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115화 (115/221)

< 『해외편 - 115』 >

『해외편 - 115』

쉬질 않고 이어지던 카메라 셔터음이 끊어지고, 카메라를 들고 있던 남자가 곁에 서 있던 스탭을 슬쩍 바라봤다.

“30분 쉬겠습니다.”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잡고 있던 모델을 향해 4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몰려갔다.

분주하게 장비를 점검하거나, 가동을 중지시키는 스탭들까지 사진 촬영은 중지됐지만 이때만 기다렸다는 듯 정신없이 움직이는 사람들로 인해 휴식 시간은 조용하지 않았다.

카메라를 들고 있던 남자는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자신이 찍은 사진들을 컴퓨터로 확인했다.

어떤 사진이 나와도 남자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감정 변화를 찾을 수 없는 얼굴로 묵묵히 모니터를 바라보던 남자는 이윽고 마지막 사진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편안하게 몸을 의자에 묻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해먼! 오늘 레코드 브레이커 선발 등판 아니야?”

“맞아. 오늘 3번째 선발 등판 경기일이야.”

“오늘은 어떨까? 설마 오늘까지도 퍼펙트 게임을 기록하는 건 아니겠지?”

“하하하.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만약, 그런 기록이 또 다시 만들어진다면 메이저리그의 수준을 의심해야겠지. 장담하건데 오늘은 절대 그런 일 없을 거야.”

“그렇겠지? 3경기 연속 퍼펙트 게임은 정말 말도 되지 않는 일이지.”

“오늘 경기의 관건은 과연 레코드 브레이커가 퍼펙트 이닝을 몇 이닝까지 달성하느냐지.”

장비를 점검하던 스탭들의 대화에 눈을 감고 있던 남자가 눈을 뜨고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촬영 중에는 절대 핸드폰 사용을 허용하지 않는 남자였지만, 휴식 시간만큼은 예외였다.

핸드폰 바탕 화면에 깔린 야구 생중계 어플을 통해서 남자는 곧바로 LA 다저스의 생중계 방송으로 접속했다.

경기 준비 화면을 보니 10분 내로 경기가 시작될 것 같았다.

“콜로라도 로키스였군.”

매마른 듯 한 음성이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여전히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눈빛만큼은 상당한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사진은 잘 나왔나요?”

핸드폰 화면에 집중하고 있던 남자의 곁으로 오늘 사진 촬영의 메인 모델인 안젤라 쉴즈가 옆 자리에 앉았다.

갈색 머리카락에 에메랄드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안젤라 쉴즈는 현재 급부상하고 있는 모델로 환상적인 몸매에 헐리우드 여배우들보다도 아름다운 외모로 인해 현재 가파른 성공 성장세를 내달리고 있었다.

남자는 안젤라 쉴즈에게 시선도 주지 않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톱스타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안젤라 쉴즈였지만, 그녀의 성격은 신인 시절과 달라진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어딜 가나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사람들뿐이었기에 그것에 익숙해진 사람이라면 남자의 행동에 기분이 상할만도 했지만, 그녀는 어떠한 불만이나 불쾌감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무엇이 남자를 저렇게 집중하게 만드는지 호기심이 들어 슬쩍 고개를 밀착시켜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는 안젤라 쉴즈였다.

“아! 오늘 척의 선발 경기가 있는 날이었지!”

안젤라 쉴즈의 짧은 탄성에 남자가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야구 좋아하나?”

“물론이죠! 어렸을 때부터 우리 가족은 모두 메이저리그 팬이었죠. 응원하는 팀은 다르지만, 요즘 가장 유명한 투수가 척이라는 건 너무 잘 알고 있죠.”

LA 다저스의 투수 차지혁을 부르는 ‘척’은 다저스 선수들과 그의 팬사이트 회원들만이 아는 애칭이었다.

워낙 많은 별명을 가지고 있는 차지혁이었지만, 그의 팬들은 모두 ‘척’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팬사이트 회원들이 아니면 차지혁을 ‘척’이라고 이렇게까지 자연스럽게 부를 수가 없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번 촬영도 매니저에게 직접 요구를 한 걸요.”

“어째…….”

이유를 물으려던 남자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는 안젤라 쉴즈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척은 어떤 사람이죠?”

안젤라 쉴즈가 눈을 반짝이며 물어왔다.

“그는…….”

남자, 이제는 상당히 유명한 사진 작가가 되어버린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투수 랜디 존슨은 차지혁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

다저 스타디움에 가득 들어선 관중들은 경기를 시작하기 위해 마운드로 향하는 내 모습만으로도 기립 박수를 쳐주며 열광적인 응원을 보여줬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라고 할 순 없지만, 현재 가장 주목 받고 있는 선수인 건 사실이었다.

2경기 연속 퍼펙트 게임이라는 기록은 그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

오늘 경기에서도 나와 호흡을 맞출 포수는 루이스 토렌스다.

모르는 사람들은 토렌스가 나 때문에 대기록의 조연이 되었고, 2개나 되는 고가의 롤렉스 시계를 선물로 받았다고 하지만 모르고 하는 헛소리다.

내가 기록한 퍼펙트 게임의 절대적인 공헌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토렌스였으니까.

그는 결코 조연이 아닌 나와 함께 2경기 연속 퍼펙트 게임의 공동 주인공인 셈이다.

마운드에 서서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는 토렌스를 바라봤다.

경기 직전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3번째 롤렉스 시계의 디자인을 거론했던 그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가볍게 연습구를 던지며 긴장감을 해소시키고는 타석에 들어서는 콜로라도 로키스의 1번 타자 사토시 슌을 바라봤다.

시범 경기에서 만났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사토시 슌이었다.

사람들은 벌써부터 내셔널리그의 신인왕 경쟁이 나와 사토시 슌의 2파전이라고 했다.

분명 임팩트적인 부분에서는 투수인 내가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지만, 시즌 전체의 성적을 놓고 본다면 사토시 슌도 결코 만만하지가 않았다.

10경기에서 무려 0.452의 타율을 유지하고 있는 사토시 슌의 타격 능력은 확실히 무시무시했다.

역대 급 신인이라는 소리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사토시 슌과 마찬가지로 톱3라 불렸던 역대 급 신인 타자들 마이크 테일러, 시몬 산체스가 상대적으로 성적이 떨어지는 것과 비교해도 사토시 슌의 현재 성적은 가히 공포스러울 지경이라 불러도 좋았다.

그러나 고작 10경기의 성적일 뿐이다.

시즌 내내 지금과 같은 성적을 유지하는 타자는 거의 없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도 똑같다.

당장 오늘 경기에서 난타를 당하며 패전 투수가 되고, 평균자책점이 고공행진을 할 수도 있다.

무려 162게임을 치러야 하는 메이저리그다.

초반의 반짝 활약만 놓고 본다면 사토시 슌보다도 더 좋은 성적을 가지고 있는 타자들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시즌이 끝나면 최정상급 타자의 타율이 3할 중반이고, 3할만 찍어도 신인으로서는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했다.

투수 역시도 마찬가지다.

신인 투수에게 20승을 바라는 구단은 어디에도 없다.

15승만 거둬도 그해 최고의 신인이라 평가를 받는다.

문제는 타자와 투수의 신인왕 경쟁은 아무래도 타자 쪽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신인왕도 중요하지만…….’

사토시 슌이 내 앞에서 무기력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릴 작정이다.

흔하게 말하는 천적 관계를 오늘 경기에서 만들어 놓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타석에 서서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사토시 슌에게 초구를 던지기 위해 천천히 와인드업을 했다.

초구는 몸 쪽 꽉 들어차는 포심 패스트볼이다.

오픈 스탠스를 밟고 서 있는 사토시 슌이었기에 몸 쪽 공에 대한 대처도 굉장히 뛰어나다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몸 쪽 공을 선호하거나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실제 데이터 상으로도 몸 쪽보다는 바깥쪽 공을 더 잘 밀어치고 있었다.

쇄애애애액!

퍼- 엉!

“스트라이크!”

몸 쪽을 송곳처럼 파고 들어가는 96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에 사토시 슌은 섣부르게 배트를 휘두르지 않았다.

쉽게 칠 수도 없었고, 정말 제대로 타격에 성공시키지 못하면 범타가 나올 확률이 굉장히 높았기에 타자 입장에서는 지켜보는 편이 가장 현명했다.

두 번째 공은 바깥쪽을 걸치는 컷 패스트볼을 던졌다.

가장 기본적인 투구 패턴이지만, 제구력이 좋고 구속과 구위가 뛰어난 투수가 던지는 공이라면 타자 입장에서는 심하게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공이다.

2스크라이크 노볼 상황에서도 사토시 슌의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저런 사토시 슌의 모습으로 인해 일본 야구팬들은 그림자 무사라고 부른다고 했다.

심리 싸움을 좋아하는 투수 입장에서는 정말 마주치고 싶지 않은 타자였다.

이제 3구다.

사토시 슌을 위해 준비한 3구는…….

쇄애애애애애액!

퍼- 어어엉!

“스트라이크! 타자 아웃!”

포수 미트를 뚫고 나갈 것 같은 불 같은 강속구.

102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이 낮은 코스의 스트라이크 존을 뚫어버렸다.

공 반개 가량만 낮았어도 볼 선언을 받았을 정도로 코스가 기가 막혔다.

최대한 낮게 던지려고 했던 집중력이 빛을 발했다.

배트를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사토시 슌은 루킹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사토시 슌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몸을 돌렸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는 사토시 슌을 바라보며 나는 글러브로 입을 가리며 빙긋 웃었다.

딱!

체인지업이 배트에 걸리면서 총알처럼 3루수를 뚫고 지나갔다.

첫 번째 피안타.

절망스러운 탄식과 머리를 부여잡으며 신을 찾는 관중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잠시 관중들은 하나가 되어 박수를 치며 날 응원해줬다.

2아웃을 잡아놓고 3번 타자, 존 킹슬리에게 결국은 안타를 맞고 말았다.

콜로라도 로키스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고 있는 존 킹슬리는 메이저리그 입성 8년 차 베테랑으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3할 밑으로 타율이 떨어진 적이 없었다.

핫 코너인 3루를 맡고 있었으며, 수비 실력은 좀 떨어지지만 통산 타율 0.324에 매년 30개 가까운 홈런을 치는 존 킹슬리는 콜로라도 로키스의 핵심 타자이자, 프랜차이즈 스타로 유명했다.

존 킹슬리에게 안타를 맞으면서 연속 퍼펙트 기록은 22이닝에서 마감을 하고 말았다.

아쉬운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한편으로는 후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1루에 존 킹슬리를 두고 타석에 들어서는 4번 타자 앤드류 멘델슨의 표정엔 자신감이 가득해 보였다.

퍼펙트 이닝이 끊겼으니 아마도 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여기는 것 같았다.

부- 웅!

“스윙! 타자 아웃!”

3구 삼진.

자신만만하게 타석에 들어섰던 앤드류 멘델슨의 표정이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비록, 연속 퍼펙트 이닝 기록은 멈춰지고 말았지만 콜로라도 로키스를 상대로 1회 초, 투구 내용은 꽤 만족스러웠다.

“수고했네.”

게레로 감독은 더그아웃 앞까지 나와서 나를 맞이했다.

그 외 코치들과 다른 선수들도 나를 향해 웃으며 머리 위로 손을 내밀었다.

짝! 짝! 짝! 짝!

하이파이브를 할 때마다 선수들 한 명, 한 명 수고했다, 고생했다는 말을 해주었다.

진심이 느껴졌기에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감정이 치솟아 올랐다.

-차! 차! 차! 차! 차! 차!

박수 소리와 함께 관중들의 외침이 경기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에 자리에 앉기도 전에 더그아웃 밖으로 나갔다.

메이저리그에서 처음으로 관중들에게 받아보는 커튼 콜이었다.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을 때에는 경기가 끝나고 관중들에게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지만, 경기 중 이렇게 커튼 콜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모두 일어나서 박수를 치며 ‘차’를 연호하는 관중들에게 정중하게 모자를 벗고 인사를 했다.

멈춰진 기록에도 이렇게 큰 환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게 정말 가슴 뿌듯했다.

“얼굴 터지겠다. 흐흐흐!”

형수가 나에게 그렇게 말하며 익살스럽게 웃었다.

감정이 치솟다보니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던 모양이다.

“형수야, 지금 나 기분 정말 좋다.”

“안타 맞아서? 흐흐!”

장난스러운 형수의 말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내가 야구를 하고 있다는 게 정말 좋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우리 정말 오래 야구하자.”

“당연하지! 내가 좀비처럼 메이저리그에 남아있을 거다. 40살이 돼서도 경기에 출전할 거니까 너도 그때까지만 마운드에 서라!”

형수의 말에 나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오래 하고 싶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 야구를 누구보다 오래 하고 싶어졌다.

< 『해외편 - 115』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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