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107화 (107/221)

< 『해외편 - 107』 >

『해외편 - 107』

제이슨 브리번.

작년부터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실질적인 에이스 역할을 하고 있는 26살의 젊은 투수다.

평균 96마일, 최고 100마일에 이르는 강력한 포심 패스트볼과 80마일 후반의 고속 슬라이더를 구사하는 제이슨 브리번은 애리조나 팬들 사이에서는 제2의 랜디 존슨이라 불리고 있었다.

실제로도 2m가 넘는 큰 키와 바짝 마른 몸매는 자연스럽게 랜디 존슨을 떠올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거기에 제이슨 브리번 스스로도 제2의 랜디 존슨이라는 소리를 좋아해서 올 시즌부터는 콧수염과 머리까지 기르며 랜디 존슨 코스프레라는 라이벌 구단 팬들의 비웃음을 사고 있었다.

퍼- 엉!

전광판을 바라보니 97마일이 찍혀 있었다.

좌투수인 제이슨 브리번이 던진 공이 대각선으로 날아와 무릎 높이에서 몸 쪽을 찌르고 들어오니 우타자 입장에서는 손도 대지 못하며 루킹 삼진을 당하고야 말았다.

“저놈도 괴물이네. 메이저리그는 어딜 가나 꼭 괴물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니까.”

형수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LA 다저스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주중 마지막 3차전의 선발 맞대결은 좌완 파이어볼러들의 대결로 이미 크게 흥행을 예고하고 있었다.

작년부터 내셔널리그 최고의 좌완으로 급부상을 하고 있는 제이슨 브리번과 충격적인 데뷔전으로 모든 야구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나였기에 오늘 경기는 양보 없는 팽팽한 투수전이 될 거라는 예측이 강했다.

앞선 2연전에서는 1승 1패씩 승리를 나눠가졌다.

같은 내셔널리그 서부 지구 소속인 LA 다저스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였기에 상대팀을 이겨야 한다는 중압감이 클 수밖에 없는 경기다.

특히, 오늘 경기는 에이스 맞대결이라는 점에서 그 비중도가 더 높았다.

벌써부터 나를 두고 다저스의 에이스라고 부르긴 힘들었지만. 아닌게 아니라, 몇 몇 언론에서 에이스 맞대결이라고 표현을 하는 바람에 진짜 에이스 필 맥카프리가 굉장히 화를 내기도 했다는 소문은 귀가 있는 이상 듣지 못 들을 수가 없었다.

허무하게 루킹 삼진을 당한 크레이그 바렛의 뒤를 이어 타석에 선 코리 시거는 호쾌하게 배트를 휘둘렀지만, 배트 중심에 정확하게 타격을 하지 못하며 유격수 땅볼로 물러나고야 말았다.

뜬공, 삼진, 땅볼.

모든 선발 투수들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1회를 공 11개만으로 깔끔하게 마무리를 지으며 마운드를 내려가는 제이슨 브리번의 얼굴 표정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작년 메이저리그 진출 4년 만에 처음으로 20승의 고지를 밟았고, 평균자책점 3.37, 탈삼진 244개를 찍으며 돌풍을 일으켰다.

6년 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특급 투수 유망주로 드래프트 1라운드에 지명되고 드디어 잠재력이 터졌다는 말이 나오는 제이슨 브리번의 미래는 아무도 예상을 할 수가 없었다.

올 시즌 강력한 사이영상 후보 중 한 명인 제이슨 브리번은 이번 시즌 개막전에서도 선발로 나와 8이닝 1실점으로 무난하게 승리를 거머쥔 상태였다.

1회 말, 수비를 위해 마운드로 오르며 머릿속을 깨끗하게 비웠다.

개막전이자, 데뷔전의 퍼펙트 게임에 대한 여운 따위는 없었지만, 주변 시선에 대한 불편한 감정은 여전했다.

기대에 찬 팬들의 눈빛, 과연 데뷔전만큼 잘 해낼 수 있을 거냐는 언론의 냉정한 시선, 팀 동료들의 우려와 신뢰가 뒤섞인 태도까지 모든 것이 날 옭아매고 있었다.

컨디션 관리에 소홀함이 없는 성격이라 오늘도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마냥 좋다고 할 수도 없었다.

어깨에 짊어진 무게가 어느 때보다도 육중하게 날 짓누르고 있었으니까.

주심의 외침에 따라 1회 말 경기가 재개됐다.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보다는 토렌스의 미트만 바라봤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토렌스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리드를 믿고 따라와 달라고 몇 번이나 나에게 당부를 했었다.

나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퍼펙트 게임 이후, 급격하게 무너지는 투수들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해주려는 토렌스만의 깊은 배려였다.

초구부터 체인지업을 요구해왔다.

오늘 경기 직전 있었던 연습 투구에서 체인지업의 상태가 가장 좋다는 토렌스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인지, 타석에 바짝 달라붙어 타격을 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애리조나의 1번 타자 케이크 얼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원하는 대로 몸 쪽을 파고 들어가는 체인지업을 던져줬다.

부- 웅!

초구부터 그것도 1번 타자가 작정했다는 듯 배트를 휘둘렀다.

타이밍도 포심 패스트볼을 의식한 듯 빠르고 간결했다.

초구에 체인지업으로 인해 헛스윙을 하고 만 케이크 얼린의 표정이 잔뜩 구겨졌다.

마스크 뒤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토렌스의 얼굴이 보였다.

큰 이변이 없는 이상 오늘도 토렌스의 덕을 톡톡히 볼 것만 같았다.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토렌스를 믿고 던지자.’

LA 다저스의 주전 포수 마스크를 몇 년이나 쓰고 있는 토렌스다.

단 한 번 뿐이라고 하지만 골든 글러브 수상 경력도 있고, 전형적인 수비형 포수로서의 가치가 높은 선수다.

갓 메이저리그에 데뷔를 한 신인 투수로서 얼마든지 믿고 따를만한 포수다.

2구는 바깥쪽을 걸치는 컷 패스트볼, 3구는 무릎에서 떨어지는 바운드성 파워 커브에 케이크 얼린은 1번 타자로서의 역할을 전혀 해보지도 못하고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이어진 2번 타자 새미 판토리아노는 6구에서 유격수 앞 땅볼로 물러났고, 3번 타자로는 애리조나 거포 3인방의 막내 지미 그랜이 타석에 들어섰다.

지미 그랜를 설명하는 딱 좋은 말은 이거다.

새미 소사의 재림.

5년 동안의 마이너와 메이저를 오가며 겪은 무명 생활, 그리고 대폭발.

27살의 지미 그랜은 2018년 18살에 드래프트에 등록을 했으나, 아무 곳에서도 받아주질 않아 결국 아마추어 자유계약 선수 신분으로 신시내티 레즈 산하의 루키팀인 빌링스 무스탕스(Billings Mustangs)에 입단을 했다.

1년 동안 별 소득 없이 야구를 했고, 이듬해 루키 리그에서 3할의 타율과 22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싱글A의 베이커스필드 블레이즈(Bakersfield Blaze) 선수가 된다.

이후로도 꾸준하게 좋은 성격을 거두며 더블A까지 올라가지만, 제대로 된 성적을 내지 못하고 2차례나 트레이드를 당하다가 결국 애리조나까지 오게 된다.

중간 중간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인상적인 활약을 하지 못하고 마이너리그 선수라는 인식이 강해질 무렵,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2025년 6월 28일, 애리조나의 주전 1루수가 부상으로 이탈을 한 가운데 메이저리그에 콜업이 된 지미 그랜은 당일 경기에서 무려 3연타석 홈런을 터트리며 화려하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정말 인상적인 경기였지.’

이후, 지미 그랜은 5경기 연속 홈런을 터트리면서 집중 조명을 받으며 주전 1루수가 돌아오기 전까지 무려 3할 8푼의 타율과 16홈런, 33타점을 쓸어 담았다.

불과 1달만의 눈부신 기록이었다.

당연히 이달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덕분에 지미 그랜은 마이너행이라는 가혹한 통보를 당당히 피해갔다.

부상 후유증으로 성적이 떨어진 주전 1루수를 대신해서 꾸준히 경기 출장 기회를 잡은 지미 그랜은 0.324타율, 27홈런, 87타점이라는 높은 성적을 기록하며 신인왕까지 거머쥐게 된다.

2026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는 과감한 결정을 한다.

주전 1루수를 트레이드시키며 지미 그랜을 주전1루수 자리에 앉혀버린 거다.

반짝 스타로 사라지느냐, 진정한 스타가 되느냐의 기로에서 지미 그랜은 3할의 타율에 46개의 홈런을 터트리며 애리조나가 자랑하는 거포 3인방의 막내로서 확실하게 입지를 다지게 된다.

타석에 선 지미 그랜은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근육을 자랑하며 배트를 꽉 쥐고 서 있었다.

그를 새미 소사에 비교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몇 년 사이에 급격하게 불어난 근육량에 있다. 이전까지는 꽤 날씬한 체형의 발이 빠른 타자였다고 하니 여러 가지로 새미 소사와 비슷한 면이 많았다.

배트를 왼쪽 어깨에 걸치고 삐딱하게 서 있는 독특한 타격 자세와 다르게 굉장히 빠른 배트 스피드와 BA 평가 80점의 파워를 가진 지미 그랜이다.

‘약점이라면…….’

변화구, 그것도 슬라이더처럼 유인구성 구종에 그나마 약한 모습을 보이는 지미 그랜이었지만, 아쉽게도 나에게는 슬라이더가 없었다.

토렌스는 슬라이더가 없는 내게 비슷한 구종이라 할 수 있는 컷 패스트볼을 요구했다.

몸 쪽 바짝 붙여서 꺾여 들어오는 컷 패스트볼이었다.

글러브 안에서 그립을 확실하게 잡고 토렌스가 원하는 코스로 컷 패스트볼을 던졌다.

지미 그랜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맞출 것처럼 날아오는 컷 패스트볼이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몸으로 바짝 붙어 가던 공이 예리하게 꺾이며 토렌스의 미트에 정확하게 박혀 들었다.

퍼- 엉!

“스트라이크!”

주심의 판정에 지미 그랜이 고개를 좌우로 두 번 흔들었다.

방금 던진 공은 베스트라 불러야 할 정도로 훌륭했다.

좌타자 입장에서 쉽게 배트를 휘두를 수도 없고, 휘두른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배팅 포인트를 맞출 수가 없었기에 내야 땅볼이 될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은 볼이었다.

2구는 역시나 몸 쪽 높은 코스의 포심 패스트볼.

퍼엉!

“볼!”

토렌스가 미트를 내민 그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려 주심을 돌아봤다.

스트라이크가 아니냐는 물음을 건네는 듯 싶었다.

냉정하게 따져서 스트라이크라 부르면 타자가 억울할 공이고, 볼이라 부르면 투수가 아쉬운 공이었다.

‘오늘은 스트라이크 존이 빡빡하겠어.’

루키 존 가동인가?

아니면, 퍼펙트 게임을 달성할 당시 약간의 논란이 되었던 토렌스의 프레이밍인 때문인가?

각종 기록으로 인해 잠깐 소란만 일었다 관심도 못 받고 사라진 논란이었지만, 확실히 토렌스의 프레이밍에 주심들이 신경을 쓸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 가능한 범위였다.

어차피 확실한 스트라이크도 아닌 공에 미련을 둘 필요가 없었다.

3구로 던진 바깥쪽 파워 커브에 지미 그랜의 배트가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딱!

배트 윗부분 끝에 걸리면서 3루 방면 파울 라인을 크게 벗어났지만, 지미 그랜은 꽤 아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볼!”

4구는 바운드 성 파워 커브, 지미 그랜의 헛스윙을 유도하기 위한 공이었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5구로 던진 컷 패스트볼이 커트 당했고, 6구 포심 패스트볼은 살짝 밑으로 떨어지며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지 못하고 말았다.

2스트라이크 3볼까지 이어졌다.

LA 다저스 팬들은 일어서서 박수를 쳐주며 날 응원하고 있었다.

현재까지 9.2이닝 퍼펙트 게임 중이다.

지미 그랜만 아웃시키면 10이닝 퍼펙트다.

메이저리그 기록인 마크 벌리의 15이닝 퍼펙트까지는 한참이나 남아 있다지만, 가능성이 남아 있기에 많은 팬들은 또 다른 신기록을 기대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솔직히 나 역시 마크 벌리의 15이닝 퍼펙트 기록은 탐이 났다.

한 경기를 퍼펙트로 끝내는 것과 6이닝 동안 퍼펙트를 하는 건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르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당장 눈앞에 서 있는 지미 그랜을 아웃시켜야 했다.

무엇을 던져야 할까?

컷 패스트볼 사인이 나왔다.

토렌스 입장에서는 가장 지미 그랜을 까다롭게 만들 구종이다.

나 역시 그 결정에 공감했다.

유인구를 던지자니 지미 그랜의 모습이 너무 여유로웠고, 정면으로 승부를 하자니 그걸 기다리고 있는 지미 그랜의 모습이 영 껄끄러웠다.

시범 경기를 통해 느낀 내 구위의 한계는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아직까지 메이저리그 최정상급 파워를 가진 타자에게는 구위로 정면 승부를 보기가 쉽지 않았다.

사인을 받아들이고 와인드업 이후, 곧바로 초구와 같은 코스의 컷 패스트볼을 던졌다.

그런데 그 순간, 지미 그랜이 한 발 옆으로 물러나며 입가에 미소와 함께 배트를 힘껏 휘둘렀다.

‘당… 했다.’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는 토렌스의 표정도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토렌스가 분명 훌륭한 수비형 포수인 건 사실이지만, 지미 그랜 또한 5년 동안 마이너리그와 메이저리그를 오가며 산전수전 모두 겪은 베테랑이라는 사실을 까먹고 있었다.

메이저리그에서의 2년 동안의 활약이 결코 운이 좋아 터진 것이 아니라는 걸 나나 토렌스가 망각하고 있었던 거다.

배트가 공을 쪼갤 듯이 공간을 가르며 나왔다.

따… 악!

타구가 우익수 방면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맞는 순간 이건 넘어갔다는 느낌이 왔다.

퍼펙트가 깨지고, 2번째 경기 그것도 1회에 실점을 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화가 났다.

지미 그랜의 노림수에 당했다는 사실보다는 아직까지도 한참이나 부족한 내 실력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이런 실력으로 무슨 세계적인 선수라는 거야?’

비틀린 웃음이 나왔다.

어제 있었던 차동호 기자와 형수의 말이 참 허무맹랑하게 느껴졌다.

그들의 의도가 미래를 준비하라는 뜻임은 안다.

하지만,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알 수 없는 현실에서 세계적인 야구 선수니 어쩌니 하는 말들은 누가 들어도 자만이고, 오만이었다.

고개를 흔들며 굽혀졌던 허리를 피는 순간, 1루를 향해 달려가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는 지미 그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미 그랜의 손에 당장이라도 부러질 듯 심하게 금이 간 배트가 보였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보니 우익수 빌 맥카티가 수비 위치에서 약간 더 뒤로 이동한 자리에서 머리 위로 떨어지는 공을 글러브로 잡고 있었다.

“컷 패스트볼이라 이건가?”

웃음이 나왔다.

안도의 한숨도 입에서 흘러 나왔다.

그런데 입안은 무척이나 썼다.

< 『해외편 - 107』 > 끝

ⓒ 독고진

작가의 말

감기에....... 걸렸네요 ㅠㅠ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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