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97화 (97/221)

< 『해외편 - 097』 >

『해외편 - 097』

<차지혁 시범 경기 성적>

콜로라도 로키스 : 3이닝, 1실점, 1피홈런, 3탈삼진.

마이애미 말린스 : 3이닝, 2실점, 2피홈런, 7탈삼진.

뉴욕 메츠 : 5이닝, 2실점, 1피홈런, 10탈삼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 5이닝, 2실점, 1피홈런, 12탈삼진.

종합 : 16이닝, 7실점, 5피홈런, 32탈삼진. 평균자책점 3.94.

맥브라이드 단장이 손에 들고 있던 선수 성적표를 내려놓으며 마주 앉아 있는 게레로 감독을 바라봤다.

“차지혁 선수에 대한 감독님의 평가는 어떻습니까? 솔직한 평가를 바랍니다.”

“훌륭합니다.”

더 이상의 대답은 필요하지 않다는 듯 게레로 감독이 입을 다물었다.

“일반적인 투수들과 비교했을 때, 분명 차지혁 선수의 시범경기 성적은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차지혁 선수는 일반적인 투수가 아닙니다. 7년 동안 2억 5천만 달러라는 거액을 지불해야 하는 고액 투수입니다. 그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한다 하더라도 같은 평가를 내리겠습니까?”

게레로 감독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맥브라이드 단장은 다른 종류의 파일을 들었다.

“여기는 시범 경기 동안 차지혁 선수를 밀착 관찰한 밥 도일의 선수 평가 보고서가 있습니다. 한 번 보시겠습니까?”

밥 도일은 과거 BA에서 가장 냉정하게 선수를 평가하기로 소문난 선수 분석의 대가였다.

오죽하면 몇몇 메이저리그 구단에서는 밥 도일의 파일이 10명의 전문 스카우트 보고서보다도 훨씬 신뢰가 높다고 할 정도였다.

밥 도일은 메이저리그의 신인 선수들이나 마이너리그의 유망주들만을 아주 냉정하게 분석해서 평가했는데, 당연히 올 시즌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간 선수가 바로 차지혁이다.

밥 도일의 평가서라는 소리에 게레로 감독은 파일을 건네받아 내용을 읽었다.

게레로 감독이 파일을 읽는 동안 맥브라이드 단장은 느긋하게 소파에 등을 기대어 기다렸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게레로 감독이 파일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대로 봤군요. 역시 밥 도일이라고 할 만 합니다.”

게레로 감독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언론이 뭐라고 하든 밥 도일은 차지혁 선수를 향후 다저스의 1선발 투수로 아주 훌륭한 이적 영입이라고 평가를 내렸다는 점이 가장 만족스럽더군요.”

말을 하는 맥브라이드 단장의 얼굴에도 미소가 걸려 있었다.

“밥 도일의 평가서는 제가 생각했던 그대로입니다. 차지혁 선수는 굉장한 투수입니다. 시범 경기 성적만 놓고 본다 하더라도 충분히 다저스 선발 핵심 맴버가 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경기 이후 달라진 그의 피칭 스타일은 혹시나 했던 메이저리그의 적응력을 더 이상 의심하게 만들지 않고 있습니다.”

“포심 패스트볼의 구종 평가가 80점(Top tier) 만점이라는 게 참 의외였습니다.”

“지금까지 본 그 어떤 투수보다 완벽한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는 투수가 차지혁 선수입니다. 포심 패스트볼의 커맨드와 컨트롤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차지혁 선수가 지금까지 시범 경기에서 피홈런을 맞은 모든 구종이 포심 패스트볼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더 재밌는 사실은 타자와 정면으로 승부를 벌였다는 점입니다. 즉, 자신의 구위와 타자의 파워를 냉정하게 평가를 받았다고 보면 됩니다.”

게레로 감독은 특히 ‘정면으로 승부를 벌였다는’말을 강조했다.

맥브라이드 단장도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듯 입가에 미소를 더욱 진하게 그렸다.

차지혁에게 홈런을 친 타자들은 사토시 슌을 제외하곤 모두 각 팀의 3번이나 4번 즉, 최고의 장타력을 지닌 타자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각 팀에서 최고의 장타력을 갖춘 타자를 제외하면 어느 누구도 차지혁의 구위를 파워로 이겨내지 못했다는 소리다.

이건 굉장히 놀라운 일이다.

투수의 구위는 장타력과 직결되는 문제다.

차지혁이 원한다면 실투가 나오지 않는 이상 메이저리그의 그 어떤 투수보다도 피홈런을 맞지 않는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메이크업(Make-up)부분에서도 70점(Plus-plus)이라는 높은 점수를 줬다는 건, 밥 도일이 이런 부분도 확실하게 관찰을 했다는 사실일 겁니다.”

메이크업은 투수의 경우 침착성, 직업윤리, 근면성, 승부근성, 배짱, 경기 태도 등을 통칭하는 말로 선수 성장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으로 여기고 있었다.

메이크업과 가정환경이 좋은 선수의 경우 메이저리그 적응력과 선수의 성장 속도에 상당한 이점을 준다는 통계 결과로 인해 모든 메이저리그 구단에서는 유망주 평가에 있어 메이크업의 점수를 꽤 중요하게 보고 있었다.

“시범경기도 모두 끝이 났으니 게레로 감독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간단하게 묻겠습니다. 20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개막전 선발 투수로 누굴 내세울 생각입니까?”

맥브라이드 단장의 물음에 게레로 감독이 테이블 위의 물 컵을 들며 대답했다.

“개막전 선발 투수는… 필 맥카프리입니다.”

@

시범 경기가 끝나고 짧은 휴식이 주어졌다.

그래봐야 며칠 밖에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시범 경기 내내 이어졌던 훈련과 경기로 인해 쌓인 피로를 풀기에는 정말 꿀 같은 시간이라 부를 만했다.

‘좋더군. 확실히 좋아졌어. 네가 가진 구종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지켜낼 수 있으니 새로운 구종을 개발하는 건 템포를 조금 더 늦춰도 된다. 6월 달에 시간이 나니 그때 찾아가도록 하지.’

두 번째 시범 경기 등판까지 지켜보고 개인 스케줄 때문에 스프링 캠프를 떠났던 랜디 존슨이었다.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다가 어제 저녁 전화를 해서 한 말이다.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꼬박꼬박 내 등판 경기를 본 모양이었다.

랜디 존슨의 말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구종 개발은 진즉에 멈춰진 상태였다.

시범 경기에서 확인해야 할 부분들이 워낙 많았기에 그것들을 진행하다보니 당연히 급할 것 없는 구종 개발은 후순위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시범 경기가 끝나고 짧은 휴식이 주어졌다고 하지만, 새로운 구종을 연습하기보다는 현재의 몸 상태를 최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리고 메이저리그 타자들의 자료도 꾸준히 살펴봐야 했다.

어설프게 데이터 야구를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철저하게 타자들의 약점을 머릿속에 기억해두기 위해서였다.

마운드 위에서 믿는 건 오로지 내가 던지는 공이지만, 한국 프로 무대와는 확연하게 다른 메이저리그 타자들의 파워와 타격 능력으로 인해 약점을 공략할 필요성이 있음을 시범 경기에서 충분히 느꼈다.

후웅! 후웅! 후웅! 후웅!

개인 훈련장 한쪽에 마련해 놓은 스윙 연습 공간에서는 쉬지 않고 맹렬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형수였다.

시범 경기 기간 동안 2할 3푼 7리의 타율과 2개의 홈런.

7할을 넘어가는 장타력은 초반 3경기에서의 부진을 일거에 날려버릴 정도로 놀라운 성적을 냈다.

덕분에 마이너리그 통보를 받고 쓸쓸하게 떠난 선수들과는 다르게 메이저리그에 남아 40인 로스터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렸다.

시범 경기가 끝났음에도 형수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3천개의 스윙을 해내고 있었다.

말이 3천개지 실제로 3천 번이나 배트를 휘두르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온 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대는 통에 형수는 매일 같이 개인 사비를 털어가며 전문 스포츠 마사지사를 불러다가 근육통을 풀어야 했고, 손바닥은 흔한 말로 걸레가 되어버렸을 정도로 살점이 온전히 붙어 있질 않았다.

근육통과 손바닥의 고통을 이겨내며 휘두르는 스윙인 셈이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핸드폰 진동에 바로 액정 화면을 바라봤다.

Trout.

마이크 트라웃의 전화였다.

전화번호를 주고받은 건 꽤 오래전 일이지만, 거의 매일 볼 수 있었기에 실제로 통화를 한 적은 없었다.

“여보세요?”

-쇼크! 축하해!

“무슨 소리죠?”

-아직 개막전 선발이라는 통보를 못 받은 거야?

“예?”

개막전 선발?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시범 경기 내내 나보다 좋은 모습을 보였던 필 맥카프리였다.

그리고 어쨌든 실질적으로 현 LA 다저스의 에이스인 그였기에 당연히 개막전 선발이라는 명예는 그의 몫이어야만 한다.

나 역시 개막전 선발 투수로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맥카프리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부상인가요?”

나은 성적, 실질적인 에이스 투수가 개막전 선발로 나오지 못한다?

이유는 딱 하나 뿐이다.

-맞아. 팔꿈치에서 통증을 느끼고 있다고 하더라고. 정밀 진단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그리 큰 부상은 아니지만 최소 2주 정도는 마운드에 오를 수가 없는 모양이야.

“그렇군요.”

팔꿈치에서 통증이라면 인대 손상과 염증을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좋지 않다.

가벼운 통증일 수도 있지만, 팔꿈치 통증은 투수들에게 있어 상당히 위험한 신호였기에 무조건 회복에 전념을 해야만 한다.

시범 경기 마지막 등판에서도 5이닝 동안 위력적인 피칭을 보여줬던 필 맥카프리였다.

물론, 중간 중간 마운드 위에서 팔을 털며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계속해서 투구를 끝까지 했기에 설마 그것이 부상자 명단에 올라야 할 정도로 통증이 심한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쨌든 에이스이자, 1선발 투수인 필 맥카프리가 빠진 자리를 채울 수 있는 투수는 시범 경기 동안 두 번째로 좋은 성적을 보이고, 에이스 급의 성적을 기대하는 나밖에 없었다.

-루키가 개막전 선발 투수라니! 잘 해보라고!

축하한다는 말과 잘 하라는 말을 하고 트라웃은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내려놓기도 전에 구단에서 전화가 왔다.

트라웃에게 미리 들은 것처럼 개막전 선발 투수라는 통보였다.

내일 게레로 감독과 미팅이 있으니 시간 맞춰서 구단으로 오라는 말도 전해왔다.

개막전 선발 투수라는 사실에도 딱히 가슴이 뛰거나, 흥분되는 감정은 없었다.

이미 한국에서도 고졸 신인 투수로 개막전 선발에 나섰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지이잉. 지이잉.

또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 화면을 확인하니 유혁선 선배였다.

LA 다저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고 있었기에 꽤 자주 구단에서 만날 수가 있었다.

보나마나 개막전 선발 투수가 된 것에 대한 축하 전화일 것이 뻔했다.

“예, 선배님.”

@

“지혁아!”

입국 심사를 마치고 모습을 드러낸 어머니가 가장 먼저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뒤이어 아버지와 지아의 모습까지도 눈에 들어왔다.

“얼굴이 왜 이렇게 까칠해? 볼 살이 쪽 빠졌네! 제대로 밥도 못 먹는 거야? 엄마가 보낸 반찬은 다 먹었어? 사골 국은 다 먹었어? 밥은 꼬박꼬박 해 먹는 거야? 형수랑 둘이서 굶고 다니는 거야?”

미국으로 와서 2kg이나 체중이 더 늘어났지만, 어머니의 눈에는 아닌 모양이다.

“살이 빠지기는 더 늘어난 거 같은데!”

지아의 말에 어머니가 고개를 홱 돌리며 사납게 째려봤다.

그 모습에 지아가 혀를 삐죽 내밀었다.

“건강하게 보이는구나.”

아버지는 어머니와 다르게 내 몸이 더 좋아졌다는 걸 한 눈에 알아보는 듯 했다.

“두 분 다 어디 아픈 곳은 없죠?”

내 물음에 어머니는 보면 모르냐며 자신들 걱정하지 말고 내 몸이나 잘 돌보라며 한 바탕 잔소리를 쏟아냈다.

뒤이어 형수가 부모님께 꾸벅 고개를 숙이자 반갑게 인사를 했다.

마지막으로 지아 차례가 됐다.

“넌 학교 어쩌고 미국까지 온 거야?”

중학교 3학년인 지아가 방학도 아닌데 미국까지 온 건 좀 의외였다.

“오빠 때문에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어서 잔소리 좀 하려고 왔어! 한국에서 오빠가 얼마나 잘근잘근 씹히고 있는지… 아야!”

“오빠한테 무슨 말이야! 장기 결석 하더라도 오빠를 응원해야 한다면서 그렇게 고집을 부려놓고 왜 앞에서는 엉뚱한 소리야?”

“치잇! 엄마는!”

지아가 원망스럽게 어머니를 바라보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황급히 내 시선을 피해버렸다.

날 응원하려고 장기 결석까지 감행했다는 말이 고맙기도 했고, 한 편으로는 내가 참 못 미덥게 시범 경기를 했구나 하는 반성도 들었다.

비록, 그것이 나만의 확인 작업이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선발 등판이라고 가족들이 한국에서까지 응원을 오다니! 정말 감동적입니다!”

형수는 진심으로 감동을 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형수 오빠는 개막전 선발이야?”

“…지아야, 미안하다.”

고개를 떨구는 형수를 지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꾸했다.

“어차피 기대도 안했어. 그러니까 너무 미안해 할 것 없어. 열심히 연습하다보면 언젠가 기회가 있겠지. 시범 경기 때, 헛스윙만 하는 꼴이 애초부터 개막전 선발은 물 건너 간 것 같더라.”

지아의 말에 형수의 거구가 휘청거렸다.

“그, 그래. 열심히 연습하다보면 기회가 있겠지…….”

먼 한국에서 미국까지 응원을 온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내일 있을 개막전 선발 경기를 멋지게 해내고 말겠다는 강한 다짐을 했다.

< 『해외편 - 097』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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