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099』 >
『해외편 - 099』
볼 판정을 어필했다가 아무런 소득도 없이 오히려 사나운 눈초리만 받은 마누엘 마고는 타석에서 다시 자세를 잡으며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봤다.
억울하겠지.
분명 공 반개 정도가 빠진 볼이었으니까.
하지만, 토렌스의 미트질에 심판이 완전히 당해버렸으니 이제 마누엘 마고는 꼼짝없이 스트라이크 존을 넓혀야만 한다.
스트라이크 존이 넓은가, 좁은가.
투수와 타자의 대결에 있어 이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없다.
일반인들에게 공 반개의 차이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투수와 타자에게는 굉장히 큰 차이를 준다.
투수에게는 삼진이나 범타를 유도해낼 확률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바깥쪽이라는 건가?’
토렌스가 요구한 구종은 컷 패스트볼, 코스는 마누엘 마고의 바깥쪽을 걸치는 곳으로 역시나 스트라이크 존에서 공 반개 정도 빠진 위치다.
한국 프로 무대에서도 내가 가장 쉽게 스트라이크 카운트를 잡았던 효자가 바로 컷 패스트볼이다.
그렇지 않아도 바깥쪽에서 휘어져 들어오는 컷 패스트볼은 우타자 입장에서 굉장히 멀게 느껴지는데, 토렌스의 사기성 짙은 미트질까지 더해진다면 어떤 효과가 더해질지 생각만으로도 기대가 됐다.
쐐애애액!
퍼엉!
공이 휘어져 들어오는 순간 최대한 팔을 뻗으며 손목을 가볍게 챈다.
아슬아슬할 정도로 미트 끝에 공이 잡혔다.
정말 감각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미트질이다.
역시 메이저리그 정상급 미트질이라고 칭찬을 할만 했다.
공을 던진 투수인 나조차 기가 막힐 지경인데, 주심은 오죽할까?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판정이 나오자 마누엘 마고가 고개를 홱 돌려 주심을 향해 소리쳤다.
“말도 안 돼! 이렇게 먼 거리의 공을 어떻게 스트라이크라는 거야!”
주심이 마스크를 머리위로 들어 올리며 마누엘 마고를 가만히 노려봤다.
시합 시작부터 자꾸만 자신의 판정에 불만을 품고 반박을 하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는 거다.
더욱이 오늘 경기는 메이저리그 개막전이다.
긴 겨울 동안 야구 하나만 기다려온 야구팬들에게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무대인데, 그런 무대에서 자신의 판정을 대놓고 오심이라 여기니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내 판정에 불만을 품는다면 퇴장 시키겠어.”
주심의 차디찬 경고에 마누엘 마고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쯤되자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더그아웃에서도 사람이 걸어 나왔다.
감독은 아니고, 코치로 보이는 중년인이었다.
그는 곧바로 주심에게 다가가서는 마누엘 마고에게는 옆으로 빠지라는 듯 손짓을 하고는 말을 건넸다.
토렌스가 미트질을 하고 있다는 듯 직접 공을 잡는 제스처까지 보이며 주심에게 말을 하고는 돌아갔다.
타석에 들어서기 전 힘차게 배트를 몇 차례 휘두른 마누엘 마고가 타석에 들어섰다.
아까보다 반 발자국 정도 홈베이스에 붙어 섰다.
‘여기서는 몸 쪽 높은 코스로 포심 패스트볼이 답이다.’
배테랑 포수답게 토렌스 역시 포심 패스트볼로 몸 쪽 높은 코스를 요구해왔다.
이번에는 미트질을 할 필요가 없는 정상적인 스트라이크 존이다.
사인을 받은 즉시 와인드업을 했고, 1회 초, 1번 타자라는 사실을 깨끗하게 잊으며 전력으로 공을 던졌다.
쐐애애애액!
부웅!
퍼어- 엉!
“스윙! 타자 아웃!”
공보다 한참 늦은 타이밍에 배트가 나왔다.
쉽게 삼진을 당하지 않는 타자인 마누엘 마고였지만, 무기력할 정도로 공 3개만으로 헛스윙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동시에 관중석에서 휘파람 소리와 환호성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전광판에는 불 붙은 공이 전광판의 정중앙을 가르고 지나가며 ‘98MPH’이라는 숫자가 붉은 색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시범경기에서도 심심찮게 98마일(157.7km)의 구속을 보여주긴 했기에 딱히 놀라울 건 없었다.
현재 내가 컨트롤 가능한 가장 빠른 구속이라고 보면 됐다.
1번 타자를 3구삼진, 그것도 마지막 헛스윙을 잡아낸 포심 패스트볼이 불 같은 강속구라는 사실에 홈 팬들은 열광적으로 나를 향한 응원을 쏟아냈다.
이방인, 한국이라는 먼 동양에서 온 낯선 투수에게도 얼마든지 열광적인 응원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세계가 바로 스포츠 세계다.
예상하지 못했던 토렌스의 환상적인 미트질에 인종과 민족을 뛰어넘은 홈 팬들의 열렬한 응원까지 더해지니 더욱더 자신감이 붙었다.
마누엘 마고가 떠난 자리엔 산티노 벨이라는 샌디에이고 팜 시스템을 통해 착실하게 실력을 쌓은 젊은 선수가 들어섰다.
2020년 드래프트에서 3라운드 지명을 받았을 정도로 실력과 재능이 뛰어난 선수였지만, 바깥쪽과 몸 쪽을 넘나드는 컷 패스트볼과 포심 패스트볼에 꼼짝도 못하고 삼진으로 물러나고야 말았다.
3번 타자는 도미닉 스미스.
마누엘 마고와 마찬가지로 올 시즌 거액의 이적료와 계약금을 지출하며 샌디에이고 유니폼을 입힌 이적 3인방 중 핵심 멤버로 불리는 도미닉 스미스는 메이저리그 1루수 중 상급에 속했다.
1루수라는 포지션 자체가 워낙 막강한 타자들이 포진되어 있다 보니 올스타에 선정된 적도, 골든 글러브나 실버 슬러거와 같은 타이틀을 따본 적이 없지만, 매년 25개 이상의 홈런과 평균 이상의 수비 실력으로 꾸준하게 좋은 활약을 해줬다.
쉽게 말해 2% 부족한 선수라고 할까?
하지만, 도미닉 스미스는 5년 1억 5천만 달러라는 초대형 계약을 체결하며 샌디에이고로 팀을 옮겨왔다.
체구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체중도 많이 나가지 않아서 1루수 치고는 발도 꽤 빨라 매년 10개 이상의 도루를 할 정도였다.
2021년부터 2024년 동안에는 20-20클럽을 달성했을 정도로 준족 소리까지 들었던 도미닉 스미스였기에 깊숙하게 내야로 빠지는 타구는 충분히 안타로 만들어 낼 주력을 갖추고 있었다.
배트 스피드도 빠르고, 컨택 능력도 좋았으며, 인내심과 선구안도 좋아 상당히 까다로운 타자라고 알려졌지만, 좌타자라는 점이 나에게는 가장 큰 약점이었다.
퍼엉!
“스트라이크!”
흠칫 거릴 정도로 놀라는 도미닉 스미스는 몸으로 바짝 붙어 들어오다 꺾여 들어가는 컷 패스트볼에 인상을 잔뜩 일그러트렸다.
그렇다고 뒤로 물러나자니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에 대한 대처가 쉽지 않으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2스트라이크가 되어버렸다.
부웅!
마지막은 적당하게 눈높이로 들어가는 높은 코스의 포심 패스트볼로 마무리를 지었다.
3타자 연속 삼진.
가장 떨린다는 데뷔전의 1회 초, 투구를 환상적으로 마쳤다.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는 날 향해 홈 팬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타국에서 받는 열광적인 박수 세례라서 그런지 기분이 더 좋았다.
“역시 대단한 걸!”
빅터 페르난도가 나에게 다가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입에서 침을 튀겨댔다.
그 역시 이번 스프링캠프와 시범 경기 기간 동안 꽤 준수한 성적을 내며서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아슬아슬하게 포함되었다.
보직은 불펜이었지만,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빅터 페르난도는 꽤 만족스러워했다.
“겨우 1회를 마쳤을 뿐인데 뭘.”
나보다 2살이나 많았지만, 빅터 페르난도와는 친구처럼 편안하게 대화를 나눴다.
아니, 실제로 빅터 페르난도는 나를 친구라 여기고 있기도 했다.
형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지혁이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가.”
손을 휘휘 저으며 형수가 내 곁으로 다가와선 빅터 페르난도를 밀어냈다.
“장! 나는 척을 귀찮게 한 적 없다고!”
언제 부턴가 빅터 페르난도는 나를 ‘척’이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지혁이라는 이름을 몇 번 발음하다 끝내는 멋대로 ‘척’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지혁이라는 멀쩡하고도 좋은 이름이 있었지만, 외국인들에게는 딱히 발음하기가 쉽지 않았기에 아무렇게나 부르도록 내버려뒀다.
“형수야, 너 앞으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토렌스에게 미트질 배워라.”
“그래야지. 그래야 되는데…….”
타격에 대한 욕심이 더 큰 형수다.
하지만, 진짜 메이저리그에서 제대로 포수 대접을 받으려면 수비 능력이 우선이었다.
공격형 포수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지만, 형수가 타격에만 욕심을 부린다면 어느 순간 구단에서는 포지션 변경을 요구해올 것이 분명했다.
진지하게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이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경기 중에 다른 곳에 신경을 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샌디에이고의 개막전 선발 투수는 좌완 맥스 프리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프랜차이즈 스타며, 올스타 투수로도 3차례나 뽑혔고, 1번의 사이영상 수상과 2번이나 투표에서 2위를 기록했을 정도로 막강한 내셔널리그 정상급 투수다.
2012년 드래프트를 통해 1라운드 7순위로 샌디에이고에 지명을 받은 맥스 프리드는 15년 동안이나 샌디에이고를 떠난 적이 없다.
1회 말 공격 선봉장, LA 다저스의 리드 오프인 1번 타자는 이적료를 제외하고 계약총액만 1억 8천만 달러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이적을 해온 던컨 카레라스다.
아메리칸리그 최고의 외야수 중 한 명인 던컨 카레라스는 2021년 드래프트 때부터 제2의 트라웃이라 불릴 정도로 확실한 재능과 실력을 겸비한 초특급 유망주였다.
결과적으로 모든 전문가들의 예상은 정확하게 맞았다.
2023년 25홈런, 41도루, 114득점으로 만장일치 아메리칸리그 신인왕에 올랐다.
2024년과 2025년에는 30-30클럽 달성과 동시에 넓은 수비 범위와 강한 어깨로 인해 골든 글러브와 실버슬러거까지 거머쥐며 명실상부 메이저리그 최정상급의 외야수로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정확성, 파워, 주력, 수비 능력, 강한 어깨까지 진정한 5툴 플레이어인 던컨 카레라스가 어째서 1번 타자인지 의아스러울 수도 있다.
“카레라스도 진짜 괴물은 괴물이지. 무엇보다 더 놀라운 건 우리보다 3살 밖에 많지 않다는 거지. 오른쪽 손목이 완전히 나가지만 않았어도 클래블랜드에서 쉽게 놔주지 않았을 텐데.”
작년에 있었던 손목 부상.
단순 부상이 아니라 고질적일 수도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던컨 카레라스의 파워를 완전히 빼앗아 버렸다.
실제로도 시즌 초 부상을 당하고 회복 후부터는 홈런수가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져버렸다.
예전이었다면 충분히 담장을 넘길 타구가 무려 80%나 야수들에게 잡혔다.
“그러니까 더 대단한 거지. 손목에 무리가 가니까 과감하게 장타력을 버려버리고 안타랑 출루 생산에 더욱 집중을 하잖아.”
내 말처럼 홈런을 포기한 던컨 카레라스는 3할을 넘기지 못했던 타율이 3할 3푼까지 치솟았고, 출루율도 4할을 넘겨버렸다.
이런 던컨 카레라스의 활약이 일시적일수도 있다 판단한 클리블랜드는 다저스와의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막대한 금액에 이적을 허용한 거다.
계약 총액은 나보다 적은 던컨 카레라스였지만, 이적료를 포함하면 3억 달러가 훌쩍 넘어가버리기에 실질적으로 이번 스토브리그에서 가장 많은 돈을 들여 영입한 선수였다.
덕분에 LA 다저스 입장에서는 역대 가장 많은 지출을 기록함으로써 제대로 된 성적을 내지 못하면 말 그대로 가루가 될 정도로 언론과 팬들에게 비난을 받을 예정이었다.
따악!
가볍게 밀어 친 타구가 3루 선상을 타고 빠져나갔다.
타격과 동시에 스타트를 끊어버린 던컨 카레라스는 매년 30개 이상의 도루 능력을 보였던 준족답게 단숨에 2루 베이스를 밟았다.
이어진 2번 타자 크레이그 바렛은 아쉽게도 아웃되고 말았지만, 2루에 있던 던컨 카레라스를 3루까지 진루 시킬 수 있었다.
“시거다.”
1사 3루라는 좋은 찬스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건 LA 다저스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코리 시거는 클럽 하우스 내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잘 생긴 외모와 매너 있는 성격으로 가장 많은 여성팬을 거느리고 있는 선수이기도 했다.
실력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데뷔 이후부터 꾸준히 좋은 활약을 해주었고, 2023년에는 커리어 하이 시즌을 기록하며 내셔널리그 MVP까지 거머쥐었으니까.
“볼!”
부담이 되었을까? 아니면, 작전인 걸까?
맥스 프리드는 코리 시거에게 좋은 공을 던지지 않으며 결국 볼넷으로 출루를 허용했다.
1사 1, 3루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4번 타자는 화려한 부활을 꿈꾸고 있는 마이크 트라웃.
“설마 더블 플레이 나오는 건 아니겠지?”
형수가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아마도 그럴 일은……!”
따- 악!
낮게 제구가 된 꽤 훌륭한 포심 패스트볼이었다.
93마일로 빠르진 않았지만, 맥스 프리드의 칼 같은 제구력은 정상급이었기에 쉽게 칠만한 공이 아니다.
그런데 타석에 들어선 트라웃은 초구에 과감하게 배트를 힘껏 휘둘렀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낮은 볼 킬러.
트라웃은 낮게 제구가 잘 되는 볼을 유독 잘 치는 능력을 있었는데, 오늘 경기에서 그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더블 플레이를 노리고 몸 쪽 낮은 공을 던진 맥스 프리드의 생각을 역으로 이용한 트라웃.
묵묵하게 베이스 런닝을 하는 트라웃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부활의 신호탄이라 이건가.”
1회부터 3점을 먼저 득점한 타자들로 인해 내 어깨는 한결 더 가벼워졌다.
< 『해외편 - 099』 > 끝
ⓒ 독고진
작가의 말
로스터에 대한 질문이 있어서 답변을 해드립니다.
작중 2017년 세계 야구 개혁이 벌어지면서 구단보다는 선수를 우선으로 시스템이 변했습니다.
현재 메이저리그는 25인 로스터, 그리고 9월 1일 로스터가 40인으로 확장됩니다.
이 부분이 저는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뭔가 구단의 입맛에 따라 선수가 휘둘리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25인 로스터를 폐지하고 시즌 초기부터 40인 로스터로 개혁을 시켜버렸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작중 제가 설정한 설정일 뿐입니다.
현실과는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