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116화 (116/221)

< 『해외편 - 116』 >

『해외편 - 116』

-차지혁 선수 6회 초 콜로라도 로키스의 공격을 다시 한 번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데뷔 후 28이닝 연속 무실점 행진을 이어나갑니다. 메이저리그 공식 기록으로는 2008년 브래드 지글러가 데뷔 후 39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을 세웠고, 1988년 오렐 허샤이저는 무려 59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으로 단일시즌 최고 기록자로 남아 있습니다. 차지혁 선수의 28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도 대단합니다만, 브래드 지글러 선수의 기록을 깨려면 아직까지 12이닝이 남아 있으니 오늘 경기를 포함해서 다음 경기까지 완봉승을 거둬야만 새로운 기록자가 됩니다. 하지만 굳이 완봉이라는 어려운 과정을 거칠 필요는 없습니다. 적절한 시점에서 불펜에 마운드를 넘겨주면 3경기 이내에 충분히 새로운 신기록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한국 무대를 완벽하게 지배하고 메이저리그에 도전장을 내민 차지혁 선수가 데뷔전부터 시작해서 정말 대단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어요. 차지혁 선수가 LA 다저스와 2억 5천만 달러라는 초대형 계약을 체결할 때만 하더라도 몇몇 구단에서는 너무 과하다라는 말이 있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LA 다저스가 오히려 싼 값에 계약을 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하더군요.

-맞는 말씀입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현재 메이저리거들 중 가장 인기 있는 선수를 꼽으라면 차지혁 선수가 첫 번째로 꼽히질 않습니까? 메이저리거도 결국은 하나의 상품이라고 봤을 때, LA 다저스는 현재 차지혁 선수로 인해 상당한 수익을 얻고 있으니 확실히 2억 5천만 달러라는 거금도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초대형 계약으로 이미 많은 메이저리그 팬들에게 알려져 있는데다가 데뷔전 퍼펙트 게임과 2경기 연속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면서 미국 현지에서는 슈퍼 스타라 불려도 거짓말이 아니라고 합니다. 참 대단한 선수에요.

-오늘 경기에서 1회 초에 존 킹슬리 선수에게 안타를 맞지만 않았어도 연속 퍼펙트 이닝 기록이 계속해서 이어졌을 텐데 그 부분이 참 아쉽습니다.

-솔직히 22이닝 퍼펙트 기록자체만 놓고 봐도 믿겨지지 않죠.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어도 아마 차지혁 선수 본인도 연속 퍼펙트 기록에 상당한 부담감을 느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짧은 단타를 맞은 것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여깁니다. 종종 저런 경우에는 장타를 맞거나, 홈런을 맞으면서 완전히 무너질 수도 있거든요. 그런 측면으로 봤을 때, 짧은 단타로 실점을 하지 않은 부분이야 말로 오늘 경기에서 가장 큰 행운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오늘 경기에서 차지혁 선수는 2개의 피안타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상대 타자가 모두 존 킹슬리 선수 아닙니까?

-존 킹슬리 선수 참 무서운 타자죠. 통산 타율이 3할2푼4리로 콜로라도 로키스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타자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죠. 1회와는 다르게 두 번째 대결에서는 빚 맞은 안타가 나왔으니 행운마저도 차지혁 선수보다는 존 킹슬리 선수에게 더 많은 것 같군요. 존 킹슬리 선수와의 대결도 흥미롭지만, 진짜 오늘 경기의 관전 포인트는 다른 곳에 있죠.

-사토시 슌 선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오늘 경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토시 슌 선수는 31타수 14안타로 무려 4할5푼2리의 고타율과 5할5푼3리의 높은 출루율을 자랑했지만, 오늘 경기에서 차지혁 선수를 상대로 단 한 차례도 출루를 하지 못하면서 타율과 출루율 모두 큰 폭으로 하락했죠. 만약 차지혁 선수와 한 번이라도 더 대결이 성사되고 역시 출루를 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때는 타율과 출루율 모두 5푼이 넘게 깎이니 사토시 슌 선수로서는 크게 실망스러운 경기가 될 수밖에 없을 테죠.

-정확하게는 현재 사토시 슌 선수의 타율과 출루율은 4할1푼2리, 5할1푼2리입니다. 여기서 박승태 해설위원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다음 타석에서도 출루를 하지 못하게 된다면 타율과 출루율 모두 4할, 5할을 정확하게 턱걸이 하게 됩니다. 단 한 경기 만에 무려 5푼의 타율과 출루율이 깎이는 셈이니 시즌 초반 아무리 높은 타율과 출루율을 기록해도 결국 시즌 막바지에는 3할의 타자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이 야구가 아닌가 싶습니다.

-당연하죠. 그렇기 때문에 매년 3할을 칠 수 있는 타자가 많은 연봉을 받으며 스타 대접을 받는 거죠. 반대로 차지혁 선수 역시 현재 2경기 연속 퍼펙트를 기록하며 무실점으로 0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 있지만, 당장 다음 이닝에라도 1실점을 하게 된다면 0.32로 치솟게 되죠. 타자든 투수든 아차하는 순간 타율과 평균자책점이 높아져버리니 4할의 타자와 0점 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투수가 거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거죠.

-LA 다저스의 공격이 끝났습니다. 오늘 콜로라도 로키스의 선발 투수인 아론 에저트 선수는 6회 말을 끝으로 4실점을 하고 결국 오늘 경기를 마감할 것 같습니다. 잠시 후에 LA 다저스의 7회 초 수비로 찾아뵙겠습니다.

@

어느덧 7회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선두 타자는 오늘 유일하게 나에게 안타를 뽑아내고 있는 존 킹슬리다.

1회에는 체인지업을 때려서 안타를 만들어냈고, 4회에는 컷 패스트볼이 정확하게 컨트롤되지 않으면서 3루수 키를 살짝 넘기는 빗맞은 안타로 출루했다.

존 킹슬리는 184cm의 키에 약간은 통통한 체형을 가졌다.

체형과는 다르게 굉장히 유연했으며, 파워도 상당했다.

처음 존 킹슬리가 메이저리그에 등장했을 때만 하더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잘 성장한다 하더라도 파블로 산도발 급을 넘지는 못할 거라고 예상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존 킹슬리는 파블로 산도발을 뛰어넘는 파워에 타격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쉬운 부분이라면 수비였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리그 평균 수준은 되었기에 콜로라도 로키스에서는 프랜차이즈 스타로 성장시켜줬고, 그 보답을 확실하게 해주고 있는 중이다.

타석에 선 존 킹슬리의 표정엔 자신감이 넘쳤다.

그럴만했다.

메이저리그 정식 경기에서 유일하게 나에게 안타를 뽑아내고 있는 타자가 존 킹슬리였으니까.

타자와 투수 간에는 천적이 존재한다.

흔한 말로 투수는 천적인 타자를 상대로 어떤 공을 던져도 안타를 맞고, 타자는 유독 한 투수의 공만큼은 제대로 치지 못하는 경우를 소위 천적 관계라고 부른다.

만약, 이번에도 존 킹슬리에게 안타를 맞는다면?

‘확실한 천적 관계가 되겠지.’

무엇보다 존 킹슬리는 내가 던지는 공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도 갖지 않게 된다.

그건 곧 내가 무슨 공을 던지든 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다는 소리다.

반대로 나는 주저하겠지.

어떤 공을 던져도 던지는 족족 쳐내는 존 킹슬리에 대한 껄끄러움과 동시에 두려움을 무의식적으로 갖게 될지도 모른다.

야구를 괜히 멘탈 스포츠라 부르는 게 아니다.

‘확실하게 끊자.’

콜로라도 로키스는 LA 다저스와 같은 내셔널리그 서부 지구에 속한 구단이다.

매년 19경기를 치러야 하는 상대팀이고, 항상 경쟁 관계에 놓인다.

그런 콜로라도 로키스에 천적을 둔다?

굉장히 위험한 일이고,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다.

토렌스가 초구로 바깥쪽 포심 패스트볼을 요구했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듯 싶다.

나를 상대로 행운의 안타가 포함됐다 하더라도 어쨌든 2타수 2안타를 만들어 낸 타자니 토렌스 입장에서는 정면승부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을 거다.

초구부터 도망가는 피칭을 한다는 건 내가 존 킹슬리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그건 존 킹슬리의 자신감을 더욱 상승시켜주는 꼴이다.

곧바로 토렌스에게 다시 사인을 줬다.

내 사인을 받은 토렌스가 존 킹슬리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와인드업을 하고 초구를 던졌다.

한 가운데로 날아가는 빠른 공에 존 킹슬리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벼락같이 배트를 휘둘렀다.

부웅!

퍼엉!

배트를 아슬아슬하게 비켜 지나가는 컷 패스트볼에 존 킹슬리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자그마치 97마일에 이르는 컷 패스트볼이다.

구속 자체만으로도 타자들에게는 핵무기급의 위력을 지녔으니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 포심 패스트볼과 구분까지 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

결국은 포심 패스트볼이냐, 컷 패스트볼이냐 둘 중 하나의 확률을 놓고 도박을 거는 수밖에 없다.

이따금씩 한 가운데 포심 패스트볼을 집어넣었던 내 투구 패턴에 존 킹슬리가 완벽하게 속았다.

두 번째 공은 포심 패스트볼로 간다.

97마일의 빠른 컷 패스트볼을 봤으니, 존 킹슬리의 머릿속에는 97마일 이상의 포심 패스트볼 혹은 느리다 하더라도 95마일 이상의 포심 패스트볼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또 한 번 존 킹슬리의 허를 찌른다.

쇄애액.

다시 한 번 한 가운데로 날아가는 공, 앞서 던졌던 97마일의 컷 패스트볼과 비교하면 너무 느린 공이다.

존 킹슬리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힘차게 배트를 아래에서 위로 퍼올리는 스윙을 가져갔다.

부웅!

퍼엉!

크게 헛스윙을 하면서 한쪽 무릎을 땅에 닿을 정도로 자세까지 무너진 존 킹슬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한 눈으로 토렌스의 미트를 바라보다 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88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이다.

당연히 80마일 후반의 공이라면 파워 커브나 체인지업을 예상했을 존 킹슬리로서는 지금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겠지.

남들에게는 강심장의 도박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타자의 머릿속을 꿰고 던진 공이다.

토렌스로 인해 얻은 또 다른 피칭 스타일이고, 두 번째 퍼펙트 게임 이후 포심 패스트볼의 구속을 최소한으로 늦추는 연습까지 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나타난 거다.

물론, 지금은 굉장히 위험한 공이기도 했다.

만약, 파워 커브나 체인지업을 예상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스윙을 했다면 홈런까지도 생각해야 했을 정도로 한 가운데의 공이었으니까.

어쨌든 두 번째 승부의 승자도 내가 됐다.

타임을 요청하고 타석에서 물러난 존 킹슬리는 장갑을 벗었다 끼며 나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허를 찔려버렸으니 존 킹슬리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을 리가 없을 거다.

타석에 다시 들어선 존 킹슬리의 표정이 자못 비장했다.

여전히 자신감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존 킹슬리는 두 번의 속임수를 확실하게 복수하겠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4구는 없다.

3구에서 끝을 본다.

그리고 그 마지막 결정구는 다시 한 번 포심 패스트볼.

쇄애애애액.

부- 웅!

퍼- 어엉!

“타자 아웃!”

배트보다 먼저 포수 미트에 파고 들어간 공, 그리고 탄성과 환호성이 터지는 관중석.

전광판을 바라보니 101마일이 찍혀 있었다.

7회에 101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을 던진다는 게 쉽지는 않지만, 존 킹슬리를 상대로 3구 삼진을 잡아냈으니 소모된 체력만큼 충분히 그 보상을 받은 셈이다.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돌아서는 존 킹슬리를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아직 멀었어. 다음에 또 날 만나면 그때도 삼진을 줄 테니까.”

존 킹슬리를 삼진으로 잡고 이어진 앤드류 멘델슨과 크리스토퍼 마틴까지 삼진과 유격수 뜬공으로 잡아내며 깔끔하게 삼자범퇴로 이닝을 마쳤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 바로 투수력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리그 정상급의 투수라 하더라도 콜로라도 로키스의 홈 구장인 쿠어스 필드의 마운드에 서는 걸 주저하기 때문이다.

투수의 무덤이라 불리는 쿠어스 필드를 홈 구장으로 택할 투수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많은 돈을 준다고 하더라도 투수 입장에서 성적 하락이 예상되는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계약은 피하고 싶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타자들은 쿠어스 필드를 사랑한다.

평범한 외야 뜬공이 심심찮게 홈런으로 바뀌기도 하니 이보다 더 반가운 구장은 없다.

그렇다보니 콜로라도 로키스는 투수들은 기피하는 구단이 되었고, 타자들은 선호하는 구단이 됐다.

딱!

타구가 쭉쭉 뻗어나가더니 기어이 담장을 넘겨버렸다.

묵묵하게 베이스를 도는 코리 시거의 모습에 홈팬들은 박수와 함께 환호성을 내질렀다.

LA 다저스의 가장 큰 약점이 바로 중심 타선의 노쇠화다.

3번 타자 코리 시거와 5번 타자 미치 네이의 나이가 34살이고, 4번 타자 마이크 트라웃은 무려 37살이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3, 4, 5번이 29, 31, 28살인 것과 비교하면 한참이나 평균 연령이 높았다.

아직까지는 큰 문제가 없다지만 과연 시즌 후반에도 문제가 없을까?

162경기를 치러야 하는 장기 페넌트 레이스에 체력은 필수다.

LA 다저스 중심 타자들의 나이는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뇌관과 같았다.

“빨리 성장해야 할 텐데.”

더그아웃 한 쪽에 앉아서 경기를 관람하고 있는 형수의 모습에 나는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2점을 더 보태며 승리의 향방은 90% 가까이 정해졌다.

8회 초에도 마운드에 올랐고, 존 킹슬리를 상대할 때처럼 투구 스타일에 변화를 주며 야수들의 도움으로 무난하게 3명의 타자만을 상대로 이닝을 마쳤다.

8회 말에는 타석에도 섰지만, 3루수 땅볼로 아웃이 되었고 오늘 경기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서 9회 초 마운드에 올랐다.

선두 타자는 투수를 대신해서 대타가 나왔지만 4구만에 중견수 뜬공으로 아웃을 시켰다.

날이 바짝 선 한 자루의 칼처럼, 독이 잔뜩 오른 독사처럼 나를 향해 강렬한 적의를 드러내며 사토시 슌이 타석에 들어섰다.

3타수 무안타, 2삼진.

사토시 슌에게는 치욕스러운 결과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천적이 무엇인지 오늘 확실하게 보여줄 작정이니까.

< 『해외편 - 116』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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