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23』 >
『해외편 - 123』
첫 번째 시리즈에서 3연패로 스윕을 당했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두 번째 시리즈.
같은 지구 꼴찌인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게 위닝 시리즈를 내주고 시작되는 첫 경기였기에 많은 우려가 있었지만, 그나마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내려왔다.
에이스의 귀환.
LA 다저스 공식 에이스 필 맥카프리가 시즌 첫 번째 선발 등판이 확정됐다.
경기력이 떨어졌을 거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이미 마이너리그에서 충분히 실전 감각을 확인하고 올라왔기에 감독과 코치들은 주변의 우려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잘 하더군.”
경기가 시작되기 전 몸을 푸는 동안 필 맥카프리가 내게 다가와 그렇게 말했다.
“몸 상태는 완벽하게 나은 건가요?”
“물론이지.”
대답을 하며 나를 쳐다보는 필 맥카프리의 눈빛이 곱지만은 않았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갔지만, 내 진심과는 전혀 동떨어진 사실이었기에 굳이 그것에 대해 반응을 할 필요가 없었다.
“다행이군요. 오늘 경기 기대하죠.”
“얼마든지 기대해. 에이스가 뭔지 확실하게 보여줄 테니까.”
몸을 돌리는 필 맥카프리의 모습에 내 등 뒤에 서 있던 형수가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재수 없는 놈.”
“실력이 있잖아? 그러니까 팬들도 좋아하는 거고.”
실력 없는 선수가 저러면 시건방지다, 주제도 모른다는 비난을 받지만, 필 맥카프리처럼 실력을 있는 선수가 저러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가 자신감이라며 긍정적인 시선을 보인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라 더 짜증나네.”
얼굴을 찌푸리는 형수였다.
형수와의 사이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의 가슴속에 쌓여 있던 감정의 찌꺼기들을 모두 털어낸 것처럼 오히려 얼굴 표정이 한결 밝아진 듯 한 형수의 모습이었다.
나를 대하는 태도 역시도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형수의 모습이 한 편으로는 고맙게 느껴졌다.
사실, 형수와의 사이가 서먹해지면 어떻게 풀어야 할지 꽤 한참을 홀로 고민했었으니까.
중요한 건 이제부터다.
형수에게 조금 더 인간적으로 대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형수의 말대로 나는 지금까지 무의식적으로 나를 기준으로 둔 상태에서 사람을 평가해왔던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노력하면 된다라는 사실에 있어서만큼은 아직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형수의 말대로 노력을 하더라도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건 맞는 말이지만, 중요한 건 어떠한 노력을 어떻게 했느냐다.
무작정 노력만 한다고 될까?
절대 그렇지 않다.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노력을 하느냐가 관건이다.
“형수야.”
“응?”
“네가 노력을 안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다만, 어떤 노력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할 뿐이야. 내가 잘났다고 널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네가 내 곁에서 평생 함께 야구를 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야.”
형수는 살짝 당황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아침에 했던 대화가 이어지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앞으로는 토렌스를 목표로 삼아봐.”
“뭐?”
“지금 현 상황에서 형수 네가 목표로 삼아야 하는 사람은 토렌스야. 그를 뛰어넘지 못하면 절대 넌 주전 포수가 될 수 없어. 그러니까 토렌스가 어떤 훈련을 하는지, 포수로서의 장점이 무엇인지, 단점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옆에서 지켜보라는 거야. 넌 포수야. 포수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는 타격이 아니라 포수로서의 능력이야.”
내 말에 형수가 가만히 날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짧은 대답이지만, 형수의 마음이 어떤지는 충분히 느껴졌다.
나 역시 최대한 형수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생각한 끝에 한 말이다.
실질적으로도 형수가 성장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부분을 말해주었다.
포수라는 포지션에 집착을 하는 형수였기에 그 무엇보다 포수로서의 능력이 중요했다.
타격을 아무리 잘해봐야 포수로서 능력미달이라면 포지션 변경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포수로서의 능력만 제대로 갖추게 된다면 기회는 꾸준하게 주어진다.
타격 능력은 그 시기에 향상시켜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현 상황만 봐도 그렇다.
토렌스가 형수보다 나은 건 포수로서의 능력 하나 뿐이다.
타격부터 시작해서 주력까지 형수가 토렌스보다 나았다.
타율이나 출루율이 증명했고, 토렌스는 7번과 8번 타순을 오가고 있었지만, 형수는 6번 타순에도 배치가 됐었고, 한 번뿐이라 하더라도 5번 타순에도 배치가 된 적이 있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토렌스보다는 형수에게 타격 능력을 더 기대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형수가 포수로서의 능력이 믿을 수 있을 만큼 향상된다면 토렌스의 자리를 충분히 위협할 수 있는 선수가 될 수 있었다.
“메이저리그에서 함께 월드 시리즈 우승하자고 했던 말 난 가슴 속에 항상 담아두고 있다.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하는 순간을 다른 누구도 아닌 너와 함께 느끼고 싶다. 그 동안 내 행동이 서운했다면 미안해. 하지만, 진심으로 단 한 번도 널 무시한 적도 없고, 내가 잘났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 네 말대로 내 성격이 이렇다보니까 주변에 친구도 없고 그런 거 알잖아.”
“그, 그건 그냥 나도 모르게 한 개소리니까…….”
“고마웠어. 솔직히 누가 나한테 이런 소릴 해줄까 생각해봤는데, 가족 외엔 없더라고. 네 말이 맞아. 지금까지 난 내가 할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솔직히 벅찬 것도 사실이고. 그런데 형수 네 말을 들으니까 알겠더라. 지금처럼 이렇게 살면 결국 내 주변에 가족 외엔 아무도 남아있지 않을 것 같다라는 걸.”
“그렇지 않아! 그건 그냥 내가 실수로 한 말이야!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네 곁에 남아서 널 지지하고 응원해줄 거야! 그리고 너를 응원하는 수많은 팬들까지도 생각 해야지!”
형수의 말에 나는 다 안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야 그렇겠지만, 과연 내가 이런 부분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계속 살았다면 너라도 견뎌낼 수 있었을까 싶더라고. 널 의심하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어. 솔직히 말해서 나도 나 자신에게 좀 질릴 면들이 많더라고.”
야구하는 기계 인간.
지아가 했던 말들이 정말 크게 와닿았다.
돌이켜보면 야구만을 위해서 살았다.
그 외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무관심했고, 흥미 자체를 주지도 않았다.
후회하는 건 아니다.
이런 삶이 있었기에 지금과 같은 기록들을 낼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당장 내 삶의 패턴이나 습관, 행동들이 바뀔 일도 없다.
여전히 내 인생에 있어 최우선은 야구다.
다만, 이전처럼 꽉 막힌 사고의 틀에서 한꺼풀 벗어났다고 할까?
더 이상 뭐라고 표현하기가 힘들지만, 분명 내 속을 단단하게 조이고 있던 어떠한 막 하나가 깨진 느낌을 받았다.
형수가 진심으로 걱정스럽게 날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설마 갑자기 삐뚤어지려는 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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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은 실력에서 나온다.
필 맥카프리의 투구는 진심으로 박수를 쳐줄 정도로 훌륭했다.
시즌 개막 직전 부상자 명단에 올랐던 필 맥카프리는 정확하게 시즌 개막 후, 20일 만에 첫 선발 등판 경기에서 8이닝 무실점이라는 눈부신 호투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냈다.
필 맥카프리가 왜 LA 다저스의 에이스인지, 어째서 평균 연봉 3천만 달러 이상을 수령하는 선수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줬다.
기세가 오를 대로 올라있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균형 잡힌 타선을 상대로 8이닝 동안 고작 3개의 안타만을 허용했다.
3개의 볼넷이 약간 아쉬운 부분이었지만, 11탈삼진과 더불어 무실점으로 8이닝을 완벽하게 막아냈다는 건 오랜 시간 필 맥카프리의 투구를 기다렸던 팬들에게 기립 박수를 박기에 충분했다.
에이스의 복귀에 힘을 실어주기 위함이었을까?
LA 다저스의 타선도 8이닝 동안 6점을 내면서 확실하게 승리를 챙겨줬다.
경기가 끝나고 수많은 취재진들이 필 맥카프리에게 달려들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좋은 분위기로 인터뷰를 해나가는 필 맥카프리의 모습도 팀의 에이스다웠다.
“넌 저게 부족해.”
형수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히죽 웃었다.
“저것 봐라. 저 자식 재수 없게 썩소를 지으면서 인터뷰 하는 거. 저런 모습에 여성 팬들이 녹는다잖아. 너도 좀 배워라. 얼굴만 보면 뭐… 평균은 되려나?”
형수의 실없는 농담에 피식 웃고는 짐을 챙겼다.
“저녁은 기대해라. 내가 혜영 누님께 특별히 모레 네 선발 등판을 위해서 최고급 소고기 샤브샤브를 부탁했으니까!”
“내일도 아니고 모레를 위해서? 그냥 솔직하게 시인하지. 네가 먹고 싶어서라고.”
“넌 원래 경기 전날 과하게 먹는 거 좋아하지 않잖아? 그러니까 하루 앞당긴 거라고!”
미워할 수 없는 형수의 모습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형수와 함께 짐을 챙겨서 다저 스타디움을 빠져나오자 언제나처럼 승합차 한 대가 천천히 뒤를 따라붙었다.
“정말 끈질기다. 그냥 에이전시나 구단에 말해서 쫓아버리는 게 어때?”
MSB 방송국 황지연 PD의 끈질긴 모습에 형수도 이제는 질려버렸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형수의 말대로 에이전시나 구단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고 통보를 해버리면 쫓아버릴 수 있었지만, 딱히 나를 방해하는 게 아니라 그러지 않고 있었다.
“연락을 기다려보고.”
“연락?”
형수가 무슨 소리냐는 듯 날 바라보는 사이 핸드폰이 울렸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딱 왔네.”
핸드폰 액정 화면에 뜬 차동호 기자의 이름을 형수에게 보여주고는 곧바로 핸드폰을 받았다.
“예, 차동호 기자님.”
-경기가 끝나고 지금쯤이면 괜찮겠다 싶어서 전화를 했습니다. 통화 가능하신가요?
“예. 괜찮습니다.”
-부탁하신 MSB 방송국 황지연 PD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사내에서도 그렇고 외부에서도 평판이 좋습니다. 우선 시청률보다는 방송의 기획 의도를 중점으로 논란이 생길만한 흥미유발용 편집 같은 일은 일체 하지 않습니다. 성격도 그렇고 여러 가지 면에서도…….
제법 자세하게 알아봐준 차동호 기자의 이야기에 나는 고맙다는 말을 했다.
점심 무렵에 차동호 기자에게 문자를 보냈었다.
MSB 방송국 황지연 PD에 대해서 좀 알아봐 달라고.
“새벽부터 괜히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차지혁 선수의 일이라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그리고 어차피 제가 하는 일이 밤낮이 없으니까 시간적으로도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그보다도 내일 모레 선발 등판 경기 잘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차지혁 선수의 연락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겠습니다. 그럼 파이팅입니다!
차동호 기자와 전화를 끊고 나자 형수가 물었다.
“왜? 방송 출연하려고?”
“아마도.”
“갑자기 왜 심경에 변화라도 생겼어?”
“약간은.”
“설마,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에? 지혁아, 무섭게 왜 그러냐? 내가 아침에는 정말 실수 했다니까. 나도 모르게 그냥 헛소리가 나온 거야. 그러니까 괜히 신경 쓸 필요 없어. 방송 출연 따위 너랑은 어울리지도 않잖아?”
안절부절 못하는 형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당장 바뀌는 건 못하겠고, 서서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부터 차근차근 해보려고. 그리고 너나 차동호 기자님 말처럼 언제까지 내가 방송 출연을 거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해야 한다면 마음에 드는 방송에 출연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더라고.”
말을 해놓고 보니 당장 실천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곧바로 승합차를 향해 걸어갔다.
천천히 뒤를 쫓아오던 승합차가 멈춰섰다.
똑똑똑.
보조석을 향해 가볍게 문을 두드리자 곧바로 창문이 열렸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피곤에 찌든 얼굴을 하고 있는 황지연 PD가 웃으며 말했다.
“차지혁 선수가 먼저 이렇게 온 건 처음이네요? 방송 출연을 하기로 결심했나요?”
“예.”
“역시 그럴 줄… 예에?”
황지연 PD의 깜짝 놀란 얼굴을 보는 것도 꽤 재밌었다.
“촬영 날짜는 이틀 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선발 경기부터 2박 3일. 인터뷰는 하루에 한 번. 훈련과 경기 촬영은 알아서들 하시면 됩니다. 카메라 앞이라고 딱히 어떤 특별한 행동을 하거나 하는 건 없을 겁니다. 혹시라도 촬영 중 어떤 행동이나, 작위적인 설정을 요구한다면 그 즉시 촬영은 중단하겠습니다. 나머지 세부 사항과 촬영 협조에 대한 계약 부분은 에이전시와 구단 측과 직접 해결을 하시면 됩니다.”
내 말을 멍하니 듣고만 있던 황지연 PD는 이윽고 다급하게 종이와 펜을 꺼내들었다.
“다, 다시 한 번만 말해주세요!”
< 『해외편 - 12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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