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09』 >
『해외편 - 109』
‘다음 이닝에는 확실하게 힘으로 눌러봐.’
토렌스의 말대로 제구력에 비중을 뒀던 부분을 깨끗하게 지워버리고 구속과 구위에 초점을 맞춰서 공을 던졌다.
6회 말임에도 불구하고 2회부터 5회까지 꾸준하게 체력을 유지하며 맞춰 잡는 투구를 해왔더니 확실히 다른 때보다 몸에 힘이 넘쳤다.
전광판에 찍힌 101마일의 구속을 확인하고는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타석에 서 있던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주전 포수, 백스터 레마가 급히 타임을 요청하고는 타자박스에 빠져나갔다.
괜히 장갑을 벗었다 끼고는 스윙을 체크하는 척 배트를 휘두르고 있었지만, 뻔했다.
당황한 거다.
2회부터 5회까지 90마일 중반에도 못 미치는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던 투수가 갑자기 101마일의 강속구를 던져버리니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 거다.
특히, 포수라는 포지션의 특성상 상대 투수와의 수 싸움이 일상처럼 되어 버렸을 테니 맞춰 잡는 투구를 대비했던 백스터 레마로서는 지금 상황이 꽤 당황스러울 수밖에.
무엇보다 90마일 중반의 공과 100마일이 넘어가는 공의 체감 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주심의 눈초리에 어기적거리며 타석에 선 백스터 레마는 나를 지그시 노려봤다.
노려보는 눈초리를 무시하며 한 템포 빠르게 투구했다.
쇄애애애액!
퍼- 어엉!
“스트라이크!”
이번에도 한 가운데 포심 패스트볼.
전광판에 찍힌 구속은 초구와 다를 것 하나 없는 101마일.
백스터 레마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3구는 뭘 던질 거냐?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변화구를 예상한다.
당연한 선택이고, 지극히 현명한 선택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쇄애애애액!
퍼- 어엉!
“스트라이크! 타자 아웃!”
배트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백스터 레마는 멍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설마 내가 또 다시 한 가운데 포심 패스트볼을 던질 줄은 몰랐던 거다.
컷 패스트볼, 파워 커브, 체인지업 중 하나를 생각했겠지.
그 중에서도 특히 파워 커브나 체인지업을 머릿속에 담아뒀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던지는 순간 미트에 박혀 버리는 101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에 백스터 레마는 차마 배트조차 휘둘러보지 못하고 3구만에 루킹 삼진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3연속 101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에 관중들은 잔뜩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났다.
8번 타자 브랫 필립스가 타석에 들어섰다.
전 타석에서 바깥쪽으로 빠져 나가는 컷 패스트볼을 억지로 때리려다 3루수 땅볼로 아웃이 된 브랫 필립스였다.
한때 휴스턴 애스트로스에서 촉망 받던 중견수 유망주였던 브랫 필립스였지만, 기대만큼 성장을 해주지 못하는 바람에 애리조나로 트레이드되었는데 놀랍게도 2년 만에 크게 성장하며 주전 좌익수 자리를 꿰차버렸다.
하지만, 30살에 허리 부상으로 급격하게 파워가 떨어지면서 예전만큼 상위 타선을 고집할 수가 없게 되어 지금은 8번 타자까지 내려앉은 상황이었다.
브랫 필립스의 커리어 하이 시절에는 무려 33개의 홈런에 36개의 도루, 0.325의 타율을 기록했을 정도였지만.
‘그나마도 벌써 5년 전 일이니까.’
전성기에서 한참이나 미끄러져 내려온 브랫 필립스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
전성기 시절을 내달리고 있는 상태라면 충분히 지미 그랜과 비슷한 등급의 타자로 보였겠지만, 지금은 그저 쇠퇴해서 주전 자리마저 가까스로 붙들고 있는 하위 타자일 뿐이었다.
쇄애애액!
부- 웅!
퍼엉!
초구부터 포심 패스트볼을 노리고 힘차게 배트를 휘두른 브랫 필립스였지만, 토렌스와 내가 선택한 초구는 체인지업이었다.
완벽하게 당했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오물거리며 욕설을 중얼거린 브랫 필립스가 다시 자세를 잡았다.
두 번째 공은 원하는 대로 100마일이 넘어가는 포심 패스트볼을 던져줬다.
문제는 손끝에서 실밥이 제대로 채지지 않으면서 살짝 공이 뜨고 말았다.
그런 공을 브랫 필립스는 냅다 휘두르면서 고맙게도 스트라이크 카운트를 올려줬다.
눈높이로 적당하게 날아간 공이니 적극적인 자세로 타격을 준비하던 브랫 필립스에게는 너무나도 유혹적인 공일 수밖에 없었다.
브랫 필립스의 머릿속에서 100마일의 강속구가 지워지기 전에 날아간 3번째 공은 97마일에 이르는 컷 패스트볼이었다.
좌타자인 브랫 필립스는 홈 플레이트로 날아오다 바깥쪽으로 떨어지며 꺾여 나가는 컷 패스트볼을 건드리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헛스윙 삼진으로 등을 돌려야만 했다.
6회 말에 7번, 8번 타자를 연속으로 3구 삼진으로 잡아내자 관중들의 열기가 무척이나 뜨거워졌다.
무엇보다 100마일이 넘어가는 강속구로 인한 관중들의 흥분감은 최고조에 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과열된 상황 속에서 타석에 들어선 선수는 6회 초까지 강속구를 뿌려대며 LA 다저스 타자들을 침묵시키고 있는 제이슨 브리번이었다.
타석에 들어선 제이슨 브리번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 역시 제이슨 브리번을 상대로 두 차례나 삼진을 헌납하며 무기력하게 타석에서 벗어나야 했기에 똑같이 되갚아 줄 이유가 충분했다.
“스트라이크!”
몸 쪽을 과감 없이 찌르고 들어간 97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에 제이슨 브리번이 움찔거렸다.
좌투수임에도 불구하고 우타자인 나와 다르게 좌투좌타인 제이슨 브리번이었기에 좌투수인 내가 던지는 강속구에 더욱 크게 공포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배트를 짧게 쥐고 선 제이슨 브리번의 눈동자가 강렬하게 빛을 토해냈다.
전 타석처럼 어떻게든 타격이라도 해보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지만,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컷 패스트볼에 민망한 스윙을 보이더니 몸 쪽 높은 코스로 날아온 파워 커브에 다시 한 번 움찔하며 루킹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3타자 연속 3구 삼진.
-와아아아아!
짝짝짝짝짝짝짝짝!
마운드를 내려가는 나에게 관중들이 모두 일어나서 우레와도 같은 박수를 쳐주었다.
그리고 15이닝 연속 퍼펙트 기록을 세우며 타이 기록자가 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남은 7회, 8회, 9회다.
단 3이닝만 또 다시 퍼펙트 기록을 세우면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로 2경기 연속 퍼펙트 투수로서 기록을 남기게 된다.
누군가의 기록을 깬다는 것보다 최초라는 기록이 더 짜릿하고 흥분될 수밖에 없다.
“설마 101마일이나 되는 공을 컨트롤 할 수 있는 거야?”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는 도중 날 기다리고 있던 토렌스가 곁으로 다가와 속삭이듯 그렇게 물어왔다.
“그럴 수 있었다면 굳이 맞춰 잡을 필요도 없었겠죠.”
“그럼 한 가운데로 다 몰렸다는 소리네?”
“그렇죠.”
“위험하겠는걸. 작정하고 친다면 아무리 101마일이라 하더라도 한 가운데로 몰리는 공은 여지없이 펜스를 넘겨버릴 수가 있어. 스트라이크가 아니어도 괜찮으니까 한 가운데로 몰리지만 않게 던져.”
맞는 말이다.
101마일의 강속구도 한 가운데로 던지면 얼마든지 넘겨버릴 타자들이 메이저리그에는 수두룩했다.
다만, 언제 어떤 상황에서 던질 줄 모르기에 대처를 못할 뿐이다.
“노력해보죠.”
“다음 이닝에는 피칭 스타일을 완전히 뒤죽박죽 섞어버리자고. 애리조나 놈들이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리는 거야. 알겠지?”
토렌스의 말에 나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더그아웃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형수가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다른 선수들이 말도 붙이지 못하는 것과는 달랐다.
나 역시도 이전 경기를 통해 개의치 않는다고 했으니 신경이 쓰일 일도 없었다.
“갑자기 구속을 높였는데 어깨는 괜찮아?”
“멀쩡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이다.
체력이 조금 떨어졌을 뿐이지, 어깨나 몸의 밸런스는 지극히 정상이었다.
몸에 무리를 줘가면서까지 공을 던질 정도로 난 어리석지 않았으니까.
“그럼 다행이고.”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한 표정의 형수였다.
이미 짐작하고 있다.
아마도 토렌스와 관련된 말임이 분명했다.
불안하겠지.
파트너라 여겼던 내가 토렌스라는 주전 포수와 친밀하게 지내고 있으니 서운한 감정도 있을 테고, 불안한 감정도 있을 거다.
나를 뺐겼다 여길 테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형수야.”
“응?”
“토렌스에게 잘 배워.”
“…그래.”
작게 대답을 하며 고개를 돌리는 형수의 표정에서 그늘이 느껴졌다.
뭐라고 말을 해주고 싶어도 지금은 경기 중이라 그럴 수도 없었고,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자존심이 상해 있을 형수에게 내가 잔소리까지 해가며 관여해서도 안 된다.
메이저리그에서 주전 선수가 된다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뤄지는 일이다.
나에 대한 섭섭한 감정이나, 서운한 감정 따위와 주변에서 잔소리를 해댄다고 형수의 실력을 향상시키거나, 그를 주전으로 앉히지는 않는다.
7회 초, LA 다저스 공격을 막기 위해 마운드에 오른 제이슨 브리번은 초구부터 98마일의 공을 던지며 뜨거워진 열기에 동참했다.
하지만, 더그아웃에서 제이슨 브리번의 투구를 지켜보는 나는 그가 상당히 흥분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존심 싸움이다.
6회 초까지만 하더라도 완벽하게 자신의 페이스대로 이 팽팽한 투수전의 주인공으로 주목을 받았는데, 단 한 이닝으로 인해 주인공이 완전히 달라졌으니 제이슨 브리번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7회 초, 공격의 선봉장이 되어 타석에 선 코리 시거는 초구부터 강속구를 남발하는 제이슨 브리번에게 결국은 삼진을 당하고는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더그아웃으로 돌아왔다.
코리 시거 다음으로 타석에 선 4번 타자는 이른 판단일지 모르나 아직까지는 완벽하게 부활했다 평가받고 있는 트라웃이었다.
오늘 경기 이전 5경기에서 19타수 12안타 0.632의 타율에 무려 3개의 홈런을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다저스 타자들 중 최고의 활약을 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제이슨 브리번을 상대로는 2타수 무안타로 지난 5경기의 활약에 무색할 정도로 무기력한 타격을 보여주고 있는 중이다.
트라웃을 상대로도 제이슨 브리번은 자신만만하게 강속구를 뿌려댔다.
부웅!
작정하고 휘두른 배트였지만, 98마일을 찍은 포심 패스트볼의 스피드를 제대로 따라가질 못했다.
아직 시즌 초라는 점에서 99마일까지 내던지는 제이슨 브리번이었기에 무리해서 구속을 끌어 올리고 있는 게 아니라면 나와 동류의 투수임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면 제이슨 브리번은 작년 시즌에도 시즌 초부터 강속구를 던졌고, 시즌 마지막까지도 여전히 구속이 저하되지 않았으니 타고난 어깨에 자기 관리가 철저한 투수임이 확실했다.
딱!
타구가 1루 베이스 뒤쪽으로 크게 벗어나며 관중석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배트 스피드가 공 스피드를 이겨내지 못하고 있었다.
몇 번 허공에 스윙을 체크하던 트라웃은 심호흡과 함께 타석에 들어섰지만, 역시 제이슨 브리번의 공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서 결국 삼진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LA 다저스의 중심 타자들을 연속적으로 삼진 처리해버리자 애리조나 팬들의 환호성이 야구장을 집어 삼킬 정도로 커졌다.
홈팬들의 응원에 더욱더 의기양양해진 제이슨 브리번은 5번 타자 미치 네이마저도 삼진으로 잡아내며 마운드 위에서 주먹을 불끈 쥐는 퍼포먼스까지 보여줬다.
“사이영상 후보라더니.”
제이슨 브리번의 투구에 진심으로 감탄하며 다시 글러브를 들고 일어나 마운드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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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빌리버블(unbelievable)! 삼진으로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아내는 차(CHA)! 이번 아웃 카운트로 인해 메이저리그의 기록이 또 한 번 깨지고 말았군요! 7회 말까지도 퍼펙트로 이닝을 마치면서 메이저리그의 새로운 신기록이 작성되었군요! 정말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나오질 않는군요!
-메이저리그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단 두 경기 만에 벌써 몇 개의 기록을 깨버린 겁니까? 한국에서 온 저 어린 투수가 수백 년의 역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넘고 있으니 뭐라고 할 말이 없네요!
-이제 남은 기록이라면 과연 메이저리그 최초로 2게임 연속 퍼펙트 게임을 기록하느냐인데, 가능하다 생각하나요?
-절반의 확률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8회 말, 애리조나 타선이 4번부터 시작되니 결코 만만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 드네요. 지혁 차가 놀랄만한 피칭 센스로 애리조나 타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고 하지만 8회 말, 공격에 나설 애리조나 타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집중력을 높일 것이 분명하니까요.
“두 경기 연속 퍼펙트라고? 웃기는 군!”
TV를 시청하던 남자가 비웃음을 지었다.
손에 들린 캔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는 갈색 머리카락에 2m에 가까운 큰 키를 가진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 LA 다저스의 에이스 필 맥카프리였다.
방송국 카메라는 더그아웃에 차분하게 앉아서 경기를 관전하고 있는 차지혁의 모습을 계속해서 비춰주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필 맥카프리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노란 원숭이 자식! 내가 복귀하는 그 순간부터 너 따윈 사람들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워지도록 만들어 버리겠어!”
필 맥카프리는 그렇게 다짐을 하며, 화면 속 차지혁의 얼굴을 죽일 듯 노려봤다.
< 『해외편 - 109』 > 끝
ⓒ 독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