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18』 >
『해외편 - 118』
“푸하하하하하! 지혁아! 이것 좀 봐!”
형수가 테블릿pc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시선을 돌려서 바라보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사토시 슌의 사진과 마운드 위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내 사진이 실린 기사였다.
기사 내용은 상당히 자극적이었다.
시범 경기를 통해 천척으로 등극했던 사토시 슌이 정식 경기에서는 4타수 무안타, 3삼진이라는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들며 첫 번째 대결에서 참패를 했다는 내용이 주요 골자였는데, 기사 내용의 단어 선택들이 굉장히 노골적이었다.
사토시 슌 본인이나, 그의 팬들이 본다면 무척이나 기분이 나쁠 정도였다.
“일본이 낳은 역대 최고의 천재 타자 사토시 슌! 한국이 낳은 역대 최고의 투수 차지혁에게 참패! 크아~ 제목부터 마음에 쏙 든다! 안 그렇냐? 시범 경기 때 그렇게 가루가 되도록 빻고,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까지도 천적이니 어쩌니 하면서 사토시 슌의 압승을 확신하던 일본 언론도 지금은 궁색한 변명이나 늘어놓으면서 복수가 어쩌고, 저쩌고 지껄이는데 웃기지도 않더라. 보여 줄까?”
형수는 꽤나 신났다는 듯 테블릿pc로 다른 기사들 특히 일본 언론쪽 기사들을 찾아서 곧바로 번역 기능으로 언어를 변환시켜 보여줬다.
“됐어.”
“왜? 봐봐. 재밌는데?”
“너 지금 사토시 슌 기사 찾아볼 때가 아니잖아?”
사토시 슌이 나를 상대로 완전히 망신을 당했다 하더라도 그는 아직까지도 4할 타자고, 5할의 출루율을 자랑하는 콜로라도 로키스의 1번 타자다.
반대로 형수는 고작 3경기 밖에 출전을 하지 못한 백업 포수다.
그것도 상위 선발 투수가 아닌 하위 선발 투수의 공을 잡아주고 있었다.
타율과 장타력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냉정하게 따져서 올 시즌은 물론이고 길게 본다면 3시즌까지도 토렌스의 자리를 넘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사토시 슌의 기사나 찾아보면서 웃고 있을 때가 아니란 소리다.
“알았다, 알았어.”
테블릿pc를 한쪽에 던져놓으며 형수가 몸을 일으켰다.
선발 등판 다음 날에는 게레로 감독의 배려로 인해 무조건적인 휴식을 명령 받았다.
원정경기라면 모를까, 홈 경기에서는 다저 스타디움에 올 필요도 없다는 말을 들었다.
나로서는 고마운 배려다.
그렇다고 나만을 위한 특별한 배려도 아니다.
실제로 일부 선발 투수들 또한 나처럼 완전한 휴식을 보장 받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휴식을 보장 받았다고 무조건 쉬고 있을 순 없다.
최소한의 운동으로 몸 상태를 꾸준히 이어나갈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선발 등판한 다음 날에는 런닝과 스트레칭에 특히 신경을 썼다.
처음 미국 생활을 시작했을 때만 하더라도 야외 런닝을 꾸준히 했었다.
하지만, 데뷔전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고 나서는 어쩔 수 없이 개인 훈련장에 지하에 마련되어 있는 런닝 머신을 이용해야만 했다.
기계 위에서 뛰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밖을 나가면 제대로 된 런닝을 하기가 쉽지 않았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훈련은 누가 뭐라 하더라도 체력 훈련이다.
기술적인 훈련 즉, 투구를 반복하는 건 한계가 있고 무리할 경우 부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컸기에 투수에게 있어 훈련의 70% 이상은 체력 훈련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형수와 함께 지루할 정도로 꼼꼼하게 스트레칭을 끝냈다.
처음에는 온 몸이 비명을 질러댄다면서 온갖 인상을 찌푸리던 형수도 이제는 완벽하게 적응을 끝냈는지 오히려 스트레칭을 해야 온 몸이 풀린다며 개운해했다.
“그럼 쉬어라. 난 연습하러 간다.”
스트레칭을 마친 형수가 커다란 백팩을 등에 메고 다저 스타디움으로 향했다.
내가 투구를 할 수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못한 날에는 어쩔 수 없이 형수는 다저 스타디움의 선수 훈련장으로 향해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스윙 연습이 아닌 제대로 된 타격 연습을 하기 위해서도 코치나 훈련 보조 요원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기에 집에 딸려 있는 개인 훈련장보다는 구단 훈련장이 훨씬 편했고, 능률도 높았다.
런닝 머신 위에 올라가 뛰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에 2시간의 런닝은 반드시 지키고 있었다.
런닝 머신을 이용하기로 마음을 먹은 이후 벽면에 TV도 설치를 해놨다.
그냥 뛰는 것보다는 TV를 보는 편이 훨씬 좋다는 형수의 말 때문이었다.
실제로 TV를 설치해놓고 나니 내 투구 영상을 보거나, 다른 투수나 타자들의 영상 자료를 볼 수 있어 꽤나 유용하게 써먹고 있었다.
미리 준비해 둔 영상 자료가 TV에서 재생됐다.
20대 후반의 투수가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고 있었다.
푸른 눈을 가진 미국인으로 어디서나 쉽게 흔히 볼 수 있는 외모의 투수였지만, 그가 던지는 공은 결코 흔하지 않았다.
데이비드 블록.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선발 투수로 현역 메이저리그 투수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투심 패스트볼을 던지는 투수다.
평균 93마일의 데이비드 블록의 투심 패스트볼은 무브먼트가 무척이나 현란했다.
오죽했으면 타자들 사이에서는 마구라 불릴 정도였다.
체인지업과 동시에 투심 패스트볼을 익혔던 나는 현재 투심 패스트볼의 컨트롤이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빠르면 보름, 늦어도 2달 안으로는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을 정도로까지 내가 원하는 수준에 이른 상태였다.
현재 내가 던지는 구종들 중 우타자 바깥쪽, 좌타자 몸 쪽으로 휘어지는 공이 없다.
컷 패스트볼은 우타자 몸 쪽, 좌타자 바깥쪽으로 휘어졌고, 서클 체인지업도 다른 투수들과는 다르게 아주 약간이지만 우측으로 살짝 휘어지며 떨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투심 패스트볼은 반드시 필요한 구종이었다.
더욱이 패스트볼 계열이었기에 포심 패스트볼, 컷 패스트볼과 함께 아주 환상적인 짝꿍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진짜 마구라고 할 만하네.”
타자 앞에서 엄청나게 휘어지며 헛스윙을 만들어 버리는 데이비드 블록의 투심 패스트볼에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방금 영상 자료 속에서 데이비드 블록이 던진 투심 패스트볼의 무브먼트와 내가 던지는 투심 패스트볼을 비교해보니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현역 최고라 불리는 데이비드 블록의 투심 패스트볼은 내가 보기엔 역대 최고 중 하나라 불러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무브먼트는 데이비드 블록을 따라갈 수 없어도 구속에서는 내가 위다.
대신 제구력은 비슷비슷했다.
주무기인만큼 데이비드 블록은 투심 패스트볼의 컨트롤만큼은 확실하게 잡아 놓고 있었다.
솔직히 투심 패스트볼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것 없는 투수가 데이비드 블록이기도 했다.
쉬지 않고 런닝 머신에서 뛰면서 데이비드 블록부터 시작해서 몇 명의 선수들의 영상 자료를 지켜보니 2시간이 지나버렸다.
체력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지만, 굳이 더 뛸 필요가 없었기에 런닝 머신을 종료시키며 TV도 껐다.
헬스 기구들을 이용해서 어깨 근육 운동을 시작으로 간단하게 운동을 마치고 난 후에 한 켠에 마련되어 있는 샤워실에서 깨끗하게 몸을 씻고 수영장으로 들어갔다.
런닝과 마찬가지로 수영 역시 무척이나 도움이 되는 운동이었기에 개인 훈련장에 수영장이 있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적당히 수영을 하고 밖으로 나오자 어느덧 점심 시간이었다.
“뭘 먹나…….”
미국에서 내가 가장 고민하는 부분이 바로 식사다.
한국이었다면 어머니가 알아서 몸에도 좋고, 영양도 신경을 쓴 집 밥을 거하게 차려주셨겠지만, 미국에서는 그런 호화스러움을 누릴 수가 없었다.
그나마 영양에 신경을 쓴다고 각종 몸에 좋다는 음식으로 냉장고를 꽉꽉 채워놓고 있었지만, 문제는 조리를 할 시간이나 그럴 실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가정부를 고용해야 하나?”
미국 생활을 시작하면서 황병익 대표가 몇 번이나 권했던 일이다.
남자 둘이서 얼마나 밥을 잘 해먹겠냐며 가정부를 고용해서 식사와 집안 살림을 담당하게 하라는 제의가 있었지만, 해보지도 않고 남의 손을 빌리는 건 아니란 생각에 지금까지 버텼다.
요즘 들어 그 생각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잘 할 자신 있다고 큰소리를 쳤던 형수도 요즘은 개인 훈련으로 시간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힘들었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냉장고 문을 열어 뭘 먹어야 하나 고민하다 이윽고 냉동시켜 놓은 사골국을 해동시키기로 했다.
한국에서 어머니가 직접 정성스럽게 끓인 사골국이었지만, 냉동을 시켜놨다 먹으니 확실히 맛이 덜했다.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싱크대에 쌓여 있는 설거지거리를 쳐다보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안되겠다.”
운동 선수는 일찍 결혼해서 아내의 내조를 받는 게 최고라고 한다.
그렇다고 21살, 미국 나이로는 19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결혼을 하기도 그렇고, 그럴 여자도 없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외부인의 도움을 받는 것뿐이다.
핸드폰을 들고 익숙한 전화번호에 통화 버튼을 누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 차지혁 선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저번에 말씀하셨던 가정부 좀 구해주세요.”
내 말에 황병익 대표가 크게 웃었다.
결국은 그렇게 될 줄 알았다는 황병익 대표는 당장 사람을 알아보겠다고 했다.
손목과 손가락 강화 운동을 하던 중 황병익 대표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예.”
-2시간 내로 도착한다고 합니다. 특별히 음식 솜씨 좋은 가정부로 고용했습니다. 혹시라도 음식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바로 교체하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빠른 일처리에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마저 운동을 하고 잠시 소파에 앉아 쉬는 동안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십니까?”
“가정부 고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
현관문을 열자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평범한 인상의 한국 여자가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한국인을 고용했을 거라고 예상했기에 놀랍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젊은 나이가 살짝 거부감이 들었다.
“차지혁 선수?”
그녀가 먼저 날 알아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우선 들어오세요.”
“네.”
집으로 들어와 소파에 앉아서 기본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솔직히 너무 젊은 분이 오셔서 놀랐습니다. 저는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분으로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셨군요.”
실망한 빛이 역력한 그녀의 모습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수고스럽게 오셨는데 그냥 돌아가시라고 하는 것도 좀 그렇고… 우선은 음식 솜씨를 보고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 이 집에 저랑 제 친구 둘이 사는데, 먹는 문제 때문에 항상 고민이라서 가정부를 고용하게 된 겁니다. 그러니 음식이 입맛에 맞질 않으면 죄송하지만 다음부터는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괜찮으시죠?”
“네. 괜찮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저녁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우선 청소부터 좀 하겠습니다.”
“예? 청소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더럽지도 않고 하니까…….”
“처음부터 집안일 전체를 맡아서 관리하기로 하고 온 거니까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집 곳곳에 먼지가 잔뜩 있는 게 눈에 보이니까 청소 좀 해야겠습니다. 청소 도구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주의해야 할 점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내 눈에는 그렇게 더럽게 느껴지지 않았던 집이었지만,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곳곳에서 쓰레기와 먼지들이 속출했다.
남자 둘이 사는 집 치고 이 정도는 충분히 깨끗하다고 자부를 했던 내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체구에 평범한 얼굴의 그녀는 능숙하게 청소를 끝내놓고는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먹고 싶은 음식이 있냐고 물어보면서 마치 거의 모든 음식을 다 할 줄 안다는 듯 한 자신 있는 태도가 은근히 기대를 갖게 만들었다.
마땅히 집 안에 있어봐야 도움이 될 일도 없고, 가만히 지켜보자니 그것도 영 이상한 것 같아서 개인 훈련장으로 향했다.
쉐도우 피칭을 하면서 간단하게 땀을 흘리고 집으로 돌아가다 훈련장 지하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낯선 여자가 있는 집에서 샤워를 하기가 그랬다.
샤워를 하고 집으로 들어가니 어느새 식탁에는 푸짐하게 저녁이 차려져 있었다.
‘냄새가… 좋네.’
그리웠던 냄새가 났다.
어머니의 음식 냄새가 느껴졌다.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만들었습니다.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이 꽤나 초조해 보였다.
아무리 음식을 잘 만든다 하더라도 사람 입맛이라는 게 지극히 주관적인 부분이라 먹는 사람이 맛없다고 하면 만든 사람 입장에서는 할 말이 없었다.
식탁에 앉아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된장찌개부터 맛을 봤다.
맛있다.
더 이상의 말과 생각은 필요하지 않았다.
“맛있습니다. 솜씨가 무척 좋으시네요.”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환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기분 좋게 웃었다.
오랜만에 맛있는 집 밥을 먹고 나니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더불어 피로도 싹 풀리는 것 같았다.
설거지까지 깨끗하게 해놓고 그녀가 시계를 바라보더니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이제 할 일도 다 했으니까 가볼까 합니다.”
“아, 예.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8일 날 다시 오시면 됩니다.”
“내일이 아니고요?”
“원정 경기가 있어서 굳이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아… 네.”
뭔가 아쉬운 듯 한 그녀의 모습이 의문을 만들어냈다.
그러다 문득 돈 문제가 아닐까 싶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돈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예? 아, 아니 뭐… 그럼 8일 날 다시 오겠습니다. 편히 쉬세요.”
재빨리 등을 돌려 현관 밖으로 뛰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을 닫았다.
< 『해외편 - 118』 > 끝
ⓒ 독고진
작가의 말
미리 선포합니다.
저 아줌마는 그냥 아줌마입니다.
누님으로 할지, 이모로 할지는 고민 중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