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096』 >
『해외편 - 096』
시범 경기의 후폭풍은 예상보다 훨씬 컸다.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시범 경기 이후, 많은 언론들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한국과 미국은 물론, 일본 언론사들도 대대적으로 기사를 쏟아냈다.
특히, 일본을 대표하는 야구 선수가 되어버린 사토시 슌과의 비교 기사는 그 수를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일본 언론들은 나를 한국 최고의 투수, 한국 역대 최강의 투수라고 온갖 미사여구를 다 붙여놓고는 결과적으로 사토시 슌에게 완패를 당했다며 일본의 우월성을 자랑하는 기사들이 대부분이었다.
미국 언론에서는 나에 대한 거품 논쟁이 뜨겁게 불 붙었고, 특히 뉴욕 언론들은 양키스가 나를 영입하지 않은 것이 이번 겨울 스토브리그에서 가장 잘 한 일이라는 식으로 기사를 낼 정도였다.
더불어 벌써부터 메이저리그 사상 최고의 먹튀니, 미국 야구를 경험해보지도 못한 선수에게 2억 달러 이상의 돈을 쓴 다저스의 프론트가 얼마나 무능한지 등등 온갖 기사들이 얼마나 많이 빠른 속도로 쏟아져 나오는지 3일 동안 그걸 지켜보던 형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혁아, 너 이러다 가루 되겠다.”
한국 언론 중에서도 일부 언론사와 기자들이 나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들을 냈고, 결국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 지아까지 전화를 해서는 괜찮냐며 날 다독였다.
자극적인 기사를 작성해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야 하는 언론사의 행동에는 별 감흥도 없었다.
어차피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게 기사를 내는 곳이 언론사다.
내일이라도 당장 내가 퍼펙트 게임을 한다면 그날 저녁 어떤 식으로 기사가 날까?
거품 논란 따윈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각 지역 언론들은 나를 영입하지 못한 지역 구단을 비난할 거다.
한국 언론도 마찬가지다.
일본 언론? 어차피 거긴 신경 쓸 필요도 없는 곳이다.
결과적으로 언론사의 기사 하나, 하나에 신경을 쓸 필요가 전혀 없다는 소리다.
그 점을 알기에 가장 가까이서 함께 생활하는 형수도 날 위로하지 않았다.
솔직히 위로를 한다면 나보다 형수가 더 시급했다.
첫 시범 경기에서 4타수 무안타를 기록했고, 이후 투수인 나와 다르게 2번 더 시범 경기에 출전했지만, 여전히 안타를 때려내기 못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형수는 더욱더 미친 듯이 타격 연습에 매달리고 있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
“뭐?”
손바닥에 연고를 바르던 형수가 날 바라봤다.
“타석에 서 있는 널 보고 있으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여유가 너무 없다는 거야. 투수인 입장에서 냉정하게 평가를 해서 너처럼 여유가 없는 타자는 정말 상대하기 편하거든.”
“내가 그렇게 여유가 없어 보여?”
형수의 진지한 물음에 나는 내가 느낀 바를 그대로 말해줬다.
타석에 선 형수가 어떤 얼굴인지,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실질적으로 어떤 공에 배트를 휘두르는지 등등 내가 느낀 것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이야기 해줬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형수가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투수들한테 완전 호구네. 그런데 어쩌냐? 타석에 서면 아니, 대기 타석에만 들어가도 머릿속에 안타를 쳐야 된다는 강박강념이 박혀 있는 것처럼 마음이 조급해 지는 걸 어쩌겠어. 나도 요즘 돌아버리겠다.”
내 그림자에 가려서 그렇지, 형수 역시 언론으로부터 꽤 많은 비판을 받고 있었다.
특히, 다저스 언론을 비롯해 팬들이 어느 정도 방패막이가 되어주고 있는 나와 다르게 형수는 정 반대였다.
LA 다저스 팜 시스템을 통해 육성한 특급 유망주를 내주면서까지 데리고 온 형수였으니 거기에 대한 실망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진짜 마이너리그에서 다시 시작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힘없는 형수의 말에 녀석의 넓은 등짝을 힘껏 후려쳤다.
짜- 악!
“아아악! 뭐야!”
“고작 3경기다. 마음 무겁게 먹지 말고 편하게 먹어. 타석에서 네가 좋아하는 공만 쳐. 이것저것 건드리지 말고 정말 제대로 칠 수 있는 공만 노리란 말이야. 어설프게 공 건드려서 아웃되지 말고 그냥 원하는 공이 올 때까지 루킹 삼진을 당하더라도 확실하게 노려 쳐. 그렇게 자신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지혁아.”
“너 나한테 뭐라고 그랬어? 꼴랑 3이닝 던진 걸로 더럽게 시끄럽게 군다고 했지? 너도 마찬가지야. 3경기 그것도 한 경기는 경기 후반에 교체되서 타석에도 한 번 밖에 못 섰잖아? 뭘 그렇게 조급해하고, 자신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메이저리그 투수라고 겁 먹은 거냐? 상대가 메이저리그 투수면 너도 마찬가지로 메이저리그 타자잖아? 못 칠 이유라도 있어?”
내 말에 형수가 두 주먹을 쥐었다.
자신 없는 눈빛이 서서히 살아났다.
고작 말 몇 마디로 자신감이 확 살아나길 기대할 순 없지만, 최소한 이대로 무기력하게 시범 경기를 마치고 마이너리그로 떨어질 가능성은 대폭 줄어들었다.
형수는 충분히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한다.
파워, 타격 능력 모두 부족하지 않다.
포수로서의 능력도 마찬가지다.
메이저리그 배테랑 포수만큼 믿고 맡길 정도로 투수 리드가 뛰어난 건 아니지만, 그건 시간이 차차 해결해 줄 일이다.
재능하나만 놓고 본다면 형수는 충분했다.
거기에 올 겨울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을 한 형수다.
지금도 시범 경기가 끝나면 하루 천 개 이상씩 특타 자처하고 있었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도 통하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해외 신인 드래프트에서 4라운드에 지명을 받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 형수가 마이너리그로 가면 안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나 때문이다.
내가 마음 편안하게 공을 던지기 위해서라도 형수가 남아 있어야만 한다.
마이너리그로 떨어지면 나 역시 마음이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나를 위해서라도 형수는 반드시 메이저리그에 남아야 한다.
“너한테 이런 소리를 다 듣고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흐흐흐!”
얼굴이 한결 풀어진 형수가 익살스럽게 웃었다.
“멍청하게 아무 공에나 배트 휘두르지 말라고 하는 소리야.”
“알았다! 다음부터 내가 멍청하게 배트를 휘두르면 더그아웃에서 엉덩이를 냅다 걷어 차버려!”
“얼마든지.”
내 대답에 형수가 히죽거리며 웃다가 물었다.
“참, 넌 어떻게 됐어?”
“뭐가?”
“비밀무기!”
슬라이더는 깨끗하게 포기했다.
대신, 랜디 존슨과 함께 신구종을 연습 중이었다.
새롭게 연습 중인 신구종을 형수는 비밀무기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제 시작 단계니까 아직 멀었지.”
“변형 패스트볼이라고 했지?”
“응.”
“연습 투구는 언제 해볼 거야? 언제든지 말만해. 난 언제든 받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형수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새로운 구종을 받을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다저스 구단에 포수로서 어필 할 수 있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너클볼처럼 말도 안 되는 구종이라면 모를까, 어느 정도의 변화구는 모든 포수들이 받을 수 있지만, 형수는 우선 순위라는 걸 들먹이며 반드시 자신에게 먼저 던져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고 있었다.
“아직 멀었다니까. 지금은 투구 방법만 가다듬고 있어서 한참은 기다려야 해.”
“어쨌든 다른 누구도 아닌 나한테 가장 먼저 던져야 해. 알겠지?”
“마이너리그로 떨어지지 않으면 그럴게.”
“네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메이저리그에 남는다.”
말은 저렇게 해도 형수의 자존심도 꽤 강하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나였다.
“그런데 랜디 존슨은 뭐라고 안 했어?”
“뭘?”
“저번 시범 경기에서 네 투구에 대해서 뭐라고 조언을 해주지 않았냐고.”
“아아.”
“뭐라고 했구나? 뭐래?”
“장점을 왜 버리고 투구를 하냐고 하더라.”
“장점?”
형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형수의 모습을 바라보다 침대에 누웠다.
“야! 하던 말은 계속 해야지! 장점이 뭔데?”
“포수인 네가 몰라서 되겠어? 스스로 생각해봐. 투수로서 내 장점이 뭔지.”
“지혁이 네 장점이라면…….”
내 장점을 떠올리는 형수를 뒤로하고 눈을 감았다.
‘어째서 사토시 슌을 상대로 어렵게 승부를 했지?’
‘어떤 상황에서도 타자를 상대로 어렵게 승부를 한 적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네가 가진 장점을 버리고 승부를 했지?’
‘장점이요?’
‘네 최대 장점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소리야? 넌 나와 같은 타입의 투수다. 사토시 슌은 장타력이 별볼일 없더군. 그 말을 역으로 뒤집으면 사토시 슌에게 있어서 넌 가장 공포스러운 투수라는 소리다. 그런데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사토시 슌에게 소극적으로 투구를 하더군. 아니, 전체적으로 3이닝 내내 피칭 스타일이 한국에서 보였던 것과는 다르더군. 왜 그랬지?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상대로 겁이라도 먹은 건가?’
겁을 먹어? 소극적으로 투구를 했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절대로 난 사토시 슌을 상대로 겁을 먹지도, 소극적으로 투구를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랜디 존슨은 나에게 소극적으로 투구를 했다고 했다.
첫 번째 홈런을 맞았던 건 전력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구에 배트를 휘두르지 않는 타자? 공을 많이 보는 타자?
웃기는 말이다.
타석에 선 타자는 자신이 칠 수 있는 최고의 공이 오면 초구라 하더라도 과감하게 배트를 휘두른다.
이 점을 잊었다.
두 번째로 첫 번째와 같은 맥락이지만, 나답지 않게 데이터에 의존했다는 것 또한 내 실수다.
결과적으로 사토시 슌과의 첫 번째 대결에서는 대놓고 쳐달라는 공을 던진 거다.
두 번째 대결에서는 스트라이크 존을 빡빡하게 가져가며 승부를 벌였다.
사토시 슌은 쳤을 때, 범타가 나올 까다로운 공은 커트를 했고, 자신 있는 공에 배트를 휘둘러 3루타를 만들어냈다.
결과적으로 두 번째 대결에서도 나답지 않게 사토시 슌에게 유리한 승부를 벌인 셈이다.
왜 그랬을까?
톱3라는 일본 역대급 타자라는 사토시 슌을 상대로 어설프게 데이터 야구를 했다가 한 방 맞았고, 이후에는 너무 어렵게 승부를 가져가려다 끌려가고 만 거다.
결과는 엉망이지만, 나름대로 수확이 있는 대결이었다고 여겼다.
언론에서 뭐라고 떠들더라도 상관하지 않았다.
다음 대결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테니까.
그런데 이 역시 나만의 착각이었다.
“아! 구위! 지혁이 네가 구위로 사토시 슌을 눌러버렸어야 했는데! 포수인 내가 먼저 알고 있어야 했는데! 젠장!”
형수가 그렇게 말하며 제 머리를 쥐어박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단 한 번도 타자를 상대로 물러난 적이 없다. 내 공에 대한 자신감 하나로 칠 수 있으면 쳐보라는 식으로 타자를 압박했다. 한국에서 보여줬던 네 피칭을 보고 난 네가 나와 같은 타입의 투수라고 확신했다. 아닌가?’
랜디 존슨의 말이 맞다.
시범 경기라 구속이 올라오지 않았다? 구위를 회복하지 못했다?
나와는 관계없는 말이다.
첫 시범 경기에서 난 제대로 된 구속을 보이지도 않았고, 위력적인 구위도 없었다.
생각해보면 사토시 슌에게 처음 홈런을 맞은 게 오히려 내게는 이득이 된 셈이다.
파워가 없는 사토시 슌도 홈런을 쳤으니 다른 타자들도 자신이 붙은 거다.
그 결과 무리하게 큰 스윙을 한 타자들로 인해 추가 실점이 없었던 경기였다.
운이 좋았다.
작년 대전 호크스에 입단했을 때가 떠올랐다.
주니치 드래건즈와의 비공식 연습 경기에서도, 부산 샤크스와의 시범 경기와 개막전 선발 경기에서도 자신 있게 나만의 공을 던졌다.
칠 수 있으면 얼마든지 쳐보라는 식으로 던졌었다.
그런데 사토시 슌을 상대로는… 타자의 성향만 보고 전력이 아닌 볼품없는 밋밋한 공을 던졌다.
고작 1년 프로 물 좀 먹고, 대성공을 거뒀다고 자만을 하는 건가?
쉽게 타자를 생각한 건가?
그것도 아니면, 메이저리그 타자들에게 위축이라도 된 건가?
막대한 연봉으로 인한 부담감인가?
3일 동안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단 하나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 시범 경기에서 전력으로 공을 던진다.
@
따악!
아슬아슬하게 담장을 넘어가는 타구를 바라보며 작게 숨을 토해냈다.
홈런을 치고 베이스를 도는 마이애미 말린스의 3번 타자 빌 버스턴의 얼굴 표정이 썩 밝지 못했다.
손목을 연신 주무르고 있었다.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홈런 타자로 매년 30개 이상씩 홈런을 터트리는 거포다.
두 번째 시범 경기에서도 홈런을 맞았다.
오늘 경기가 끝나면 또 언론이 난리가 나겠다 생각하니 슬쩍 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유인구로 승부를…….”
“형수야, 빌 버스턴이 작정하고 휘두른 공인데 담장을 겨우 넘어갔네?”
“그거야 네 구위가 워낙 좋으니까 그렇지.”
“아니지. 내 구위가 메이저리그 타자들에게도 확실하게 통한다는 거지. 다시 가자. 이번에는 구속을 좀 더 올린다. 말론 패트릭이 얼마나 잘 칠 수 있는지 확인해보자.”
“너 정말… 나도 모르겠다. 네 마음대로 해라.”
투덜거리며 마운드를 내려가는 형수를 바라보다 대기 타석에서 배트를 휘두르고 있는 4번 타자 말론 패트릭에게 시선을 옮겼다.
빌 버스턴과 함께 마이애미 말린스의 쌍포라 불리는 말론 패트릭의 파워는 메이저리그 상위 그룹이다.
말론 패트릭의 파워와 내 구위.
과연 어느 쪽이 더 강할까?
한 가운데 포심 패스트볼 전력으로 던져준다.
3이닝 2실점 2피홈런, 그리고 7K.
마이애미 말린스와의 두 번째 시범 경기에서 내가 받아 든 성적표다.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러웠지만, 역시나 언론들은 쉴 새 없이 부정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나만의 시범 경기를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 『해외편 - 096』 > 끝
ⓒ 독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