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093』 >
『해외편 - 093』
주변 선수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을 살피더니 이윽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의 등장에 모두가 얼떨떨해하는 사이, 필 맥카프리가 황급히 뒤를 쫓아 움직였다.
자연스럽게 나머지 투수들도 어미 오리를 쫓는 새끼 오리마냥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 이쪽으로 오잖아?”
빅터 페르난도가 호들갑스럽게 말을 쏟아냈다.
나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는 그와의 첫 인사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뭐라고 하지?’
내가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내 앞에 도착한 그가 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살짝 구부정한 자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선은 191cm인 나보다 훨씬 높았다.
“한국에서의 활약은 잘 봤네. 정말 멋지더군.”
활짝 웃으며 내게 악수를 건네는 그의 큼지막한 손을 바라보며 이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메이저리그의 전설이라 불리는 분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내 말에 그가 환하게 웃었다.
208cm의 큰 키로 인해 빅 유닛 (Big Unit)이라고 불린 메이저리그의 전설, 랜디 존슨(Randy Johnson)이 바로 맥브라이드 단장이 나를 위해 특별히 초청한 투수 코치였다.
은퇴 이후, 야구계를 완전히 떠났다고 알려진 랜디 존슨은 현재 꽤 유명한 사진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정말 많은 메이저리그 구단에서 투수 코치로 영입을 하려고 했지만, 일절 관심이 없다면서 야구계를 완전히 떠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맥브라이드 단장의 제안에 흔쾌히 오케이 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바로 차지혁 선수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 때문이라니요?’
‘랜디 존슨이 차지혁 선수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더불어 자신의 뒤를 이을 최고의 좌완 파이어볼러가 될 거라고 확신한다고 했답니다. 맥브라이드 단장이 랜디 존슨을 찾아가 다른 것 다 필요 없으니 슬라이더 하나만 제대로 가르쳐 달라면서 부탁을 했고, 그 조건을 그대로 수용했다고 하더군요.’
내게 남은 마지막 퍼즐 조각, 슬라이더(slider).
메이저리그 최고의 슬라이더를 던졌던 좌완 투수가 바로 랜디 존슨이다.
나 역시 어렸을 때부터 랜디 존슨의 투구 영상을 상당히 많이 보며 동경을 해왔다.
무엇보다 랜디 존슨이 대단한 건 직구와 슬라이더만으로 모든 타자들을 잠재웠던 완벽한 투피치 스타일의 투수라는 사실이다.
말 그대로 직구 아니면 슬라이더 딱 두 가지의 구종만으로 최고 372개의 삼진을 잡았다는 건, 타자 입장에서 이보다 더 심한 굴욕도 없는 셈이다.
알고도 못 친다.
랜디 존슨의 전성기 시절의 공은 괴물이라 불리는 메이저리그 타자들조차 건들 수가 없는 위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 랜디 존슨에게 슬라이드를 배운다?
최고의 영광이다.
“들어서 알겠지만, 난 이번 스프링 캠프 기간 동안 자네에게 슬라이더 하나만 가르칠 거야.”
“알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모자를 벗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런 나와 랜디 존슨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투수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질투와 부러움으로 정리를 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도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지금 말대로라면 우리는 랜디 존슨 당신께 아무것도 배울 수가 없다는 말인가요?”
필 맥카프리가 살짝 흥분한 얼굴로 랜디 존슨을 향해 도전적으로 물었다.
랜디 존슨은 필 맥카프리의 얼굴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다저스 구단의 요청을 받아들인 건 여기 있는 차지혁뿐이다.”
“말도 안 돼! 이따위 말 같지도 않은 스프링 캠프라니!”
필 맥카프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다.
누가 봐도 차별을 두는 행동이었으니까.
선수들의 표정이 모두 불쾌함으로 물들어가자 랜디 존슨이 다시 말을 꺼냈다.
“착각들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다저스 구단의 요청을 받아들인 건 온전히 내 뜻이다. 다시 말해 내가 차지혁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에게 슬라이더를 가르치겠다고 이번 스프링 캠프에 온 거다. 더 확실하게 말해서 난 차지혁의 개인 전담 코치 자격으로 다저스 구단과 단기 계약을 했을 뿐이다. 구단의 뜻이 아닌 바로 내 뜻으로.”
구단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이라는 랜디 존슨의 말에 구단에 대한 반감을 가졌던 선수들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랜디 존슨 스스로 관심을 둔 선수에게 코칭을 하겠다는 걸 구단에 불만을 삼을 순 없었다.
메이저리그 선수들 중 여유가 있거나, 단기적으로 기술적 보완을 이유로 개인 전담 코치를 두는 일은 흔해 빠진 일이었으니까.
당장이라도 단장 사무실을 찾아갈 것 같았던 필 맥카프리도 랜디 존슨의 말에 헛바람만 토해냈다.
“저… 혹시 가르치는 걸 지켜만 보는 건 괜찮을까요?”
빅터 페르난도가 조심스럽게 랜디 존슨을 향해 그렇게 물었다.
나에게 슬라이더를 가르치는 걸 옆에서만 지켜보겠다는 의미였다.
랜디 존슨은 그런 것까지는 막지 않겠다는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 몇몇 선수들도 눈을 반짝였다.
시간이 되자 투수 코치들이 도착했고, 첫날부터 지각하며 훈련장에 모습을 드러낸 선수들도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첫 날의 훈련은 아주 기본적인 신체 훈련을 시작으로 몸 풀기까지 이어졌다.
쇄애액!
퍼억!
“와우! 볼 끝이 정말 좋은데!”
나와 파트너가 되어서 캐치볼을 하게 된 빅터 페르난도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볼이 좋기로 따지면 빅터 페르난도 역시도 결코 나쁘지 않았다.
캐치볼만으로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부분들은 꽤 준수한 편이었다.
역시 메이저리그 스프링 캠프에 참여할만한 실력이라고 할까?
랜디 존슨은 훈련이 시작하면서부터 가만히 내 곁에 서 있기만 했다.
내가 몸을 푸는 모습을 볼 때에도 가만히 지켜만 봤고, 캐치볼을 할 때에도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약간은 신경이 쓰였지만, 캐치볼을 하면서 서서히 몸이 달궈지고 땀이 나기 시작하니 공을 던지는 동작에만 온 정신을 집중했다.
어깨 예열이 끝나자 포수 장비를 착용한 선수들이 훈련장으로 들어섰다.
“마이너리그 포수들이야.”
곁에 서 있던 빅터 페르난도가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다.
본격적으로 피칭 훈련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코치들이 몇 명의 선수들을 호명했다.
가장 먼저 호명을 받은 건 필 맥카프리였고, 그 외에 작년 시즌 다저스의 선발로 활약했던 투수들과 마지막으로 내가 이름을 불렸다.
올 시즌 다저스 선발 라인업에 가장 유력한 투수들로 현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일종의 테스트였다.
가장 먼저 마운드에 오른 건 당연히 작년 시즌 에이스로 활약했고, 올 시즌도 에이스로 활약을 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필 맥카프리였다.
우완 쓰리쿼터 투수로 포심 패트스볼과 투심 패스트볼, 12to6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 스플리터까지 꽤 많은 구종을 잘 던지는 투수였다. 특히, 12to6커브는 커쇼에게 직접 배웠을 만큼 그 위력이 상당했다.
퍼엉!
“나이스!”
포수 미트에서 깨끗한 포구음이 울려 퍼졌다.
모든 구종의 구속도 괜찮았고, 포수가 원하는 곳으로 정확하게 꽂히는 제구력도 뛰어났다.
변화구의 움직임도 상당히 좋았다.
확실히 연봉 3천만 달러를 받는 에이스 투수의 투구다웠다.
마운드에 서 있는 필 맥카프리는 이번 시즌에도 다저스의 에이스 자리는 자신의 것이라는 듯 오만하게 서 있었다.
방금 보여준 구속과 구위만 놓고 본다면 확실히 오만할만했다.
아무리 냉정하게 평가를 해도 필 맥카프리는 굉장히 좋은 투수였고, 어딜 가더라도 에이스자리를 차지하거나, 넘볼 만했다.
다른 투수들도 하나, 둘 공을 던졌다.
메이저리그 선발 투수 자리를 거저먹은 게 아니라는 듯 하나 같이 위력적인 구위와 구속을 뽐냈다.
한국 프로 투수들과는 확실히 수준차이가 컸다.
괜히 메이저리그를 세계 최고의 프로 리그라 부르는 게 아니다.
마지막으로 마운드에 오른 건 나였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됐다.
미국 땅에 와서 처음으로 타인이 보는 앞에서 피칭을 하는 거다.
긴장감이나 부담감?
그딴 건 없다.
그냥 마운드 위에 서니 절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다.
역시 나는 마운드 위에 설 때가 가장 행복하고 즐겁다는 걸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시즌이 시작되서 정식 경기에 등판하고 싶다는 생각 밖에 안 들었다.
루키 리그와 싱글A 리그가 벌어지는 구장임에도 마운드 상태가 좋았다.
굉장히 신경 써서 관리를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가운데 포심 패스트볼.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는 마이너리그 포수의 첫 번째 요구 사인에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공을 던졌다.
쇄애애액!
퍼어엉!
깔끔하게 포수 미트에 박혀 들어갔다.
손가락 끝에 걸리는 실밥의 감촉도 나쁘지 않았다.
매일 같이 공을 손에 쥐고 다녔던 결과다.
투수는 워낙 민감해서 아주 작은 변화에도 흔들린다.
한국 프로 리그의 공인구와 메이저리그 공인구는 상당히 다르다.
이 변화를 적응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투수들도 생각보다 많다.
두 번째는 몸 쪽 포심 패스트볼, 세 번째는 바깥쪽을 걸치는 컷 패스트볼, 파워 커브, 서클체인지업까지 포수가 원하는 코스에 꼬박꼬박 공이 꽂혔다.
예열된 어깨로 인해 공의 구속도 점점 올라갔고, 무브먼트 역시도 좋았다.
“와우! 정말 대단한데!”
빅터 페르난도가 멀리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몇몇 선수들이 눈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그들 역시 반박을 하지 않았다.
뭐라고 하기가 힘들 정도로 좋은 공을 던져대니 할 말이 없을 수밖에.
마운드에 서서 필 맥카프리를 바라보니 그의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이전 투수들이 던졌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와 여유가 사라져 있었다.
마운드를 내려오려고 하자 랜디 존슨이 내게로 다가왔다.
“슬라이더는 던져 봤나?”
“던져보지 않았습니다.”
“가르쳐주지.”
“지금 여기서 말입니까?”
“물론이지.”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새로운 구종을 던져본 적이 없었다.
공을 던지기 전까지 그립이 손에 익을 때까지 쥐고 다녔고, 자세를 하나하나 체크하며 만들었다.
때문에 내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 버릇이 없다는 점이다. 즉, 같은 투구 동작에서 포심 패스트볼, 파워 커브, 컷 패스트볼, 서클 체인지업까지 모두 동일하게 나왔다.
그만큼 오랜 시간 공들여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손을 줘봐.”
랜디 존슨은 내 손을 보고는 가만히 공을 올려놓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그립을 쥐어줬다.
투구 동작에 대해서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내가 지금까지 슬라이더를 배우지 않은 이유는 팔꿈치에 무리가 많이 가는 구종이기 때문이다.
한 번 팔꿈치에 문제가 생기면 그걸로 투수 생명은 끝이다.
절대 회복을 할 수가 없는 부분이다.
그렇기에 최대한 조심을 해야만 한다.
“던져봐.”
마운드 뒤로 물러나며 랜디 존슨이 포수를 가리켰다.
‘이런 식으로 슬라이더를 배우게 될 줄이야.’
솔직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투수의 몸은 스스로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정말 어이없게도 다른 투수의 투구폼을 장난삼아 따라하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선수 생활을 접은 투수도 있다.
황당한 일이지만, 그만큼 투구 동작은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다짜고짜 말 몇 마디하고 슬라이더를 던지라니…….
마운드에 서서 가만히 투구를 기다리는 포수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몸을 돌려 랜디 존슨을 바라보며 말했다.
“못 던지겠습니다. 아니, 던지지 않겠습니다.”
내 말에 랜디 존슨이 피식 웃었다.
“겁이 많군.”
“예. 그만큼 제 몸은 소중합니다.”
마운드에서 내려오자 랜디 존슨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마음에 드는 군. 투수는 몸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해. 롱런의 첫 번째 비결이지.”
“절 시험하신 겁니까?”
“평가라고 해두지.”
그 말을 끝으로 랜디 존슨은 오후에 보자며 훈련장을 나갔다.
오후에 다시 나타난 랜디 존슨은 내게 usb메모리를 내밀었다.
“스프링 캠프 기간은 생각보다 짧지. 제대로 슬라이더를 배우기엔 부족한 시간이야. 아쉽지만, 나도 2월 말부터는 개인 일정이 빡빡해서 시간을 더 낼 수가 없어. 스프링 캠프 기간 동안 최대한 많은 부분을 가르치겠지만, 부족한 점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 나머지는 여기 담겨 있는 자료를 활용해서 스스로 터득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건가?
체계적으로 차근차근 슬라이더를 배우고 싶었지만, 랜디 존슨의 개인 스케줄이 따로 있다고 하니 매달릴 수도 없었다.
어설픈 자료를 줬을 리가 없었기에 랜디 존슨이 건네주는 usb메모리를 가방에 잘 넣어뒀다.
“이제 시작해볼까?”
메이저리그를 호령했던 랜디 존슨의 슬라이더를 배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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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훈련 기간 동안 투수조는 피칭 훈련과 수비 훈련을 상당히 강도 높게 했다.
하루, 하루가 지옥 훈련이라 할 정도로 새로운 감독인 블라디미르 게레로 감독은 스타 선수라 하더라도 절대 봐주지 않았다.
매년 막대한 연봉을 지출하는 LA 다저스에서 올 시즌 제대로 된 성적을 내기위해 확실하게 게레로 감독을 밀어주기로 한 이상 스타급 선수들이라 하더라도 대놓고 불만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았다.
“손목 각도가 먼저 빠지는 군.”
랜디 존슨의 지적에 고개를 흔들었다.
슬라이더는 확실히 다른 구종들에 비해 동일한 투구폼으로 공을 던지는 게 쉽지 않았다.
몇 번을 연습해도 마찬가지였다.
손목의 각도가 미묘하게 비틀리며 지금 슬라이더를 던진다라는 걸 상대방에게 알려주는 투구폼이 반복됐다.
“후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잠시 휴식을 취하자 랜디 존슨이 조용히 말했다.
“슬라이더의 투구폼을 바꾸는 건 쉽지 않겠군. 그렇다고 대놓고 슬라이더를 던지면 그걸 못 칠 타자들도 없을 테고.”
맞는 말이다.
메이저리그의 타자들이다.
투수가 어떤 구종을 던질지 뻔히 알고 있는데 못 친다?
한두 번은 있을 수 있어도 그 이상은 힘들다.
구속과 구위로 타자를 짓누르는 것 역시도 한계가 있다.
“모든 투구폼이 너무 깨끗해. 그 점이 오히려 슬라이더를 던지는 걸 방해하고 있어. 지금 상태로는…….”
냉정하지만, 맞는 말이다.
방법이 없을까?
혹시나 싶어 랜디 존슨의 뒷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슬라이더는 포기해.”
“…….”
사망선고다.
슬라이더를 던질 수 없다는 사망선고가 랜디 존슨의 입에서 냉정하게 나왔다.
< 『해외편 - 09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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