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13』 >
『해외편 - 113』
쉴새 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도 최대한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이것저것 질문을 쏟아내는 사람들을 상대로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오로지 야구와 경기에 관련된 일 뿐이었다.
그 외에 사적인 질문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노코멘트로 대응했다.
일부 기자들은 이런 내 행동이 꽤 못 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지만, 그런 것에는 조금도 신경을 쓸 이유가 없다 여겼다.
-데뷔 2경기 만에 벌써 메이저리그의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데, 앞으로의 목표가 무엇이죠?
금발의 아름다운 여기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눈웃음을 살살 치는 모습이 자신의 미모를 이용해서 꽤나 많은 남자들을 홀렸을 것만 같았다.
미국에 와서 놀란 것 중 하나는 바로 여자들의 적극적인 관심이었다.
좋게 말해 관심이지 지아의 말투를 빌리자면 얼굴과 몸매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날 한 번 자빠트려보겠다는 속셈이라고나 할까?
대한민국 사회도 꽤 개방적이지만, 확실히 미국을 비롯한 서양과 비교를 하면 여전히 보수적이었다.
“입단식에서도 말했다시피 제 목표는 오직 하나, 세계 최고의 투수가 되는 겁니다.”
자질구레한 말은 모두 삭제했다.
내 말에 여기자가 눈웃음을 치며 미소를 지었다.
LA 다저스 입단식 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변했다.
당시 내가 세계 최고의 투수가 되겠다고 대답을 했을 때, 여기저기서 비웃음이 나왔었다.
대놓고 비웃는 사람도 있었고, 말로는 아닌 척 하면서도 표정은 숨기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명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분위기라고 할까?
가슴 속에 약간의 불신은 있을지 모르나, 어느 정도의 가능성은 분명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애리조나와의 경기에서 13이닝, 145구를 던졌는데 다음 선발 등판에는 지장이 없는 건가요?
“선발 투수에게 괜히 4일의 휴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자회견을 하기 전에도 게레로 감독은 내게 다음 로테이션을 건너뛰거나 일정을 뒤로 미루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왔었다.
나를 배려했기에 한 제안이라 무척이나 고맙긴 했지만, 4일이라는 휴식 기간이라면 충분히 체력적으로 회복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로테이션을 건너뛰면 분명 일부 언론에서는 체력적인 문제를 거론하며 날 깎아내리려고 할 것이 분명했기에 그런 소리를 듣기 싫어서라도 로테이션을 미룰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가장 중요한 건 4일의 휴식이라면 체력을 회복하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이다.
-로테이션 상으로 31일 다저 스타디움에서 콜로라도 로키스를 상대로 선발 등판이 예정되어 있는데, 사토시 슌 선수와의 대결에 자신은 있나요?
뚱뚱한 체형의 남자 기자의 물음에 좌중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시범경기, 그것도 고작 1경기뿐이었다 하더라도 어쨌든 미국에서 나를 상대로 유일하게 전타석 안타를 때려냈던 타자는 사토시 슌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특히, 초구 홈런은 당시 엄청나게 이슈가 되며 나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를 양산해냈었다.
사토시 슌. 시범 경기 동안 보여줬던 엄청났던 타율과 출루율을 시즌 초반에도 그대로 이어나가고 있었다.
현재 콜로라도 로키스의 1번 타자로서 타율 0.425에 출루율 0.512를 기록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신인 선수로 콜로라도 로키스 팬들에게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수퍼 루키다.
벌써부터 콜로라도 지역 언론과 몇몇 외부 언론사들은 22이닝 퍼펙트 기록 행진이 콜로라도 로키스를 상대로 특히 1번 타자 사토시 슌에 의해 깨질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특정 타자를 상대로 자신이 있다, 없다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운드에 오르면 상대 타자가 누구든지 최선을 다해서 공을 던질 뿐입니다.”
내 대답에 질문을 한 기자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다시 물었다.
-시범 경기에서 사토시 슌 선수에게 유독 약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현재 많은 사람들이 22이닝 퍼펙트 기록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을 거라고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죠?
빙빙 돌렸지만, 결국은 앞의 질문과 하나도 다를 것 없는 질문이었지만 확실하게 대답했다.
“모든 스포츠는 기록에 연연하는 순간 선수 본인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은 무의미하다 생각하기에 노코멘트 하도록 하겠습니다.”
역시나 질문을 한 기자는 내 대답에 불만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다른 기자가 다른 종류의 질문을 했고, 거기에 대답을 하며 기자회견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수많은 질문에 대답을 하다 보니 어느새 약속했던 3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게레로 감독과 구단 직원이 서둘러 기자회견을 마무리했고, 그렇게 난 기자회견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수고했네.”
게레로 감독이 내 등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훌륭한 기자회견이었습니다.”
구단 직원이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서 푹 쉬도록 하게.”
“괜찮겠습니까?”
내 물음에 게레로 감독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몇 시간 후면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홈경기가 있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전날 선발 투수들은 자유롭게 휴식을 취할 수 있었기에 나는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3시간에 걸친 기자회견으로 진이 빠지기도 했지만, 31일 콜로라도와의 경기를 생각해서라도 오늘 하루는 푹 쉴 필요가 있었다.
“혹시 시간이 괜찮다면 내일 중으로 구단주님과의 저녁 약속을 잡으려고 합니다만, 괜찮겠습니까?”
구단 직원의 물음에 나는 게레로 감독을 바라봤다.
내일도 경기가 있었으니까.
“나 때문에 약속을 못 잡았다고 하면 내 입장이 난처해지겠지?”
게레로 감독의 말에 나와 구단 직원이 피식 웃고 말았다.
구단 직원은 정확하게 약속 시간을 알려주겠다며 사무실로 향했고, 게레로 감독도 경기 준비를 위해 바쁘게 걸어갔다.
수십 명의 인파 속에서 집중 조명을 받다가 홀로 남으니 그렇게 자유롭고, 편안할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서 푹 쉬어야겠다 생각하며 다저 스타디움을 빠져나왔다.
“나왔다!”
“지혁 차다!”
“코쇼다!”
편안한 혼자만의 자유는 다저 스타디움을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깨져버렸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기자와 팬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팬들이야 고마운 존재였기에 거부감이 들지 않았지만, 연신 사진을 찍고 질문을 퍼붓는 기자들의 모습은 절로 미간이 일그러졌다.
기자들의 질문은 깨끗하게 무시하며 사인을 요청하는 팬들만 상대를 했다.
가장 많은 팬들이 야구공과 내 이름과 등번호가 마킹되어 있는 유니폼에 사인을 요청했고, 일부 팬들은 글러브를 내밀기도 했다.
그 중 나를 가장 당황스럽게 만든 팬은 한 여성 팬이었는데, 내 앞에서 양팔을 자신의 상의 안으로 집어넣더니 입고 있던 브래지어만 쏙 빼서는 당당하게 내밀며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상의를 입고 있는 상태에서 브래지어만 빼는 기술도 참 신기했고, 낯선 남자에게 자신의 속옷을 내밀며 사인을 해달라고 하는 행동도 무척이나 신기했다.
붉어진 얼굴로 브래지어에 사인을 해주니 여성 팬이 포옹까지 요구해서 방어막이 해제된 가슴의 감촉을 고스란히 느껴야만 했다.
사인을 해주는 사이 계속해서 팬들이 몰려들었다.
기자회견 스케줄을 미리 알고 온 팬들도 있었고, 오늘 경기를 위해 미리 다저 스타디움 주변을 돌아보던 팬들도 있었다.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사진까지 찍어 주다보니 1시간이 빛의 속도로 지나갔다.
더 이상은 시간을 할애할 수도 없고 슬슬 피로감도 들었기에 팬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극성스러운 기자들과 다르게 확실히 팬들은 웃으며 자발적으로 물러났다.
일부 팬들이 다음에 꼭 사인을 해달라며 하는 말에 나 역시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얼른 집으로 향할 때였다.
“안녕하세요! 차지혁 선수!”
옅은 화장기 있는 얼굴의 여자가 불쑥 내 앞을 막아섰다.
신경 써서 차려입은 듯 한 여성정장 차림의 미인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야구팬으로는 보이질 않았다.
기자거나, 방송국 직원이라는 소리다.
“누구십니까?”
딱딱한 내 말투에 여자가 살짝 당황한 듯 한 표정을 내비치다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명함을 내밀었다.
“MSB 방송국 황지연이라고 합니다.”
명함을 슬쩍 바라보니 PD라고 쓰여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차동호 기자에게 미리 들어서 알고 있었음에도 모르는 척 그녀를 바라봤다.
“메이저리그에서 대기록과 함께 새로운 기록을 세우신 것 정말 축하드려요. 오래전부터 차지혁 선수의 팬으로서 정말 기뻐서…….”
누가 들어도 립서비스식 칭찬이었기에 단칼에 그녀의 말을 잘라버렸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지금 상당히 피곤합니다. 용건만 간단하게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말이 끊겼기 때문인지 그녀의 표정이 잠시 일그러졌지만,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저희 MSB 방송국에서 차지혁 선수에 대한 특별 방송을 기획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 차지혁 선수와 대화를 나눴으면 합니다.”
“간단하게 방송에 출연을 해달라는 뜻 아닙니까? 그렇다면 저는 생각이 없습니다.”
차동호 기자의 말을 듣고 생각을 해봤지만, 역시 아직은 이르다는 생각뿐이었다.
언젠가는 분명 방송국 카메라 앞에 서야 하겠지만, 그 시기가 지금은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차지혁 선수가 딱히 방송을 위해 해주실 건 없습니다. 저희 촬영팀이 차지혁 선수의 훈련 모습이나, 시합 영상 등만 밀착 촬영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겁니다. 차지혁 선수의 훈련이나 경기에 어떠한 걸림돌도 되지 않도록 조용히 촬영만 할 수 있도록 승낙을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재빨리 그녀를 지나쳐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끈질기게 그녀는 내 곁을 따라 붙으며 계속해서 날 설득하려고 했고, 결국 집 앞까지 쫓아왔다가 내가 집으로 들어가 버리자 멈춰서야만 했다.
집으로 들어와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냉장고에서 싱싱한 과일을 꺼내 깨끗하게 씻었다.
한국에서는 항상 어머니가 몸에도 좋고 피로 회복에도 좋다며 과일을 자주 챙겨줬지만, 미국에 와서는 혼자 해먹어야 하다보니 대충 몇 가지의 과일을 한꺼번에 갈아서 주스처럼 마시는 것이 일상이 되어 있었다.
깨끗하게 씻은 과일을 믹서에 갈기 좋도록 적당하게 자른 후에 믹서기를 돌렸다.
잘 갈린 과일 주스를 들고 소파에 앉아서 TV를 틀었다.
스포츠 관련 채널은 너나 할 것 없이 나에 대한 뉴스와 영상이 방송되고 있었고, 일부 케이블 채널들 역시도 내 이야기로 방송을 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던 와중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십니까?”
“차지혁 선수, 접니다.”
황병익 대표의 음성에 재빨리 현관문을 열어줬다.
“역시 집에서 쉬고 계셨군요.”
황병익 대표가 빙긋 웃고는 뒤쪽을 바라보며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을 바라보며 말을 했다.
3명의 남자들이 양손 가득 무거운 짐들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와 한쪽에 가지런히 내려뒀다.
각종 상자와 쇼핑백 등이 순식간에 집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이게 다 뭡니까?”
“선물입니다. 차지혁 선수의 팬들이 에이전시로 보내온 선물입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그 수가 많았기에 얼떨떨했다.
그렇지 않아도 집을 알고 직접 선물을 보내오는 팬들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팬들은 에이전시로 선물을 보냈다.
혹시라도 모를 테러를 방지해야 한다는 황병익 대표의 말 때문이기도 했지만, 훈련과 경기에 집중을 해야 하는 나를 대신해서 관리를 해주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건 제가 드리는 겁니다.”
황병익 대표가 쇼핑백을 내게 내밀었다.
쇼핑백을 받아서 내용물을 확인하자 고급스러운 케이스 두 개가 담겨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눈에 익숙한 롤렉스 시계 케이스였다.
“지금 메이저리그의 모든 포수들은 루이스 토렌스를 가장 부러워할 겁니다. 하하하.”
퍼펙트 게임 달성 기념으로 토렌스에게 줄 롤렉스 시계였다.
황병익 대표가 퍼펙트 게임을 달성할 때마다 롤렉스 시계만큼은 자신이 직접 선물을 해주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역시 구입해 온 거였다.
“이건 뭡니까?”
“생각해보니 루이스 토렌스는 만 달러가 넘는 고급 시계를 선물로 받았는데, 차지혁 선수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서 하나 샀습니다.”
“파텍필립? 유명한 브랜드입니까?”
“롤렉스보다 조금 더 유명합니다.”
황병익 대표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황병익 대표가 선물을 해준 파텍필립 시계는 명품이라 불리는 롤렉스마저 준명품으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비싼 시계였다.
세계 최고의 시계 브랜드로 시계들 중 왕이라 부르면 된다.
놀랍게도 황병익 대표가 선물이라며 준 파텍필립 시계의 가격은 무려 36만 달러여서 차고 다니기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마실 것 좀 드릴까요?”
황병익 대표는 내가 직접 만든 과일주스를 힐끔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하긴, 내가 봐도 비주얼적인 측면에서는 좀 괴상한 주스였으니까.
솔직히 맛도 특이했다.
오로지 몸에 좋다고 하니 마실 뿐이었다.
“그런데 집 앞에 수상한 차량 한 대가 서 있던데, 알고 계십니까?”
“수상한 차량이요?”
무슨 소린가 싶어서 창문 커튼을 열어서 주변을 살펴보니 집 앞에 승합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내부는 짙은 틴팅으로 보이질 않았다.
“아는 차량입니까?”
황병익 대표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 보는 차량입니다. 그런데 수상하다고 하기에는 너무 노골적으로 주차를 해놓은 것 같은데요?”
“그렇긴 합니다만, 제가 한 번 알아보죠.”
황병익 대표가 곧바로 현관문을 나가서는 차량으로 접근했다.
창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리면서 내부가 드러났는데, 탑승하고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눈에 익었다.
MSB 방송국 황지연이라는 PD였다. 결국, 방송국 차량이라는 사실에 나는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고 커튼을 쳐버렸다.
황병익 대표가 집으로 돌아오자 MSB 방송국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방송 출연은 정말 생각이 없는 겁니까?”
“아직까지는 확고합니다.”
내 대답에 황병익 대표는 더 이상 방송국 문제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았다.
“어제부터 에이전시 업무가 완전히 마비상태입니다.”
“예?”
“차지혁 선수와 계약을 하고 싶다는 기업들이 쉬질 않고 연락을 해오고 있습니다.”
말을 하는 황병익 대표의 얼굴엔 즐거움이 가득했다.
“차지혁 선수의 뜻을 알기에 거절을 하고 있습니다만, 메이저리그 사무국과 게임 업체의 제안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 『해외편 - 11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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