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05』 >
『해외편 - 105』
“헤이~ 척!”
클럽 하우스에 들어서자 토렌스가 날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빅터 페르난도의 영향 때문인지, 선수들 대부분이 나를 ‘척’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코쇼나, 쇼크, 몬스터 등으로 부르지 않아서 차라리 잘 됐다 싶기도 했다.
“어떻게 된 거죠? 부상이라면서요?”
“부상? 아! 내일 경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으니까 걱정할 것 없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을 하는 토렌스였다.
“참, 시계가 정말 좋아. 앞으로 몇 개는 더 받을 수 있겠지?”
토렌스가 손목에 찬 화려한 금장 시계를 가볍게 흔들며 웃었다.
롤렉스 시계, 무려 1만 5천 달러에 이르는 거액의 시계다.
한국 돈으로 따지면 1600만원이 훌쩍 넘어가는 고가의 시계로 퍼펙트 게임 다음날 황병익 대표가 토렌스에게 선물로 줘야 한다며 사가지고 왔다.
메이저리그에서는 퍼펙트 게임을 달성한 투수가 포수에게 롤렉스 시계를 선물로 주는 전통이 있었다.
“글쎄요.”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그렇게 대답하자 토렌스가 분명 나에게 몇 개는 더 선물로 받을 것 같다며 웃었다.
다른 투수들은 평생에 걸쳐 한 번이라도 해봤으면 하는 퍼펙트 게임을 토렌스는 나에게 몇 번이나 할 것처럼 말을 하니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옷을 갈아입으며 다시 한 번 토렌스에게 부상에 대해서 물었다.
형수가 오늘 갑작스럽게 선발 출장하게 된 이유는 토렌스가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작 4게임 만에 주전 포수가 부상으로 출장을 못하게 됐다는 건 굉장히 심각한 문제였다.
더욱이 토렌스의 포수 능력 덕분에 퍼펙트 게임을 달성할 수 있었던 나였기에 그의 빈자리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사실은 아무렇지도 않아.”
“예? 그런데 어째서 경기에 나갈 수 없다고 한 거죠?”
“당연히 척 때문이지.”
“그게 무슨 말이죠?”
토렌스가 잠시 클럽 하우스를 두리번거리고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어차피 클럽 하우스 내에 나와 토렌스 밖에 없었음에도 그는 꽤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이번 시즌 내내 척의 공을 받고 싶거든.”
“그게 무슨…….”
“알다시피 포수라는 포지션 자체가 시즌 내내 풀타임 출장이 쉽지 않잖아. 그리고 나도 이제 나이를 생각해야 할 시기이기도 하고 해서 이왕이면 적당히 휴식을 주면서 척이 등판하는 날에는 무조건 나도 같이 출장을 하기 위해서 머리 좀 썼지. 물론, 롤렉스 시계를 더 받으려는 생각도 있고 말이야. 하하.”
생각하지도 못했던 토렌스의 말에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토렌스의 말대로 포수라는 포지션은 시즌 내내 풀타임 출장이 불가능하다.
워낙 체력 소모가 심하기도 했고, 이런저런 이유로 부상에서도 자유롭지 못했으니까.
그렇다보니 모든 메이저리그 구단에서는 주전 포수를 대신할 수 있는 실력 좋은 백업 포수를 꼭 보유하고 있었다.
다저스에서는 형수를 백업 포수로 키울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제대로 성적을 내지 못하면 언제든 다른 포수 유망주를 메이저리그로 올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최악의 경우엔 7월 달에 형수를 트레이드 해버리거나, 백업 포수를 트레이드 해올 수도 있다.
이런 메이저리그 포수 시스템에서 토렌스는 스스로 몸 관리에 들어갔다는 의미다.
선택과 집중.
무리하게 많은 경기에 출장하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등판하는 경기에 반드시 출장하고 거기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하겠다 마음을 먹은 거다.
어차피 다저스의 에이스인 필 맥카프리나 3선발인 포스터 그리핀, 4선발 나단 코스코의 경기에만 꼬박꼬박 나와도 훌륭하게 시즌을 보냈다고 할 만했다.
‘게레로 감독이 용납할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이번은 토렌스의 뜻을 따라준 건 확실했다.
어쩌면 토렌스를 생각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한 배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퍼펙트 게임이나 노히트 게임을 달성한 투수가 다음 경기에서 엉망으로 무너지는 경우는 꽤 많았기에 아무래도 토렌스의 컨디션을 조절해서 나를 잘 리드해주길 원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쨌거나 토렌스가 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기에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리고 오늘 경기에서 형수가 정말 잘 해줘야 토렌스와 번갈아가며 경기에 출장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다는 것도 깨달았다.
어쩌면 나보다 토렌스가 형수의 선전을 기대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오늘 선발 투수는 어떻죠?”
“클레먼트? 나쁘지 않지. 구속도 빠르고, 구종도 다양하고. 다만.”
잠시 말을 멈춘 토렌스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컨디션이 좋지 못한 날에는 제구가 완전히 엉망이지. 특히, 와일드 피치(Wild Pitch)를 꽤 자주 만들기도 해서 그 날은 진짜 포수가 고생을 해야만 해. 사실, 내가 오늘 출장을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클레먼트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괜한 고생을 했다가 내일 경기력에 문제가 발생할까 싶었던 거야.”
@
쇄애액.
퍽!
홈플레이트 앞에서 공이 튀며 불규칙적으로 바운드가 되면서 포수 옆으로 공이 빠져나가고 말았다.
다급하게 마스크를 집어 던지며 형수가 공을 쫓아 움직였지만, 2루 주자가 3루까지 가기에는 아주 풍족한 시간이었다.
“벌써 4개째군.”
토렌스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말과 다르게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가득했다.
오늘 경기에서 마스크를 썼다면 형수가 아닌 자신이 저런 고생을 했어야 한다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3회. 고작 3회 동안 앤디 클레먼트는 4개나 되는 와일드 피치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와일드 피치로 인한 실점이 없다는 것 정도다.
마운드 위에서 잔뜩 신경질이 난 얼굴로 공을 던진 앤디 클레먼트는 94마일의 투심 패스트볼로 타자를 잡아내며 무사히 3회 말 수비를 끝냈다.
더그아웃으로 들어온 앤디 클레먼트는 포수 장비를 벗고 있는 형수에게 다가가 제법 큰 소리로 말했다.
“포수가 블로킹을 그렇게 못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내가 삼진으로 타자를 잡지 못했다면 실점을 할 뻔했잖아!”
포수 장비를 벗고 있던 형수로서는 앤디 클레먼트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명백하게 투수인 앤디 클레먼트가 잡을 수 없는 공을 던진 와일드 피치였다.
포수의 수비 능력이 떨어져서 공을 놓친 패스트 볼(Passed ball)이 절대 아니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런 사실을 앤디 클레먼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책임을 떠넘기며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또 시작이군.”
토렌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앤디 클레먼트, LA 다저스에서 꽤 공을 들여 키워낸 특급 유망주다.
미국 나이로 22살인 그는 2024년 2라운드 지명을 받으며 다저스 유니폼을 입었고, 마이너리그에서 착실하게 선발 수업을 쌓아 작년부터 메이저리그 투수가 되었다.
7승 10패. 4.21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앤디 클레먼트는 토렌스의 말처럼 컨디션이 좋을 때는 굉장히 좋은 투구를 보여줬지만, 반대로 컨디션이 좋지 못할 때는 스스로 무너지는 타입이었다.
무엇보다 어린 나이에 메이저리거가 되어서인지, 원래 성격인지 오만했으며, 자신의 잘못보다는 남을 탓하는 걸로 잘못을 회피하는 경향이 크다는 게 토렌스의 설명이었다.
그런 앤디 클레먼트에게 형수는 정말 만만한 상대였다.
“프레이밍도 엉망이고! 도루도 못 잡고! 블로킹마저 그 모양이면 포수를 그만두던지! 젠장!”
형수의 프레이밍, 미트질이 뛰어나다 할 순 없지만 스트라이크를 볼로 만들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았다.
형수의 어깨는 굉장히 좋다. 거기에 송구 능력도 평균 이상이라 할 만했다. 문제는 앤디 클레먼트의 투구 동작이 너무 길어서 아무리 포수의 도루 저지율이 높아도 잡기가 쉽지 않았다.
실제로 매년 다저스 투수들 중 도루 허용률이 가장 높은 투수가 앤디 클레먼트다.
블로킹 역시도 마찬가지다. 체구도 크고, 민첩성도 떨어지지 않았기에 블로킹 능력 역시 형수 정도면 평균 이상이라 불러도 좋았다.
결과적으로 앤디 클레먼트의 말은 모조리 억지 주장이란 사실이다.
다른 사림이 듣기에도 짜증이 날 정도로 억지 주장으로 성질을 부리고 나서야 앤디 클레먼트가 더그아웃 안쪽 문을 통해 나가버렸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상대에게 막말을 들은 형수의 표정이 당장이라도 폭발 할 것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는 모양새가 당장이라도 앤디 클레먼트의 뒤를 쫓아가서 한 바탕 할 것만 같았기에 재빨리 곁으로 다가갔다.
“어떤 마음인지는 알겠는데, 지금은 참아.”
“씨발! 너도 들었잖아? 저 개새끼가 지가 좆같이 공 던져 놓고 나한테 책임을 떠넘기잖아!”
형수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줄줄 나왔다.
다행이라면 흥분해서인지 한국말이었고, 주변 선수들은 그걸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분위기와 거친 음성만으로도 어떤 심정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공을 바닥에 패대기 친 새끼가 누군데!”
잔뜩 화가 난 형수의 모습은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만큼 화가 났다는 뜻이다.
나 역시 이해는 가지만, 지금은 경기 중이다.
무엇보다 이미 선발의 한 자리를 꿰차고 있는 앤디 클레먼트와 백업 포수로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형수의 위치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났다.
여기서 형수가 앤드 클레먼트와 싸움이라도 벌인다면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실질적인 피해는 형수가 더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
어차피 감독과 코치, 선수들은 물론 야구팬들까지도 앤디 클레먼트가 와일드 피치를 했다는 걸 알고 있다.
억울할 것도 없고, 와일드 피치로 인한 불이익을 당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싸우면 다르다.
그러니 경기 중인 지금은 꾹 참아야 한다.
차분하게 설명을 하니 형수가 그제야 화를 누그러트렸다.
그렇지만 흥분한 마음을 완전히 다독이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열 받으면 다른데 풀지 말고 타석에서 풀어. 상대 투수가 클레먼트라고 생각해.”
내 말에 형수가 이를 바드득 갈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수는 그날 3타수 2안타, 특히 9회 초 5:6의 1점차 패배 상황에서 2타점 2루타를 터트리면서 게레로 감독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반대로 앤디 클레먼트는 결국 제구력 난조로 인해 5이닝 5실점으로 강판을 당하며 시즌 첫 번째 경기를 엉망으로 시작하고야 말았다.
“개자식! 패전 위기에 놓인 놈 구했더니 오히려 내 욕을 하는 거 봤지?”
경기가 끝나고 기분 좋은 마무리를 하던 형수는 클럽 하우스에서 자신의 실점이 포수 때문이라며 불만을 토하던 앤디 클레먼트로 인해 하늘 높이 치솟았던 좋은 기분이 곤두박질을 당하고 말았다.
“원래 그런 놈이라고 하니까 신경 쓰지 마.”
“그래도 열 받잖아!”
“그래서 어쩌려고? 따지기라도 하려고?”
“그건 아니지만…….”
오늘 경기의 승자는 형수다.
앤디 클레먼트는 오히려 감독과 코치들 눈에 찍힌 투수가 되고 말았다.
더불어 짜릿한 역전승을 거두며 한껏 달아올랐던 클럽 하우스 분위기를 망치려고 했던 앤디 클레먼트를 마이크 트라웃이 따끔하게 훈계하기도 했다.
올 시즌 LA 다저스의 캡틴이 된 마이크 트라웃은 클럽 하우스에서의 역할을 꽤 열정적으로 해내고 있었다.
제 아무리 건방지고 오만한 앤디 클레먼트라 하더라도 마이크 트라웃이라는 대스타 앞에서는 제대로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내가 확실하게 주전 포수가 되면 그 새끼 공은 절대 안 받는다!”
지금 토렌스가 앤디 클레먼트를 피하고 있으니 당분간은 지속적으로 배터리를 맞춰야 할지도 모르는 형수의 처지를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다저 스타디움을 나와 집으로 향할 때였다.
“차지혁 선수!”
익숙한 한국말, 그리고 익숙한 음성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금테 안경에 커다란 서류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있는 30대 초반의 남자, 차동호 기자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차동호 기자님!”
반갑게 차동호 기자를 향해 다가갔다.
“전 세계를 흥분시킨 환상적인 데뷔전을 다시 한 번 축하합니다!”
악수와 함께 차동호 기자는 축하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절 취재하시려고 왔습니까?”
내 물음에 차동호 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윗선에서 어찌나 등을 떠밀던지 월급 받아먹고 사는 직장인이라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먼 미국 땅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차지혁 선수의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면 절대 인터뷰를 할 생각이 없습니다. 사실, 취재라는 명목으로 떠밀리다시피 왔다고는 말했지만, 솔직하게 제가 바라는 건 내일 있을 차지혁 선수의 두 번째 선발 경기를 직관하는 거니까요. 하하하.”
차동호 기자의 말에 나는 웃고 말았다.
내가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기자가 바로 차동호 기자다.
다른 기자들과는 다르게 팬심으로 날 응원하며 나에 대한 언제나 호의적인 기사를 써주는 고마운 사람이다.
“누구셔?”
형수가 차동호 기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간단하게 차동호 기자에 대해서 소개를 해줬다.
“장형수 선수! 반갑습니다! CBC 인터넷 스포츠 기자 차동호라고 합니다! 오늘 경기 정말 멋있었습니다! 일석 고등학교 시절 때부터 팬이었습니다.”
팬이라는 말에 형수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금세 형수와 차동호 기자는 친한 사이처럼 편안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몇 마디의 말을 주고받더니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형수는 차동호 기자를 집으로 초대까지 해버렸다.
< 『해외편 - 10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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