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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마일-92화 (92/221)

< 『해외편 - 092』 >

『해외편 - 092』

“what the fuck! yellow monke……!”

“일을 크게 만들고 싶은 모양이지? 어떤 상황이건 공개적으로 인종 차별적인 말을 하면 그 즉시 선수 징계 위원회에 올라간다고 알고 있는데? 내가 잘 못 알고 있는 건가? 그리고 한 번은 참지만 두 번은 안 참아. 징계 위원회에 출석하고 싶지 않으면 닥치는 게 좋을 거야.”

눈앞에서 녹음이 되고 있는 핸드폰을 가볍게 흔들자 급히 입을 다물고 날 죽일 듯 노려봤다.

어디든 인종 차별에 대한 징계는 무척이나 엄격했다.

특히, 스포츠계에 있어서는 그 수위가 더 높았다.

아무리 약소한 징계를 받는다 하더라도 적지 않은 벌금과 더불어 경기 출장 정지를 받는다.

프로 스포츠 선수에게 가장 심한 징계는 그 어떤 것도 아닌 경기 출장 정지다.

녀석도 그걸 알기 때문에 나만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낮춰 모욕적인 말을 했던 거다.

다시 말하면 바보는 아니라는 소리다.

하지만, 한 번은 봐줄 수 있지만, 두 번은 봐줄 마음이 없다.

여기서 일을 크게 만들길 원한다면 나 역시 얼마든지 뜻대로 해줄 수 있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수위 높은 징계를 받는 건 당연히 녀석이다.

어떤 경우든 인종 차별은 최우선적으로 처벌을 받으니까.

“앨런! 무슨 일이야?”

이름이 앨런인가?

나를 죽일 듯 노려보는 녀석의 곁으로 갈색 머리카락에 2m에 가까운 큰 키를 가진 호리호리한 체격의 선수가 다가왔다.

별다른 특징 없게 생긴 선수였는데, 그가 바로 현재 LA 다저스의 에이스 필 맥카프리였다.

필 맥카프리가 다가오자 원군을 얻었다는 듯 기세등등하게 앨런이 말했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시비를 걸고 있잖아!”

앨런의 말에 필 맥카프리가 사실이냐는 듯 날 빤히 바라봤다.

아래로 깔아보는 눈빛에서 대충 상황이 이해갔다.

앨런이라는 놈이 작정하고 나에게 시비를 걸었고, 그걸 지시하거나, 그렇게 하도록 부추긴 사람이 필 맥카프리일 것 같았다.

“말은 똑바로 하지? 시비를 먼저 걸었던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뭐라고!”

흥분한 듯 앨런이 다짜고짜 내 멱살을 잡아챘다.

“지혁아! 야 이 새끼야! 그 손 안 놔!”

형수가 누구보다 먼저 달려왔고, 그런 그보다 내가 먼저 앨런의 손목을 잡고 비틀었다.

“으윽!”

“어딜 손을 대? 손모가지 부러지고 싶어?”

있는 힘껏 손목을 비틀어버리자 급기야 앨런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악!”

나보다 키가 큰 미국인이 엉거주춤 허리를 굽히고는 비명을 지르는 모습이 꽤 우습게 보였다.

달려오던 형수는 혹시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까 싶어 눈을 부라리며 주변을 돌아봤고, 몇몇 선수들이 재빨리 달려오며 앨런의 이름을 불렀다.

“이적생 신분인데, 선수들과 인사도 하기 전부터 폭력 사건인가?”

필 맥카프리가 피식 웃으며 날 바라봤다.

“틀렸어. 이건 정당방위라고 하지. 그쪽도 분명히 봤잖아? 이쪽이 먼저 날 죽이려고 목을 조르던 걸?”

당당한 내 말에 필 맥카프리가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목을 조르긴 누가 목을 졸랐다는 거야? 앨런은 그냥 멱살만 잡았을…….”

말을 하던 필 맥카프리가 눈을 찌푸렸다.

확실하게 증언을 해줬다.

앨런이 내 멱살을 잡는 걸 못 봤던 선수들에게 분명히 증언을 한 셈이다.

물론, 못 본 선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난 확실하게 주머니 속에 넣어 둔 핸드폰 음성 녹음을 통해 필 맥카프리의 육성으로 물증까지 확보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앨런은 욕과 함께 비명을 내지르며 고통스러워했다.

“그 정도 했으면 됐으니까 그만 둬.”

트라웃이 다가와 내게 그렇게 말했다.

더 이상 문제를 크게 확대시키지 말라는 눈빛이었고, 나 역시 이 정도면 충분하다 여겼기에 미련 없이 손을 놔줬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난 앨런은 ‘f’로 시작하는 욕을 연신 지껄였다.

저 지저분한 입을 한 대 후려 갈겨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앨런! 너도 그만해! 먼저 부주의하게 가방으로 사람을 쳤으면 사과를 해야 할 것 아냐!”

트라웃의 말에 앨런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필 맥카프리를 바라봤다.

도움을 요청하는 앨런을 필 맥카프리는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더 이상은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한 태도에 앨런이 살짝 당황한 모습을 보이더니 이윽고 몸을 돌려 선수 전용 버스로 향했다.

“필 맥카프리다. 반갑다.”

필 맥카프리가 손을 내밀었다.

가만히 그가 내민 손을 바라보다 이내 손을 맞잡았다.

“차지혁. 잘 부탁해.”

꿍꿍이가 무엇이든 간에 내가 먼저 성급하게 행동할 필요는 없었다.

손을 맞잡은 필 맥카프리의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일그러지며 웃었다.

마치 그 웃음이 뱀의 눈과 같았다.

소름이 돋기보다는 기분이 나빴다.

“올 시즌 모두가 널 새로운 다저스의 에이스라며 거는 기대가 크더군. 부디 모두의 바람대로 좋은 활약 부탁한다.”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리는 필 맥카프리의 곁으로 4명의 선수들이 달라붙었다.

“나는 또 투명인간 취급이네. 젠장!”

형수의 투덜거림을 뒤로 하고 트라웃을 바라봤다.

“고마워요, 트라웃.”

“내게 고마워 할 건 없지. 설마 이 정도의 시비에 마음이 상한 건 아니겠지?”

“물론이죠.”

“하하하. 어딜 가든 이적선수는 처음에는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어. 이것도 다 가까워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내 어깨를 툭툭 치고 지나가는 트라웃이었다.

메이저리그의 선수들은 한국 프로 선수들과는 분명히 다르다.

막대한 돈을 받다보니 자존심이 무척이나 강했다.

그렇다보니 주변 시선, 말에도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런데 자신의 자리까지 위협한다고 해봐라.

굉장한 적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당연하다.

자신의 자존심을 짓밟은 것도 모자라서 밥 그릇까지 뺏으려고 하는데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무엇보다 스타급 선수들은 한국과 다르게 감독이나 코치들마저 아래로 깔본다.

그게 메이저리거다.

세상에서 가장 잘난 맛에 사는 인간들이고, 거기에 걸맞는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이해해야 하는 문제였다.

“어디 다친 곳은 없지?”

형수의 물음에 빙긋 웃어주고는 함께 선수 전용 버스를 탔다.

전세기를 타고 애리조나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도 상관없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단에서 전세기를 내어준 것을 보면 메이저리그의 선수들이 얼마나 대우를 받으며 야구를 하는지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스프링 캠프가 끝나기 전까지 생활하게 될 숙소 역시 최고급 호텔이었다.

룸메이트도 마음 맞는 선수들끼리 지낼 수 있도록 배정을 해주었기에 나는 당연히 형수와 함께 생활을 했다.

“작년에도 애리조나였는데, 올해도 애리조나로 왔네.”

LA 다저스와 밀워키 브루어스는 같은 캑터스 리그(cactus league)에 속해 있었다.

메이저리그의 스프링 캠프는 각각 애리조나와 플로리다에 차려지는데, 이때 각 지역의 특산물을 대표해서 애리조나는 선인장인 캑터스 리그, 플로리다는 노란 자몽인 그레이프프루트 리그(grapefruit league)라고 불렀다.

“가자! 애리조나가 어떤 곳인지 구경시켜 줄게!”

싫다고 하려다가 이내 짐 가방을 풀어 간편한 운동복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왜 옷을 갈아입어?”

“너도 갈아입어.”

“왜?”

“오후 훈련은 런닝으로 대체하려고.”

“뭐?”

“애리조나 구경도 하고, 운동도 하고. 일석이조잖아. 싫어? 그럼 훈련장으로 갈까?”

“독한 놈!”

형수는 구시렁거리면서도 운동복을 찾아 입었다.

어차피 애리조나를 구경할 거라면 간단하게 런닝을 하면서 구경을 해도 될 것 같았다.

형수와 함께 호텔을 나와 그 앞에서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하고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형수의 안내를 받으며 시내를 뛰어 다녔다.

그 중 몇몇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는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해오기도 했다.

몇몇 아이들은 사인을 해달라고 달려오기도 했지만, 부모들이 미안하다며 재빨리 아이들을 데리고 가버려서 번거로운 일에 휘말리지는 않았다.

“미국은 이게 참 좋아. 사생활을 존중해주거든. 한국이었으면 넌 지금쯤 사람들 속에 파묻혀서 꼼짝도 못했을 거다.”

대략 3시간 정도 구경 겸 런닝을 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로 돌아오니 구단 직원이 앞으로 스프링 캠프의 정확한 스케줄을 통보해왔다.

“작년이랑 좀 다르네.”

스케줄을 확인한 형수가 그렇게 말했다.

“달라?”

“작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메이저리그 구단은 10일 정도 팀 훈련을 하고 곧바로 시범경기에 들어갔었거든. 그런데 이번에는 팀 훈련 시간이 15일로 늘어났잖아. 그리고 그만큼 시범경기 일정도 줄어들었고. 의외네. 어쨌든 난 먼저 씻는다.”

이틀 후부터 시작되는 스프링캠프 일정은 15일 동안 팀 훈련을 받고, 하루 휴식 후 곧바로 시범 경기 일정을 소화한다.

첫 상대는 신시내티 레즈(Cincinnati Reds)였고, 굿이어 볼파크(Goodyear Ballpark)에서 원정 경기가 잡혀 있었다.

“신시내티에서 경계해야 할 선수가 누구였더라…….”

프론트 직원에게 부탁해서 받은 각 구단 선수 데이터 자료를 살펴보기 위해 노트북을 켰다.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분명 한국 타자들과는 다르다.

미안한 말이지만, 수준 차이가 아주 컸다.

타자들의 분석 자료를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마운드 위에서 가장 믿는 건 오로지 내가 던지는 공이다.

전력 분석실의 자료는 참고 사항일 뿐이다.

아주 유용한 참고자료.

그거면 충분하다.

@

스프링 캠프가 시작됐다.

LA 다저스의 훈련 전용 구장은 캐멀백 랜치(Camelback Raunch)의 구장 중 5개를 사용하고 있었다.

57만m²에 달하는 엄청나게 넓은 부지에 2020년 5개의 야구장을 증설한 총 16개의 야구장이 지어져 있는데, 그 중 시범경기에 사용되는 메인 스타디움을 제외한 나머지 15개의 야구장을 각각 5개씩 시카고 화이트삭스(Chicago White Sox)와 나눠서 사용하고 있었다.

각각 야구장에는 내야, 외야, 투수, 타격, 합동 훈련조로 나누어져서 야구장을 사용했다.

나는 당연히 투수들이 훈련하는 3구장으로 향했고, 형수는 타격 훈련을 하는 4구장으로 향했다.

구장에 들어서자 나보다 먼저 가볍게 도착해서 끼리끼리 어울려 대화를 하는 선수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중에 다저 스타디움에서 개망신을 당했던 앨런과 필 맥카프리가 눈에 들어왔다.

보이더 앨런.

작년 후반기에 트리플A에서 메이저리그로 콜업되어 올라온 투수다.

보직은 불펜 투수인데, 롱릴리프로 꽤 인상적인 활약을 해서 올 시즌 선발 로테이션의 한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나이는 23살이고, 특이 사항으로는 필 맥카프리와 꽤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형수의 표현에 의하면 필 맥카프리의 하인 같은 놈이라고 했다.

앨런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노골적으로 적대감 가득한 시선으로 노려봤다.

반면, 필 맥카프리는 나를 향해 손을 슬쩍 흔들며 인사를 건네왔다.

“쇼크(Shock)! 오늘 드디어 네 투구를 직접 볼 수 있겠는데?”

선수들은 어느 순간부터 이름보다는 쇼크라고 날 부르고 있었다.

딱히 좋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하기도 귀찮아서 마음대로 부르라는 식으로 내버려뒀다.

“흥! 2억 5천만 달러? 정말 기대가 되는군!”

앨런이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난 깨끗하게 개무시 해버렸다.

형수 말대로 필 맥카프리의 하인을 상대로 대응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 없다 여겼다.

앨런 외에도 주변 투수들 대부분이 날 호의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다저스 클럽 하우스 내에는 3개의 파벌이 존재했는데, 파벌들의 중심은 필 맥카프리, 마이크 트라웃, 코리 시거였다.

필 맥카프리를 중심으로 뭉친 파벌들은 대다수 투수조로 실질적인 다저스 투수진의 수장이라 부를 만 했다.

호의적이지 않은 이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기에 간단하게 런닝으로 몸이라도 풀어놓을 겸 천천히 그라운드를 뛰기 시작했다.

훈련장에 투수들이 하나, 둘 들어설 때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필 맥카프리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 모습에 괜히 쓴웃음이 나왔다.

필 맥카프리를 중심으로 한 파벌이 깨지지 않은 이상은 투수조 내에서 내 위치가 참 애매할 것 같았다.

모든 투수들이 필 맥카프리의 파벌은 아니었다.

일부 몇 명의 선수들은 각자 홀로 떨어져서 몸을 풀며 필 맥카프리의 파벌이 아니라는 걸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헤이~!”

내 곁으로 한 선수가 다가왔다.

180cm나 겨우 될까 싶을 정도로 작은 키의 흑인 선수였다.

눈은 왕방울만 했고, 코는 뭉툭했다.

두피에 딱 달라붙을 정도로 짧은 곱슬머리까지 전체적인 외모는 썩 호감이 가질 않았다.

단 하나, 시원스럽게 좌우로 벌어지는 입 꼬리만큼은 꽤 매력적이었다.

“코리아 쇼크~! 붐!”

양손에서 폭탄이 터지는 모습을 과장스럽게 표현하며 익살스럽게 웃는 모습이 천진난만하게 보이는 내 눈이 이상한 걸까?

“난 빅터 페르난도! 도미니카 출신이고, 이번이 3번째로 다저스 스프링 캠프 참석이야.”

손가락 3개를 쫙 펴고 말을 하는 빅터 페르난도였다.

“나는…….”

내 소개를 하려고 할 때였다.

빅터 페르난도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지더니 경악성에 가까운 외침을 토해냈다.

“맙소사! 저게 누구야! 내가 지금 누굴 보고 있는 거야!”

훈련장 입구를 통해 들어서고 있는 한 사람,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모든 선수들이 깜짝 놀란 얼굴로 저마다 소리를 질러댔다.

‘왔군!’

나 역시 그의 모습을 보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까스로 잠재워야만 했다.

< 『해외편 - 092』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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