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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마일-87화 (87/221)

< 『해외편 - 087』 >

『해외편 - 087』

“죄, 죄송합니다. 아, 알겠습니다. 예, 예.”

땀을 뻘뻘 흘리며 전화기를 받은 제프는 조심스럽게 수화기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책상 위에 가지런하게 정리가 되어 있던 서류, 사진, 각종 장식품들을 바닥으로 내던지며 분노를 폭발시켰다.

“으아아아아아악!”

자신의 사무실에서 고성을 내지르며 책장의 책까지도 마구잡이로 집어 던지며 분풀이를 하는 제프였다.

제프의 난동을 사무실 밖에서 들어야만 하는 사람들의 얼굴엔 불편한 기색이 가득했다.

상사가 저렇게 화가 났으니 괜한 불똥이 자신들에게도 튈 것이 걱정스럽기도 했다.

“이제 겨우 한 번 실패했을 뿐인데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건가?”

“뭐든 한 번이 중요한 거잖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패를 하지 않았던 제프의 자존심과 명예에 큰 상처가 되겠지.”

“이번에 구단 측에서도 굉장히 많은 부분을 지원했다고 하던데?”

“당연하잖아. 듣기로는 이번 이적 협상 지원 경비로만 20만 달러 이상 들었다고 하더군.”

“20만 달러?”

생각하지도 못했던 큰 지출에 직원 중 한 명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도대체 무슨…….”

“테일! 테일! 당장 내 방으로 들어와!”

제프의 신경질적인 고성에 직원들이 안쓰러운 눈으로 테일을 바라봤다.

승승장구하던 제프의 곁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지만, 지금과 같은 순간에는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렇게까지 기쁠 수가 없었다.

테일은 제프의 사무실로 들어가기 전,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문을 열었다.

10분.

대략 그 짧은 순간 사이에 누구보다 깔끔하고 정리가 잘 되어 있던 제프의 사무실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토네이도가 휩쓸고 지나간 것 같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온갖 물건을 내던졌을 제프의 모습을 머릿속에 지워버리고는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토해내고 있는 제프의 곁으로 다가갔다.

“동양의 냄새나는 노란 원숭이 자식이 날 물 먹였어! 내 자존심과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커리어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고! 구단주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나에게 실망이라는 말을 3번이나 했어! 젠장! 빌어먹을!”

온 몸을 부르르 떨며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제프였다.

“다저스에서 차지혁을 영입하기 위해 그의 친구를 동원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비열한 맥브라이드!”

LA 다저스의 단장에게 온갖 욕을 퍼붓는 제프를 테일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비열함으로 따지면 메이저리그 모든 구단의 스카우트들 중 제프가 일인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맥브라이드 그 인간이 미친 게 분명해! 정상적인 놈이었다면 마리아 파헬슨을 내줬을 리가 없어!”

LA 다저스 마이너리그에서 키우고 있는 유망주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특급 유망주가 마리아 파헬슨이다.

BA 선정 2026년 전체 유망주 평가에서도 27위를 차지할 정도로 마리아 파헬스은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유망주였다.

많은 메이저리그 구단에서 몇 번이나 트레이드를 요청했을 때에도 절대 불가를 외쳤던 마리아 파헬슨을 먼저 트레이드 시키면서까지 차지혁을 영입한 맥브라이드였다.

결과적으로 차지혁이라는 최고의 대어를 영입하는데 성공했지만, 마리아 파헬슨을 내보낸 건 분명 LA 다저스 입장에서 큰 손실이라 부를 만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차지혁을 성공적으로 영입했다는 것 하나만 놓고 본다면 올 겨울 이적 시장의 승리자는 맥브라이드가 확실했다.

문제는 과연 차지혁이 성공적으로 메이저리그에 정착을 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일 뿐.

“빌어먹을!”

제프는 쉬질 않고 맥브라이드와 차지혁에게 욕설을 내뱉다가 테일에게 물었다.

“테일! 나는 지금 너무 화가 나! 2년 안으로 양키스의 단장이 되려던 내 계획을 망가트리고 있는 다저스와 차지혁에게 어떻게든 복수를 하고 싶단 말이야! 방법을 제시해봐!”

LA 다저스와 차지혁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방법?

솔직히 그런 게 있나 싶기만 한 테일이었다.

어떤 식으로 복수를 할까?

차지혁에게는 말 그대로 약점이 없다.

놀랍도록 깨끗하기만 한 사생활과 가족 관계에다 운동 밖에 모르는 너무나도 모범적인 선수가 차지혁이다.

이런 선수에게 복수를 한 다는 건 굉장히 힘들었다.

더불어 LA 다저스를 건드리는 것 또한 무모한 일이었다.

뉴욕 양키스에 비해 아래라 평가를 받을 뿐이지, 메이저리그의 나머지 구단들을 대상으로 명문이라 불리는 다저스였다.

또, 섣부르게 다저스의 흠을 공격하면 양키스 또한 역공을 당할 수가 있다.

“방법 없어?”

제프의 눈동자가 뱀처럼 번들거렸다.

테일은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다 한 가지를 떠올렸다.

“이번 이적이 실패가 된다면 맥브라이드와 차지혁 모두에게 치명타가 될 테죠.”

“계속해.”

“다저스는 프로 데뷔가 고작 1년 밖에 되질 않는 루키에게 무려 2억 5천만 달러를 지출했죠. 여기에 이적료까지 더하면 3400만 달러가 더 추가되죠. 엄청난 거금이죠. 차지혁의 기본 스팩이 워낙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과연 스팩만으로 이 험난한 메이저리그 마운드에서 더욱이 마이너리그에서의 경험도 없는 낯선 외국 투수가 2억 9천만 달러의 가치를 입증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빙빙 돌리지 말고 요점만 말해! 요점만!”

다른 때였다면 흥미롭게 이야기를 들어줬을 제프였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는 듯 성급하게 테일을 닦달했다.

살짝 쓴 웃음을 지은 후에야 테일이 말을 했다.

“제 아무리 뛰어난 신인 투수도 날선 비판으로 자신감이 무너지면 그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죠. 그렇게 무너진 신인 투수와 거액을 들여 돈을 지출하고 팜에서 소중히 키웠던 특급 유망주까지 날려버린 맥브라인 단장이라면 과연 내년 시즌에도 다저스의 단장직을 유지할 수 있을까 싶군요.”

테일의 말에 제프가 그제야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차갑게 웃었다.

“다시 한 번 비버트에게 부탁을 해야… 아니지! 이런 일은 베네딕이 제격이겠군!”

제프의 입에서 베네딕의 이름이 나오자 테일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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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쓰레기 같은 걸 특집 기사라고 쓴 거야!”

장형수가 신경질 적으로 신문을 구겨버리며 화를 터트렸다.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조용히 좀 해.”

그제야 장형수가 조심스럽게 주변을 돌아봤다.

몇 몇 사람들의 눈초리가 꽤 날카롭게 변해 장형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가, 긴 비행 시간을 최대한 안락하게 보내고자 비싼 돈을 지불하고 비즈니스 클래스에 탔는데, 웬 덩치 큰 인간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니 나라도 짜증이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이거 너도 봤지?”

확실히 작아진 음성으로 장형수가 신문을 내밀었다.

우리나라 3대 신문사에서 발행한 스포츠 신문이었고, 거기엔 나에 대한 소식이 특집 기사화되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문제는 내용이었다.

기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뼈대는 미국 야구계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베이스볼 아메리카(BA)의 칼럼을 그대로 번역해 놓은 것이었다.

칼럼의 내용은 굉장히 부정적이었다.

미국 야구를 경험해보지도 못한 외국 신인 투수에게 막대한 돈을 쏟아 부은 LA 다저스의 도박성 짙은 이적을 날카롭게 비판했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더불어 다저스 팜 시스템을 통해 몇 년 동안 열심히 길러 온 특급 유망주 마리아 파헬슨을 밀워키로 트레이드 시킨 이유가 날 영입하기 위한 사실이라는 것도 대놓고 까발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칼럼에서는 나에 대한 기대심보다는 우려심이 더 짙다는 식으로 평가를 하고 있었다.

막대한 연봉을 받는 만큼 신인이더라도 냉정하게 받는 돈 값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잣대를 들이대고 있었다.

특히, 다저스의 영웅으로 화려하게 은퇴를 한 커쇼를 빗대어 거기에 준하는 활약을 해야만 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를 함으로써 굉장한 부담감을 지어주고 있었다.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칼럼 내용이었다.

다만, 수위가 너무 과격했고 너무 비평에만 치중한 내용이 아쉽긴 했지만, 미국인이 아닌 이방인이라는 걸 생각하면 씁쓸하지만 그럴 수 있다 여겼다.

중요한 건 이런 칼럼 내용을 그대로 번역하고 그 내용을 수긍한다는 식으로만 기사를 쓴 우리나라 신문사의 행태였다.

그래도 같은 한국인인데 조금이라도 희망적으로 기사를 써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런 기사를 보고 부모님이 얼마나 걱정할까를 생각하니 더욱더 입안이 씁쓸했다.

결국은 실력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봤어.”

“칼럼을 쓴 베네딕인지 뭔지 하는 인간도 그렇지만, 이걸 그대로 번역해서 특집이라고 쓴 한국 기자 놈하고 신문사는 진짜 뭐냐!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국위선양이라고 그렇게 빨아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게 무슨 개짓거리냐고!”

다시금 목청이 높아지려는 장형수를 진정시켰다.

“그러거나 말거나 너나 나나 실력으로 보여주면 되는 거야. 그러니까 그딴 기사에 괜히 열 받지 말고 신경 꺼.”

“성자 나셨네! 넌 괜찮을지 몰라도 난 정말 못 참겠다!”

“못 참으면? 언론이랑 싸우려고? 누가 그러더라. 벌집하고 언론은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아무리 신경이 쓰여도 모르는 척, 무관심하게 대하는 게 최선이라니까 괜히 혼자 흥분해서 떠들지 말고 영화라도 봐.”

말을 마치고 이어폰을 귀에 꼽아버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나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이게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앞으로 얼마나 더 짜증나는 일이 생길까 싶기도 했다.

‘한국과 미국은 완전히 다르다. 그곳에서 거액을 받아 챙기는 낯선 이방인일 뿐이다. 네가 좋은 성적을 내기 전까지는 하루도 쉬질 않고 널 흔들어 댈 거다.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겠지. 그래도 눈 감고, 귀 닫고 살아라.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니까.’

가족들과 함께 공항까지 마중을 나온 최상호 코치가 내게 한 마지막 말이었다.

외로울 거라고 했다.

주변의 시선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날카롭고, 부정적일 거라고도 했다.

그걸 견디지 못하면 낙오자가 될 거라고도 했다.

꿋꿋하게 이겨내야 한다고, 실력으로 그들을 포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맞는 소리다.

처음부터 환대를 해줄 거란 기대는 버려야 한다.

날 반겨 줄 사람은 극소수다.

선수들만 하더라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날 볼 것이 분명했다.

누군가의 기회를 내가 빼앗는 꼴이니 당연할 수밖에 없다.

시비도 걸어 올 거고, 어떤 일이든 비협조적으로 나올지도 모른다.

슬쩍 장형수를 바라봤다.

그래도 나보다 미국에서 1년이나 먼저 야구를 경험한 녀석이라 든든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 사주가 친일파라고 했었지? 망할 새끼들! 친일파는 전 재산을 몰수하고 일본으로 추방시켜버려야 하는데! 광복한지가 언젠데 아직도 친일파 놈들이 떵떵거리고 사는 건지! 나라꼴이 개판이야! 이러니까 일본이 한국을 아직까지도 졸로 보는 거 아냐!”

끝내 분을 풀지 못하고 신문을 찢어대는 장형수였다.

저런 놈을 믿고 의지할 수 있을까?

작게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앞좌석에 붙어 있는 넓고 깨끗한 화면에서는 슈퍼 히어로라 불리는 영웅들이 악당들을 상대로 화려하게 싸움을 하고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영웅 시리즈물 영화로 얼마 전 5편이 개봉을 했는데, 비행기에서도 볼 수가 있었다.

한참 영화에 집중하고 있는데, 옆에서 장형수가 팔을 툭툭 건드려왔다.

한 번, 두 번은 무시했지만, 자꾸만 건드려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렸다.

“왜?”

이어폰 한 쪽을 빼며 살짝 눈을 찌푸리자 장형수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뒤로 까닥거렸다.

“뭐?”

“저기 뒤에 타고 있는 여자 누구야? 언제부터 금발 미녀랑 알고 지냈던 거야?”

“금발 미녀? 에바?”

“오오~ 이름이 에바야? 같은 비행기를 탄 걸 보면 LA에 사는 미녀라 이거지? 솔직히 말해봐. 나 때문이 아니라 에바 때문에 다저스랑 계약 한 거냐? 흐흐흐.”

익살스럽던 웃음이 지금은 더없이 음흉스러웠다.

“에바 필리스 광팬이다. 내가 에바 때문에… 됐다.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냐. 헛소리 하지 말고 영화라도 봐.”

“필리스? 필라델피아 출신이야? 뭐, 출신이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사는 곳이 LA면 앞으로 다저스 팬 하면 되는 거지. 안 그래?”

“사는 곳도 필라델피아니까 다저스 팬이 될 일도 없다.”

“그래? 그런데 왜 우리랑 같은 비행기를 탄 거래?”

자꾸만 물어오는 장형수의 말을 깨끗하게 무시하며 이어폰의 볼륨을 높였다.

그러다 잠깐 잠이 들었는데, 그 사이 장형수가 사고를 쳐놓고 말았다.

< 『해외편 - 087』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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