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086』 >
『해외편 - 086』
한 통의 전화.
한 통의 전화가 내 이적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해 버렸다.
타석에 선 타자에게 던진 깔끔하고 강렬한 포심 패스트볼처럼 내가 갖고 있던 고민을 미련 없이 털어버렸다.
-나 트레이드 됐다!
멋진 한 수였다.
어쩌면 무의식중에 누구보다 바라고 있었던 소식일지도 몰랐다.
아무도 없는 미국 땅에서 홀로 야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내 가슴속에 작은 불안감을 싹 틔우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아직까지는 20살, 새로운 환경에 홀로 적응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차지혁, LA 다저스로 간다!》
결정을 내리자 이적 협상은 엄청나게 빠르게 이뤄졌다.
이미 모든 세부 조항들을 준비해뒀다는 듯 LA 다저스는 거의 모든 조건들을 수용하며, 기분 좋은 이적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7년 2억 5천만 달러.
황병익 대표가 가장 신경을 쓰며 협상에 열을 올렸던 초상권 수익 배분 비율은 5%를 올린 45%에 최종 합의를 봤다.
여기에 4시즌 후, 선수 독자적으로 선택이 가능한 옵트 아웃 조건, 트레이드 거부권, 마이너리그 거부권, 각종 보너스 내역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LA 다저스에서 얼마나 많은 양보를 해줬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언제 이런 대박 계약을 해보려나.”
장형수는 핸드폰으로 인터넷 기사를 확인하다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뭘?”
“다저스에서 왜 날 트레이드 했겠어? 당연히 널 잡으려고 한 거잖아? 이제 너랑 계약했다고 날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여기지 않도록 네가 옆에서 팍팍 밀어줘. 그래도 내가 이 지구상에서 너랑 가장 많은 시간 호흡을 맞춰 본 마누라잖아. 서방이 마누라 챙겨줘야지. 안 그렇냐? 흐흐흐.”
“선수 기용은 전적으로 감독의 고유 권한인거 몰라? 다저스 단장이 널 트레이드 했지만, 감독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잖아. 혹시 알아? 여름에 다시 널 다른 구단으로 트레이드 보내버릴지.”
“…너 진짜 그렇게 나올래?”
장형수는 무척이나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말이 그렇다는 거야. 내가 다저스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너라는 것 정도는 구단 측에서도 알고 있을 거야.”
“지혁아~ 사랑한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날 껴안으려고 양팔을 벌리며 장형수가 달려들었다.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다시 말했다.
“분명 내가 다저스를 선택한 것엔 네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말끝을 살짝 흐리자 장형수가 눈을 찌푸렸다.
“얌마, 나도 자존심이 있지! 너만 믿고 내가 있을까봐? 단지 너 때문만이 아니라 내 실력으로 안방을 차지할 테니까 걱정 마!”
자신 있는 장형수의 말에 더 이상 할 말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밀워키에서 4라운드에 지명을 했을 정도로 A급 유망주 소리를 들었고, 거기에 맞춰서 올 시즌 내내 키워진 장형수였다.
다만, 메이저리그에 콜업되고 치렀던 몇 경기에서의 성적이 썩 좋지 않았을 뿐이다.
0.156의 타율에 12경기 6개의 수비 실책.
이른 판단일지는 모르겠지만, A급 유망주라고 하기엔 굉장히 부끄러운 성적표였다.
그걸 알기 때문인지 장형수도 올 겨울 혹독한 훈련을 준비 중이었다.
장형수가 어떤 각오로 이번 겨울을 보내려고 하는지와는 상관없이 다저스에서 장형수를 트레이드 한 일은 생각보다 파급 효과가 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밀워키 브루어스에서 장형수를 트레이드하기 위해 다저스에서는 특급 유망주로 분류를 해놓았던 마리아 파헬슨을 내줬기 때문이다.
2023년 2라운드 지명으로 얻은 마리아 파헬슨은 빠른 발과 정교한 타격 능력을 갖추고 넓은 수비 범위를 자랑하는 유격수 자원으로 내년부터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합류가 예정 되어 있었을 정도로 가파른 성장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현재 믿을 만한 유격수가 없는 상황에서 마리아 파헬슨은 다저스 팬들이 가장 아끼던 유망주 중 하나였다.
그런데 폭탄이 터져버린 거다.
나름 탄탄하다 부를만한 포수 자원이 있음에도 포수 유망주인 장형수를 데려왔으니 다저스 팬들 입장에서는 이해하지 못한 해괴한 트레이드라 부르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누구보다 부담감이 큰 사람은 장형수였다.
다저스 팬들의 곱지 않은 시선과 주전 경쟁이 치열한 포지션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메이저리그 생활이 완전히 꼬여버릴 수가 있었다.
“지혁아, 우리 같이 살까?”
“같이?”
“굳이 따로 살아야 할 이유가 없잖아? 같이 살면 서로 훈련하기도 편하고, 생활비도…….”
생활비 이야기를 하던 장형수가 히죽 웃었다.
메이저리그 최고 수준의 연봉이 보장된 나에게 생활비를 이야기 한다는 게 스스로도 어이없는 듯 싶었다.
“생각해보자.”
솔직히 나쁘지 않은 제안인 것 분명했다.
장형수의 노림수가 무엇인지도 뻔히 보였다.
같이 생활하며 자신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다저스 내에서 공고하게 다져놓으려는 노림수였다.
고등학교 시절 배터리였다는 이유만으로도 다저스 내에서 몇 번은 장형수에게 기회를 줄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 기회를 장형수가 얼마나 확실하게 잡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그런데 등번호는 몇 번으로 정했어? 박호찬 선배의 번호나 유혁선 선배의 번호는 아니겠지?”
“미쳤냐.”
61번과 99번.
한국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등번호다.
LA 다저스에서는 얼마나 기억되고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한국인들에게는 영구 결번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61번과 99번은 무조건 사양이다.
우선 다저스의 영구 결번은 1, 2, 4, 19, 20, 24, 32, 39, 42, 53에다가 클레이튼 커쇼의 22번이 추가됐다.
여기에 현재 다저스의 스타급 선수들의 번호까지 피하자면 선택의 폭이 상당히 줄어든다.
“집은? 어느 동네에 얻을 생각이야? 이왕이면 할리우드(Hollywood) 스타들이 많이 산다는 비버리 힐스(Beverly Hills)의 고급 주택을 구하는 게 어때?”
“고급 주택?”
“너 정도면 미국에서도 엄청난 스포츠 스타인데, 이왕이면 주변 시설이나, 불필요한 일에 휘말리는 일이 없도록 고급 주택 단지에 사는 게 편하질 않겠어? 내가 알아보니까 다저 스타디움에서 넉넉잡고 30분이면 이동이 가능할 정도로 거리도 가깝더라고.”
충분히 고려해볼만한 일이었다.
처음 황병익 대표는 다저 스타디움에서 가장 가까운 고급 오피스텔을 얻어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개인 훈련 시간이 많은 나에게 오피스텔보다는 단독 주택이 훨씬 편했기에 그쪽으로 구해달라고 말을 해놓은 상태였다.
고급 주택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편안하게 개인 훈련을 하려면 보안 시설도 잘 되어 있고, 조용한 동네가 내게 맞을 것 같았기에 장형수의 말대로 한 번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집은 얼마나 하는데?”
집이 비싸봐야 얼마나 할까 싶어 가볍게 물었다.
“대충 4천만 달러면 괜찮은 집을 구할 수 있다고 하더라.”
“…….”
내가 말없이 쳐다보자 장형수가 뭘 그러고 보냐는 듯 대꾸했다.
“그래도 넌 2억 7천만 달러짜리 계약을 한 몸이잖아. 원래 집은 빚지고 사는 거라더라. 그런데 넌 빚 같은 거 질 필요도 없잖아? 우리 아빠도 10년 동안 집 대출금 갚았어. 그렇게 생각하면 너한테 4천만 달러짜리가 아니라 1억 달러짜리 집도 충분히 살 수 있는 거 아냐?”
더 이상 언급할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평생 살 것도 아니고, 몇 년 살 집을 4천만 달러나 준다고?
미친 짓이다.
만약, 부모님과 지아가 모두 함께 산다면 모를까, 나 혼자 사는 집을 이렇게까지 호화스럽고 사치스럽게 구입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혹시라도 황병익 대표가 장형수처럼 생각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재빨리 전화를 걸었다.
-아, 차지혁 선수. 무슨 일입니까?
“미국에 집 구입 문제 때문에 전화 드렸습니다. 혹시 제가 원하는 조건대로 집을 알아보신다고 비버리 힐스에 있는 고급 주택 같은 걸 알아보고 계신 건 아니시죠?”
내 말에 곧바로 황병익 대표가 웃음을 터트렸다.
-비버리 힐스라고요? 하하하하하! 차지혁 선수, 그 동네 주택 가격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습니까? 아, 차지혁 선수를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 차지혁 선수가 구입하려고 한다면 딱히 못할 이유도 없지만, 개인적으로 절대 권하지 않겠습니다. 가격도 엄청나게 비싸지만, 세금문제부터 시작해서 유지비까지 매달 들어가는 돈이 상당합니다. 그런 고급 주택보다는 조용한 동네에 위치한 단독 주택을 알아보고 있으니 집 문제는 걱정 마십시오. 다저스 측에서 괜찮은 임대 주택을 알아봐주고 있다고 하니 우선 그쪽부터 확인해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따로 알아볼 예정입니다. 전화 주신 김에 미리 말씀드리죠, 3일 후에 미국으로 들어갈 예정입니다. 차지혁 선수의 집 문제도 그렇고, 그 외적으로도 해결해야 할 일들이 있어 자리를 비울 예정이니 연락해야 할 일이 생기면 에이전시로 연락해놓으시면 제가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괜한 우려였다.
더불어 황병익 대표는 장형수처럼 철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걸 똑똑히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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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깍두기, 파김치만 있으면 돼? 아들, 동치미 좋아하잖아? 마른 반찬도 종류별로 몇 개를 해야 할까? 아! 당장 내일부터 사골부터 끓여서 1회용 팩에 한 끼 먹을 정도로 얼려둬야겠네. 제육볶음이랑, 오징어 볶음도 양념장에 버무려서 팩에 넣어둬야 하니까, 아이스 박스를 엄청 큰 걸로 새로 하나 사야겠는데. 또 뭐가 있더라…….”
식탁에 앉아서 꼼꼼하게 메모를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니 이제 내가 정말 이 집을 나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식으로 계약을 하고, 입단식을 하기로 한 날짜가 어느덧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최소한 3일 전에는 미리 구단주와 단장도 만나야 한다는 황병익 대표의 말에 따라 정확하게 열흘 후에 출국을 하기로 했다.
출국 날짜가 잡히자, 다른 누구보다 바쁜 사람이 바로 어머니였다.
세상 모든 어머니가 그렇듯 가장 먼저 밥 먹는 걱정부터 했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 선수는 잘 먹어야 한다며 언제나 풍족하고 영양가 많은 식단으로 밥을 차려줬던 어머니였다.
하지만, 열흘 후부터는 자신의 손을 벗어나 홀로 생활한다고 생각하니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아들, 고추장하고 된장도 넉넉하게 챙겨야겠지?”
어머니의 물음에 맞은편에 앉아서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미국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으니까 그냥 사먹을게요.”
“사먹는 음식이 얼마나 몸에 안 좋은데! 그리고 넌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담근 고추장이랑 된장만 먹었잖아? 괜히 잘 못 사먹었다가 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메모지에 고추장과 된장, 간장 등을 꼼꼼하게 적는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괜히 가슴이 찌릿해졌다.
“엄마.”
“응?”
“자주 와.”
“어딜? 미국?”
“당연하지. 와서 나 밥도 해주고, 미국 구경도 하고.”
내 말에 어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비행기 표 보내면 자주 가고.”
“한 달에 한 번씩 보내줄게.”
내 대답에 재밌다는 듯 웃던 어머니가 손을 내밀어 내 손을 꼭 잡았다.
“엄마는 우리 지혁이가 미국에 가서도 지금처럼 열심히 잘 할 거라고 믿어. 주변에서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신경 쓰지 말고 지혁이 네가 잘 할 수 있는 운동만 열심히 해. 알겠지?”
말을 하며 눈물을 보이는 어머니의 모습에 나 역시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어머니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떤 일들을 걱정하는지 정도는 잘 알고 있다.
모두가 부러워할 정도로 크게 성공해서 메이저리그로 간다지만, 그곳에서 한국에서만큼 성공을 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남아 있었다.
더불어 너무 큰 계약을 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주변의 기대가 너무 커, 자칫 부담감과 중압감에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부모님이었다.
평생 자식 걱정만 한다는 부모의 심정을 100% 느낄 수는 없지만, 내 손을 꽉 쥐고 있는 어머니의 따뜻한 손이 현재의 감정이 어떻다라는 것 정도는 알려주고 있었다.
“걱정 마. 나 차지혁이잖아. 내가 말했던 것처럼 국내 최고의 투수가 세계 최고의 투수라는 걸 반드시 메이저리그 마운드 위에서 보여줄게.”
밝게 웃으며 대답하는 날 어머니는 기특한 표정으로 바라봐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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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이렇게 가는구나.”
정혜영은 살짝 눈물이 고인 눈으로 에바를 쳐다봤다.
1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단짝처럼 어울렸던 에바였기에 그녀의 떠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정혜영으로서는 서운함과 아쉬움이 물 밀 듯이 밀려들었다.
“혜영,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혜영이 옆에서 많은 걸 가르쳐줘서 정말 뜻 깊은 1년을 보낼 수 있었던 것 같아. 미국에 가서도 절대 혜영을 잊지 않을 게.”
“에바…….”
끝내 눈물을 흘리는 정혜영과 에바였다.
“나 꼭 미국에 갈게. 그때 우리 다시 만나자.”
“언제든 환영이야.”
서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에바와 정혜영은 그렇게 헤어졌다.
< 『해외편 - 08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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