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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마일-98화 (98/221)

< 『해외편 - 098』 >

『해외편 - 098』

LA 다저스 홈 중계를 전속으로 맡아서 하는 캘러헌은 중계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널려져 있는 자료들을 이리저리 뒤지다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양 팀 선발 라인업 자료가 보이질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중계 박스에 설치되어 있는 전화기를 들었다.

“린다! 미안한데, 오늘 양팀 선발 라인업 좀 보내줘. 아무래도 집에서 빠트린 모양이야.”

전화기를 내려놓고 서둘러 테이블 위의 자료들을 하나, 둘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중계 박스 안으로 캘러헌과 항상 짝을 이뤄 해설을 하는 길버트가 들어왔다.

“캘러헌, 캐스터가 선발 라인업을 빠트리면 어떡해?”

고개를 돌리니 길버트가 한 장의 종이를 흔들며 서 있었다.

“아, 린다가 줬군요.”

어색하게 웃는 캘러헌에게 길버트는 종이를 건네줬다.

“오늘부터 또 다시 피를 말리는 전쟁이 시작되겠군!”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그렇게 말을 하는 길버트의 모습에 캘러헌이 빙긋 웃었다.

“덕분에 저희가 먹고 사는 거죠.”

“하하하. 그건 그렇지. 구단과 선수들이야 성적 때문에 시즌 내내 피를 말리겠지만, 우리야 그 덕에 또 1년을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거니까.”

매년 162경기를 치르는 메이저리그다.

LA 다저스의 경우 2027년 홈 경기가 78게임으로 작년보다 게임수가 줄어들었지만, 그 게임을 중계하고 해설하는 대가로 받는 돈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게임수에 관계없이 매년 웬만한 직장인보다 훨씬 많은 연봉을 받았기에 메이저리그의 캐스터와 해설위원 자리는 항상 경쟁이 치열했다.

몇몇 구단의 오래된 캐스터와 해설위원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캐스터와 해설위원들이 매년 계약 갱신을 해야 하는 입장이라, 절대 허투루 중계를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메이저리그를 좋아한다 하더라도 사명감과 책임감이 없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날도 아니고 다저스 홈 개막전 선발 투수가 코리아 쇼크라니… 신인 투수를 개막전 선발로 내세운 건 좀 무리가 아닌가 싶군요.”

“어쩌겠어? 맥카프리가 팔꿈치 통증이라잖아.”

“그러게 말이에요. 시범 경기 동안 오버 페이스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시즌 시작도 하기 전에 4주 부상자가 되어버렸네요.”

캘러헌의 말에 길버트가 혀를 차며 대꾸했다.

“불안했던 거지.”

“불안했다고요?”

“구단주가 직접 지시해서 단장이 2억 5천만 달러나 들여서 새로운 투수를 영입했는데, 제 아무리 맥카프리가 다저스 에이스라 하더라도 감독까지 교체된 마당에 자신의 자리가 불안하지 않았겠어? 그러니 시범 경기 동안 신임 감독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어놓으려면 오버 페이스라 하더라도 무리를 할 수밖에 없었겠지.”

“그렇긴 하군요. 어쨌든 맥카프리도 그렇지만, 다저스 입장에서도 참 안타까운 일이죠.”

에이스 급 투수가 시즌 개막 직전에 4주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많게는 5번, 적게는 4번이나 로테이션을 쉬어야 한다.

투수 개인이나, 구단 입장이나 에이스 투수라는 걸 생각하면 최소 2승 이상을 그대로 날려버리는 일이니 굉장히 손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과연 코리아 쇼크가 제대로 투구를 할 수 있을까요? 시범 경기 성적은 맥카프리 다음으로 다저스 선발진 중 좋았다고 하더라도 루키라는 부담감도 그렇고, 시범 경기에서 매 경기마다 피홈런으로 실점을 허용했던 부분도 그렇고… 솔직히 전 5이닝 2실점 정도면 나쁘지 않은 데뷔전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캘러헌의 말에 길버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럴까?”

“저랑 생각이 다르군요?”

“솔직히 나도 코리아 쇼크에게 7이닝 2실점이면 아주 훌륭한 데뷔전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어제 밥 도일이 포스팅한 것 봤어?”

“못 봤어요. 밥 도일이 코리아 쇼크에 대해서 포스팅을 했나요?”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최고의 신인이라고 소개를 했더군.”

“예? 설마 그게 부정적인 의미인가요?”

2억 5천만 달러의 신인.

확실히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신인이긴 했다.

“밥 도일이 언제 말장난을 하는 거 봤어?”

“아, 아뇨.”

“놀랍지? 선수 평가에 있어서만큼은 냉혹하다는 말을 듣는 밥 도일이 코리아 쇼크를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최고의 신인이라고 포스팅을 했으니 말이야.”

“정말 의외군요. 도대체 어떤 부분으로서 그렇게 좋은 평가를 내렸는지 꼭 찾아봐야겠군요.”

@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아침만 하더라도 멀쩡했다.

평소와 다를 것 하나 없었다.

그런데 다저 스타디움.

이 거대한 경기장에서 들어서고, 개막전 선발 투수로 마운드에 오른다는 사실이 눈 앞의 현실로 다가오자 갑작스럽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한국 프로 무대에서도 고졸 신인 투수로 개막전 선발 마운드에 섰지만, 솔직히 느낌 자체가 하늘과 땅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달랐다.

거친 들판을 폭주하듯 달려가는 말처럼 뛰어대는 심장 박동은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후우우우…….”

눈을 감고 차분하게 호흡을 내뱉었다.

최대한 의식적으로 호흡을 천천히 가져가자 서서히 심장 박동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개막전 선발이라고 다를 것 없다. 네 공만 믿고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 있게 던져라.’

최상호 코치의 깜짝 방문이었다.

개막전 선발로 등판을 한다고 하니 급하게 LA까지 날아온 거다.

‘차지혁 선수는 누가 뭐라 하더라도 세계 최고의 투수입니다. 그 자신감으로 마운드에 서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황병익 대표 역시 아침에 최상호 코치와 함께 집으로 찾아와 날 응원해줬다.

‘필 맥카프리가 팔꿈치 부상이라면서? 하하하! 희한하게도 나랑 같은 상황이구나? 나도 2001년 시즌 개막전에 케빈 브라운이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내가 선발 등판을 했었지. 그때 난 7이닝 무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됐었으니까 지혁이 너도 꼭 승리 투수가 되길 바란다!’

박호찬 선배는 개막전 선발도 결국은 수많은 게임 중 하나일 뿐이라며 긴장할 것 없다며 격려의 전화를 했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타선은 생각보다 강한 편이지만, 지혁이 네 구위라면 충분히 누를 수 있는 타자들이다. 과감하게 구위로 눌러버려.’

유혁선 선배는 예의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힘을 줬다.

그 외에도 아침부터 어머니는 든든하게 상을 차려 기운을 북돋아줬고,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아들을 믿는다는 표정으로 부상을 당하지 말라는 조언만 했다.

지아는 시차 적응에 실패해 겨우 눈만 뜨고는 파이팅이라며 응원을 해주곤 다시 아침잠을 잤다.

그리고.

개막전 선발 등판 축하해요!

반드시 지혁씨라면 반드시 이길 거라고 믿어요!

차지혁! 파이팅! 아자! 아자!

차지혁 선수!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신인 투수로 개막전 선발 등판이라니, 제가 다 떨리는군요!

경기 꼭 지켜보면서 응원하겠습니다!

멋진 피칭 부탁드립니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는 개막전부터 무서운 상대를 만났네요.

개막전에서 필리스가 다저스와 만나지 않은 것이 이렇게 다행스럽게 생각 될 줄은 몰랐네요.

미국 전역에 차지혁 선수의 가치를 확실하게 증명하길 바랄게요.

아주 가끔씩 문자로만 연락을 주고받았던 정혜영, 차동호 기자, 에바까지 모두 아침부터 문자를 보내주었다.

그 외에도 에이전시를 통해 한국과 LA와 미국 전역에 퍼져 있는 교포들이 각종 선물을 보내주며 승리를 응원했다.

모두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시범 경기를 통해 내가 확인한 메이저리그 마운드의 높이를 확실하게 오늘 경기에서 보여줄 생각이다.

승리나 패배에 대한 집착은 없다.

패배하기보단 승리하는 것이 더 좋겠지만, 투수인 내가 승리를 이끌 순 없는 일이다.

그저 오늘 하루만큼은 LA 다저스 최고의 방패가 되어 마운드 위에 버티고 서 있을 생각이다.

“지혁아.”

클럽 하우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형수가 머리를 내밀고는 날 불렀다.

“시작이야?”

“그래. 개막전 행사부터 시작한다.”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잠시 동안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은 효과가 컸는지 심장 박동이 평소보다 아주 약간만 빠를 뿐이었다.

약간의 흥분감과 긴장감, 그리고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깨우는 것만 같은 묘한 떨림.

“뭐야? 너 웃냐?”

형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내가 웃고 있었나?

의식하지 못했다.

“난 내가 선발 투수도 아닌데 심장이 이렇게 벌렁거리는데… 너도 이런걸 보면 정상은 아니야.”

고개를 절래절래 젓는 형수의 모습에 나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가자.”

@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엄청난 함성 소리.

마운드에 서자 5만 6천석의 관중석을 꽉 채운 관중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특히, 한국 교포와 관광객들로 이루어진 한인 응원석에서 들려오는 나에 대한 열렬한 응원 소리는 잠시나마 긴장했던 마음을 다잡아주기에 충분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파랗고 높은 하늘과 따뜻한 햇살이 참 좋은 날이었다.

“공 던지기에 딱 좋은 날이네.”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연습 피칭을 하기 위해 로진백을 왼손으로 주무르곤 내려놨다.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오늘 호흡을 맞출 포수가 형수가 아니라는 점뿐이다.

당연한 일이다.

형수는 어디까지나 유망주에 백업 포수의 자리를 얼떨결에 꿰찬 선수일 뿐이다.

LA 다저스의 주전 포수는 루이스 토렌스다.

올해 한국 나이로 31살인 그는 본래 양키스에서 꽤 촉망 받던 포수 유망주였다.

하지만, 어깨의 염증이 여러 차례나 반복되면서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2번의 트레이드 끝에 다저스 유니폼을 입은 토렌스는 2023년, 그 재능이 폭발하면서 다저스의 주전 포수로서 자리를 확실하게 잡은 상태였다.

특히, 수비 능력이 굉장히 좋았기에 2023년에는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기까지 했다.

쇄애애액-!

퍼- 엉!

미트질이 아주 깔끔했다.

포수에게 있어 미트질, 투수가 던진 공을 스트라이크로 만드는 능력인 프래이밍(framing)은 투수라면 누구나 중요하게 여기는 포수의 능력 중 하나다.

토렌스는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메이저리그 전체를 통틀어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훌륭했다.

더불어 블로킹과 송구 능력 또한 굉장히 뛰어나서 괜찮은 공격력을 갖고 있음에도 수비형 포수라고 불렸다.

구단 입장에서야 수비형 포수보다는 공격형 포수를 더 선호하지만, 투수인 내 입장은 정 반대였다.

시범 경기에서도 2번 호흡을 맞춰본 결과 토렌스와는 궁합이 꽤 잘 맞았다.

하지만, 수비 능력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형수와의 교감이 더 깊었기에 두 사람 중 한 명과 배터리를 이루라면 고민하지 않고 형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연습 투구 내내 토렌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이 좋다는 제스처를 보여줬다.

굉장히 과묵한 편에 속하는 토렌스였기에 항상 활발하게 분위기를 이끌려고 노력하는 형수의 모습도 아쉬움 중 하나였다.

몇 차례의 연습 투구가 끝나고 심판이 게임 시작을 알렸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1번 타자는 올스타 선수에 3번이나 뽑힌 마누엘 마고.

도미니카 출신으로 전형적인 5툴 플레이어다.

특히, 배트 컨트롤이 상당히 뛰어나서 삼진을 잘 당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이번 스토브리그에서 공격적으로 많은 돈을 퍼부어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로부터 이적에 성공시킨 이적 3인방 중 한 명이다.

한국 나이로 33살이니 앞으로 3~4년은 샌디에이고를 위해 뛸 타자고, 그 기간 동안 나 역시 다저스에서만 공을 던진다면 매년 19번 샌디에이고와 경기를 치르니, 로테이션에 따라서는 매년 수십 타석을 상대할 수도 있는 타자다.

‘초구부터?’

토렌스는 초구로 파워 커브를 요구했다.

코스는 스트라이크 존에서 공하나 정도 빠지는 아래.

초구부터 볼을 던진다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경기 직전 초구만큼은 절대적으로 토렌스의 의견대로 공을 던져주기로 약속을 했었다.

마누엘 마고의 성향이 워낙 공격적이라 배트가 나오면 범타가 될 확률이 컸으니 토렌스의 판단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첫 번째 투구, 메이저리그 마운드에서 공식적으로 기록되는 1구다.

나를 노려보는 마누엘 마고의 시선을 무시하며 천천히 와인드업을 한 뒤, 힘껏 공을 던졌다.

쇄애애애액! 휘이익!

퍼- 엉!

타석에서 움찔 거렸던 마누엘 마고가 안도의 눈빛을 보낼 때였다.

“스트라이크!”

“……!”

볼이라고 안심했던 마누엘 마고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심판을 향해 볼이라며 어필을 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공을 돌려주는 토렌스를 바라보며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미트질의 승리다.

볼도 스트라이크로 만드는 토렌스의 미트질이 초구부터 나왔다.

이건 마누엘 마고의 공격적인 성향을 따져서 나온 주문이 아니다.

투수인 나를 위한 주문이다.

오늘 네가 던질 스트라이크 존은 넓다!

토렌스는 나에게 그걸 알려주고 싶었던 거다.

“이런 건 형수가 좀 빨리 배워야 할 텐데.”

로진백을 왼손에 묻히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 『해외편 - 098』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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