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095』 >
『해외편 - 095』
시범 경기였지만, 글렌데일 캐멀백 랜치 구장을 찾아온 야구팬들은 굉장히 많았다.
관중석의 빈자리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팬들이 모여 들었다.
모든 관중석이 유료였고, 포수 뒤쪽 가장 좋은 자리의 경우 좌석 값이 60달러가 넘었음에도 표가 없어서 못 팔았다고 할 정도로 오늘 시범 경기는 많은 이들에게 큰 관심을 주고 있었다.
관심이 얼마나 높은지 미국 전역으로 생중계까지 된다고 했다.
“시범 경기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빵빵하게 받는 기분이 어때?”
형수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사토시 슌에게도 가서 물어봐.”
오늘 시범 경기는 LA 다저스대 콜로라도 로키스였지만, 실질적인 메인 테마는 나와 사토시 슌이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큰 돈을 받고 이적을 한 투수와 1년 동안의 마이너리그에서 완벽하게 담금질을 끝낸 역대급 재능의 일본인 타자 사토시 슌의 대결은 며칠 전부터 수많은 언론에서 기사화 된 상태였다.
덕분에 오늘 야구장은 정식 시즌 경기라고 느껴질 정도로 그 열기가 뜨거웠다.
“라인업 봤지?”
“봤어.”
예상대로 사토시 슌이 콜로라도 로키스의 리드오프, 1번 타자에 배치가 되었다.
게레로 감독은 오늘 시범 경기에서 나에게 무조건 3회까지 맡기겠다고 했다.
점수를 몇 점을 주던, 어떤 상황이 벌어지던, 부상으로 투구를 할 수 없는 경우만 제외하곤 3회를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가자.”
형수가 포수 장비를 단단하게 착용하고 나를 바라봤다.
홈 구장이었기에 1회 초 수비를 하기 위해 글러브를 집어 들었다.
“시범 경기다. 복잡하게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편안하게 가자.”
내 부담을 덜어주기 위함인지 형수가 마운드까지 함께 걸어가며 계속해서 말을 했다.
“고맙다. 너도 확실하게 네 가치를 보여. 시즌 동안 너 외의 포수에게 공 던지는 일이 없도록 해줘.”
“당연하지!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흐흐흐!”
익살스럽게 웃는 형수였지만, 표정과 눈빛은 굳어 있었다.
어쩌면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긴장하고 있는 건 형수 자신일지도 몰랐다.
더욱이 작년 짧게나마 메이저리그가 어떤 곳인지를 경험한 형수였고, 그 성적이 결코 만족스럽지 못했기에 거기에 따른 부담감과 압박감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2억 5천만 달러라는 계약을 맺은 나.
LA 다저스 특급 유망주였던 마리아 파헬슨과 트레이드가 된 형수.
부담감으로 따지면 어느 쪽도 모자라지 않았다.
“후우우우.”
공기부터 다르다.
호의적인 시선으로 날 응원하던 한국 야구팬들 앞에서 투구를 하던 것과 호기심과 날선 비난과 비판을 언제든 토해낼 준비를 하고 날 바라보는 미국 야구팬들 앞에서 투구하는 건 확실히 달랐다.
한국 마운드에서 따뜻한 훈풍을 느꼈다면, 미국 마운드에서는 차가운 칼바람이 몰아쳐오는 것만 같았다.
“아자! 아자! 차지혁! 파이팅!”
형수가 마스크를 내리기 전 우렁차게 외쳤다.
나를 향한 응원이면서 자신을 향한 응원이기도 했다.
좋다.
저런 든든한 녀석과 함께 호흡을 맞출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싸늘하게 느껴졌던 마운드 위의 공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매끈한 감촉이 더 큰 메이저리그 공인구를 글러브 안에서 두어 번 굴리고는 첫 번째 연습투구를 시작했다.
쇄애애액.
퍼- 엉!
“좋아! 좋아! 바로 이거야! 오늘 볼 끝이 완전 살아 있다!”
형수는 시끄럽게 떠들었다.
몇몇 관중들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참 수다스러운 포수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어쨌든 좋았다.
몇 번의 연습투구를 통해 확실하게 어깨가 예열이 되자, 적절한 타이밍에 심판이 경기 시작을 외쳤다.
타자 박스로 아침에 호텔 로비에서 봤던 사토시 슌이 들어왔다.
배트를 짧게 쥐고 스탠스를 넓게 잡고 서 있다.
오른발은 타자 박스 가장 뒤쪽이자, 안쪽 선을 정확하게 밟고 있었으며, 왼발은 살짝 바깥쪽으로 벌어졌고, 특이하게도 양쪽 팔꿈치가 딱 달라붙어 있었다.
상체가 약간 웅크려져 있어 스트라이크 존이 굉장히 넓게 느껴졌지만, 사토시 슌의 모습 자체가 굉장히 날카롭게 날이 선 칼처럼 보여 섣부르게 공을 던져서는 안 된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토시 슌은 초구에 배트를 거의 휘두르지 않아. 그러니까 초구는 무조건 한 가운데로 던져.’
경기가 시작되기 전, 마무리 훈련을 마치고 휴식을 하는 동안 형수가 했던 말이다.
나 역시 사토시 슌이 초구부터 배트를 휘두를 정도로 성격이 급하거나, 공격적인 타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사인대로 한가운데에 초구를 넣어 줄 생각이었다.
사인이 나왔다.
한 가운데 포심 패스트볼.
천천히 와인드업을 하고 곧바로 초구를 던졌다.
손가락 끝에서 밀려 나가는 감촉이 괜찮다, 구속을 끌어올리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91~92마일은 나올 것 같다.
미국 마운드에 서서 던지는 첫 번째 공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내가 던진 공이 손끝에서 뿜어져 나가기가 무섭게 포수 마스크 뒤에 가려진 형수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커졌다.
따- 악!
초구에 배트가… 나왔다.
91~92마일의 한 가운데 포심 패스트볼.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아주 맑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타구는 빛의 속도로 외야를 향해 뻗어 나갔다.
오늘 경기 선발로 중견수를 맡고 있는 마이크 트라웃은 두 발자국 정도 움직이다 멈춰서더니 등을 돌려 머리 위를 올려다봤다.
“하…….”
담장을 훌쩍 넘겨버린 타구를 바라보는 내 입에서 허탈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초구 홈런이라니 이런 경우가 있었던가?
빠르게 베이스를 도는 사토시 슌의 표정은 덤덤했다.
그 표정이 더 내 심장을 따끔거리게 만들었다.
차라리 날 향해 우월감을 표시하거나, 비릿한 웃음, 거만한 웃음을 지었다면 완전히 수 싸움에서 졌다고 느꼈겠지만, 사토시 슌은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애초부터 나라는 존재자체를 신경 쓰지 않았다는 의미로 밖에 보이질 않았다.
“타임!”
2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기 전, 형수가 마운드로 올라왔다.
“신경 쓰지 마. 운이 나빴다고 생각해.”
“운이 나쁜 게 아니야.”
“뭐?”
“사토시 슌이 마이너리그에서 타율이 얼마라고 했었지?”
내 물음에 형수가 곧바로 4할 5푼이라고 대답했다.
이제야 알 것 같다.
트리플A가 마이너리그라 하더라도 타율이 4할 5푼이라는 건 경이적인 기록이다.
더욱이 사토시 슌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트리플A에서 뛴 타자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타자가 메이저리그 입성을 코앞에 둔 트리플A 투수들을 상대로 4할 5푼을 쳤다.
일본 고시엔에서 6할의 타율 밖에 기록하지 못했던 사토시 슌이 어떻게 비교할 수 없는 트리플A에서 4할 5푼의 타격을 기록했을까?
여기서부터 의심을 했어야 했다.
“너 마이너리그에서 타율 얼마였어?”
“2할 8푼 3리.”
대답을 하는 형수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
같은 리그에서 누군 4할 5푼을 쳤으니 말을 하는 형수의 표정이 썩어 들어가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문제는 이런 형수도 한국에서는 타격 재능이 굉장하다고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사토시 슌과는 급이 다르다.
“알겠어?”
내 물음에 형수가 눈을 찌푸렸다.
“뭘?”
“이건 운이 아니야. 사토시 슌은 처음부터 내 공에 대한 두려움이나 경계 자체가 없었던 거야. 사토시 슌은… 본능적으로 타격을 한 거야.”
본능적인 타격.
말 그대로 감각적으로 날아오는 공을 파악하고 배트를 휘두르는 타자.
사람들은 그런 타자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천재.
사토시 슌은 진짜 천재다.
타격 능력 하나는 정말 두 말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천재인 거다.
투수에게 있어 가장 까다로운 타자, 가장 위험한 타자, 가장 약점이 없는 타자가 바로 감각적으로 타격을 하는 천재다.
문제는 그런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는 사토시 슌이 작년 동안 어떤 식으로 훈련을 받았는지 모르나, 완벽하게 자신의 재능을 만개시켰다는 사실이다.
장담하건데, 당장 사토시 슌이 고시엔 무대에 선다면 8할, 어쩌면 9할에 이르는 타율을 기록할지도 모른다.
“사토시 슌 문제는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면 다시 상의하자.”
심판의 눈초리가 매섭게 변했다.
타임 시간이 너무 길다는 경고가 나오기 직전이라는 뜻이다.
형수도 곧바로 심판의 눈치를 파악하고는 서둘러 포수 자리로 돌아갔다.
처음부터 홈런이라니.
의외의 한 방이다.
하지만, 수확이 크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2번 타자는 도미닉 리스로 작년에도 주전 좌익수로 활약을 했던 선수다.
작년 시즌 1, 2번을 왔가갔다 할 정도로 발이 빠르고, 선구안이 좋으며, 작전 수행 능력을 갖춘 타자다.
메이저리그 3년 차였고, 한국 나이로는 27살이다.
파워가 부족했기에 투수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콜로라도 로키스의 홈구장인 쿠어스 필드(Coors Field)에서조차 홈런을 5개 이상 쳐본 적이 없을 정도였기에 장타에 대한 부담감이 없었다.
딱!
내야를 살짝 벗어난 타구였지만, 2루수인 웨스 스테인의 글러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잡히고 말았다.
이어서 3번 타자와 4번 타자를 상대로 내야 땅볼을 이끌어내며 이닝을 마칠 수 있었다.
더그아웃으로 들어오자 선수들이 일어서서 하이파이브와 함께 날 맞이했다.
몇몇 선수들은 입가에 비틀린 웃음을 짓고 있었다.
초구부터 홈런을 맞았다는 사실이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특히, 필 맥카프리의 표정은 어제 퍼펙트 피칭을 한 이후 날 바라볼 때보다도 더 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초구를 너무 정직하게 던졌잖아. 다음부터는 조심하라고. 그래도 나머지 타자들을 훌륭하게 상대했으니 다음에도 기대하지.”
필 맥카프리의 말에 곁에 앉아 있던 형수가 몸을 움찔거리며 표정을 찌푸렸다.
“됐어. 상대할 필요 없어. 그것보다도 사토시 슌을 상대할 때는 최대한 스트라이크 존을 빡빡하게 가지고 가야겠어.”
“그러다가 볼넷 나오면 어쩌려고? 사토시 슌 저놈 선구안 장난 아니야. 거기에다 애매한 건 몽땅 커트할 정도로 배트 스피드도 좋아. 섣부르게 스트라이크 존을 가지고 놀았다가는 볼넷으로 보내거나, 실투가 나와서 안타를 맞을 수도 있어.”
“알아. 그래도 사토시 슌을 상대하려면 다른 타자들보다 타이트하게 투구를 해야 해.”
내 말에 형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1점 리드를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작된 1회 말 다저스의 공격은 2명의 타자가 출루에 성공하는 것에만 만족하며 공격이 끝났다.
2회 초, 마운드에 다시 오른 나는 포심 패스트볼로 스트라이크 카운트를 만들고 파워 커브로 삼진이나, 범타를 이끌어 내며 이닝을 마쳤다.
사토시 슌에게 홈런을 맞은 것이 오히려 콜로라도 로키스의 다른 타자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준 것인지 전체적으로 스윙이 컸기에 상대를 함에 있어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따악!
타석에서 타구를 확인한 형수가 고개를 흔들며 1루로 뛰었다.
전력을 다할 필요가 없는 평범한 중견수 플라이였다.
2회 말 선두 타자로 2루타를 친 주자는 아웃 카운트가 2개나 늘어날 동안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2루 베이스에 묶여 있었다.
2사 2루 상황에서 타석에 선 건 다름 아닌 선발 투수인 나였다.
고등학교 때에도 지명타자를 써가며 타격을 하지 않았던 나였기에 타석에 서니 상당히 어색하고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쇄애애액!
퍼어엉!
한 가운데에 꽂히는 초구가 굉장히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89마일?’
전광판에 찍힌 구속은 89마일.
내가 느낀 체감 속도는 90마일 중반 정도였으니 타격에 대한 자신감이 급격하게 하락했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타격에도 자신이 있었는데 확실히 고등학교 때부터 타격 연습을 아예 그만둬버렸더니 타격감 자체가 없어진 듯 싶다.
움찔!
몸 쪽으로 파고 들어오는 공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 거렸다.
볼인가?
“스트라이크! 타자 아웃!”
포수 미트를 바라보니 스트라이크가 맞다.
허무하게 루킹 삼진을 당한 거다.
쓴 입맛을 다시며 시간을 쪼개서라도 타격 연습을 해야 한다는 다짐을 하곤 형수가 챙겨온 글러브를 받아 들고 마운드로 올라갔다.
약속된 3회 투구다.
선두 타자는 8번 타자, 그리고 다시 한 번 사토시 슌과 대결이다.
펑!
“아웃!”
유격수의 송구가 자로 잰 것처럼 1루 미트에 꽂혔다.
전력으로 1루를 향해 뛴 타자가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헬멧을 벗고 몸을 돌렸다.
깊숙한 코스로 빠질 수도 있었던 타구를 유격수인 크레이그 바렛이 몸을 날려 잡아내곤 송구까지 깔끔하게 마쳤다.
절로 박수가 나올 명품 수비였다.
이적료 포함 1억 1천만 달러에 탬파베이 레이스에서 영입을 한 크레이그 바렛이다.
단 한 번의 수비였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째서 그가 6년 동안 유격수 골든 글러브자리를 놓쳐본 적이 없는지.
9번 타자는 투수였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루킹 삼진으로 돌려보냈다.
마지막 하나의 아웃 카운트를 남겨두고 그가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오늘 경기 유일한 타점이자, 득점을 만들어 낸 사토시 슌.
1회 초, 타석에 들어섰을 때와 달라진 점은 하나도 없었다.
유일하게 홈런을 친 타자임에도 담담했고, 차분하게 날 노려보고 있었다.
“후우우우.”
가볍게 호흡을 가다듬고 투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따악!
8구까지 가는 접전 끝에 우중간을 가르는 안타를 치고 3루까지 달려버린 사토시 슌의 무지막지한 스피드에 나는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인정한다.
사토시 슌은 진짜 천재다.
나와는 다르다.
놈의 몸엔 천재적인 야구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3루 베이스를 밟고 크게 호흡을 뱉어내는 사토시 슌을 바라보는데,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묘한 감정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다.
질투? 아니다.
경쟁심? 그것도 아니다.
이건… 놀랍게도 즐거움이었다.
“재밌네.”
홈런을 맞고, 3루타를 맞았는데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더불어 손에 쥔 공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사토시 슌은 진짜고, 동급의 진짜들이 아직 2명이나 더 있다.
거기에 기존 괴물 같은 천재들까지 더하면…….
“역시 오길 잘 했어.”
메이저리그에 온 걸 실감했고, 그 어느 때보다 흥분감이 온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코리아 쇼크, 차지혁! 메이저리그 시범 경기서 3이닝 1실점 호투로 합격점!》
기사는 호의적으로 나왔다.
아니, 그럴만한 경기 내용이었다.
다만, 미국의 언론들은 달랐다.
《차지혁, 시범 경기에서 3이닝 1실점. 2억 5천만 달러는 거품?》
벌써부터 시끄러웠다.
특히, LA 다저스와는 관계도 없는 뉴욕 언론의 오지랖은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 『해외편 - 09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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