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11』 >
『해외편 - 111』
프로에 데뷔해서 단 한 번 밖에 기록하지 않았지만, 가장 치명적인 상처로 남아 있는 지우고 싶은 기록이 나에게는 낫아웃이다.
한국 프로 무대 데뷔전에서 발생했던 낫아웃으로 인해 퍼펙트 기록이 깨졌다.
그런데 하필이면…….
배트가 허공을 가르고, 공이 땅을 때리는 건 순간적으로 벌어졌다.
동시에 불규칙하게 튀어 오르는 공을 향해 토렌스가 블로킹을 하기 위해 몸 전체를 내던졌다.
빡!
공이 토렌스의 마스크에 맞고 옆으로 튕겨나갔다.
“뛰어!”
애리조나 더그아웃에서 선수들이 한 목소리로 그렇게 외쳤다.
헛스윙으로 자세가 무너졌던 게리 헌틀리는 고막을 때리는 동료들의 외침에 손에 들고 있던 배트를 그대로 내던지며 1루를 향해 뛰었다.
빨랐다.
1루를 향해 뛰어가는 게리 헌틀리는 아프리카 초원의 맹수처럼 빠르게 달려 나갔다.
“3루 방향!”
다저스 더그아웃과 유격수를 보고 있는 크레이그 바렛이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내질렀다.
토렌스는 마스크를 집어 던지며 다급하게 3루 쪽으로 튕겨져 나간 공을 찾아서는 1루로 힘껏 내던졌다.
‘높다!’
다급한 상황에서 던진 토렌스의 송구가 생각보다 높았다.
정상적으로 1루수인 미치 네이가 베이스를 밟은 상태에서는 포구를 할 수가 없을 정도의 높이였다.
미치 네이는 어쩔 수 없이 점프를 하며 공을 잡았고, 동시에 한 마리의 맹수처럼 달려오는 게리 헌틀리를 향해 공이 든 글러브를 힘껏 휘둘렀다.
퍽!
미치 네이의 글러브가 게리 헌틀리의 옆머리를 정확하게 가격했고, 동시에 게리 헌틀리의 발이 베이스를 밟으며 옆으로 쓰러지며 데굴데굴 굴렀다.
모두의 시선이 1루심에게 향했고, 1루심은 머뭇거리다 이윽고 양손을 옆으로 뻗었다.
“세이프!”
판정이 나오기가 무섭게 미치 네이가 공이 들어가 있는 자신의 1루 미트를 들어 올리며 태그가 먼저였다며 항의를 했다.
동시에 머리를 가격당하며 넘어졌던 게리 헌틀리가 벌겋게 변한 얼굴로 1루심에게 항의를 하고 있는 미치 네이에게 달려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1루 코치가 재빨리 게리 헌틀리를 붙잡으며 폭력 행위가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잔뜩 흥분한 얼굴로 욕설을 퍼부어대는 게리 헌틀리로 인해 분위기는 삽시간에 흉흉해졌다.
양측 더그아웃에서 선수들이 뛰쳐나왔고, 내외야에서 수비를 보던 야수들도 벌떼처럼 1루로 모여들었다.
1루로 달려가려던 나를 제지한 건 3루수 코리 시거였다.
“끼어들지 말고 뒤로 물러나.”
뒤이어 더그아웃에서 달려 나온 코치도 혹시라도 모를 위험에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곁으로 바짝 다가서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게리 헌틀리는 자신을 양쪽에서 붙잡고 있는 동료와 코치를 뿌리쳐가며 연신 ‘F’로 시작하는 단어를 쏟아내며 미치 네이를 죽일 듯 노려봤다.
미치 네이의 태그 행위가 다급한 플레이로 인해 발생한 불미스러운 행동이기는 했지만, 종종 벌어지는 일이기도 했기에 게리 헌틀리의 과도한 욕설은 심하다 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미치 네이가 흥분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만약, 미치 네이까지 게리 헌틀리의 욕설에 같이 흥분했다면 정말 벤치 클리어링 사태가 벌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흥분한 게리 헌틀리를 애리조나 선수와 코치들이 다독이는 사이, 게레로 감독이 1루심에게 다가가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다.
양측 선수들이 하나, 둘 더그아웃으로 돌아가거나 제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심판진이 모여서 비디오 판독을 시작했다.
“같은 상황이 또 벌어지게 될 줄이야.”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8회 2아웃 상황에서 벌어진 낫아웃이다.
눈으로 쉽게 판단을 할 수 없는 절묘한 상황에서 이어진 비디오 판독까지 너무나 똑같아서 이 정도면 운명의 장난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여기서 또 다시 세이프 판정이 나온다면?
하지만, 이미 내가 할 수 있는 없었기에 로진백만 주물럭거리며 비디오 판독 결과를 기다렸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심판들이 천천히 쓰고 있던 헤드폰을 벗으며 최종 결과를 알렸다.
오른 주먹을 턱 밑까지 들어 올리는 주심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손에서 주물럭거리고 있던 로진백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아웃!”
1루 베이스에 서 있던 게리 헌틀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흥분한 얼굴로 욕설을 내뱉었고, 그렇지 않아도 미치 네이에게 보였던 거친 행동으로 인해 눈에 담아뒀던 주심은 곧바로 퇴장을 명령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비 위치에 서 있던 수비수들은 재빨리 더그아웃으로 달려왔고, 나 역시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휴~ 아찔하군.”
토렌스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씩 웃었다.
“다친 곳은 없어요?”
바운드 된 공이 그대로 토렌스의 마스크를 직격했기에 혹시나 싶어 괜찮은지 물었다.
아무리 마스크를 썼고, 바운드가 되면서 구속이 줄었다고 하더라도 딱딱한 야구공에 맞았다.
워낙 상황이 상황인지라 통증을 느끼지 못했을 뿐, 어느 정도의 고통이나 의외의 데미지를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토렌스는 아무 문제없다며 내 어깨를 툭 치고는 더그아웃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행스럽게도 멀쩡해 보이는 토렌스의 모습에 나 역시 걱정을 털어내며 자리에 앉았다.
“이제 1이닝 남았는데…….”
8회까지 퍼펙트 게임을 유지하고 있지만, 문제는 9회에도 마운드에 올라온 제이슨 브리번이었다.
내가 퍼펙트 게임을 진행 중이라면 제이슨 브리번은 완봉 페이스를 달리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0:0의 균형이 깨지지 않았다는 소리다.
최악의 경우 9회 초 공격에서도 LA 다저스 타자들이 점수를 내지 못하면 내가 9회 말까지 퍼펙트 게임을 한다 하더라도 경기가 끝나지 않기에 승리 투수가 되지도 못하고 2게임 연속 퍼펙트 게임이라는 신기록도 달성되지 못한다는 소리다.
연장까지 퍼펙트를 유지하고 팀이 승리를 한다면 퍼펙트 게임이 되겠지만, 과연 그게 쉬울까?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투수는 페드로 마르티네즈다.
명예의 전당에 헌액이 된 이 전설적인 투수, 외계인이라 불렸던 페드로 마르티네즈는 1995년 9회까지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지만, 당시 소속팀이었던 몬트리올이 점수를 내지 못하면서 연장 10회 말 선두 타자에게 2루타를 맞으면서 퍼펙트 게임이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페드로 마르티네즈보다 더 불운한 투수가 있다.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하비 하딕스다.
1959년 무려 연장 12이닝까지 퍼펙트로 상대팀을 막았지만, 13회에 수비수 실책으로 퍼펙트 게임이 무산되고 희생번트와 2루타까지 맞으면서 결국은 패전 투수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페드로 마르티네즈와 하비 하딕스는 아만도 갈라라가 앞에서는 억울하다는 말도 할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도 내가 생각하는 가장 억울한 투수가 바로 아만도 갈라라가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투수 아만도 갈라라가는 2010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상대로 마지막 한 명의 타자를 남겨두고 퍼펙트 게임을 유지했다.
마지막 타자 제이슨 도널드를 상대로 던진 공이 1, 2루 사이의 내야 땅볼이 되고, 그 공이 1루수 미트에 들어갔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퍼펙트 게임을 달성한 투수가 될 거라고 누구나 생각했다.
누가 봐도 명백한 아웃 상황에서 1루심 짐 조이스는 세이프라는 희대의 오심을 하면서 퍼펙트 게임을 날려버렸다.
다음날 짐 조이스 1루심은 기자회견을 통해 오심을 인정하며 눈물까지 흘렸고, 갈라라가는 ‘사람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다’라는 대인배다운 발언과 함께 퍼펙트 게임에 대한 미련을 털어내 버렸다.
이만큼 퍼펙트 게임이라는 게 쉽지 않다는 뜻이고, 하늘이 내려준 게임이라는 의미다.
어쩌면 나 역시 연장전을 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8이닝까지 던진 투구수는 89구.
지금과 같은 투구 밸런스를 유지한다면 11회까지 120구 내외다.
솔직히 그 이후는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쉽지 않다.
차라리 깨끗하게 승리를 포기하고 다음 투수에게 마운드를 넘겨주는 쪽이 나를 위해서도, 팀을 위해서도 현명한 선택이다.
딱.
9회 초, 선두 타자로 타석에 들어섰던 던컨 카레라스의 타구가 유격수의 글러브에 그대로 빨려 들어가며 아쉽게 물러나야만 했다.
이어진 2번 타자 크레이그 바렛.
수비에 있어서는 무결점이라 할 정도로 메이저리그 최정상의 위치에 서 있는 크레이그 바렛이지만, 타격은 더 이상 상위 타선에 올려두기 민망할 정도로 바닥을 기고 있었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0.274의 타율을 자랑했던 크레이그 바렛이었지만, 현재 그의 타율은 0.164로 심각했다.
고작 5경기 밖에 치르지 않은 상황이라 속단할 순 없지만, 이런 성적을 계속해서 유지한다면 조만간 하위 타선으로 밀려날 것이 분명했다.
오늘도 3타수 무안타였다.
삼진은 많이 당하지 않았는데, 제대로 된 타구를 생산하지 못하면서 매번 아웃을 당하고 있는 크레이그 바렛은 이번에도 역시나 우익수 뜬공으로 타율을 깎아먹으며 맥없이 더그아웃으로 돌아왔다.
벌써 2아웃 상황.
제이슨 브리번은 벌써 110구에 가까운 공을 던졌음에도 여전히 구위가 떨어지지 않은 공을 던져대고 있었다.
무엇이 제이슨 브리번을 저렇게까지 뜨겁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오늘 그는 메이저리그 데뷔 이래 한 손에 꼽힐 정도로 호투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딱!
코리 시거의 타구가 3루수 방면을 뚫었다.
2루까지 가기엔 무리였다.
2아웃 상황이라는 게 너무 아쉽게만 느껴졌다.
애리조나 더그아웃에서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갔다.
제이슨 브리번이 지금까지 호투를 펼쳤다 하더라도 이미 많은 공을 던졌고, 아무래도 다음 타자가 트라웃이라는 사실이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약간의 대화 끝에 감독이 제이슨 브리번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홀로 마운드를 내려갔다.
9회까지는 맡기기로 한 거다.
팀 에이스에 대한 자존심과 예우인 셈이다.
감독의 결정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제이슨 브리번은 트라웃을 상대로 다시 한 번 삼진을 잡아내며 자신의 역할을 훌륭하게 달성하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홈팬들의 열렬한 박수세례를 받으며 퇴장한 제이슨 브리번의 뒤를 이어 그보다 더 큰 박수를 받으며 9회 말, 애리조나의 타선을 막기 위해 내가 마운드에 올라섰다.
9회를 퍼펙트로 막아도 9이닝 퍼펙트 게임 승리는 없다.
“부담감이 생각보다 더 적네.”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타석에 들어선 애리조나의 7번 타자 백스터 레마를 바라보곤 곧바로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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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아내고 마운드를 내려오니 온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몸이 말해주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무리라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는 내내 야수들이 얼굴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날 피하고 있었다.
클럽 하우스의 리더로서 다른 선수들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와 말을 건네던 트라웃마저도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미안한 기색이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까지.’
12회까지 던졌으면 정말 잘 던진 거지.
예상보다 훨씬 적은 126구를 던졌다.
이제는 아무리 힘껏 던지라고 해도 95마일 이상의 포심 패스트볼을 던질 수가 없을 정도로 체력이 떨어졌다.
여기서 더 이상 욕심 부리지 말고 다음 투수에게 마운드를 넘겨야 하는 게 옳다.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며 게레로 감독에게 다가갔다.
“그만 던지겠습니다.”
“…알겠네.”
게레로 감독의 눈빛도 미안함과 연민이 가득했다.
선발 투수가 12회까지 퍼펙트 게임을 지키도록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거다.
상대 투수력에 밀렸다, 타자들의 컨디션이 좋지 못했다, 득점 찬스에서 점수를 내지 못했다, 모두 감독의 책임이라 떠넘길 수도 있는 사안이다.
상대 투수력을 감안해서 선발 라인을 짜고, 득점 찬스에서 득점을 할 수 있게끔 각종 작전을 구사하는 사람이 바로 감독이다.
12회까지 단 1점의 점수도 내지 못했다는 건 감독에게도 그만큼의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게레로 감독은 무언가 내게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다 이내 수고했다며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이윽고 게레로 감독은 코치들에게 대타를 준비시키라고 했다.
불펜 투수야 9회가 끝나면서부터 대기를 시키고 있었으니 문제 될 것 없었다.
아이싱마저 뒤로 하고 우선은 쉬고 싶다는 생각에 더그아웃에 앉아서 경기를 지켜봤다.
형수마저도 곁으로 다가오길 꺼려했으니 내 분위기가 꽤 주변을 부담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13회 초, 6번 타자 빌 맥카티부터 다저스의 공격이 시작됐다.
4번째로 바뀐 애리조나의 투수를 상대로 빌 맥카티는 1루수 뜬공으로 아웃됐고, 7번 타자 토렌스는 조급하게 타격을 시도하다 투수 앞 땅볼로 물러나고 말았다.
오늘 애리조나의 선발 투수부터 불펜 투수들까지 집중력도 좋았고, 구위도 뛰어났기에 다저스 타선으로서는 쉽게 공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쉽네.’
솔직히 아쉽다.
약간 억울한 느낌도 들고, 타자들에게 서운한 감정도 들었다.
투수인 내가 이렇게까지 잘 던졌는데, 이렇게 완벽하게 던졌는데 승리를 챙겨주지 못하는 동료들에게 서운한 감정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게 야구다.
투수가 아무리 잘 던져도 혼자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는 스포츠다.
8번 타자 웨인 스테인이 타석에 들어서는 사이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미련을 둘 필요가 없으니 이제는 어깨를 보호하기 위해 아이싱을 하기 위해서였다. 투수 코치에게 다가가 아이싱을 해달라고 말을 꺼내려고 할 때였다.
따- 악!
경쾌한 울림과 함께 관중들의 탄성이 터졌다.
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웨인 스테인이 극적인 솔로 홈런을 터트리고는 껑충껑충 뛰며 베이스 런닝을 하고 있었다.
“감독님 호멀스로 갑니까?”
대타 교체를 알리기 위해 떠났던 타격 코치가 다급하게 더그아웃으로 돌아와선 게레로 감독에게 물었다.
투수 코치 앞에서 멍하니 서 있는 날 향해 게레로 감독이 큰 소리로 외쳤다.
“척! 헬멧 쓰고 당장 나가!”
< 『해외편 - 111』 > 끝
ⓒ 독고진
작가의 말
일본의 오오타니 쇼헤이 투수가 내년에는 165km의 공을 던지겠다고 선언했다고 하네요.
구속이 전부는 아니지만, 투수에게 구속은 역시 마약과도 같나 봅니다.
무리해서 165찍고 남들보다 16년 먼저 은퇴하는 건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