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126화 (126/221)

< 『해외편 - 126』 >

『해외편 - 126』

처음부터 그랬지만, 이제는 너무나도 까마득한 곳까지 올라가 버린 사람이다.

감히 쳐다보는 것조차 민폐가 될 정도로 너무 높은 곳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사람이라 이제는 더 이상 하찮은 용기조차 낼 수가 없었다.

손은커녕 눈길조차 닿을 수 없는 곳에 떠 있는 남자.

TV로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기로 했다.

“지혁 씨…….”

넘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손에 쥔 핸드폰의 액정이 꺼지자 천천히 버튼을 눌렀다.

차지혁이라는 세 글자가 화면에 떴다.

아무렇지도 않게 문자를 보낼 수도 있었지만, 그것조차 이제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야속한 마음도 들었다.

언제나 먼저 연락을 했었다.

선발 경기가 있는 날이면 경기가 시작되기 한참 전부터 먼저 문자로 응원을 했고, 경기가 끝나면 승리를 축하하는 문자도 보냈다.

단 한 번도 먼저 연락을 해온 적이 없었고, 자신이 보낸 문자에 대한 답변도 늘 형식적이고 간단했다.

자존심이 상하기보다는 섭섭하고 서운한 감정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 문자를 더 이상 보내지 않았다.

항상 먼저 연락을 했었으니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 궁금해 하지 않을까 기대도 해봤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핸드폰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싶어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내달라는 부탁까지 해봤다.

멀쩡한 핸드폰을 확인하곤 현실을 깨달았다.

너무 까마득한 높은 곳으로 올라간 그는 자신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애초부터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으니 그를 원망하고 욕할 이유도 없었다.

“하아아…….”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고, 괜히 눈물이 맺혔다.

첫사랑이라면 첫사랑인 남자에게 변변찮게 고백도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이렇게 끝나는 건가 싶은 마음에 스스로가 너무 초라하고 못났다는 생각만 들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TV에 나오는 연예인을 동경하며 짝사랑을 하는 모습을 보고 한심하다 여겼는데, 남자 친구가 생겨 데이트를 즐기는 친구들과 다르게 자신은 20살이 넘어서야 TV속 스타를 동경하며 가슴앓이하고 있으니 부끄럽고 창피했다.

당장이라도 문자를 보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행동인지 알기에 단념하기로 했다.

-차지혁 선수! 멋진 파워 커브로 길버트 라라 선수를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 세웠습니다! 1회 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공격을 무실점으로 막아내면서 41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을 이어나갑니다!

이제는 순수한 팬으로서 그를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것만이 아름다운 이별이었다.

화면이 꺼진 핸드폰 액정을 다시 살려내며 차지혁이라는 이름으로 저장된 번호를 지우는 것이 가장 깨끗하게 그와의 인연을 정리하는 것임을 알기에 떨리는 손으로 삭제 버튼을 눌렀다.

연락처를 삭제하겠냐는 마지막 경고에 확인 버튼을 향해 손가락을 움직일 때였다.

벨이 울리면서 같은 과 동기의 이름이 화면에 떠올랐다.

“응, 수애야.”

-혜영아! 장 교수님이 너 편입학 추천 지원학생으로 선정했대!

“뭐라고?”

-집안 빽으로 밀어 붙이던 재수 없는 년이 탈락하고 네가 편입학 추천 지원학생으로 선정됐다고!

뒤이어 부럽다면서도 진심으로 축하를 해주는 수애의 말을 듣고는 전화를 끊었다.

액정에는 다시 연락처를 삭제하겠냐는 경고 메시지가 떠 있었다.

“이렇게 끝내지 말라는 거겠지?”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

재빨리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연락처를 검색해서 한 사람의 이름을 찾아냈다.

주저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반가운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혜영!

“에바! 잘 지냈지?”

-나야 잘 지냈지. 혜영은 좀 어때? 편입학은 여전히 힘든 거야?

“사실 그것 때문에 전화를 했어. 에바! 나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아!”

-축하해! 진심으로 축하해. 학비 때문에 걱정했었는데 정말 잘 됐네. 학교는 어디로 정했어?

“UC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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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일러 콜렉 선수! 다시 한 번 100마일의 강속구를 던지면서 크레이그 바렛 선수를 삼진으로 돌려 세웠습니다!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파이어볼러라는 명성이 이제는 시들해졌다 싶었는데 여전히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야수답게 무지막지한 공으로 1회부터 다저스 타자들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2024년 2번째 사이영상을 수상할 당시만 하더라도 타일러 콜렉 선수는 무려 104마일이라는 믿기지 않는 강속구를 던졌던 선발 투수였죠. 그 해 타일러 콜렉 선수의 패스트볼은 말 그대로 알고도 못 친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구위를 자랑했죠.

-하지만 이듬해부터 조금씩 구속이 줄어들지 않았습니까?

-기록을 찾아보니 2025년 최고 구속이 101마일로 기록되어 있군요. 여전히 빠른 강속구를 던졌습니다만, 평균 구속이 96마일로 확 떨어진 부분이 결정적으로 타일러 콜렉 선수의 전성기를 끝냈다고 할 수 있죠. 그렇다 하더라도 2025년 시즌에 17승, 2026년 작년 시즌에도 15승을 거두었으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막강한 선발 투수 중 한 명인 건 사실이죠. 올 시즌에도 벌써 3승을 거두고 있으니 내셔널리그에서는 LA 다저스, 워싱턴 내셔널스,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마찬가지로 가장 막강한 1, 2선발 투수를 보유하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죠.

-말씀드리는 순간, 코리 시거 선수 좌익수 뜬공으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LA 다저스의 1회 말 공격도 삼자범퇴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잠시 후에 2회 초, LA 다저스의 수비 차지혁 선수의 투구로 돌아오겠습니다.

카메라가 꺼지자 이어폰을 끼고 있던 이태석 캐스터가 곁에 앉아 있는 박승태 해설위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경기도 팽팽한 투수전이 되겠는데요?”

“그러겠지. 차지혁이야 뭐 두 말 할 것도 없고, 오늘 타일러 콜렉의 구속과 구위가 전성기 시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군. 방금 코리 시거가 작정하고 타격을 했는데도 좌익수를 넘기지 못한 걸 보면 힘이 빠지기 전까지는 어림도 없겠어.”

전성기 시절 타일러 콜렉의 구위는 타자들에게는 살인적이었다.

역대 투수들 가운데 타일러 콜렉처럼 본능적으로 자신의 체중을 공에 실을 수 있는 투수가 없다고 평가를 받았을 정도였으니 제 아무리 파워가 뛰어났던 타자라도 힘으로는 승부를 볼 수가 없었다.

“잘 맞았는데 구위에 완전히 눌려 버렸죠. 그런데 차지혁 선수가 오늘도 완봉승을 할 수 있을까요? 1회부터 기습 번트를 하면서 어떻게든 흔들어 보려고 하는 걸 보면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말이죠.”

박승태 해설위원을 대신해서 곁에 반대쪽에 앉아 있던 고민기 해설위원이 대꾸했다.

“예전부터 강했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였지만, 콜 머먼트 감독이 부임하고부터는 더욱더 강한 팀이 된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극소수의 구단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작전 야구를 언제든 구사할 수 있으니, 차지혁 투수로서는 오늘 경기 다른 때와 다르게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대처를 확실하게 대비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지난 경기에서도 콜 머먼트 감독의 작전에 루카스 지올리토 투수가 완전히 무너지질 않았습니까?”

루카스 지올리토가 누구인가?

역대 사이영상을 3차례나 수상한 현재 메이저리그 최강의 투수 중 한 명이다.

그런 루카스 지올리토가 4회를 버티지 못하고 강판을 당했다.

구속이나 구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콜 머먼트 감독의 작전에 완전히 무너졌던 거다.

차지혁이라고 다를 것 없었다.

1회부터 기습 번트가 나오며 너무나도 허무하게 타자를 출루시켰다.

토렌스의 허를 찌르는 견제사로 인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작전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만, 분명 차지혁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기가 막힌 작전이었다.

“그래도 차지혁이니까 한 번 기대를 해보자고.”

박승태 해설위원의 말에 나머지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차지혁은 다를 거라는 강한 믿음, 아니 그러고 싶은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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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랜더 터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4번 타자인 그는 올 시즌 고작 28살 밖에 되질 않았다. 그러나 벌써 10년 동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18살에 드래프트를 통해 샌프란시스코에 살기 시작한 올랜더 터너는 3년의 마이너리그 생활과 2년의 백업 선수 생활을 거쳐서 정식으로 주전 선수가 되었다.

‘타격 능력은 확실히 뛰어나지만, 본능적인 타격이 아니라 기계적인 타격이라고 했었지?’

말 그대로 천재라고 하기 보다는 노력으로 지금의 자리에 오른 선수가 올랜더 터너다.

드래프트 당시 유일한 장점이라면 성실함과 인성, 깨끗한 기본기가 전부였기에 28라운드에 지명을 받았으니 솔직히 이름 날린 유망주들과는 차이가 컸다.

그런 올랜더 터너는 꾸준한 성실함을 무기로 결국 중심 타선까지 올라왔다.

초구는 몸 쪽으로 붙이는 체인지업.

놀라울 정도로 매년 많은 훈련량을 소화해냈기에 몸 쪽, 바깥쪽을 특별하게 가리지 않고 골고루 잘 치는 올랜더 터너였지만, 그래도 조금 더 확률적으로 타격 성공률이 떨어지는 곳을 고르자면 몸 쪽이었다.

퍼엉!

“스트라이크!”

타격을 한다 하더라도 파울이거나, 재수 없을 경우 범타로 처리될 확률이 높은 공이었기에 올랜더 터너는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타석에서 물러나 스윙을 하며 타이밍을 체크하는 모습이 같은 코스의 공을 곧바로 던져서는 안 된다는 걸 분명히 알려주고 있었다.

‘몸 쪽 높은 코스.’

토렌스가 요구한 두 번째 공은 몸 쪽 높은 코스의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포심 패스트볼이었다.

체인지업의 구속을 보여줬으니 빠른 패스트볼로 타이밍을 흩트려 놓자는 의도였다.

거기에 눈에 확 들어오는 높은 코스의 공이니 잘만하면 내야 뜬공을 이끌어 낼 수도 있었다.

빠르게 날아간 공은 그대로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했다.

2스트라이크 노볼 상황에서도 올랜더 터너는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타석에서 물러나 다시 한 번 허공에 스윙을 할 뿐이었다.

‘유인구? 아니면 승부구?’

토렌스는 과감하게 승부구를 요구했다.

바깥쪽을 걸치는 컷 패스트볼.

우선 제대로 된 타격을 하기가 쉽지 않았고, 지켜보면 그대로 루킹삼진이다.

제구에 신경을 써서 토렌스가 원하는 코스로 정확하게 컷 패스트볼을 던졌다.

딱!

올랜더 터너는 가볍게 스윙을 하며 커트만 했다.

이어진 4구 파워 커브 역시도 올랜더 터너는 슬쩍 배트만 휘둘러 커트했고, 5구와 6구마저도 툭툭 건드리며 파울을 만들었다.

자신이 원하는 구종, 코스의 공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커트를 할 수 있다는 듯 배트를 슬쩍슬쩍 갖다 대는 올랜더 터너의 짧은 스윙이 상당히 거슬렸다.

자칫 어설프게 타구가 떠버리거나, 헛스윙을 할 수도 있음에도 올랜더 터너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배트를 휘둘렀다.

탁.

기어이 타구가 토렌스의 머리 뒤로 떠올랐다.

재빠르게 마스크를 벗어 던지며 타구를 쫓아간 토렌스는 안정적으로 포구하며 올랜더 터너를 아웃시켰다.

‘8구.’

올랜더 터너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공을 던졌다.

작정하고 커트만 하겠다고 배트를 휘둘러대니 생겨난 결과물이었다.

“후우.”

짧게 한숨을 토해내고는 타석에 들어서는 리즈 맥과이어를 바라봤다.

전형적인 대기만성형 선수인 리즈 맥과이어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없어서는 안 될 주전 포수였다.

공수에 걸쳐 밸런스가 아주 잘 잡혀 있는 리즈 맥과이어는 골든 글러브나 실버 슬러거와 같은 개인 타이틀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팀 전체적으로 봤을 때 승리 기여도 자체는 상당히 높았다.

퍼엉!

퍼엉!

순식간에 2스트라이크가 잡혔다.

몸 쪽으로만 파고들었던 공에 리즈 맥과이어는 조금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진 3구.

틱!

짧고 간결한 스윙.

스트라이크 존 근처로 향하는 공에 리즈 맥과이어는 망설임 없이 배트를 휘둘렀다.

문제는 그 스윙이 커트가 목적이라는 점이었다.

4구, 5구 역시도 리즈 맥과이어는 짧게 끊어서 스윙을 했다.

2스트라이크 노볼이었지만, 내가 던진 공은 5구.

타석에 선 리즈 맥과이어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설마?”

머릿속에 하나의 작전이 스치고 지나갔다.

투구수 늘리기.

전형적으로 선발 투수를 빨리 끌어내리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작전이다.

삼진을 당해도 상관없고, 파울 플라이나, 내야 뜬공으로 아웃을 당해도 상관없다.

무조건 2스트라이크까지 내주고 이후부터는 스트라이크 존 근처로 오는 공에 대해서는 커트만 한다.

자신의 타율을 갉아먹는 작전임에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타자들은 누구든지 수행할 수 있었다.

단 한 사람, 콜 머먼트 감독의 지시가 떨어졌다면 말이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더그아웃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푸른 눈동자에 반쯤 벗겨진 대머리의 콜 머먼트 감독이 입 안 가득 넣은 해바라기씨를 씹어대며 연신 껍질을 뱉어내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기분 나쁘게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작전이라…….”

역시 만만찮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였다.

< 『해외편 - 126』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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