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10』 >
『해외편 - 110』
2013년 BA선정 올해의 고등학교 선수상 수상, 2013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라운드 지명과 동시에 구단 역대 최고의 드래프트 계약금, 구단의 철저한 관리 아래 엘리트 코스를 차근차근 밟아온 초특급 유망주, 타석에 들어선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부동의 4번 타자 클린튼 프레이저의 화려한 과거다.
지금처럼 40인 로스터제가 아닌 25인 로스터, 확장 로스터가 존재하던 2015년 하반기 즉, 확장 로스터를 통해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메이저리그 생활을 시작한 클린튼 프레이저는 상당히 인상적인 활약으로 초특급 유망주, 엘리트 유망주라는 이름이 전혀 아깝지 않은 장밋빛 미래를 예고했다.
2016년 신인왕 투표에서 아쉽게 2위를 차지한 클린튼 프레이저에게 2017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특급 딜을 제안했다.
당시 내셔널리그에서 최고의 유격수 후보 중 한 명이었던 닉 아흐메드와 3선발 투수로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가던 아치 브레들리를 내주면서까지 클린튼 프레이저를 데리고 온 거였다.
엄청나게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초대형 트레이드로 인해 많은 전문가들은 애리조나의 단장이 미쳤다고 단정 지었다.
시간이 지나 결과적으로는 애리조나와 클리블랜드 모두 윈윈 한 트레이드였다.
닉 아흐메드는 아메리칸리그에서도 최고의 유격수 중 한 명으로 명성을 떨쳤고, 아치 브레들리 역시 좋은 투수로서 클리블랜드의 선발 라인을 확실하게 책임졌다.
클린튼 프레이저는 2021년부터 6년간 골든 글러브 수상, 2번의 타격왕 출신, 8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이 되며 팀 내 간판 타자이자,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폴 골드슈미트의 자리를 자연스럽게 계승하고 있는 중이다.
33살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올 시즌에도 애리조나의 4번 타자 역할을 톡톡히 해낼 거라 평가를 받는 만큼 클린튼 프레이저는 확실히 위험한 타자군에 속했다.
아니, 오늘 경기에서 어쩌면 가장 힘든 싸움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2개의 범타.
오늘 클린튼 프레이저가 나를 상대로 낸 성적이다.
타석에 들어선 클린튼 플레이저는 차분하게 배트를 쥐고 서 있었다.
겉으로 봐서는 전혀 호전적으로 보이지 않는 클린튼 플레이저였다.
데뷔 초창기만 하더라도 타석에서의 인내심이 부족하고 너무 적극적으로 스윙을 한다며 많은 지적을 받았다고 한다.
마스크를 쓰고 있던 토렌스는 고개를 살짝 위로 올려 타석에 서 있는 클린튼 플레이저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나에게 시선을 주며 사인을 보냈다.
‘컷 패스트볼, 바깥 쪽.’
토렌스가 요구한 초구는 우타자인 클린튼 플레이저의 바깥 쪽 스트라이크 존을 아주 살짝 걸칠 수 있을 정도로 제구력에 신경을 쓴 컷 패스트볼이었다.
제구력에 집중하다보면 구속이 5마일(8km) 가량 떨어진다.
구속 저하의 패널티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코스에 공을 넣을 수 있다면, 클린튼 플레이저가 생각하고 있던 스트라이크 존을 넓힐 수 있으니 충분히 해볼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쇄애액.
퍼엉!
“스트라이크!”
주심의 손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올라갔다.
역시나 토렌스의 미트질이 빛을 발했고, 코스도 워낙 절묘했다.
주심의 스트라이크 판정에 클린튼 플레이저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다소 멀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스트라이크가 아니라고 주장하기엔 애매한 공이다. 그렇다고 배트를 휘둘러봐야 제대로 된 타구를 만들 수가 없으니 참 신경질 나는 공일 거다.
2구는 파워 커브, 코스는 클린튼 플레이저의 무릎 높이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공이었다.
공을 던진 나 역시 굉장히 좋은 유인구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완벽한 공이었지만, 클린튼 플레이저의 배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1스트라이크 1볼의 상황에서 던진 3구는 또 다시 파워 커브였고 코스는 2구보다 공 한 개 정도 더 높았다.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공은 아니었지만, 타자의 성향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걷어 올려버릴 수 있을 정도의 공이기도 했다.
딱!
벼락처럼 클린튼 플레이저의 배트가 튀어나오며 공을 걷어 올렸다.
하지만, 배트 스피드가 훨씬 빨랐기에 타구는 지켜볼 것도 없이 3루 선상을 훌쩍 벗어나 관중석 깊은 곳까지 날아갔다.
2스트라이크까지 왔다.
클린튼 플레이저의 눈빛이 한층 더 깊어진 듯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타자와 투수의 심리적인 부담감은 천지 차이다.
타자는 투수가 던지는 구종부터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스트라이크 존을 넓게 펼쳐야 했기에 웬만한 공에는 배트를 휘두를 수밖에 없어진다.
반대로 투수는 자신이 던질 수 있는 모든 구종으로 하여금 유인구를 던지거나, 허를 찌르는 반전의 투구로 타자를 사냥할 수가 있게 된다.
토렌스가 보내온 사인은 전력투구.
코스는 몸 쪽 낮은 곳.
구종은 체인지업.
내가 전력으로 던지는 체인지업의 경우 최고 속도가 88마일까지 나온다.
엄청나게 빠른 공이다.
타자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다.
전력으로 던지는 체인지업과 제구력에 신경을 쓴 파워 커브의 구속 차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파워 커브가 직각 형태로 떨어지는 공이라면, 내가 던지는 체인지업은 특이하게도 다른 투수들과는 다르게 우타자의 경우 몸 쪽으로 약간 붙으며 사선으로 떨어지는 형태의 공이라 파워 커브라 여기고 배트를 휘두른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타격이 쉽지 않았다.
딱.
예상대로 클린튼 플레이저의 타구가 타자박스 바로 앞에서 크게 바운드가 되며 3루 방면으로 튀었다.
파울인가?
타구가 3루 베이스를 넘어가기 전에 파울 라인을 넘어갈 것 같았다.
내가 파울이라 여길 때였다.
“시거!”
토렌스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고, 미리 전진 수비를 하고 있었던 듯 3루수 코리 시거가 빠른 속도로 달려 나오며 라인을 벗어나려는 타구를 아슬아슬하게 잡고서는 곧바로 1루로 송구, 아웃 카운트를 올려버렸다.
당연히 파울이 될 거라 여겼던 타구라 나는 물론, 타격을 한 클린튼 플레이저마저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관중들도 코리 시거의 눈부신 호수비에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8회 말, 퍼펙트 게임 중이라 이미 관중들은 모두 기립해 있는 상태였다.
코리 시거로 인해 손쉽게 아웃 카운트를 잡았기에 나 역시 글러브 박수를 치며 코리 시거의 수비력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더그아웃에서 토렌스가 내야수들과 대화를 나눴던 게 이런 상황을 염두 해뒀던 건가?’
퍼펙트 게임이라는 특수 상황으로 인해 더그 아웃은 7회부터 고요했다.
정확하게는 선발 투수인 내 주변을 형수를 제외하면 아무도 접근하지 않았고, 시끄럽게 떠들지도 않았다.
그 가운데에서 토렌스가 내야수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무언가 말을 주고받았는데, 아마도 어떤 상황에 대한 작전이 있었던 듯 싶다.
투수가 상대팀을 상대로 전면에 서서 싸우는 선봉 장수라면, 포수는 모든 계획을 짜고 야수들을 일일이 지휘하는 총사령관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멋진 포수였어.’
토렌스에 대한 감상을 뒤로 하고 다음 타자를 바라봤다.
클린튼 플레이저 다음으로 타석에 들어선 타자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무지막지한 파워를 지닌 홈런왕 출신의 미겔 사노.
이전 타석에서도 큼지막한 좌익수 플라이를 만들어 냈기에 역시 신중하게 투구를 해야만 했다.
미겔 사노를 상대로는 클린튼 플레이저와는 정 반대로 투구를 했다.
초구부터 전력을 다한 컷 패스트볼, 파워 커브, 포심 패스트볼을 뒤섞으며 볼 카운트를 2스트라이크 2볼로 만들었다.
‘결정구로는 다시 한 번 체인지업.’
내 생각대로 토렌스 역시 체인지업을 결정구로 요구했다.
미겔 사노의 유일한 약점이라면 파워를 이용한 큰 스윙에 있었고, 너무 눈에 의존한 스윙 형태로 인해 전형적인 거포형 타자들처럼 삼진비율 또한 높다는 점이었다.
부- 웅!
크게 헛돌며 미겔 사노의 방망이가 바람 소리만 남겼다.
분하다는 듯 씩씩거리며 더그아웃으로 돌아간 미겔 사노는 그대로 방망이를 내던지며 마운드에 서 있는 나에게까지 그 소란스러움을 전해왔다.
8회 말, 2아웃 상황.
이제 마지막 고비다.
비트를 타듯 리드미컬한 걸음걸이로 타석에 들어서는 흑인 타자, 게리 헌틀리.
2020년 드래프트 당시 18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스카우트들이 최고의 파워를 가진 타자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게리 헌틀리는 애리조나의 보물이라 불리는 타자다.
클린튼 플레이저의 뒤를 이을 프랜차이즈 스타로 키우기 위해 애리조나에서도 10년 장기 계약으로 묶어 둔 상태이기도 했다.
‘타격 재능은 정말 괴물이지.’
파워도 파워지만, 공을 때리는 능력 하나는 정말 기가 막혔다.
반면, 수비력은 리그 평균에도 못 미칠 정도로 부족했지만 그것이 순전히 노력 부족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기에 미래성은 확실히 밝았다.
재능과 실력을 겸비했다면 노력은 부족한 편이었고, 성격 역시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대다수의 사람들이 추켜세웠기 때문인지 좋게 말하면 상당히 자유분방한 성격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천방지축 타입으로 유명했다.
타석에 들어선 게리 헌틀리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나를 향해 씨익 웃었다.
지금 상황이 어떤지 알면서도 긴장감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앞 타석에서 안타에 가까운 깊은 유격수 코스로 타구를 날렸지만, 무결점 수비수라 불리는 크레이그 바렛의 환상적인 수비 앞에 아쉬운 아웃을 당하고 말았다.
오늘 경기 최고의 수비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멋진 수비였고, 그 수비가 아니었다면 연속 이닝 퍼펙트 신기록도 물거품처럼 사라질 뻔했다.
안타나 다름 없는 타구를 쳤기 때문인지 게리 헌틀리의 표정엔 자신감이 충만해보였다.
어쩌면 워낙 낙천적인 성격이 강해서인지 지금 상황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메이저리그 최초로 2경기 연속 퍼펙트 게임이라는 최초의 기록을 향해 달려가는 투수를 상대로 자신이 제동을 걸 수도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타석에 선 게리 헌틀리는 어서 공을 던지라는 듯 나를 재촉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도발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팔이 길고, 몸이 유연한 게리 헌틀리는 좌우 폭에 대한 대처가 상당히 편안했다.
‘컷 패스트볼은 좋지 않겠어.’
내 마음과 마찬가지로 토렌스 역시 초구는 포심 패스트볼, 낮은 코스를 요구해왔다.
무릎 높이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낮고 빠른 포심 패스트볼에 게리 헌틀리는 주저 없이 배트를 휘둘렀다.
타격이 쉽지 않은 공이었음에도 게리 헌틀리의 배트에 걸리면서 타구가 빠른 속도로 1루 관중석 방면으로 날아갔다.
파울이 되기는 했지만, 실투는 곧장 치명적인 비수가 되어 날 찌를 것이라는 걸 깨닫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로진백을 만지며 호흡을 골랐다.
8회 말까지 왔지만 체력적으로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87구.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기 위해 3.7개의 공을 던진 셈이다.
분명 굉장히 좋은 페이스고, 훌륭한 페이스다.
계산상으로만 본다면 한 경기 완투를 했을 경우 100개의 공을 던진다는 결과가 나오니 이상적인 투구다.
문제는 심리적인 압박감이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기록에 도전을 한다는 사실이 아무리 기록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척이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후우우우.”
크게 호흡을 뱉어내고는 다시 피처 플레이트에 왼발을 올렸다.
‘하나 강하게 가자.’
심리적 압박감을 털어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타자와의 대결에서 유리한 카운트를 만드는 거다.
1스트라이크 1볼의 상황과 2스트라이크 노볼의 상황은 천지 차이니까.
우선은 확실하게 스트라이크 카운트 하나를 잡아 놓는 게 이번 대결에서도 승부의 추를 내쪽으로 가져올 수 있기 수월해진다.
바깥쪽 체인지업을 요구하는 토렌스의 사인을 거부하곤 곧바로 전력을 다한 포심 패스트볼, 낮은 코스 사인을 보냈다.
토렌스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게리 헌틀리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력으로 던지되, 가운데로 몰리지만 않으면 된다.
와인드업을 하면서부터 모든 신경을 집중해서 공을 던졌다.
쇄애애애애액!
퍼- 어엉!
“…스트라이크!”
약간 늦은 타이밍에 주심이 스트라이크를 외쳤고, 게리 헌틀리는 타석에서 물러나며 주심을 향해 뭐라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판정에 대한 항의겠지.
할 만한 항의다.
볼이 낮았으니까.
팔을 미리 쭉 뻗으며 볼을 캐치한 토렌스의 미트질이 아니었다면 볼이라고 판정을 받을 수도 있을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야구 경기에서 비디오 판독으로 인한 많은 부분이 번복 판정을 받지만, 스트라이크 판정에 대해서만큼은 주심의 절대적인 영역이자, 최후의 권력이다.
항의는 항의로 끝날 뿐이다.
다시 타석에 선 게리 헌틀리는 주심의 판정에 불만이 많다라는 걸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
‘파워 커브다.’
게리 헌틀리는 지금 낮은 볼에 대한 민감함이 극도로 높아져 있다.
다시 말하면 낮은 볼에 대한 대처가 평소보다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뜻이고, 거기에 카운트는 2스트라이크였으니 조금 전 공과 비슷하다 싶으면 무조건 배트를 휘두를 수밖에 없다.
토렌스 역시 파워 커브를 요구했는데, 코스가 굉장히 까다로웠다.
바운드가 되기 직전의 공으로 던져달라니.
지금은 제구력보다는 구속에 신경을 써야 할 타이밍이라 토렌스의 블로킹 능력을 믿고 던지는 수밖에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마운드에서의 내가 가진 최고의 장점은 바로 똑같은 투구폼에서 각기 다른 구종을 던질 줄 안다는 사실이다.
내가 던질 수 있는 가장 빠른 87마일이 파워 커브가 홈 플레이트를 향해 날아갔다.
방금 전에 던졌던 포심 패스트볼과 아주 흡사한 위치로 날아오는 공에 게리 헌틀리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배트를 휘둘렀다.
배트의 궤적이 아주 유연하고도 스피드하게 그려졌다.
포심 패스트볼이라면 무조건 맞을 수밖에 없다.
휘이이익.
배트에 맞기 바로 직전에 공이 급격하게 직각으로 휘어졌다.
부- 웅!
공기를 찢을 것 같은 바람 소리와 함께 허공을 찢어버린 배트를 뒤로하고 공은 계속해서 아래로 떨어지며 전진했다.
퍽!
“……!”
꺾이는 각이 생각보다 심했고, 공은 곧바로 바닥을 때리며 불규칙하게 튀어 올랐다.
< 『해외편 - 110』 > 끝
ⓒ 독고진
작가의 말
벌써 2014년의 마지막 달, 12월이 시작됐네요.
내년이면 내 나이가............
회기하고 싶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