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088』 >
『해외편 - 088』
“일어났냐? 에바, 지혁이 일어났네요.”
눈을 떠보니 황당하게도 이코노미 좌석에 앉아 있어야 할 에바가 비즈니스 좌석에 앉아 있었다.
원래 앉아 있어야 할 중년의 남자는 멀리 앞쪽에 비어 있던 좌석에 앉아 있었다.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이 갔다.
“에바 양쪽 옆으로 한 덩치 하는 남자들이 앉아 있더라고. 그 모습을 보니까 도저히 안 되겠더라. 승무원하고 저쪽 남자분에게 양해 좀 구했다. 흐흐.”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날 바라보는 장형수의 모습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중에 승무원들하고 기념 사진 한 장씩만 찍어줘라. 그 대가로 에바를 이쪽으로 오게 할 수 있었으니까.”
“뭐?”
“걱정 마. 너랑 에바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고 나랑 에바가 친구 사이라고 말을 해뒀으니까.”
걱정할 것 하나 없다는 투로 말을 하는 장형수에게 왜 쓸때없는 짓을 벌였냐고 면박이라도 주고 싶었지만, 에바가 빤히 바라보고 있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 LA 공항까지 한참이나 남았는데 그 긴 시간을 불편하게 만들 순 없었다.
“차지혁 선수, 미안해요.”
에바의 말에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보나마나 장형수가 싫다는 에바를 억지로 끌고 왔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제와 나 혼자 싫은 내색을 해봐야 좋을 것 하나 없었기에 참고 넘어가는 게 나았다.
“괜찮습니다.”
매년 정기적으로 이뤄지는 가족 여행이라고 했다.
필라델피아에 사는 에바네 가족은 매년 12월 마지막 주에 LA에 사는 삼촌네 집에서 보내는데, 실질적으로 여행이라기보다는 모임이라고 부르는 게 더 맞을 듯 싶었다.
12월이면 상당히 추운 필라델피아보다는 LA가 훨씬 따뜻하기에 연말과 신년을 항상 LA에서 보낸다고 했다.
장형수는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에바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계속해서 주고받았다.
작년 이맘때만 하더라도 영어에 자신 없는 모습을 보였고, 전화 통화로도 영어가 늘지 않는다며 하소연을 하더니 실제로 에바와의 대화가 생각보다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그러니 메이저리그로 콜업도 됐었겠지.’
포수라는 포지션의 특성상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으면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절대 메이저리그의 포수 마스크를 쓸 수가 없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에바와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 동안 장형수가 했던 하소연들이 모조리 엄살이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장형수로 인해 나 역시 간간히 대화에 끼어들었지만, 딱히 의미 있는 내용들은 없었다.
10시간이 넘는 긴 비행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장형수는 꽤 오랫동안 에바를 붙들고 대화를 나눴다.
한참 지나서야 에바가 피곤해하는 모습을 발견하곤 그녀를 놔주었는데, 얼마나 피곤했으면 눈을 감은지 5분도 되지 않아서 잠이 들어버렸다.
“에바 진짜 괜찮지 않냐? 저런 여자 친구 있으면 없는 힘도 솟아나겠다.”
“한 번 들이대던지.”
내 말에 장형수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날 바라봤다.
“내가 미쳤냐? 친구의 애인을 뺏게! 날 그렇게 파렴치한 놈으로 본 거야?”
“친구의 애인?”
“솔직히 말해봐. 너랑 에바랑 분위기가 묘하던데? 에바가 널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나보다는 너한테 더 관심을 보이는 모습도 그렇고. 솔직하게 말해서 에바 정도면 진짜 끝내주는 미녀잖아? 네가 당장 사귀자고 하면 사귈 수 있을 것 같던데?”
“헛소리 그만 하고 잠이나 자.”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고개를 돌리고는 눈을 감았다.
“당장 결혼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가볍게 사겨보라는 건데 뭘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받아들여? 하긴, 여자 손목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쑥맥인 네가 뭘 알겠냐? 다 가졌으면 뭐해. 정작 가장 중요한 게 없는데. 넌 아직 남자 되려면 멀었다. 흐흐흐.”
그 말을 끝으로 잠시 뒤, 잠이 들었는지 움직이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여자 조심해! 오빠처럼 돈 많고 어리숙한 남자들이 꽃뱀들한테 당하는 거야. 웃으면서 먼저 접근하는 여자들 특히 조심해! 다 목적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아유! 진짜 내가 옆에 있으면 꽃뱀이랑 불여우 같은 년들은 단번에 골라낼 수 있는데! 3년만 잘 버텨! 고등학교 졸업하면 바로 미국으로 갈 테니까! 알겠지? 어차피 20년 동안 동정남으로 살았는데 3년 더 동정남으로 산다고 억울할 것도 없잖아?’
나름 눈물의 작별 인사를 하던 중,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며 날 한쪽 구석으로 끌고 간 지아의 마지막 말이었다.
15살 여자애가 할 말이 아니라며 이마에 알밤을 먹이긴 했지만, 한 편으로는 지아의 눈에 내가 얼마나 어리숙하게 보였으면 저렇게까지 말을 할까 하는 자괴감도 살짝 들었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덥나?”
지아의 방에 있던 많은 순정 만화를 모두 섭렵한 나였다.
이제 어느 정도 여자라면 자신감이 붙기도 했다.
아주 작은 덜컹거림과 함께 비행기가 안전하게 착륙을 했다.
“으갸갸갸! 미국이구나!”
겨울잠을 자던 곰이 깨어나듯 기지개를 켜며 장형수가 그렇게 말했다.
“덕분에 정말 잘 왔어요. 보답은 꼭 할 게요.”
에바가 나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엥? 나는? 에바, 확실하게 하자고. 에바를 이쪽으로 데리고 온 건 나잖아. 그런데 왜 나를 빼고 지혁이에게만 보답을 하겠다는 거야?”
“물론, 형수 너에게도 보답을 할게.”
비행기에서 친구 사이가 된 장형수와 에바였다.
“나는 다른 거 필요 없어. LA에 사는 예쁜 여자 친구 한 명만 소개시켜줘. 흐흐!”
장형수의 말에 에바는 찾아보겠다고 대답을 하고는 내게 말했다.
“입단식 잘 해요. 차지혁 선수라면 분명히 메이저리그에서도 충분히 통할 실력자니까 주변 시선 같은 건 무시해요. 한국 사람들은 불필요할 정도로 겸손한 경향이 있어요. 그게 나쁜건 아니지만, 미국에서는 겸손하게 스스로를 낮추는 것보다는 남들 앞에 당당하게 자신감을 드러내는 게 훨씬 이득이에요. 자신 있게! 차지혁 선수가 한국 프로 무대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당당하게 다저스에서도 생활하면 선수들과 팬들 모두 차지혁 선수를 응원해줄 거예요.”
“조언 고마워요. 가족들과 연말 휴가 잘 보내요.”
나와 에바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장형수가 혀를 찼다.
“두 사람은 언제까지 그렇게 말을 할 거야? 에바, 나에게 하는 것처럼 지혁이에게도 말을 편하게 해. 지혁이 너도! 에바가 우리보다 한 살 어리다고 하지만 미국에서는 나이 따윈 크게 중요하지 않아. 서로 마음만 맞으면 10살 차이가 난다 하더라도 편하게 친구로 대할 수 있어.”
형수의 말에 나는 다음에 그러겠다고 말을 했고, 에바는 그저 희미하게 웃고는 자신의 짐을 올려두었던 이코노미 좌석으로 향했다.
에바가 사라지자 형수가 히죽 웃었다.
“에바 덕분에 즐거운 비행이었다. 그렇지?”
“짐이나 챙겨. 에이전트가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난 바로 나가봐야해. 넌?”
“우리 에이전트는 뭐 별로 날 크게 신경 쓰지 않아서 말이야. 생각해보니까 열 받네. 이 기회에 너희 에이전시로 옮길까?”
“그러던지.”
“계약 기간이 아직 3년 남았으니까 위약금이 얼마인지 한 번 알아보고 너희 쪽으로 옮기던지 해야겠다. 해외 드래프트 끝나니까 아예 찬밥 취급이야. 쳇!”
툴툴거리는 형수를 뒤로 하고 먼저 승무원의 안내를 받으며 비행기에서 빠져나왔다.
출국 심사를 마치고 나오자 황병익 대표가 날 알아보고는 재빨리 다가왔다.
황병익 대표 곁에는 백인 남자가 함께 서 있었다.
“오는데 불편한 건 없었습니까?”
“좌석 등급이 좋아서 그런지 편안하게 왔습니다.”
“다행입니다. 어쨌든 미국에 첫 발을 내딛은 걸 축하합니다. 앞으로 차지혁 선수의 이름이 미국 전역에 널리 알려지길 기대하겠습니다.”
황병익 대표의 말에 나는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이쪽은 다저스 구단 직원인 행크라고 합니다.”
황병익 대표는 원어민에 가까운 발음으로 행크에게 나를 소개시켰다.
행크는 나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환영합니다! 차지혁 선수! 오들리오 행크라고 합니다. 그냥 편하게 행크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피곤하시겠지만, 구단주 사무실로 먼저 가셔야 합니다. 구단주와 단장을 비롯한 다저스의 이사회 임원들이 차지혁 선수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죠?”
생각보다 피로감이 없었기에 상관은 없었다.
설령, 피곤하다 하더라도 구단주를 비롯한 임원들이 기다리고 있다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행크가 앞장서서 걸어가자 등 뒤에서 불만 섞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는 완전 투명인간이군. 진짜 서럽다! 서러워!”
형수의 말에 황병익 대표가 손을 내밀었다.
“장형수 선수, 이번에 트레이드 된 것 축하드립니다. 고등학교 때처럼 차지혁 선수와 함께 다저스에서 멋진 활약 기대하겠습니다.”
“황 대표님 말씀처럼 되지 못하면 또 다시 트레이드 당할지도 모르니 이를 악물고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네요.”
형수는 행크를 바라보며 그렇게 푸념했다.
그 모습을 보며 황병익 대표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고등학교 때, 몇 차례나 만난 적이 있었던 두 사람이었기에 서먹한 느낌은 하나도 없었다.
생각해보면 형수는 어느 누구와도 잘 지냈던 것 같았다.
천성이 그런 녀석인 거다.
“황 대표님, 제가 대표님 에이전시로 넘어가면 위약금이나 법적 분쟁 정도는 다 해결해 주실 수 있나요?”
에이전시를 옮긴다는 말이 진심이었던 건가?
“물론입니다. 장형수 선수가 원한다면 내일부터라도 당장 일을 진행시킬 수가 있습니다. 진심으로 저희 쪽으로 옮기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황병익 대표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당연한 반응이다.
지금이야 나로 인해 형수가 찬밥 신세 취급을 받고 있지만, 국내 역대급 포수 유망주로 인정을 받았고, 실제로 해외 드래프트에서도 4라운드에 지명을 받을 정도로 높은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이런 형수를 소속 에이전시에서 무시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원래 형수는 오늘 LA에 입국할 예정이 아니었다.
일주일 후에나 입국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나를 따라서 일찍 들어온 것뿐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에이전시에 알리지도 않았고, 당연히 다저스 구단에서도 전혀 모르고 있다.
그렇다보니 스카우트나 현장 직원이 아니라면 행크가 형수를 못 알아보는 것도 당연했다.
체격이 좋아 눈에 띄기는 했지만, 행크의 입장에서는 나를 보호하는 보디가드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구단 측에서 준비한 차량에 탑승하기 전에 황병익 대표가 슬쩍 행크에게 형수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그가 깜짝 놀라며 형수에게 인사를 해왔다.
형수로서는 딱히 기분 좋은 인사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처지를 잘 알기에 괜찮다고 대답 할 수밖에 없었다.
“짐은 다 도착했습니까?”
하루 전에 미리 어머니가 싸주신 김치와 반찬 등을 비롯해서 개인 생활 용품을 보냈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오전에 모두 집으로 옮겨놨습니다. 그리고 성대준 대표가 차지혁 선수의 새로운 글러브 등을 비롯해서 운동 용품과 의류 등을 보내온다고 했습니다.”
“공항에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는데.”
국내 스포츠 브랜드 시장에 급부상한 Woool의 성대준 대표 역시 공항까지 날 마중 나온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내가 울의 메인 모델로 활약을 하고 모든 운동 용품과 의류를 입고 다니다보니 불과 반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엄청나게 성장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나 역시 통장에 꽤 많은 돈이 쌓이고 있었고, 보유하고 있는 주식의 가치 또한 굉장히 높아져 있는 상태였다.
“너 얼마나 벌었냐?”
곁에서 가만히 앉아 있던 형수가 은근슬쩍 물어왔다.
“꽤 벌었어.”
“그러니까 얼마?”
“정확한 액수는 잘 몰라.”
“대충이라도 말해봐.”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형수의 부담스러운 눈빛에 대충 대답했다.
“6억 정도.”
“6억?”
형수가 놀란 얼굴로 날 바라봤다.
연봉 자체가 백억 단위가 넘다보니 6억이 작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절대 적은 돈이 아니다.
6억은 어디까지나 울에서 발생한 순이익의 7%를 받은 금액일 뿐이었다.
실제로 정말 큰 돈이 되는 건 주식의 가치였다.
“너 주식도 꽤 가지고 있다면서?”
“그건 또 어디서 들었어?”
“기사로 도배가 됐는데 모르는 사람이 더 이상한 거지! 그리고 지아도 그러더라. 너 패가 망신 하고 싶어서 주식한다면서 좀 말리라고.”
“하여간 걔는 별 소리를 다 하네. 내가 무슨 주식을 알겠어? 그냥 황 대표님이 스톡옵션인가 뭔가로 주식을 받고, 개인 돈도 좀 투자해보는 게 어떻게냐고 하길래 했을 뿐이야.”
처음 울과 계약을 맺고 스톡옵션을 통해 얻은 주식과 일부 돈을 투자해서 사들인 주식의 수가 꽤 됐다.
계약을 맺을 당시에만 하더라도 1주당 1020원이었던 가격이 지금은 7800원을 넘어선 상태였다.
7배가 늘어난 거다.
“그래서 얼마나 가지고 있는데?”
“17%정도 가지고 있어.”
지속적으로 황병익 대표와 함께 울의 주식을 사놨기 때문에 현재 나는 울의 지분율이 17%나 됐고, 황병익 대표 역시 12%였다.
40억이 겨우 넘었던 주식총액도 이제는 290억이 넘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상승할 전망이라 코스닥 시장에서는 가장 뜨거운 주식으로 불리고 있다고 들었다.
“17%?”
형수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재빨리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인터넷으로 주식을 알아보더니 이윽고 열심히 계산까지 끝내고는 내 멱살을 움켜잡았다.
“이 자식아! 너만 부자 될 생각이야? 이런 좋은 일은 나한테도 좀 알려주면 좋잖아!”
“난 아직도 주식 잘 몰라. 그냥 황 대표님이 괜찮다고 하니까 한 것뿐이야. 하고 싶으면 너도 지금이라도 울 주식을 사던지.”
내 말에 형수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반년도 안 되서 7배나 뛴 주식을 사는 멍청이가 어딨냐!”
갑자기 소리를 내지르는 형수로 인해 운전을 하던 행크가 깜짝 놀라며 무슨 일이냐며 물어왔다.
창문을 열고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는 형수를 대신해서 내가 아무 일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말라고 대답을 했지만, 룸밀러를 통해 자꾸만 우리 쪽을 쳐다보는 행크였다.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형수가 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이라도 살까?”
“내 옆에 멍청이가 있었네.”
< 『해외편 - 088』 > 끝
ⓒ 독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