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102화 (102/221)

< 『해외편 - 102』 >

『해외편 - 102』

6회 초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공격.

다저 스타디움은 고요했다.

관중석의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꽉 찬 관중들의 낮은 호흡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툭. 툭. 툭. 툭.

로진백을 왼손에 묻히며 심호흡을 했다.

1회부터 5회까지 모든 타자들을 삼진으로 잡았다.

기록보다는 오늘 경기에 집중하며 던진 결과였다.

컨디션이 좋았던 것도 이유 중 하나고, 1회부터 토렌스의 신들린 미트질에 큰 도움을 받으며 자신감을 얻은 것도 이유 중 하나며, 흔들릴 수 있었던 시점에 내 심적 안정을 찾아준 토렌스의 조언도 이유 중 하나였다.

‘오늘 토렌스가 아니었다면 이런 말 같지도 않은 기록이 나오지도 못했겠네.’

지금까지 최고의 수훈 선수를 뽑으라면 난 자신 있게 토렌스라고 말할 수 있다.

형수가 아니어서 아쉽다고 생각했던 경기 전이 토렌스에게는 너무나 미안할 정도다.

그리고 확실하게 형수는 아직 한참 멀었다는 걸 오늘 경기를 통해 똑똑히 깨달았다.

포수라는 위치가 갖는 존재감과 무게감이 얼마나 막대하고 무거운 것인지를 확실하게 느끼고 있는 경기다.

지금까지 15타자 연속 삼진.

더그아웃 누군가의 말처럼 앞으로 절대 깨지지 않을 불멸의 기록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15명의 타자를 연속으로 삼진을 잡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까.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아직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16번째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에디 앤더슨.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7번 타자, 3루수.

수비는 꽤 준수한 편이지만, 타격은 솔직히 3루수라는 포지션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약하기만 했다.

때문에 스토브리그에서 샌디에이고가 3루수를 영입하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아쉽게도 영입을 하지 못했고 덕분에 아직까지도 선발 맴버로 남아 있는 선수가 에디 앤더슨이다.

타석에 선 에디 앤더슨의 모습은 솔직히 말해서 상위 타선의 타자들과 비교했을 때, 만만하게 보였다.

첫 번째 타석에서도 무기력하게 배트를 휘두르다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그 때문인지 위축되어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초구는 몸 쪽 낮은 코스의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포심 패스트볼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에디 앤더슨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나를 노려봤다.

두 번째 공은 우타자가 가장 싫어하는 바깥쪽을 살짝 걸치는 컷 패스트볼.

“스트라이크!”

주심의 콜에 관중석 곳곳에서 흥분한 관중들의 호흡소리가 들려왔다.

2스트라이크 노볼.

공 하나면 또 다시 삼진이다.

16타자 연속 삼진!

관중들은 눈도 깜빡하지 않았고, 모든 행동조차 멈추고 있었다.

역사적인 순간이다.

오늘의 경기를 평생의 자랑거리로 삼아도 좋을 정도다.

이런 대기록의 경기를 직접 관전한다는 건 메이저리그의 팬으로서 정말 어마어마한 행운이라 불러도 좋았다.

세 번째 공에 대한 토렌스의 사인이 나왔다.

나와 일치했다.

위축되어 있는 에디 앤더슨의 배트를 허무하게 허공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최상이 공, 높은 코스의 포심 패스트볼이다.

가만히 있으면 볼이지만, 현재 심리적인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는 에디 앤더슨이라면 눈에 공이 들어오는 순간 이것저것 계산할 여유 없이 배트를 휘두르고 만다.

스트라크 존에서 공 하나가 완전히 빠지는 볼을 던졌다.

쇄애애액.

날아가는 공.

동공이 확장되며 허리를 비틀며 배트를 휘두르는 에디 앤더슨.

딱.

배트 윗부분에 공이 맞았다.

하늘 높이 뜬 공이 1루 쪽으로 날아갔다.

1루 수비를 하고 있던 미치 네이는 당황한 얼굴로 공을 바라보며 조금씩 움직였다.

바람을 탄 공이 아주 조금씩 라인 밖으로 움직였지만, 아직까지는 확실하게 1루 선상 안쪽이었다.

베이스는 이미 넘어섰으니 어디에 떨어지느냐가 관건.

모두의 시선이 공과 1루수 미치 네이를 향했다.

미치 네이는 공을 바라보고,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느라 바빴다.

라인 안으로 떨어지면 안타, 라인 밖으로 떨어지면 파울.

다른 때였다면 고민할 것 없이 쉽게 잡으면 그만인 공이다.

그런데 지금은 무작정 잡을 수가 없는 공이었다.

안타가 될 공이라면 무조건 잡아야하지만, 만약 파울이 될 공이라면 잡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다.

파울로 처리해야만 다시 한 번 나에게 삼진의 기회를 줄 수 있으니까.

공을 따라 움직이던 미치 네이가 1루 선상에서 멈춰섰다.

높이 뜬 공이 이제는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안타냐, 파울이냐를 명확하게 판단할 수 없는 절묘한 위치에 선 미치 네이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잡지 마!”

관중석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 소리에 미치 네이의 몸이 움찔 거렸다.

“잡지 마! 잡지 마!”

한 명의 외침이, 서너 명이 되고, 이윽고 수백, 수천 명의 관중들이 하나 같이 타구를 잡지 말라며 소리쳤다.

“잡아! 잡아야 돼!”

잡지 말라는 관중들 속에서 잡아야 한다며 소리치는 관중이 생겨나자, 그에 힘을 얻은 일부 관중들도 한 목소리로 잡으라고 소리쳤다.

한 쪽에서는 잡으라고 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잡지 말라고 하고.

굳은 표정의 미치 네이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위치와 타구의 방향을 확인했다.

타구가 땅에 떨어져봐야 알 정도로 선상 바로 위에서 공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미 1루 베이스를 지나쳤기 때문에 타구가 라인 안쪽으로 떨어진 후 굴러서 라인 바깥으로 빠진다 하더라도 안타.

라인을 맞아도 안타다.

오직 라인 밖으로 공이 떨어져야만 파울로 선언이 되는 상황이었다.

“잡아! 잡아!”

“잡지 마! 잡지 마!”

잡으라는 관중들과 잡지 말라는 관중들의 외침이 미치 네이를 괴롭히고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안타가 된다면?

삼진 기록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져오던 퍼펙트 게임마저 끝이 나고 만다.

터- 억.

고민에 빠져있던 미치 네이는 결국 글러브를 들어 타구를 잡아버렸다.

“아아아아아아……!”

장탄식을 터트리며 털썩 주저앉은 관중들이 속출했다.

일부 과격한 관중들은 욕설을 내뱉으며 미치 네이를 비난했다.

타구를 잡은 미치 네이가 날 바라봤다.

뭐라고 규정을 지을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복잡한 감정이 잔뜩 꼬여 있는 표정의 미치 네이의 모습에 나는 괜찮다며 희미하게 웃어주고 말았다.

연속 삼진 기록은 15명의 타자로 끝이 났다.

솔직히 아쉬운 마음이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기록에 연연하면서 공을 던진 건 아니었지만, 충분히 삼진의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빗맞은 타구가 발생했고, 그것이 안타냐, 파울이냐를 구분할 수 없었다는 건 아쉽기만 했다.

‘결국은 내 운이지 뭐.’

미치 네이도 그 짧은 순간 사이에 무수히 많은 고민을 했을 거다.

그리고 그가 내린 결론은 단 하나였겠지.

두 가지의 가능성을 모두 포기하느니, 하나의 가능성만이라도 살리겠다는 의지인 거다.

이제 남은 건 퍼펙트 게임이다.

미치 네이가 직접 나에게 다가와 공을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부탁한다.”

무엇을 부탁한다는 소리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여기서 퍼펙트가 깨지면 두고두고 미치 네이는 욕을 먹을 수도 있다.

“최선을 다해보죠.”

“내 부탁을 들어주면 네가 원하는 게 뭐든 다 들어줄게.”

미치 네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1루 수비를 하기 위해 돌아갔다.

여전히 일부 관중들은 그를 향해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미치 네이를 비난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경기 중에 그런 말을 해서 좋을 것 없다는 걸 알기에 최선을 다해 투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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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혁 차! 대단합니다! 연속 삼진 기록이 깨졌지만,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위력적인 피칭으로 조시 벨라를 또 다시 삼진으로 처리합니다!

-믿어지지 않는 군요! 어떻게 저런 어린 투수가 기록에 연연하지 않고 피칭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불가사의할 정도군요!

-오늘 경기를 보시고 계신 다저스 팬들은 과연 시범 경기에서 봤던 그 투수가 맞는지 의심이 드실 것 같습니다!

-시범 경기 때와는 완전히 다른 지혁 차군요. 우선 오늘 최고 구속이 102마일이고, 그 외의 다른 구종들 역시 대단하군요. 무엇보다 시범 경기 때처럼 모든 타자들을 상대로 굉장히 공격적인 피칭을 하고 있지만, 결과는 전혀 다르군요. 이걸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맥스 프리드 헛스윙으로 두 번째 삼진을 당하며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6회 초 공격이 끝났습니다! 이렇게 되면 에디 앤더슨의 타구가 정말 아쉽다고 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길버트, 아무래도 오늘 미치 네이의 타구 판단이 상당한 논란거리가 될 수 밖에 없는데, 어떻게 보셨나요?

-솔직히 정말 애매한 타구였죠. 지금 다각도에서 촬영된 화면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보는 것과 같이 타구가 어디로 떨어질지 쉽게 예측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판단이 어려웠죠. 미치 네이로서도 굉장히 고민을 했겠지만, 결국 타구를 잡았죠. 그 판단이 오늘 경기 이후 어떤 식으로 평가를 받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야수로서 미치 네이는 자신의 역할을 했다는 것만큼은 비난할 수 없죠.

-하지만, 아쉬운 건 사실입니다. 6회에도 지혁 차는 두 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잡았습니다. 만약, 미치 네이가 잡은 타구가 파울로 판정이 됐다면 15타자 연속 삼진이 18타자 연속 삼진으로 늘어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물론 가능성이 없는 말은 아니죠. 하지만, 결과는 아무도 모르죠.

-그렇긴 합니다만, 아쉬운 건 사실이죠.

-연속 타자 삼진 기록을 멈췄지만, 지혁 차는 오늘 또 하나의 대기록에 도전을 하고 있죠.

-그렇습니다! 퍼펙트 게임입니다! 무엇보다 신인 투수가 데뷔전에서 퍼펙트에 성공을 한다면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며, 절대 깨지지 않을 불멸의 기록으로 남게 됩니다! 재밌는 기록은 지혁 차는 한국에서도 데뷔전에서 퍼펙트 게임에 도전을 했다가 포수의 실책으로 노히트 게임으로 그쳤죠.

-한국에서도 그렇고 메이저리그에 와서도 정말 충격적인 데뷔 무대를 치르는 지혁 차군요.

-속단하긴 이르지만, 이 정도의 투수라면 LA 다저스의 2억 5천만 달러가 결코 아깝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까울 수가 없죠. 데뷔전에서부터 이미 전국구 스타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무엇보다 지혁 차의 나이가 한국 나이로 21세지만, 미국 나이로는 19세죠. 7년 후라 하더라도 26세. 투수로서 절정의 기량을 뽐내는 시기이니 벌써부터 재계약에 들 금액이 얼마나 될지 예측조차 불가능하군요.

-그러고 보면 오늘 만약 퍼펙트 게임이나 노히트 게임이 나온다면 메이저리그 역대 최연소 투수로서 지혁 차의 이름이 기록됩니다. 지금까지의 기록을 살펴보면 퍼펙트 게임의 경우 1968년 미네소타 트윈스를 상대로 오클랜드의 투수였던 캣피시 헌터 선수가 22세의 나이로 최연소 퍼펙트 게임의 주인공이고, 노히트의 경우 바이다 블루 선수가 21세입니다. 퍼펙트 게임이든, 노히트 게임이든 어느 것 하나라도 오늘 경기에서 달성될 경우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연소 투수가 등장하게 됩니다.

-과연 오늘 어떤 결과가 나올지 정말 궁금하군요.

-맥스 프리드 투 아웃까지 잘 잡아 놓은 상황에서 웨인 스테인에게 볼넷을 줬습니다. 타석에는 아직까지 오늘 경기의 히어로인 지혁 차 선수가 들어섭니다. 투수로서의 피칭 능력은 굉장하지만, 타자로서의 타격 능력은 솔직히 크게 기대할 것이 없는 지혁 차 선수입니다. 앞서 있었던 두 번의 타석에서는 모두 삼진으로 물러났는데 이번에는 어떨지 지켜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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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온 타석.

솔직히 어느 누구도 나에게 타자로서의 타격을 기대하진 않을 거라 생각한다.

투수에게 타격까지 잘 하길 바라는 건 분명 과한 욕심이니까.

하지만, 3번씩이나 삼진을 당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범타!

안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타구를 그라운드 안으로 넣는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평소보다 배트를 짧게 잡을까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맥스 프리드의 공이 빠르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지만, 배트 스피드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른 공은 아니었다.

‘초구에 냅다 갈겨버려. 어차피 너도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면 초구에 무조건 스트라이크 잡으려고 하잖아? 상대 투수도 마찬가지야. 더욱이 너처럼 무기력하게 두 번씩이나 삼진을 먹은 투수를 상대로 굳이 어렵게 초구를 던지려고 하겠어?’

타석에 들어서기 전, 형수가 했던 말이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말이었기에 초구부터 힘껏 배트를 휘두르겠다 마음을 먹고 타석에 들어섰다.

마운드에 선 맥스 프리드가 1루 주자를 의식하고 있다.

‘무조건 패스트볼이다!’

맥스 프리드에게 패스트볼 계열은 포심 패스트볼과 컷 패스트볼이 전부다.

확률적으로 컷 패스트볼보다는 포심 패스트볼을 던질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러니 나는 무조건 포심 패스트볼이라 여기고 배트를 휘두른다.

코스는?

고민하지 말고 몸 쪽으로 생각한다.

앞선 두 타석에도 몸 쪽 공을 위주로 던졌으니까.

반보 정도 홈 플레이트에서 멀게 섰다.

무조건 몸 쪽 공을 의식한 위치다.

1루 주자를 힐끔 바라본 맥스 프리드가 곧바로 공을 던졌다.

일직선상으로 쭈욱 날아오는 공.

‘포심 패스트볼! 그리고 몸 쪽 코스!’

예상 적중이다.

미련 없이 부드럽게 몸을 회전시키며 타격을 했다.

따- 아악!

< 『해외편 - 102』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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