟁자들에게 순식간에 따라잡히고 만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비록 처음으로 실점을 했고, 승리투수 요건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마운드를 내려오고 말았지만 메이저리그 시즌이 시작되고 정말 소중한 경험들을 얻은 경기임에는 분명했다.
딱!
마이크 트라웃의 끝내기 홈런이 터지면서 1점차이로 LA 다저스가 승리했다.
승리투수는 되지 못했지만, 팀이 승리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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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투수도 되지 못했고, 경기 결과적으로도 차지혁 선수에게 있어 가장 좋지 못한 날인데 굳이 방송에 내보낼 이유가 있을까요? 차지혁 선수만 괜찮다면 차라리 다음 선발 경기 등판을 방송으로 보내드릴 수도 있어요. 차지혁 선수를 응원하는 팬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라도 이왕이면 승리하는 경기가 좋지 않을까 싶은데요?”
경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 소파에 앉았다.
여전히 황지연 PD는 경기 결과에 대한 아쉬움을 보이고 있었다.
오늘 새벽부터 찍어뒀던 것들을 모두 폐기하더라도 승리투수가 되는 모습이 방송으로 나가는 것이 어떻겠냐며 나를 설득했다.
“모든 운동 선수가 항상 이길 수만은 없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계속된 승리가 더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겠죠. 오늘 경기를 방송에 내보내지 않는다고 그 결과가 숨겨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전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겁니다. 그리고 선발 투수가 7이닝 2실점이면 꽤 호투한 겁니다.”
내가 빙긋 웃자 황지연 PD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알고 있죠. 하지만, 차지혁 선수가 지금까지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서 승승장구 하던 모습만 지켜봐온 시청자 입장에서는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고, 국민성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이미 국민적인 영웅이 되어 있는 차지혁 선수라서 그 이미지를 괜히 깨고 싶지 않아서 아쉬워서 그럴 뿐이에요. 알잖아요.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이라는 곳이 온갖 악플들이 난무하는 곳이라는 걸. 개인적으로 차지혁 선수에게 흠이라도 생길까 싶어서 걱정 되서 하는 말이에요.”
“황 피디님 생각은 고맙습니다. 그래도 전 지금의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야 말로 날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팬들에 대한 신뢰가 아닌가 싶습니다. 누구 말대로 매번 이기기만 하면 그것도 재미없지 않을까요?”
황지연 PD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픽 웃고 말았다.
“카메라 돌릴까요?”
카메라 감독의 물음에 황지연 PD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지혁 선수, 카메라 돌아갑니다!”
카메라에 빨간 불빛이 들어왔다.
“오늘 경기에서 아쉽게도 승리를 챙기지 못하셨습니다. 더불어 두 가지의 굵직했던 메이저리그 대기록도 중단되고 말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솔직한 심정을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황지연 PD와 첫 번째 인터뷰를 시작했다.
< 『해외편 - 12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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