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24』 >
『해외편 - 124』
“말씀하신 것처럼 촬영은 내일 새벽부터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 카메라에 담을 예정이에요. 다른 어떠한 인위적인 연출은 하지 않을 거고, 저희 촬영팀의 재량으로 동료 선수들의 인터뷰도 따로 딸 겁니다. 더불어 방송 전 편집이 완료된 최종 영상을 차지혁 선수와 에이전시, 구단에 먼저 전달하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의도하지 않았던 내용이 방송에 나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황지연 PD의 말에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들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편집된 최종 영상 즉, 방송 영상을 출연자는 물론 에이전시와 구단에 먼저 준다는 건 무척이나 이례적인 일이라고 했다.
그렇게 모든 촬영 준비가 끝났다.
솔직히 약간의 우려도 있었다.
너무나도 단순하고 반복적인 생활 패턴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눈을 뜨면서부터 시작되는 훈련, 그리고 무미건조한 일상.
도저히 방송용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말을 한 내용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촬영을 하겠다고 방송국에서 끈질기게 매달렸으니 어련히 알아서 할까 싶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괜한 짓을 벌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다시 되돌릴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우려는 됐지만, 그 역시도 내 본모습이니 어떻게 받아들이든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방송 촬영을 허락한 건 나를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성의라고 판단을 했다.
지금까지는 나 혼자 내가 해야 할 훈련만 하면서 야구를 했다면, 이제부터는 나를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어느 정도는 보여줘야 할 것 같다는 의무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건 마운드 위에서의 모습이지만.
“참, 인터뷰와는 별도로 차지혁 선수가 방송을 통해 어떤 특정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면 언제든지 촬영을 할게요. 혹시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메시지라면 정확하게 뭘 말하는 거죠?”
“간단하게 영상 편지라고 생각하면 되요. 가족들이나, 팬, 친구, 은사님 등등 차지혁 선수가 평소 하지 못했던 말들을 방송을 통해서 하는 거죠.”
“생각해보겠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당연히 가족이다.
지금의 나를 있게끔 만들어 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동생 지아.
가족 다음으로 떠오른 사람은 내가 이 자리에까지 올라설 수 있도록 튼튼한 기초를 마련해준 최상호 코치다.
그 외에도 몇몇 사람들이 떠오르긴 했지만, 굳이 방송을 통해서까지 영상 편지를 쓸 만한 사람은 최상호 코치뿐이었다.
마지막으로 황병익 대표와 형수도 후보 중 하나였다.
“그럼 내일 새벽부터 촬영 시작할게요. 다시 한 번 고마워요. 촬영을 허락해 준 것도 그렇고, 촬영 기간 동안 차지혁 선수의 집에 머물 수 있도록 해준 점도 고마워요. 나중에 촬영이 끝나면 정말 멋진 저녁 식사 한 번 대접할게요.”
환하게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하는 황지연 PD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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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2차전에서는 아쉽게도 3:2로 1점차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전날 필 맥카프리의 구위에 짓눌렸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타자들은 다소 컨디션이 떨어진 듯 제대로 된 화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득점 찬스에서는 집중력을 발휘하며 아슬아슬하게 1점차 승리를 가져갔다.
이번 두 번째 시리즈의 마지막 3차전.
LA 다저스의 선발 투수로는 내가 마운드에 올라갔고,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선발 투수로는 2선발 투수인 타일러 콜렉이 마운드에 오르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타일러 콜렉.
야수(野獸), 미국에서는 타일러 콜렉을 비스트(beast)라고 불렀다.
타일러 콜렉은 2m가 넘어가는 큰 키에서 뿌려대는 무지막지한 구위를 지닌 포심 패스트볼로 인해 한때 메이저리그 최고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타고난 체격과 최고 수준의 팔 힘을 가지고 2014년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마이애미 말린스와 계약했고, 유망주 시절부터 타일러 콜렉의 패스트볼은 대다수의 스카우트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더불어 커브를 사용하는 감각 또한 수준급이라 부를만했다.
여기까지가 1라운드에 지명을 받은 타일러 콜렉의 장점이라면, 단점으로는 폭발적인 구위를 지닌 패스트볼을 조절하지 못하는 완급 조절 능력과 손목의 사용이 부드럽지 못해 패스트볼의 구속과 커브의 사용이 저하될지 모른다는 점, 체인지업을 배우고 있지만, 제3구로서의 가치가 불투명하다는 점과 제구, 경기 운영 능력이 미숙하다는 점이 오랜 시간 노력을 들여야만 잠재능력을 꽃피울 수 있다 평가를 받았다.
가진바 재능만큼 상당한 노력도 필요한 유형의 투수다.
충분한 노력으로 재능을 개화시킬 수만 있다면 충분히 에이스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평가를 받은 타일러 콜렉은 결과적으로 마이애미 말린스에서는 아무런 빛도 보지 못했다.
마이애미 말린스는 타일러 콜렉을 세련되게 조련을 시켰다.
최대 장점인 패스트볼의 구속과 구위가 조금 떨어진다 하더라도 감각적인 커브와 체인지업, 슬라이더를 장착시키며 제구력, 완급 조절, 경기 운영 능력까지 모든 것을 다 집중적으로 투자하며 차기 에이스로 성장을 바랐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
그것도 아주 처참할 정도의 대실패였다.
타일러 콜렉의 최대 장점인 패스트볼의 구위는 드래프트 시절보다 못해졌고, 커브나 다른 변화구들의 구사 능력도 평균 이상을 바랄 수가 없었다.
완급 조절은 가능해졌으나 구위가 떨어진 패스트볼은 전혀 위력적이지 못하니 완급 조절 자체가 의미가 없어졌으며, 선발 투수의 구위가 모조리 하락하다보니 이닝 이터 역할을 수행하지 못해 경기 운영 능력 또한 미숙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한 가지 얻은 것이라고는 제구력이었으나, 그 역시 밋밋한 패스트볼과 타자를 속이기에 부족한 변화구들로 인해 빛을 발하지 못했다.
결국, 3년 만에 타일러 콜렉은 헐값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를 당했다.
그 조차도 주력 트레이드 카드가 될 수 없는 전형적인 끼워 팔기 식 카드였다.
그렇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트레이드 당한 타일러 콜렉에게 시선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구단은 물론, 팬들조차도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진 유망주 투수, 더 이상 재기가 어려운 투수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그때, 타일러 콜렉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선수가 있었다.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더그아웃 쪽으로 향했다.
흔하게들 말하는 꽃중년의 외모를 지닌 젊은 코치가 시야에 들어왔다.
‘타일러 콜렉의 평생 은인이라고 했었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배출한 최고의 포수, 버스터 포지다.
완전히 망가져 더 이상의 기대를 가질 수 없는 타일러 콜렉을 부활시킨 장본인이 바로 버스터 포지다.
‘꾸미지 말고 본능적으로 던져라.’
버스터 포지는 타일러 콜렉에게 그렇게 주문했다고 한다.
마이애미 말린스에서 배운 것들을 모두 잊어도 좋으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대로의 날것, 규격화 되지 않은 본능적이고, 가장 편안한 투구를 하라고 말했다.
그 결과는 놀라울 정도였다.
타일러 콜렉은 스스로조차 잊었던 폭발적인 패스트볼을 던졌다.
오랜 시간 마이애미 말린스에서 가다듬은 커브를 비롯한 변화구들은 투박해졌지만, 패스트볼 하나로 인해 충분히 타자에게 위협적으로 변했다.
그 동안 가장 발전했다 평가를 받았던 제구력이 다소 떨어졌지만, 그 정도는 문제가 아니었다.
급변한 타일러 콜렉은 마이너리그를 초토화 시켜버렸다.
강력한 패스트볼을 앞세워 마이너리그의 타자들을 일방적으로 압살시킨 타일러 콜렉을 두고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팬들은 길들여지지 않는 야수, 비스트라고 불렀다.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타일러 콜렉은 평균 구속 99마일, 최고 구속 104마일을 앞세워 메이저리그 타자들마저도 힘으로 짓누르며 승승장구했다.
그렇게 2020년부터 2024년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며 2번의 사이영상까지 탄 타일러 콜렉이었지만, 30살에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구속이 줄어들었다.
도니 케일이라는 새로운 에이스가 등장하면서 이제는 2선발 투수로 밀려난 타일러 콜렉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위력적인 패스트볼을 구사하는 투수 중 하나였다.
“컨디션은 어때?”
유혁선 선배가 곁에 앉으며 그렇게 물었다.
“오셨습니까.”
LA 다저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고 있는 유혁선 선배는 종종 한 번씩 얼굴을 보였다. 대부분의 시간을 마이너리그에서 보내고 있었지만, 오늘처럼 시간이 빌 때는 다저 스타디움까지 찾아오기도 했다.
“일어날 것 없어. 앉아.”
“예.”
“오늘도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을 이어나갈 거지? 연속 완봉승도 마찬가지고?”
장난꾸러기처럼 웃으며 묻는 유혁선 선배에게 나 역시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샌프란시스코 타자들은 솔직히 저도 무섭습니다.”
“맞아. 샌프란시스코 타자들은 정말 무섭지. 나도 으~ 옛날 일 떠오른다. 거기에다 필 맥카프리가 복귀하는 바람에 샌프란시스코의 노림수가 박살이 나긴 했지만, 어쨌든 어제 경기로 승패를 맞춰놨으니 오늘 경기에서 어떻게든 널 한 번 흔들어 보려고 할 거다. 진짜 조심해야 해.”
유혁선 선배의 말대로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첫 번째 시리즈에서 완벽하게 스윕을 가져갔음에도 이번 두 번째 시리즈마저도 위닝 시리즈를 가져가기 위한 계획을 짰다.
선발 로테이션까지 바꿨던 거다.
‘필 맥카프리가 복귀하지 않았다면 샌프란시스코의 계획대로 갔을지도 모르지.’
예상하지 못했던 에이스의 귀환으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계획이 어긋났다.
무난하게 1차전을 승리했어야 했을 게임을 내주고 만 것.
이후, 두 번째 경기에서 예정대로 1선발이자 현 샌프란시스코의 에이스 도니 케일이 등판해서 아슬아슬했지만 어쨌든 승리를 따내며 시리즈 전적 1승1패를 맞춰놨다.
오늘이 마지막 3차전으로 예정대로 막강 선발 카드 중 하나인 타일러 콜렉이 나왔다.
나를 상대로 어느 정도 기대를 걸어볼 만한 선발 카드인 건 분명했고, 필 맥카프리만 아니었어도 이미 2승을 따놓으며 위닝 시리즈를 만들어 놨으니 설령 패배한다 하더라도 아쉬울 것 없는 계획이었다.
“콜 머먼트 감독은 작전 야구에 능통한 사람이야. 내 말이 무슨 소리인지 알지?”
“물론입니다.”
메이저리그 감독들 가운데 가장 작전을 많이 쓰고, 자유롭게 구사하는 감독이 바로 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콜 머먼트 감독이다.
얼마나 작전을 잘 쓰고 자유롭게 구사하냐고 묻는다면 상황에 따라서 투수가 아닌 선수들에게도 여지없이 희생 번트 작전을 내리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히트 앤 런, 런 앤 히트, 번트(희생, 기습, 스퀴즈), 스틸(더블, 홈) 등 온갖 작전을 구사하기로 유명했다.
수비 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메이저리그에서 콜 머먼트 감독만큼 많은 작전을 구사하는 감독이 없을 정도다.
중요한 건 이런 콜 머먼트 감독의 작전 지시를 샌프란시스코 선수들이 모두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사실, 메이저리거들이 감독의 작전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개인 기록이 하락하기도 하고, 자신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여겨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타 구단의 감독들은 군소리 없이 콜 머먼트 감독의 작전 지시를 따라주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선수들을 더 대단하게 여겼다.
“투구 직후 바쁘게 움직여야 할 거다.”
유혁선 선배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수고하라는 뜻임을 알기에 나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마운드에 오르자 홈 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이 가장 먼저 날 반겼다.
거짓말 하나도 보태지 않고 절반 가량의 팬들이 내 이름과 번호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곳곳에 나를 응원하는 피켓도 눈에 들어왔다.
다저 스타디움을 찾은 수만의 홈팬들이 원하는 건 하나였다.
승리.
라이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게서 승리하는 것이다.
첫 번째 시리즈에서 치욕스러운 스윕을 당했으니, 두 번째 시리즈에서는 어떻게든 복수를 할 수 있길 바라고 있는 거다.
에이스 필 맥카프리는 복귀해서 손쉽게 승리를 거뒀다.
어제 경기에서 아쉽게 패배하긴 했지만, 오늘은 내 차례다.
필 맥카프리가 없는 상황에서 에이스 역할을 해주며 양대 리그를 통틀어 가장 눈부신 활약을 해주고 있는 나에 대한 홈팬들의 기대감은 대단했다.
피켓에 보이는 믿음과 신뢰라는 단어들만 보더라도 그 열망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해보자.”
홈 팬들의 기대, 그리고 방송 촬영을 위해서라도 오늘 승리는 반드시 필요했다.
< 『해외편 - 12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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