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101화 (101/221)

< 『해외편 - 101』 >

『해외편 - 101』

12타자 연속 삼진.

그리고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기록.

4회 초 수비를 마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니 주변 분위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항상 밝은 분위기로 선수들을 독려하는 게레로 감독조차 조심스럽게 날 맞이해줬고, 다른 코치들과 선수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대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나에 대한 배려인 셈이다.

고맙긴 하지만, 한 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하다.

“커, 컨디션은 괘, 괜찮지?”

형수마저 어울리지 않게 말까지 더듬거리고 있었다.

애써 신경을 쓰지 않으려는 척하는 모습이 더 우습게 보였다.

웃기는 건 형수의 말에 더그아웃의 모든 선수들과 감독, 코치들까지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부 선수들 중에는 왜 쓸 때 없이 말을 걸었냐는 질책의 눈빛까지 보내고 있을 정도였다.

“안 괜찮으면? 나 대신 마운드에 올라가려고?”

“뭐?”

깜짝 놀라며 나를 바라보는 형수와 마찬가지로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는 선수들의 모습에 실없는 장난을 한 내가 더 놀랄 정도였다.

“뭘 그렇게까지 놀라는 거야? 농담이잖아. 농담.”

모두 들으라는 듯 그렇게 말하자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던 선수들은 하나 같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

“너는 지금 상황에서 그런 농담이 나오냐?”

형수가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그렇게 말하며 날 타박했다.

“뭐 어때서?”

“너 지금 열두 타자 연속 삼진이야. 메이저리그 신기록이라고! 앞으로 네가 한 명, 한 명 삼진을 계속해서 잡을 때마다 그게 곧 역사가 되는 일인데 긴장도 안 되냐? 그런 실없는 농담이 나오냐고. 아무리 다이아멘탈이라 하더라도 그렇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숨을 푹푹 내뱉었다.

삼진을 잡을 때마다 역사가 된다.

기분 좋은 소리다.

그만큼 모든 사람들이 내가 던지는 공 하나, 하나에 집중을 한다는 소리다.

“참, 지금 방송도 난리가 났다더라. 실시간으로 네 투구 영상이 미국 전역에 중계가 된단다.”

“오늘 전국 중계 아니잖아?”

“당연히 아니지. 메이저리그 개막일이니 지역 방송국마다 담당 구단의 개막전 경기를 생중계해야지. 그런데도 일부 지역 방송국들이 KCAL-TV에 다급하게 중계권을 사서 생방으로 중계를 한다고 하더라. 아까 구단 직원이 그렇게 말하더라.”

KCAL-TV는 LA 다저스 구단과 중계권 계약을 독점하고 있는 LA 지역 방송사다.

전국 생중계 방송.

한국 프로 야구를 즐기는 팬들에게는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 싶겠지만, 미국이라는 땅덩어리가 워낙 큰 나라는 각 지역마다 케이블 방송사가 따로 있었기에 전국 동시 생중계라는 건 웬만해선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형수의 말대로 오늘은 메이저리그 개막전이다.

시차 문제로 인해 지역마다 경기 시간이 다르지만, 그렇다고 LA 다저스의 개막전을 생방으로 중계하는 지역은 그리 많지 않다.

때문에 메이저리거에게는 두 부류의 스타가 존재한다.

지역구 스타와 전국구 스타.

LA 다저스에서 아무리 유명하고 많은 연봉을 받더라도 내셔널리그를 벗어나면 인지도가 거의 없는 선수로 전락하는 경우를 지역구 스타라고 한다.

그게 말이 되냐 싶지만, 미국에서는 말이 된다.

지역구 스타가 전국구 스타가 되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은 올스타에 선정이 되거나, 각종 기록에서 순위권에 드는 일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아주 드문드문 주어지는 전국 방송을 계기로 확실하게 인지도를 쌓는 방법 밖에 없다.

“데뷔전부터 전국구 스타로 떠오르겠구나.”

“몸값 자체가 전국구 스타잖아.”

“…너 어디 아프지? 이런 중요한 경기에 실없는 농담을 자꾸 하는 게… 서, 설마 너?”

“뭐?”

형수가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내 귀에 속삭였다.

“금지 약물 복용한 건 아니지? 너 지금 약기운에 공 던지는 거 아니지?”

형수의 말 같지 않은 소리에 녀석의 머리통을 냅다 후려갈겼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지만, 이번에는 나도 모르게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고 말았다.

“미쳤냐!”

“끙.”

그래도 제 잘못은 아는지 형수가 반발하지 않고 가만히 제 머리만 매만졌다.

“넌 떨리지도 않냐?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냐? 나였으면 지금 신경이 잔뜩 곤두서서 누가 말만 걸어도 감정을 조절할 수 없을 텐데.”

이해한다.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이니까.

하지만, 마누엘 마고에게 한 가운데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면서 모든 불안, 걱정, 기대, 집념, 욕심 등을 모두 함께 내던졌다.

메이저리그의 역사를 새로 쓸 기록을 세웠지만, 언제고 누군가에게 결국은 깨어질 기록이다.

기록에 연연한다고 당장 구속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구위가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제구력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며, 내가 던지는 변화구가 마구로 변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심리적으로 긴장감과 압박감을 받으면 자연적으로 신체에도 문제가 생긴다.

무엇보다 투수라는 예민한 포지션의 특성상 멘탈이 흔들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내려놓으면 된다.

타자 한 명, 한 명을 상대로 기록보다는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으로 공을 던질 뿐이다.

어차피 삼진은 아웃 카운트를 잡아내는 방법 중 하나일 뿐이고, 안타나 홈런 등을 생각하면 타자와의 승부에서 삼진을 잡아낸다는 건 극히 적은 확률 중 하나였다.

매번 그 적은 확률을 기대하며 삼진을 잡는다?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당장 다음 수비에서 선두 타자에게 삼진을 잡는 것보다 다른 방법으로 안타나, 아웃 카운트를 가져올 확률이 몇 십 배나 높았다.

작은 확률에 집착해서 경기 자체를 망치는 바보스러운 투수가 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물 줄까? 아니면 음료로 줄까?”

형수가 옆에서 시중이라도 들겠다는 듯 그렇게 물어왔다.

“유난스럽게 굴지 말고 그냥 평소처럼 해.”

“그래도 어떻게 그러냐. 다른 것도 아니고 대기록을 이어나가고 있는 사람한테…….”

형수의 말을 흘려들으며 몸을 일으켰다.

4회 말 LA 다저스의 공격이 8번 웨인 스테인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헬맷을 쓰고 배팅 장갑을 끼고는 구단에 주문을 해놨던 나무 배트를 들고 대기 타석에서 스윙 연습을 했다.

시간을 쪼개가며 배팅 연습을 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큰 효과는 없었다.

어렸을 때는 타격에 대한 감각이 나쁘지 않다 여겼지만, 어디까지나 고만고만한 수준의 투수들을 상대로 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메이저리그라는 세계 최고의 투수들 앞에서는 하잘것없는 감각이었다.

웨인 스테인이 2루수 땅볼로 아웃이 되며 물러나자, 내가 타석에 들어섰다.

‘눈빛으로 죽이겠네.’

마운드 위에 서 있는 맥스 프리드의 눈초리가 굉장히 사나웠다.

상처 입은 맹수마냥 날 노려보는 모습이 섬뜩할 정도였다.

1회 4점을 내준 이후부터는 안정적으로 마운드를 지키고 있었지만, 상대 투수가 워낙 압도적이다보니 꽤나 자존심이 상한 듯 보였다.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지만 말이다.

쇄애애액!

퍼엉!

“볼!”

몸 쪽으로 심하게 붙는 볼에 화들짝 놀라며 타석에서 물러났다.

맥스 프리드의 몸 쪽 볼이 나오자 관중들이 욕설과 함께 비난을 퍼부으며 맥스 프리드를 압박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투수를 상대로 몸 쪽 볼이라니.

관중들의 야유와 욕설에도 불구하고 맥스 프리드는 날 노려보고 있었다.

‘여기서 내 기를 죽이겠다는 거군.’

아니면, 반대로 날 흥분하게 만들겠다는 의도거나.

어떤 노림수든 맥스 프리드의 개인의 행동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더그아웃에서 나온 작전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타석에서 물러난 상태에서 힘차게 배트를 3, 4번 휘둘렀다.

보란 듯이. 몸 쪽으로 던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타격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맥스 프리드의 눈이 일그러졌다.

타석에 서서 타격 자세를 취하자 다시 공이 날아왔다.

이번에도 몸 쪽이다.

그런데 볼이 아니라 스트라이크였다.

전광판을 바라보니 92마일이라고 찍혀 있었다.

여전히 체감하기에는 95마일 이상처럼 느껴졌다.

이런 공을 약간의 연습만으로 쳐낸다? 정말 욕심이다.

세 번째 공이 날아왔다.

포심 패스트볼이라 여기고 힘껏 배트를 휘둘렀다.

따악!

손바닥을 타고 팔까지 강한 진동이 왔다.

혹시나 싶어 기대를 갖고 타구를 바라봤지만, 역시나 타구는 3루 라인 선상 바깥으로 휘어져 나갔다.

이번에도 몸 쪽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공이었다.

‘그나마 건드리는 건 가능하네.’

살짝 자신감이 들었다.

하지만, 뒤이어 날아온 낮게 떨어지는 체인지업에 허망하게 헛방망이질을 하며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처음에 이어서 두 번째로 삼진을 당하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살짝 기분 나쁜 표정으로 더그아웃으로 돌아오자 형수가 한 마디를 했다.

“열두 번이나 삼진을 시켜놓고 달랑 두 번 삼진 당했다고 불만스러운 표정이라니… 도둑놈이 따로 없네.”

형수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2번이나 안타를 치고 출루를 했던 던컨 카레라스가 3번째 타석에서는 1루수 땅볼로 아웃이 되며 5회 초 샌디에이고의 공격으로 바뀌었다.

“레코드 차! 가서 불멸의 기록을 한 번 세워봐!”

형수가 더그아웃에서 그렇게 외쳤다.

“레코드 차는 또 뭐야.”

미국에 와서 늘어난 거라고는 몸무게와 이상한 별명들뿐이었다.

@

한국은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처음 차지혁이 LA 다저스 개막전 선발 투수로 경기에 나간다고 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기대만큼이나 우려심도 컸다.

미국만큼 비관적이진 않았고, 일본만큼 조롱기 섞인 비웃음은 없었지만, 시범 경기에서 보여줬던 경기력에 실망을 한 한국 팬들이 적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다수의 팬들은 차지혁이 편안한 경기에서 등판하길 원했다.

아무리 한국 무대를 초토화시켰다 하더라도 시범 경기에서 보였던 경기력은 확실히 메이저리그의 높은 벽을 실감하게 만들었고, 그만큼 차지혁에 대한 걱정과 불안함이 클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데뷔전으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라는 상대적인 약팀은 분명 좋았으나, 개막전 선발은 심리적인 부담감이 너무 클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렇게 시작된 개막전 데뷔 경기는 한국의 모든 공공장소부터 시작해서 생방송으로 전파를 탔다.

첫 타자를 상대로 3구삼진을 잡았을 때, TV나 라디오, 인터넷을 통해 경기를 실시간으로 중계 받던 모든 국민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렇게 1회, 2회, 3회, 그리고 메이저리그 신기록을 세운 4회가 지나가자 한국 언론과 인터넷은 말 그대로 마비가 될 정도로 차지혁의 경기 이야기로 들끓었다.

오죽했으면 각종 방송사마다 방송화면 하단에 속보라며 차지혁의 메이저리그 신기록을 전할 정도였다.

야구에 관심이 없던 사람, 차지혁이라는 이름만 들어봤던 사람, 경기를 모르고 있던 사람 등등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이제는 LA 다저스 개막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대박이 난 곳이라면 단연 LA 다저스와 중계권 계약을 하고 있는 MSB 방송국이었다.

“황 부장! 황 부장!”

부장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50대 중반의 남성이 난입했다.

“국장님!”

“차지혁 중계 보고 있었던 거야?”

“물론입니… 삼진입니다! 삼진!”

5회 초, 샌디에이고의 공격을 막기 위해 마운드에 오른 차지혁은 선두 타자인 4번 타자 윌리 아다메스를 강력한 체인지업으로 삼진을 잡아냈다.

“또 다시 기록 경신이군!”

“열세 번째 연속 삼진입니다! 국장님!”

“정말 대단한 놈이야!”

국장은 혀를 내두르며 TV를 바라봤다.

“그런데 국장님께서 여기까진 무슨 일이십니까?”

“아! 그렇지! 특집 방송 편성해!”

“예?”

“차지혁 특집 방송을 편성하라고! 다른 곳도 아니고 메이저리그에서 역사에 남을 대기록을 달성한 선수잖아! 이런 좋은 기회가 어딨어? 이건 사장실에서 직접 내려온 지시니까 무조건 특집 방송 편성해! 2부작, 아니 4부작이든, 6부작이든 차지혁에 관한 특집 방송을 편성하도록 해! 인력은 부서 상관없이 마음껏 데려다가 팀 만들고, 필요한 경비도 마음껏 갖다 써! 3일 안으로 기획서 만들어서 내 방으로 가져오고, 아! 당장 LA로 사람 보내서 인터뷰 따오고!”

국장의 말에 황 부장이 난감하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게 쉽지 않습니다.”

“뭐?”

“국내에 있을 때부터 그랬습니다. 차지혁은 시즌 중에는 웬만해서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하지 않기로 소문난 놈입니다. 오죽하면 CF도 모조리 거절했겠습니까? 인터뷰도 힘든데, 특집 방송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출연료 최고 등급으로 책정하고…….”

“국장님, 차지혁 연봉이 얼만지 모르십니까? 출연료에 넘어갈 사람이 아닙니다.”

황 부장의 말에 국장이 입을 다물었다.

말 그대로 출연료 몇 푼에 방송 출연은 힘들었다.

거기에 유명세를 얻고자 방송용 카메라에 얼굴을 비출 사람도 아니다.

국장은 황 부장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특집 편성해!”

방을 나가버리는 국장의 모습에 황 부장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스, 스윙! 스윙입니다! 파워 커브에 오스틴 헤지스의 배트가 분명히 나왔습니다! 스윙이 아니라며 거칠게 반발을 하지만, 이미 주심과 선심 모두 스윙 판정을 내렸습니다! 차지혁 선수 대단합니다! 5회에도 연속 삼진 행진을 이어나가며 이것으로 열다섯 타자 연속 삼진이라는 전무후무한 불멸의 기록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 『해외편 - 101』 > 끝

ⓒ 독고진

작가의 말

마이애미가 스탠튼에게 13년 3억 2500만 달러를 줬네요.

미국 4대 스포츠 사상 첫 계약 총액 3억 달러 돌파 선수라니....

주인공 너무 적게 준 듯 싶네요;;;;

재계약을 노리자, 지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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