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22』 >
『해외편 - 122』
형수의 예상하지 못했던 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차지혁 선수와 함께 사시는 분이시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를 하는 그녀의 모습에 형수는 마주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장형수라고 합니다. 지금은 유명하지 않지만 머지않아 요기베라처럼 메이저리그 최고의 포수가 될 겁니다.”
요기베라라니.
내가 피식 웃는 사이 그녀는 그저 희미하게 웃고만 있었다.
딱 봐도 요기베라가 누구인지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다.
형수도 그런 낌새를 눈치 챘는지 히죽 웃고는 그녀가 들어올 수 있도록 옆으로 한 발 크게 물러났다.
“감사합니다.”
현관을 넘어 들어선 그녀는 곧바로 주방으로 향했다.
능숙하게 냉장고에서 각종 식자재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야채가 생각보다 많이 상했네요. 괜찮다면 오늘 중으로 제가 따로 장을 봐둬도 될까요?”
지금까지는 에이전시에서 일정 기간마다 냉장고를 채워놨었다.
날짜가 지나거나 오래된 음식들도 알아서 수거를 해갔었기에 형수와 내가 따로 장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물론입니다! 혼자서 힘드실 테니 아침 먹고 바로 저랑 가실까요?”
형수가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그렇게 제안을 했다.
“바쁘실 텐데 그러실 것 까지는 없습니다. 제가 혼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영수증처리만 잘 해주시면 됩니다.”
“제가 따로 먹고 싶은 것도 있고 하니까 그냥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힘 좋은 짐꾼하고 같이 간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형수의 말에 그녀는 그러면 그렇게 하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있는 것들로 아침을 만들겠습니다.”
“예! 맛있게 부탁드립니다!”
아침부터 저렇게 활기찬 형수의 모습은 처음인 것 같았다.
주방에서 떠날 줄을 모르는 형수를 잡아끌고 훈련장으로 향했다.
런닝은 이미 끝내놨기에 스트레칭과 가벼운 근력 운동을 조금 하고는 집으로 돌아가니 어느새 집안 가득 맛있는 음식 냄새가 폴폴 풍기고 있었다.
“크아~! 죽인다!”
형수가 빠른 걸음으로 주방으로 들어섰고, 그 뒤를 따라 내가 주방에 들어서니 보글보글 끓고 있는 찌개 하나와 몇 가지의 간단한 반찬들이 보기 좋게 차려져 있었다.
“김치찌개!”
형수가 군침을 삼키며 자리를 잡고 앉았고, 그 맞은편에 나 역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어디 가셨지?”
숟가락을 들던 형수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그녀를 찾았다.
계단 밟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빨래거리를 한 아름 안아들고 나타났다.
기본적으로 유니폼의 경우 클럽 하우스 매니저 밑에서 일하고 있는 보조 직원인 클러비(clubby)를 통해서 세탁이 가능했다.
덤으로 형수와 나는 유니폼 외의 빨래거리도 2~3일에 한 번씩 모아놨다가 클러비에게 세탁을 부탁 하고 있었다. 팁만 주면 가능한 일이었기에 미안 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모아두었던 세탁물을 발견해서 가지고 내려온 거였다.
흙먼지와 땀 냄새가 잔뜩 배여 있었음에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양팔로 안아들고 있었다.
“그건 그냥 두세요! 구단으로 가져가면 알아서 세탁을 해주니까 굳이 세탁을 하실 필요가 없어요.”
형수가 재빨리 움직여 빨래를 빼앗았다.
“아니에요. 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 당연히 제가 해야죠. 아침 식사부터 하세요.”
빨래거리를 빼앗으려는 그녀를 피해 형수는 세탁실로 향했고, 곧바로 빈손으로 돌아왔다.
“일찍 나오신다고 아침도 못 드셨죠? 같이 드시죠.”
“아니에요. 저는……!”
“그러지 말고 앉으세요.”
형수는 그녀를 비어 있던 식탁 의자에 앉히고는 직접 수저와 밥까지 담아왔다.
형수의 막무가내 행동에 그녀가 처음으로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형수는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아주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저는 그쪽…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주혜영입니다.”
“예. 혜영 누님. 누님이라고 불러도 괜찮겠죠? 아니,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형수는 쉬지 않고 밀어붙였다.
“저는 혜영 누님께서 다른 것 다 하지 않고 맛있는 밥만 해주셨으면 합니다. 저랑 지혁이가 운동을 하다 보니 먹는 부분에 있어서 꽤 신경을 써야 하는데, 보시다시피 요리랑은 담을 쌓고 사는 사내놈들이다보니까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서 보내주신 음식들이나, 아주 간단한 음식만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혜영 누님께서 만들어 주신 음식을 먹고 나니 진짜 음식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습니다.”
음식 투정이라고는 한 적이 없던 형수였는데 꽤 그리웠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오셨을 때에도 형수는 구단에서 제공하는 음식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집까지 왔다갔다 거리며 밥을 먹었었다.
메이저리거들에게 제공되는 음식은 무척이나 화려하고 맛도 좋았다.
많은 나라의 음식이 종류별로 뷔페식으로 제공되기에 개인의 취향대로 먹고 싶은 것만 골라서 먹을 수 있어 나는 단 한 번도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
‘말만 들으면 엄청 못 먹고 산 줄 알겠네.’
기본으로 세 접시 이상 먹었던 형수다.
항상 먹고 나면 만족스럽게 웃으며 포만감을 느긋하게 즐기던 모습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런데 이제와 그것들이 모두 거짓이라는 듯 말을 하고 있으니 내 입장에서는 황당하기만 했다.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저희가 집에 있을 때에만 밥을 챙겨주시면 됩니다. 보수는 최대한 많이 챙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얼마를 받기로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무조건 그것보다 더 많이 드리겠습니다.”
형수의 말에 주혜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음식만 하고 갈 수는 없습니다. 집안 살림도 같이 하겠습니다. 대신… 정말로 괜찮으시다면 보수는 조금 더 받도록 하겠습니다.”
살짝 얼굴을 붉히는 주혜영의 모습에 형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큰 소리로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아예 지혁이 에이전시에서 받는 돈은 그대로 받으시고 제가 따로 또 보너스 형식으로 돈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형수의 말에 주혜영이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고맙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만족스러워 하는 형수와 다르게 나는 딱히 만족스럽지가 못했다.
주혜영의 음식솜씨가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저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었다.
에이전시에서 어련히 잘 알아봤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판단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럼 아침 먹고 다시 계약서를 작성하시죠. 그럼 잘 먹겠습니다!”
형수는 김치찌개를 크게 한 숟가락 떠서 먹고는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정말 맛있습니다! 최고에요! 지혁아, 너도 먹어봐. 진짜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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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호호 웃으며 집으로 들어오는 형수와 주혜영의 모습을 보니 급속도로 친해진 듯 한 느낌이 들었다.
“고마워요.”
“에이~ 누님, 편하게 말하라니까요. 그냥 동생들이다 생각하고 편안하게 대하세요. 안 그렇냐, 지혁아?”
형수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녀석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내 모습에 주혜영이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피고는 형수의 손에 들려 있는 식자재를 넘겨받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누님! 점심은 아까 제가 말한 대로 잘 부탁드려요!”
싱글벙글 웃고 있는 형수에게 말했다.
“형수야, 여기서는 좀 그렇고 훈련장으로 가서 얘기 좀 하자.”
“왜? 무슨 얘기?”
대꾸 없이 집을 나와 훈련장으로 들어서니 형수도 곧 들어왔다.
“뭔데?”
“너무 과한 것 아냐? 어떤 사람인 줄 알고 그렇게까지 대하는 거야? 그리고 엄연히 우리가 고용한 사람이잖아. 적당하게 선을 그어놓고 사람을 대해줘야 하지 않겠어?”
“뭘 그런 걸로 그렇게 팍팍하게 구냐? 딱 보면 모르겠어? 혜영 누님 같은 사람은 딱 봐도 착한 사람이라는 게 뻔히 보이잖아? 그리고 아무리 돈 받으면서 밥하고 집안 살림하는 가정부라고 하더라도 굳이 뻣뻣하게 대할 필요는 없잖아?”
“뻣뻣하게 대하자는 게 아니라 내 말은…….”
“너 임마, 그렇게 딱딱하게 사니까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거야.”
“뭐?”
형수의 말에 내 표정이 경직되듯 굳어버렸다.
내 표정을 보고 알면서도 형수는 이참에 하고 싶었던 말을 해야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솔직히 혜영 누님처럼 젊은 여자가 왜 남의 집 가정부를 하면서 살겠어? 그런 것도 좀 생각하면서 편안하게 대해줘. 사람은 혼자 사는 거 아니다. 고등학교 때도 그렇지만 넌 네가 할 일만 다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사람치고 주변에 사람 많은 사람 없더라.”
형수의 갑작스런 말에 말문이 막혔다.
반박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를 가장 잘 이해주는 친구가 이런 말을 하니 가슴이 답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넌 항상 최고였지? 어려움도 없었고, 항상 남들이 추켜 세워줬지? 물론, 네가 그만큼 열심히 노력했다는 건 잘 알아.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네가 있다는 것도 충분히 인정하고. 그런데, 세상에는 뭘 해도 안 되는 사람도 있어. 노력하면 다 된다? 그것처럼 희망고문도 없더라. 너는 항상 노력하지 않았기에 결과가 그 모양이라고 말하는데, 내가 손바닥이 다 찢어지도록 타격 연습을 하는데도 안타 하나 못 치는 날은 어떨 거 같아?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노력만으로도 안 되는 사람도 있는 거야. 세상에 부자들이 다 노력해서 부자인 것 같아? 절대. 그들 중 일부만이 정당하게 노력해서 대가를 얻은 것뿐이야. 나머지는 다 사기꾼에 강도 새끼들이야. 네 기준대로라면 성공한 사람만 노력한 사람이라는 거야? 틀렸어. 성공하지 못했어도 자신의 모든 걸 걸고 노력한 사람도 있어. 젠장! 말 하다보니까 괜히 하소연이나 하고 있네. 내가 하고 싶은 건 이거야. 너무 네 기준대로만 사람을 평가하지 말고 그 사람을 그대로 봐줬으면 좋겠다. 미안하다, 이런 개소리나 지껄여서.”
형수가 훈련장을 나가고 홀로 남아 멍하니 서 있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혼란스러웠다.
나는 그저 형수가 너무 주혜영에게 과도한 친절을 베푼다고 여겼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나쁜 결과를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 같아 충고만 해주고 싶었다.
주혜영은 돈이 필요해서 가정부로 왔고, 우리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그녀를 고용한 것뿐이다.
고용주와 피고용주의 관계를 확실하게 해둬야 나중에 뒷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여겼다.
인정에 한 번 끌려 다니기 시작하면 결국 남는 건 파국이다.
주혜영과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가장 좋은 길은 확실하게 선을 긋고 대하는 거라고 여겼을 뿐이다.
그것만 말해주고 싶었다.
너무 친절을 베풀지 말라고, 선의에서 시작된 친절이 상대에게는 당연한 권리가 될지도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하기도 전에 형수가 먼저 내게 말을 쏟아냈다.
“서운했던 건가.”
각종 기록을 갈아치우며 승승장구하는 내 곁에서 형수가 어떤 마음이 들까?
자격지심은 아니다.
형수는 그런 마음을 품을 놈이 아니다.
그랬다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분명 달랐거나, 이상한 낌새를 내가 느꼈을 거다.
무심했던 거다.
형수에 대해서 너무 무심했던 내 태도가 녀석의 마음에 서운함을 품게 한 거다.
각종 기록을 세우고도 담담했던 내 모습을 형수는 항상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며 혀를 찼었다.
당연한 결과라고, 노력하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입버릇처럼 했던 내 말들이 형수에게 가시처럼 박혔던 거다.
반대로 넌 노력하지 않았기에 그 모양이라고 말하고 있었던 셈이다.
“후우…….”
성격 좋은 놈이 그동안 꽤 가슴속에 담아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딴엔 꾹 티내지 않으며 잘 지내고 있었는데, 별 것도 아닌 가정부 일마저도 내가 걸고 넘어가니 참았던 감정들이 폭발한 거다.
“차라리 잘 됐네.”
이제라도 알았으니 됐다.
모르고 계속 쌓아뒀으면 형수마저 날 멀리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아찔한 마음도 들었다.
‘오빠는 감정이 없어? 왜 기계처럼 그렇게 살아? 사람이면 사람답게 실수도 하고, 흐트러진 모습도 좀 보이고 그래야지. 으유~ 정말 정 떨어진다!’
한국에서 지아가 했던 말이 새삼스럽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 『해외편 - 12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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