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112화 (112/221)

< 『해외편 - 112』 >

『해외편 - 112』

일어나서 경기를 지켜보는 차동호는 손이 축축하게 젖었다는 사실마저 느끼지 못했다.

손 뿐 만이 아니라 온 몸이 축축했다.

극도의 긴장감으로 인해 생겨난 현상이다.

비단, 차동호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의 모든 관중들이 온 몸이 경직된 것처럼 초조하고 긴장된 얼굴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제발… 제발…….’

마운드 위에 서 있는 차지혁을 바라보는 차동호의 눈가엔 눈물도 맺혀 있었다.

메이저리그 사상 최초로 2경기 연속 퍼펙트 게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차지혁의 모습은 무수히 많은 감정들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긍심, 세계 유일의 기록에 도전하고 있다는 자부심, 대견함, 뿌듯함 그리고 안쓰러움까지 온갖 감정들이 버무려지며 차동호의 가슴을 뜨겁게 울리고 있었다.

퍼- 엉!

“스트라이크!”

포수 미트에서 울려 퍼지는 파열음과 주심의 높은 스트라이크 콜 외침이 고요한 적막감이 내려앉은 경기장을 흔들었다.

차동호는 축축하게 젖은 두 손을 불끈 쥐며 이를 악물었다.

전광판을 바라보니 94라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이제는 94마일이 가장 빠르게 던질 수 있는 공이 되어버렸다니.’

100마일을 넘나드는 강속구를 던지는 차지혁이었지만, 지금은 힘껏 던진 포심 패스트볼의 구속이 95마일도 넘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130구가 넘었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선발 투수가 130구까지 던진단 말인가?

누구나 말한다.

혹사.

하지만, 메이저리그에 혹사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설령 혹사라 하더라도 오늘의 경기엔 다분히 그 이유가 있었다.

누구도 혹사라는 말을 쉽게 내뱉을 수가 없는 절대적인 이유가 있다.

연장 13회까지 퍼펙트 게임을 이어오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연장 12회 말이 끝나고 LA 다저스 더그아웃이 분주하게 돌아갔다.

후보로 경기를 지켜보던 선수가 헬맷을 쓰고, 배트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대타.

누구나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12회까지 퍼펙트 게임을 달성한 차지혁이 13회를 포기했다는 사실이 차동호를 비롯한 모든 관중들을 비통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렇게 대단한 투수에게 승리를 안겨주지 못한 LA 다저스의 타자들에 대한 분노도 일었다.

차동호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를 때였다.

어느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8번 타자 웨인 스테인이 시즌 1호, 솔로 홈런을 터트렸다.

1:0.

그토록 바라던 점수였다.

배트를 휘두르며 대타를 준비하던 선수가 더그아웃으로 들어가고, 헬맷을 쓰고 차지혁이 등장했을 때는 정말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홈 구장인 체이스 필드(Chase Field)가 무너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차동호도 뒤섞여서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내질렀다.

비록, 삼진을 당하고 말았지만 중요한 건 타석에서 선 차지혁의 모습이 아니었다.

12회까지 퍼펙트 게임을 이어온 투수 차지혁이 연장 13회 말에도 다시 마운드에 올라온다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삼진을 당하고 돌아서는 차지혁을 향해 모든 관중들이 손바닥이 빨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박수를 쳐주었다.

이어진 13회 말.

12회까지 퍼펙트 게임을 유지시킨 차지혁이 마운드에 올라왔고, 1번 타자 케이크 얼린을 상대로 5구만에 2루수 땅볼로 아웃 카운트 하나를 올렸다.

뒤이어 타석에 선 2번 타자 새미 판토리아노를 상대로 차지혁은 또 다시 5구만에 중견수 뜬공으로 아웃 카운트를 추가했다.

연장 13회 말, 2아웃까지 온 퍼펙트 상황.

이제 마지막 한 명의 타자만 아웃시키면 메이저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2경기 연속 퍼펙트 게임 투수이자, 연장 13회 퍼펙트 게임 투수, 22이닝 연속 퍼펙트라는 믿기지 않을 전설적인 기록의 주인공이 탄생한다.

대기록의 마지막 희생양이 될지도 모르는 타자는 얄궂은 운명처럼 오늘 경기에서 차지혁을 한 방에 무너트릴 수 있었던 애리조나의 유일한 타자, 지미 그랜이었다.

타석에 들어선 지미 그랜은 독이 바짝 오른 독사처럼 배트를 쥐고 서 있었다.

불안했다.

연장 13회까지 오는 접전이라 하더라도 타자와 투수의 피로감은 비교할 수가 없다.

더욱이 선발 투수인 차지혁은 지금까지 퍼펙트 게임을 유지하면서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 피로감이 극한까지 달했을 상태다.

지미 그랜을 상대로 차지혁은 무릎 높이보다 살짝 높은 코스의 포심 패스트볼을 던졌다.

‘지켜보고 있다!’

초구는 의도적으로 지켜봤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마운드에 서 있는 차지혁 역시도 같은 기분이었을까?

로진백을 주무르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기분 좋게 초구 스트라이크를 던지면서 카운트를 유리하게 가져갔음에도 결코 좋아 보이는 표정이 아니었다.

반대로 지미 그랜은 타석에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

피처 플레이트에 발을 올려놓은 차지혁이 두 번째 공을 던졌다.

구속은 떨어졌지만, 여전히 멋진 궤적을 그리는 파워 커브였다.

아쉽게도 판정은 볼이었다.

타자를 유인하기에 딱 좋은 훌륭한 공이었지만, 조금의 미련도 없다는 듯 지미 그랜은 어깨조차 움찔거림이 없었다.

3구는 바깥쪽을 살짝 벗어나는 체인지업이었는데, 투수인 차지혁이 왼쪽 어깨를 가볍게 흔드는 모습이 컨트롤이 제대로 되지 않은 듯 보였다.

4구는 다시 한 번 파워 커브였고, 지미 그랜의 몸 쪽을 절묘하게 파고드는 스트라이크였다.

1스트라이크 2볼 상황이라 다시 한 번 기다렸던 걸까?

차동호가 금테 안경을 손가락으로 치켜 올리며 타석에 서 있는 지미 그랜의 표정을 확인하기 위해 양눈썹을 가운데로 모았다.

무언가를 노리고 있다.

차동호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지미 그랜은 시시껄렁한 변화구로 자신을 유인할 생각하지 말고 정면으로 승부를 해보라고 도발하고 있는 거다.

타자를 압박하기에 가장 좋다는 2스트라이크 2볼 상황에서 차지혁은 다시 한 번 체인지업을 꺼내들었다.

딱!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던 지미 그랜의 배트가 벼락처럼 내리 꽂히며 차지혁이 던진 공을 1루쪽 파울 라인 너머로 날려버렸다.

이어진 6구, 7구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스트라이크 존 근처로만 와도 지미 그랜은 배트를 휘둘러 타구를 파울 라인 밖으로 보내버렸다.

마운드에 서 있는 차지혁이 모자를 벗었다.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유니폼에 땀을 닦으며 다시 모자를 고쳐 쓴 차지혁은 왼손이 로진백의 하얀 가루로 범벅이 되도록 묻히고는 8구를 던지기 위해 포수와 사인을 교환했다.

그리고 던진 8구는…….

쇄애애애액!

퍼- 어엉!

연장전에 들어서고 단 한 번도 던지지 못했던 빠른 포심 패스트볼로 전광판에는 99마일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컨트롤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일 정도로 높은 볼이었다.

포수인 토렌스가 팔을 쭉 뻗어서 잡아야 했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높은 볼로 인해 풀 카운트까지 승부가 이어졌다.

아무리 높은 볼이었다 하더라도 갑작스런 99마일의 강속구였기에 어느 타자라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본능적으로 배트를 움찔거릴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애초부터 자신이 노리는 공만 오길 기다린다는 뜻이다.

“서, 설마?”

차동호의 머릿속에 번갯불이 번쩍하고 튀듯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 차지혁이 연장 13회까지 퍼펙트를 이어올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두 가지의 투구 스타일로 애리조나 타자들을 상대했기 때문이다.

차지혁에게 그런 단초를 마련해준 사람이 바로 지미 그랜이다.

1회 초에 차지혁을 무너트릴 수 있었던 타자가 지미 그랜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13회까지 퍼펙트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강력한 지지대를 마련해준 타자도 바로 지미 그랜이다.

“컷 패스트볼… 지미 그랜은 커터를 노리고 있는 거야!”

차동호는 자신의 예상이 맞을 것 같다는 강한 느낌이 들었다.

“던지면 안 돼! 절대 커터를 던지면 안 돼!”

차동호의 바람과 다르게 마운드 위에서 토렌스와 사인을 주고받은 차지혁은 글러브 속에 손을 넣으며 천천히 그립을 쥐었고, 와인드업을 하고는 마지막 힘을 짜내듯 공을 던졌다.

좌타자인 지미 그랜의 몸통을 파고 들것처럼 날아오는 공.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1회 초와 마찬가지로 왼발을 타자 박스 바깥쪽으로 한 발 움직이며 벼락처럼 배트를 휘두르는 지미 그랜.

“아아아아…….”

그 모습을 보며 머리카락을 부여잡으며 절규하는 차동호.

끝났다.

차지혁은 결정구로 컷 패스트볼을 던졌고, 지미 그랜은 노리던 컷 패스트볼이 날아오자 기다렸다는 듯 중심이동을 하며 배트를 휘둘렀다.

배트의 중심에 공이 맞기 직전에 공의 궤적이 조금 더 아래로 가라앉았다.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회전이 걸린 공은 그대로 배트와 충돌했다.

따… 빡!

타자의 힘과 공의 회전력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져버리는 배트.

부서지면서도 바깥쪽으로 튕겨내는 배트의 반발력에 떠오르는 공.

지미 그랜의 얼굴에서 가득 그려졌던 미소가 일그러졌고, 마운드에서 공을 던진 차지혁은 그대로 앞으로 튀어나가며 허공에 떠오른 공을 향해 글러브를 내밀었다.

툭.

글러브에 공이 들어가고.

“아웃!”

주심이 길었던 경기의 결말을 장식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온 몸이 굳어버릴 정도로 긴장해서 경기를 지켜보던 수만 명의 관중들이 양팔을 높이 치켜들며 지금까지 꾹꾹 억누르며 참았던 비명에 가까운 환호성을 토해냈다.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스스로 잡아낸 차지혁은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워서 두 팔을 하늘로 내뻗었다.

“이야아아아아아아-!”

메이저리그의 새로운 역사를, 깨트리기 어려운 불멸의 기록을 쓴 어린 투수의 포효였다.

“하… 하… 하…….”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차동호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모든 것이 어긋나버린 경기 결과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판단했던 차지혁이었다.

차지혁이 던지는 구종부터 시작해서 투구 패턴까지 모든 것이 자신의 데이터에 들어 있다 여겼다.

자신의 데이터대로라면 오늘 차지혁은 절대 퍼펙트 게임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보란 듯이 퍼펙트 게임을 달성한 차지혁의 모습에 차동호는 인정해야만 했다.

차지혁은 놀랍도록 빠르게, 그리고 무섭게 진화하고 있었다.

특히, 지미 그랜이라는 막강한 타자를 상대로 던진 마지막 컷 패스트볼은 가히 압권이었다.

지미 그랜이 컷 패스트볼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고 던져줬다.

칠 테면 쳐라, 절대 칠 수 없는 공을 던져 줄 테니까!

그라운드에 드러누워서 동료들의 축하세례를 받고 있는 차지혁이 모습이 눈이 부셨다.

저 어린 투수가 과연 앞으로도 어떤 성장을 보일지, 무슨 역사를 써내려갈지 온 몸이 떨릴 정도로 흥분되고 기대가 됐다.

“내가 주제넘게 나선 꼴이군.”

세계 최고의 야구 선수가 되라고 조언을 했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어느 누가 말을 해주지 않아도 차지혁은 이미 스스로 세계 최고를 향해 빠르게 달려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고맙습니다, 차지혁 선수. 내 생에 최고의 경기를 관람하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차동호는 차지혁이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를 향해 깊숙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 차동호의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올라 주체할 수 없는 희열이 차동호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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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다시 한 번 뒤집었다.

만 19세의 어리디 어린 투수가 메이저리그 데뷔 2경기 만에 메이저리그의 역사를 새로 썼다.

데뷔전 퍼펙트 게임.

15타자 연속 탈삼진.

9이닝 최다 23탈삼진.

2경기 연속 퍼펙트 게임.

연장 13회 퍼펙트 게임 투수.

22이닝 연속 퍼펙트 기록.

전 세계에 차지혁이라는 이름 석자가 쉴 틈 없이 거론됐다.

TV를 켜도 차지혁에 대한 이야기, 신문 가판대를 봐도 대문짝만하게 실린 차지혁의 얼굴과 기사, 인터넷에 접속해도 차지혁에 관련된 각종 기사와 커뮤니티 글들뿐이었다.

특히 미국 내에서 차지혁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데뷔전 퍼펙트 게임을 기록하고 새롭게 찍어낸 수십 만 벌의 유니폼이 한 시간도 되지 못해서 전량 완판되었고, 관련 상품 모두 눈을 씻고 찾아봐도 살 수가 없었다.

언론과 기자들은 차지혁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LA로 몰려들었고, LA 다저스의 남아 있던 시즌권은 순식간에 전량 판매, 불법적으로 웃돈까지 얹혀서 인터넷 상에서 거래가 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차지혁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깊은 잠에 빠진 차지혁의 모습을 바라보며 형수가 피식 웃으며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 『해외편 - 112』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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