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108화 (108/221)

< 『해외편 - 108』 >

『해외편 - 108』

마운드를 내려오는 발걸음이 생각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무실점으로, 여전히 퍼펙트 이닝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가벼워야 할 발걸음이 전혀 그렇지 않았다.

‘포심 패스트볼이었다면 분명히 넘어갔다.’

지미 그랜은 내 공을 철저하게 노리고 있었다.

아니, 내가 몸 쪽 컷 패스트볼을 던질 수밖에 없다고 확신을 하고 있었던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던지는 순간 체중 이동을 했을 리가 없다.

구종과 코스를 모두 확신하고 타격을 했음에도 지미 그랜이 홈런을 만들어내지 못한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다.

내가 던지는 컷 패스트볼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컷 패스트볼을 던지는 투수들은 굉장히 많지만, 모두 같은 공을 던지는 건 아니다.

기본적인 구속부터 무브먼트까지 투수들마다 제각각이다.

컷 패스트볼뿐만이 아니다.

가장 기본이라 불리는 포심 패스트볼도 투수들마다 차이가 있다는 게 바로 이 부분이다.

중요한 건 지미 그랜 정도의 타자에게 두 번째는 없다는 사실이다.

당장 다음 타석만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지미 그랜은 여지없이 홈런을 만들어 낼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게 메이저리거니까.

더그아웃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으며 음료수를 들이켰다.

쓴 입안이 시원하게 씻겨 내려갔다.

지미 그랜과 같은 타자를 상대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구위뿐이다.

그러나 당장은 어렵다. 아니, 올 시즌이 지나기 전까지도 요원한 일이다.

구위라는 건 어느 순간 갑자기 좋아지는 게 아니라 서서히 시간을 두면서 차곡차곡 쌓이기 때문이다.

구속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토렌스.”

내 부름에 포수 장비를 벗고 휴식을 취하던 토렌스가 날 바라봤다.

“미안. 내 생각이 짧았다.”

토렌스가 미안하다며 내게 사과를 했다.

지미 그랜의 노림수에 역으로 잡아먹혔다는 것을 토렌스는 자신만의 탓이라 여기고 있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으니까 토렌스의 잘못이 아니죠. 그것보다도 지금 내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토렌스라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묻고 싶은 거? 뭐지?”

조금은 민감한 개인적인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생각을 했는지, 토렌스가 내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에게 지금의 내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대충 짧게 이야기를 했지만, 토렌스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대답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투수가 누구인지 알아?”

뜬금없이 가장 존경하는 투수에 대해 말을 할 토렌스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차분하게 다음 말을 기다렸다.

“80마일 중후반의 패스트볼로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요리했던 투수. 메이저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4년 연속 사이영상을 받은 투수.”

“그렉 매덕스.”

토렌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뛰어난 투수 중 한 명이 그렉 매덕스다.

제구력 하나만큼은 메이저리그 역대 원톱이라 불리는 정밀한 제구력으로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호령했던 그렉 매덕스의 포심 패스트볼 구속은 80마일 중후반.

솔직히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느린 구속으로도 그렉 매덕스는 메이저리그 사상 최초이자,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는 4년 연속 사이영상을 탄 유일한 투수다.

구속이나 구위로 타자를 윽박지르며 압도한 투수가 아니라 정밀한 제구력 하나만으로 타자들을 요리했던 그렉 매덕스의 피칭 스타일은 세상 모든 투수들의 귀감이라 할 수 있다.

“척, 네 제구력은 메이저리그에서 수준급이야. 하지만, 최정상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 구속은 정상급이라 할 수 있지만, 역시나 손에 꼽자면 열 손가락에도 들어가지 못하지. 그런데 놀라운 건 제구력과 구속을 합쳐놓으면 메이저리그 투수들 가운데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 대단하다는 거지. 그런데 경험이 부족해. 타자와의 수 싸움은 기대할 수 없는 수준이고, 이제 갓 메이저리그에 데뷔를 한 루키답게 타자들에 대한 분석력도 부족해.”

냉정한 평가다.

하나도 틀린 말이 없다.

솔직히 내가 지금까지 남들보다 뛰어나다 평가를 받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빠른 구속의 공을 훌륭하게 컨트롤을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멘탈과 배짱도 큰 이유 중 하나다.

“시범 경기에서도 느꼈지만, 당장 네 구위로는 정상급 파워를 가진 타자들을 상대로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어. 아니, 냉정하게 말해서 이길 가능성이 적어. 이것도 인정하는 거야?”

“물론이죠.”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지금의 상황일 뿐이지. 앞으로 당장 내년 시즌만 되어도 네가 어떤 식으로 변하게 될지는 모르니까. 어쨌든 당장 네가 지미 그랜과 같은 타자들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뿐이야. 정교한 제구로 제대로 된 타격을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거지.”

말은 쉽다.

제구력도 한 순간에 쑥 향상되는 부분이 아니다.

시간을 들여 가다듬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렌스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이유는 당장이라도 내가 조금 더 정교하게 제구력을 잡을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시범 경기에서 그랬던 것처럼.

“구속을 줄이고 제구를 잡으라는 거죠?”

“맞아. 이왕이면 타자가 예측하기 힘들게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섞어서 던지는 것도 좋겠지.”

확실히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구속과 구위로 억누르기도 하고, 정교한 제구력으로 허를 찌르기도 하고.

“우리 팀의 야수들은 믿을 만하지. 믿고 던져. 섣부른 판단일지 모르겠지만, 척 네 공을 받아보면 마운드에서 홀로 해결을 하려는 느낌이 많이 들어. 물론, 너 정도로 좋은 공을 던질 줄 아는 투수라면 충분히 그런 자신감을 가질 필요도 있지. 그래도 야구는 혼자 하는 스포츠가 아니잖아? 야수들을 믿고 던져봐.”

데뷔전 경기에서 확실히 야수들을 믿고 던진 기억은 없었다.

최선을 다해서 타자 한 명, 한 명을 상대했을 뿐이다.

타자에게 집중했다고는 하지만, 야수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믿지 못하고 공을 던진 투수로 비춰질 수도 있는 일이긴 했다.

“토렌스, 날 확실하게 리드해줘요.”

“날 믿을 수 있겠어? 나도 완벽하진 않아. 알다시피 지미 그랜에게 한 방 제대로 먹었다고.”

“상관하지 않아요. 오늘은 토렌스를 믿고 던질게요. 아니, 야수 모두를 믿고 던지죠.”

토렌스가 가만히 날 바라보다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는 마. 어쩌면 다음 이닝에 곧바로 실점을 할 수도 있어. 그래도 믿겠다면… 최선을 다하지.”

눈을 반짝이며 대답을 하는 토렌스의 모습에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사인부터 정하자. 피칭 스타일을 나눠야 하니까 그것부터 확실하게 정하고 들어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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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배트 끝에 걸린 공이 힘없이 유격수와 3루수 방면으로 굴러갔다.

상대적으로 가까이서 수비를 하고 있던 3루수 코리 시거는 재빨리 타구를 잡아 1루로 송구를 했다.

어려울 것 하나 없는 수비였기에 1루 주자는 아웃을 당했다.

“확실해. 차지혁 선수는 맞춰 잡고 있어.”

차동호는 자신의 테블릿pc에 기록을 하며 확신에 가득 찬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기록표가 계속해서 그 증거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삼진이 뚝 끊겼고, 범타 처리 되면서 아웃 카운트를 착실하게 쌓고 있었다.

구속 저하 역시도 눈에 띄었다.

1회에 97마일까지 나왔던 포심 패스트볼이 2회부터는 93~94마일을 왔다갔다 거렸다.

차지혁의 체력을 잘 알고 있는 차동호로서는 힘이 빠졌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부상?

차지혁의 성격상 부상을 달고도 공을 던질 리가 없다.

인간미가 없다 할 수 있지만, 차지혁은 철저하게 자신의 몸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선수였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차동호는 정말 이상적인 운동 선수라 여겼다.

마지막으로 애리조나 타자들의 타구가 모조리 땅볼이나 내야 뜬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정확하게 배팅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조금씩 히팅 포인트가 흔들리거나, 의도적으로 타자들의 배트를 끌어내고 있다는 소리다.

어느 쪽이든 투수에게 끌려가고 있다는 뜻이다.

타자들의 성향을 냉정하게 파악하고 분석해서 맞춤 코스로 공을 던지고 있었다.

‘차지혁 선수가 벌써 그 정도로 성장했을 리는 없고… 토렌스겠지.’

메이저리그 베테랑 포수인 토렌스라면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다.

“역시 1회가 문제였던 건가?”

1, 2번 타자를 잘 잡고 3번 타자였던 지미 그랜에게 완벽하게 수 싸움에서 잡아 먹혔던 차지혁이다.

지미 그랜이 노리고 친 공이 우익수 방면으로 총알처럼 뻗어나가는 순간, 차동호는 홈런이라고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타구가 우익수에게 잡혔을 때, 차동호는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홈런이 되어야 했을 타구였으니까.

이닝이 교체되면서 지미 그랜의 배트가 부러지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면서 차동호는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음…….”

정말 효율적인 투구를 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차동호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 투구였다.

차지혁이 투구 스타일은 복잡하고 계산적인 수 싸움이 아니라 어떤 타자라도 물러서지 않고 사냥하듯 강렬하게 윽박지르는 스타일이다.

지켜보는 이들의 가슴속을 뻥 뚫리게 만들어주는 쾌감을 선사하는 투수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쾌감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노련한 사냥꾼이 사냥감을 함정으로 유인해서 잡는 모습이었다.

덕분에 퍼펙트 이닝이 어느덧 14이닝까지 이어졌지만.

5이닝을 마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는 차지혁의 모습에 많은 팬들이 박수를 쳐주며 응원과 격려를 해주고 있지만, 경기에 대한 집중도는 확실하게 떨어진 모습이 차동호의 눈에 보였다.

메이저리그에 갓 데뷔를 한 신인 투수가 14이닝 퍼펙트 기록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분명 엄청난 일이긴 했지만, 이전까지 보여줬던 차지혁의 퍼포먼스를 생각하면 확실히 임팩트가 약했다.

“다음 이닝에서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모든 팬들의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될 투수.

노련함보다는 열정적으로, 패기를 갖고 화끈하게 타자를 상대하는 투수가 더 많은 팬들에게 기억되는 법이다.

이제 갓 메이저리그에 데뷔를 한 신인 투수에게 팬들이 바라는 것 또한 후자다.

벌써부터 타자와 수 싸움에나 매달리며 노련한 투구를 하려고 한다면 신인 투수로서의 장점이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생각하는 차동호였다.

LA 다저스의 공격이 시작됐다.

오늘 경기의 관전 포인트인 좌완 파이어볼러들의 팽팽한 투수전은 분명 예상대로 진행되고 있었지만, 파이어볼러라는 명성답게 시원시원하게 타자를 윽박지르는 투수는 애리조나의 제이슨 브리번뿐이었다.

“맙소사! 또 다시 99마일이야!”

LA 다저스 그것도 차지혁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한 미국 남성이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제이슨 브리번은 벌써 4번째 99마일의 강속구를 던져대고 있었다.

“차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1회 이후 95마일의 공도 못 던지고 있잖아!”

“지난 경기에서 보여줬던 패기가 없어! 소극적으로 타자들을 맞춰 잡기만 하잖아!”

“신인 주제에 벌써부터 베테랑 투수처럼 공을 던지려고 하다니!”

몇몇 관중들이 차지혁의 피칭 스타일에 불만을 토하고 있었다.

“효율적인 투구를 하고 있는 중인데 무슨 헛소리야!”

“무조건 빠른 공만 던진다고 그게 최고인줄 알다니! 멍청이들 같군!”

“대기록이 눈앞에 있는데 신중하게 던져야지! 난 차가 아주 현명하고 똑똑하다고 생각해!”

일부 팬들은 차지혁을 옹호했다.

차동호는 같은 LA 다저스를 응원하는 팬들 사이에 의견이 팽팽하게 갈리는 모습을 보며 아쉽다는 생각만 들었다.

차지혁의 평소 스타일대로 공을 던졌다면 이렇게 의견이 갈리는 일 따위 없이 모두가 차지혁을 열광적으로 응원했을 테니 말이다.

6회 초까지도 다저스 타자들을 압도하고 마운드를 내려가는 제이슨 브리번을 향해 애리조타 홈팬들은 열광적으로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하지만, 6회 말 차지혁이 마운드에 오르자 언제 그랬냐는 듯 관중석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14이닝 퍼펙트에서 15이닝 째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09년 마크 벌리가 세웠던 기록을 18년 만에 새롭게 갈아엎을 수 있다는 사실은 LA 다저스 팬이 아니더라도, 차지혁을 응원하는 팬이 아니더라도 존중하고 숨죽여 지켜봐줄 필요가 있었다.

마운드 위에서 차지혁이 투구 준비를 하는 사이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포수와 사인을 주고받은 차지혁은 와인드업을 하고 힘껏 공을 던졌다.

쇄애애액!

퍼- 어엉!

“스트라이크!”

한 가운데를 꿰뚫어버린 무지막지한 강속구가 차지혁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갔다.

관중들 모두가 하나가 된 듯 전광판을 바라봤다.

101MPH

“이야아아아악!”

차동호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고, 뒤를 이어 관중들이 너도 나도 소리를 내지르며 환호했다.

차분하게 가라앉았던 열정이, 차갑게 식어가던 관심이 다시 뜨거워지는 순간이었다.

< 『해외편 - 108』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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