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25』 >
『해외편 - 125』
“플레이볼!”
주심의 활기찬 외침에 타석에 타자가 들어섰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번 타자, 데릭 힐.
리그 최고 수준의 리드 오프.
파워를 제외한 타격 능력, 주력, 수비력, 선구안 모든 것이 최정상급이라 불리는 선수다.
2014년 1라운드에서 디트로이트의 지명을 받았을 정도로 잠재력을 인정받았던 데릭 힐은 메이저리그 데뷔와 동시에 리그 평균 이상의 성적을 항상 내왔다.
무엇보다 데릭 힐의 가장 큰 장점은 약점이 없다는 사실이다.
수준급의 배트 스피드로 인해 웬만한 공은 모두 커트해낼 능력이 있었고, 경력이 쌓이며 침착하게 투수의 공을 기다릴 줄도 알았다.
삼진 수는 적고, 평균 5개 이상의 공을 투수로 하여금 던지게 만들었기에 1번 타자로서의 자질이 타고 났다가 평가를 받고 있었다.
까다로운 타자다.
하지만, 데릭 힐은 나와 상성이 맞질 않는다.
‘구위로 누른다.’
간단하게 말해서 데릭 힐은 사토시 슌과 같은 유형의 타자다.
파워가 없다는 점은 그만큼 투수의 구위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없다는 뜻과 같다.
벌써 정규 시즌 5번째 호흡을 맞추고 있는 토렌스는 초구부터 강하게 압박을 해보라는 듯 포심 패스트볼을 몸 쪽으로 요구해왔다.
타석에 서서 침착하게 날 바라보는 데릭 힐을 향해 오늘 경기 첫 번째 공을 던졌다.
쇄애애애액!
퍼- 어엉!
“스트라이크!”
살 떨릴 정도로 빠른 포심 패스트볼이 몸 쪽으로 파고들자 주심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스트라이크 판정을 내렸다.
고개를 돌려 전광판을 바라보니 97마일이 찍혀 있었다.
평균 96마일의 패스트볼을 던지고 있었기에 초구부터 평균 구속을 1마일 넘어섰다.
‘이제는 손에 익었어.’
97마일의 공도 제구력에 문제가 없었다.
정말 집중이 잘 되거나, 컨디션이 베스트라 불릴 때라면 98마일까지도 제구가 잡혔지만, 실질적으로 내가 완벽하게 제구력을 잡을 수 있는 구속은 96마일까지였다.
그런데 오늘 경기에서는 우선 97마일까지 제구가 잡힌 다는 걸 확실하게 인지했다.
2구는 우타자인 데릭 힐에게 가장 까다로운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을 살짝 걸치는 컷 패스트볼을 던졌다.
펑!
“스트라이크!”
환상적인 토렌스의 미트질이 빛을 발하며 스트라이크 판정을 끌어냈다.
정말 토렌스가 포수로 앉아 있을 때만큼은 주심의 성향을 굳이 파악할 이유가 없었다.
정말 까다로운 주심이라면 말이 다르지만, 그 외의 대부분의 주심들은 토렌스의 미트질에 확실하게 넘어갔기에 경기 초반 스트라이크 존을 탐색할 이유가 없었다.
유리한 볼 카운트에서 토렌스가 요구해온 3구는 데릭 힐의 무릎 높이는 스치고 지나가는 몸 쪽 낮은 코스의 체인지업이었다.
가볍게 호흡을 가다듬고 곧바로 3번째 공을 던졌다.
딱!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던 데릭 힐의 배트가 아주 가볍게 움직이며 체인지업을 커트해버렸다.
파워 커브였다면 확실하게 헛스윙을 이끌어 낼 수도 있었겠다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어진 4구는 같은 코스의 컷 패스트볼.
휘두르지 않으면 볼이 되겠지만, 휘두르면 헛스윙보다는 3루수 방면으로 먹힌 타구가 나올 확률이 굉장히 컸다.
카운트가 불리한 상황이라 그런지 데릭 힐은 고민 없이 배트를 휘둘렀다.
딱.
배트에 맞은 공이 크게 바운드가 되며 3루수 방면으로 튀어 나갔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파울이 될 수도 있는 애매한 타구였지만, 3루수인 코리 시거는 파울 따윈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다는 듯 빠르게 달려 나오며 바닥에서 튀어 오르는 공을 그대로 맨손으로 잡아 1루로 송구했다.
펑!
“아웃!”
발이 빠른 데릭 힐이었지만, 코리 시거의 멋진 수비에 한 발 늦고 말았다.
코리 시거의 멋진 호수비에 글러브 박수를 쳐줬다.
데릭 힐이 아웃되자 2번 타자 마틴 배긴스가 타석에 들어섰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야심차게 육성한 내야수 중 한 명이 바로 마틴 배긴스다.
포지션은 유격수고, 우투좌타다.
처음 드래프트를 통해 샌프란시스코와 계약을 맺을 때만 하더라도 스위치 타자였다고 했다.
수비 실력은 메이저리그 양대 리그를 통틀어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뛰어나다.
넓은 수비 범위, 빠른 발, 유연한 몸놀림, 강한 어깨까지 모든 것을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눈부신 재능을 가진 마틴 배긴스는 향후 메이저리그 최고의 유격수 중 한 명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타석에서의 능력도 마찬가지다.
데릭 힐과 비슷한 성격의 타자로 파워가 부족했지만, 전체적인 타격 밸런스가 아주 훌륭하다고 평가를 받고 있었다.
더불어 작전 수행 능력이 굉장히 좋았는데.
톡.
기습 번트.
초구에 마틴 배긴스는 배트를 던지다시피 기습적으로 번트를 대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1루를 향해 내달렸다.
매년 40개 이상의 도루를 할 정도로 빠른 발을 가진 마틴 배긴스였고, 워낙 기습 번트에 대한 대비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기에 토렌스가 공을 주워들고 1루를 향해 던지려고 할 때는 이미 늦었다는 판단이 들었다.
‘완전히 당했네.’
콜 머먼트 감독의 작전일까?
아니면, 마틴 배긴스의 독단 행동일까?
중요한 건 어느 쪽이든 기습 번트를 허용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1회부터 기습 번트라니… 휴우!”
토렌스가 마운드까지 직접 올라와 공을 건네주며 고개를 저었다.
마틴 배긴스를 향한 눈초리는 무척이나 사나웠다.
“괜찮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 기습 번트를 보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다.
특히, 일부 극성스러운 팬들은 정당하지 못하다며 기습 번트를 성공 시킨 타자에게 날 선 비난이나, 조롱을 퍼붓기도 했다. 지금처럼.
“사내새끼가 부끄럽게 기습 번트라니! 창피한 줄 알아라!”
“척의 공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1회부터 번트질이냐! 너 같은 놈이 빅리그의 타자라는게 수치다!”
1루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홈팬들이 마틴 배긴스를 향해 쉬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중에는 꽤 듣기 민망할 정도로 수위가 높은 욕설이나, 조롱도 있었지만 1루 베이스를 밟고 서 있는 마틴 배긴스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내가 좌투수라 하더라도 1루에 빠른 주자가 나가 있으면 신경이 쓰이는 건 마찬가지다.
마틴 배긴스는 우투수, 좌투수 가리지 않고 재량껏 도루를 할 정도로 콜 머먼트 감독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보란 듯이 리드폭을 넓게 가져가면서 내 시선을 분산시키는 마틴 배긴스의 행동에 견제구를 던졌다.
촤아아아악.
그림 같은 슬라이딩을 보여주는 마틴 배긴스였다.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내고는 다시 넓게 리드폭을 가져갔다.
순간 반응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기에 마틴 배긴스를 견제로 잡기란 요원한 일, 실제로 그는 매년 40개 이상의 도루를 성공시키면서도 5번 이상 견제사를 당한 적이 없을 정도였다.
도루 성공률도 무척이나 높았기에 마틴 배긴스가 1루에 나가면 상대팀 포수는 자연적으로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토렌스도 언제든 2루로 송구를 할 수 있는 자세를 잡고 앉아 있었다.
‘저번 시리즈에서 두 개, 이번 시리즈에서도 도루를 하나 줬었지.’
바로 어제 경기에서 토렌스는 마틴 배긴스의 도루를 허용하고 말았다.
도루 저지율이 평균 이상인 토렌스였지만, 마틴 배긴스에게 올 시즌에만 벌써 3개나 도루를 허용하고 있었으니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주자의 도루를 포수 혼자서만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수비형 포수라는 인식이 강한 토렌스에게 도루 허용은 분명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토렌스의 자존심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내 자존심이다.
시범 경기부터 시작해서 오늘 경기 전까지 나는 단 한 번도 도루를 허용한 적이 없었다.
좌투수로서 도루를 허용한다는 것 자체가 우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리드폭이 넓기는 하지만 마틴 배긴스도 나처럼 빠른 공을 던지는 파이어볼러 앞에서는 쉽게 도루를 생각하지 않는다.
의도는 뻔하다.
내 집중력을 흔들어 놓겠다는 것.
더욱이 현재 타석에는 3번 타자 길버트 라라가 서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사상 가장 많은 이적료를 지급하고 영입한 특급 거포가 바로 길버트 라라다.
8시즌 연속 3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하고 있는 길버트 라라는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 기록인 배리 본즈의 13시즌의 기록을 깰 유일한 타자로 주목을 받고 있는 중이다.
‘어제 경기까지 7개를 터트렸지.’
올 시즌 길버트 라라는 역대 그 어떤 시즌보다 빠른 페이스로 홈런을 날려대고 있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길버트 라라의 파워와 타격 능력이 정점에 도달했다며 부상을 당하지 않는 이상 올 시즌도 무난하게 30개 이상의 홈런을 터트릴 것이며, 생애 첫 홈런왕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을 거라고 조심스럽게 예상할 정도였다.
반대로 말하면 8년 동안 매년 30개 이상의 홈런을 터트리고 있음에도 홈런왕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 뜻이다.
‘파워 하나는 정말 끔찍할 정도라고 했으니까.’
경기 직전 토렌스가 길버트 라라에 대해서 말하길, 딱 한 가지만 조심하라고 했다.
‘절대 구위로 덤벼 들지 마. 척, 네 구위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길버트 라라의 파워가 워낙 대단해서 하는 말이야. 메이저리그의 어떤 투수도 현재 그를 구위로 이길 수는 없어. 이건 내가 장담할 수 있어. 파워 하나는 정말… 끔찍할 정도로 무서운 타자야.’
타석에 선 길버트 라라는 확실히 분위기부터 달랐다.
언뜻 느껴지는 느낌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지미 그랜과 무척이나 흡사했다.
하체보다는 상체에 집중되어 있는 터질 듯 부풀어 올라 있는 근육은 스트라이크 존을 작게 만들었다.
단순하게 파워만 놓고 본다면 지미 그랜도 한 수 접어줘야 할 길버트 라라였기에 신중하게 토렌스와 사인을 주고받았다.
사인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1루 주자인 마틴 배긴스는 꽤 요란스럽게 움직이며 날 자극했다.
신경 쓸 필요 없다 생각하며 토렌스의 사인대로 바깥쪽을 걸치는 컷 패스트볼을 초구로 던졌다.
쇄애애애액!
부우우- 웅!
마운드에서도 바람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살벌하게 돌아가는 길버트 라라의 스윙이었다.
이건 여지없다.
제대로 맞을 것도 없이 어느 정도만 타격에 성공해도 그대로 담장을 넘겨버린다.
길버트 라라는 현재 나를 상대로 정교한 타격이 아니라 무지막지한 파워를 앞세운 한 방을 노리고 있었다.
문제는 유인구를 던지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1루에 발 빠른 마틴 배긴스를 두고 구속이 떨어지는 변화구를 던진다는 건 도루할 기회를 주는 것이었기에 토렌스도 초구를 컷 패스트볼로 요구해왔던 거다.
토렌스는 1루 주자를 힐끔 바라보고는 두 번째 사인을 보내왔다.
포심 패스트볼, 바깥쪽으로 빠지는 코스.
스트라이크가 아니라 볼을 요구하고 있었다.
유인구로 삼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차라리 한 방을 노리고 있는 길버트 라라를 생각했을 때, 몸 쪽으로 바짝 붙여서 떨어지는 파워 커브나, 높은 코스의 포심 패스트볼이 적당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인이었지만, 포수로서 토렌스를 신뢰하고 있었기에 원하는 대로 던져줬다.
쇄애애액.
빠르게 날아가는 공에 길버트 라라는 상체를 움찔 거렸지만 예상대로 배트를 휘두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판정에 대한 미련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듯 토렌스는 포구와 동시에 포수 미트를 가슴으로 끌어당기고는 전광석화처럼 오른손을 움직여 공을 빼내고는 그대로 앉아서 1루수 미치 네이에게 송구를 했다.
펑!
미리 사인을 맞췄다는 듯 1루수 미치 네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토렌스의 공을 잡으며 1루 베이스 앞쪽을 쓸 듯이 팔을 휘둘렀다.
툭.
내가 투구 동작을 하면서 2루 베이스 쪽을 향해 몇 발자국을 이동했던 마틴 배긴스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토렌스의 1루 송구에 다급하게 슬라이딩을 하며 손을 뻗었지만, 그보다 미치 네이의 글러브가 그의 손등을 찍고 지나가는 것이 먼저였다.
“아웃!”
1루심이 우렁차게 외치며 주먹을 쥐었다.
마틴 배긴스는 슬라이딩을 한 자세 그대로 고개를 바닥에 푹 묻었다.
평소보다 넓었던 리드폭이 문제였다.
물론, 가장 결정적인 건 투수인 나조차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토렌스의 깜짝 송구였다.
옷에 묻은 흙을 털지도 않고 더그아웃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마틴 배긴스의 모습에 나는 고소한 감정을 느꼈다.
더불어 토렌스의 또 다른 면을 봐서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신경 쓰이던 1루 주자를 잡아냈고, 아웃 카운트도 하나 올리면서 눈앞에 서 있는 길버트 라라만 잡으면 1회가 끝난다.
주자가 아웃됐음에도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길버트 라라의 모습을 보며 나는 토렌스가 보내주는 사인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길버트 라라를 잡으러 가볼까.’
글러브 속에 감추고 있는 공의 실밥을 느끼며 피처 플레이트에 발을 올려놨다.
< 『해외편 - 125』 > 끝
ⓒ 독고진
작가의 말
독자분의 요청에 의해....
NL 사이영상 수상자.
2015년 클레이튼 커쇼(LA 다저스)
2016년 루카스 지올리토(워싱턴 내셔널스)
2017년 클레이튼 커쇼(LA 다저스)
2018년 클레이튼 커쇼(LA 다저스)
2019년 클레이튼 커쇼(LA 다저스)
2020년 케디올라 벨로(LA 다저스)
2021년 타일러 콜렉(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2022년 필 맥카프리(LA 다저스)
2023년 루카스 지올리토(워싱턴 내셔널스)
2024년 타일러 콜렉(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2025년 맥스 프리드(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26년 루카스 지올리토(워싱턴 내셔널스)
2027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