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083』 >
『해외편 - 083』
유혁선.
무슨 말이 필요할까?
박호찬 선배가 미국 메이저리그에 발을 들여 놓은 1세대 한국인 메이저리거라면, 유혁선은 한국 선수의 우수함을 전 미국에 널리 알린 2세대 메이저리거다.
2013년 LA 다저스와 6년 3600만 달러에 계약을 하고 메이저리그로 향한 유혁선 선배는 데뷔 시즌부터 14승을 거두며 화려한 신고식을 치뤘다.
4년 만에 옵트 아웃 조항인 750이닝을 달성하며 FA로 풀리는가 싶었지만, 다시 한 번 LA 다저스와 6년 7700만 달러에 재계약을 하면서 LA 다저스의 유니폼을 계속해서 입었다.
이후, 2년 연장 계약이 더 성사되면서 통산 12년 동안 141승을 올리며 한국인으로서는 가장 많은 승리를 올린 메이저리거, 아시아 투수로서는 다나카 마사히로 다음으로 많은 승리를 기록하고 있는 투수로 이름을 떨쳤다.
“나랑 다나카랑 공통점이 뭔지 알아?”
어느덧 나이가 40살에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유혁선 선배의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혹시, 사이영상을 못 탔다는 것 아닙니까?”
조심스럽게 묻자 유혁선 선배가 히죽 웃었다.
“잘 알고 있네. 나도 그렇지만, 다나카도 10년 넘게 메이저리그에서 뛰면서 단 한 번도 사이영상을 받아본 적이 없어. 다나카는 두 번이나 사이영상 투표에서 2위를 기록했었고, 나도 한 번 뿐이지만 투표 순위 2위로 사이영상과는 인연이 없었지. 그리고 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지.”
월드 시리즈 우승? 이건 아니다.
유혁선 선배는 준우승까지는 해봤지만, 다나카는 2차례나 우승을 해봤기 때문이다.
한 가지가 번뜩 떠올랐다.
“원클럽맨 아닙니까?”
유혁선 선배가 제법이라는 듯 날 바라보며 웃었다.
한국에서는 대전 호크스, 미국에서는 LA 다저스에서만 선수 생활을 한 유혁선 선배다.
다나카 마사히로는 일본에서는 라쿠텐 골든이글스, 미국에서는 뉴욕 양키스에서만 선수 생활을 했다.
두 사람 모두 원클럽맨이며, 그에 걸맞는 대우를 충분히 받으며 선수 생활을 마친 사람들이다.
이후, 말없이 음식만 집어 먹던 유혁선 선배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LA 다저스는 좋은 구단이야.”
“예.”
“LA 다저스는 한국에서 가장 사랑 받는 구단이기도 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
LA 다저스에서 화려하게 비상을 시작한 박호찬 선배와 12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원클럽맨으로 활약한 유혁선 선배의 공은 무시할 수 없다.
더불어 LA라는 지역적 특성도 한 몫 단단히 한다.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중 가장 유명한 건 뉴욕 양키스나 보스턴 레드삭스일지 몰라도, 한국인들이 가장 친숙해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구단은 LA 다저스다.
“이적 협상을 앞두고 이런 말하려니까 진짜 미안하네.”
유혁선 선배의 말에 내가 희미하게 웃었다.
방금 말로 확실해졌다.
갑작스럽게 일면식도 없는 유혁선 선배가 날 만나고자 한 이유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내 이적 협상에 어떻게든 LA 다저스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가져가려는 뜻이다.
유혁선 선배가 현재 LA 다저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뻔히 나오는 답이다.
“미안하다. 맥브라이드 단장이 어찌나 사정을 해대던지, 얼굴 철판 깔고 널 만나자고 한 건데… 너무 마음에 담아두진 마라.”
얼굴까지 빨갛게 변한 유혁선 선배의 모습에 나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적 협상이라는 게 어디 돈만으로 되는 문제인가?
인맥도 중요한 수단 방법 중 하나다.
LA 다저스 입장에서는 날 어떻게든 영입하려고 모든 수단을 다 사용하는 거니 나쁘다 말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까지 날 영입하고자 한다는 노력에 오히려 더 기뻐해야 할 판이다.
“선배님께서는 다시 선수 생활을 할 수 있다면 그때도 LA 다저스에서 뛸 생각이 있으십니까?”
내 물음에 유혁선 선배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LA 다저스는 정말 매력적인 구단이야. 선수들에 대한 대우도 상당히 좋은 편이고, 무엇보다 한인 팬들의 힘은 무시할 수가 없거든. 거기에 명문 구단의 일원이라는 것도 자부심을 가질만하지. 아쉽다면, 쓰는 돈에 비해 성적이 생각보다 나오질 않는다는 게 참 그렇지만.”
쓴 웃음을 짓는 유혁선 선배였다.
한국인으로서 남부럽지 않을 화려한 선수 생활을 한 유혁선 선배였지만,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메이저리그에서 우승 경험이 없다는 거였다.
사이영상이야 워낙 괴물 같은 투수들이 존재하는 메이저리그라 솔직히 유혁선 선배의 실력으로는 요원한 일이지만, 월드 시리즈 우승은 LA 다저스의 선수단을 생각했을 때 충분히 노려볼 만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준우승이 전부인 LA 다저스의 성적은 유혁선 선배에게 있어 쓰디쓴 기억으로 밖에 남질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너는 꼭 우승 반지 가져라. 사이영상도 타고.”
유혁선 선배의 말에 나는 그저 웃고 말았다.
월드 시리즈 우승이나, 사이영상이나 나만 잘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투수라는 보직이 그렇다.
막말로 타자는 팀이 밑바닥을 박박 긴다 하더라도 혼자서 타율 높이고, 홈런 때려대면 MVP를 거머쥘 수 있다. 물론, 팀 성적이 하위권이면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해야겠지만.
어쨌든 타격은 선수 본인의 집중력에 달려 있는 문제라 혼자의 힘만으로도 얼마든지 MVP를 노려볼만 했다.
투수는 다르다.
아무리 잘 던져도 수비의 도움, 타선의 지원이 없으면 승을 쌓을 수 없고, 자책점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하물며, 월드 시리즈 우승은?
메이저리그 역대급 투수로 선수 생활을 마친 클레이튼 커쇼도 원클럽맨으로 LA 다저스에서만 선수 생활을 했다.
7번이나 사이영상을 차지하며 역대 최다 수상자 타이기록까지도 갖고 있었고, 무엇보다 투수로서 MVP도 2차례나 수상하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우승 반지는 없었다.
클레이튼 커쇼의 유일한 아쉬움이자, 단점이 바로 우승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니 오죽하면 LA 다저스는 역대급 선발 투수를 데리고 있음에도 우승을 하지 못하는 저주 받은 구단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우승을 못하는 구단이라 놀림을 받고 있어도 LA 다저스가 명문이고, 좋은 구단인 건 사실이다.
또, 투수인 나에게 가장 유리한 점이 한 가지 존재했다.
바로 LA 다저스의 홈 구장인 다저 스타디움(Dodger Stadium)이 메이저리그 5대 투수 친화구장 중 하나라는 점이다.
홈 구장의 이점은 절대 무시할 수가 없는 부분이다.
투수를 평가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평균 자책점과 이닝 소화력이 바로 구장에 따라서도 크게 변동을 갖기 때문이다.
“굳이 LA 다저스가 아니어도 상관없으니까 널 정말 대우해주고, 우승 가능성이 높은 팀으로 꼭 이적해라. 미국에는 혼자 가는 거냐?”
“예.”
“그렇다면 다행이고. 사실, 가족들이 살아갈 지역 환경도 무시하지 못하거든. 특히 디트로이트 같은 경우는… 뭐 알겠지?”
디트로이트.
무슨 말이 필요할까?
미국 최악의 범죄 도시라는 오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곳이다.
지금이야 미혼이니 상관없었지만, 만약 결혼을 했고 아이가 있었다면 억만금을 준다 하더라도 디트로이트는 사양하고 싶은 곳이다.
실제로 살아보면 어떨지 모르지만, 세계 1위를 고수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안정적인 치안률을 생각한다면 분명 불안한 건 사실이다.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다짜고짜 이적 문제를 들먹이려니까 진짜 미안하다. 내가 했던 말은 그냥 무시해라.”
“여러모로 좋은 말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이적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을게. 그것보다도 한국 시리즈 1차전에서 퍼펙트 한 거 봤다. 서클 체인지업은 언제부터 배운 거야?”
눈을 반짝이는 유혁선 선배의 물음에 나 역시 반색했다.
다른 건 몰라도 메이저리그에서도 체인지업 하나는 리그 최정상급이라 평가를 받았던 유혁선 선배다.
메이저리그를 호령했던 유혁선 선배에게 체인지업에 대한 조언을 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행운이 찾아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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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제프는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중 최고 명문, 뉴욕 양키스의 스카우트 팀장으로 이쪽 계통에서는 남 부러울 것 없는 명예를 쌓았고, 돈도 벌었다.
향후 10년 안에 뉴욕 양키스의 단장이 되는 것이 최종 꿈인 그에게 선수 영입 성공은 당연한 거였고, 반드시 이뤄야 할 것들이었다.
한 번 찍은 선수는 절대 놓치는 법이 없었다.
우선 뉴욕 양키스라는 명문 구단 타이틀이 모든 선수들에게 비싼 값으로 어필을 했고, 막대한 자금력 또한 선수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걸로도 부족한 선수에게는 개인 취향을 고려해서 여자, 술, 가족, 심지어 마약과 도박으로까지 충족을 시켜주며 영입을 성공시켰다.
그런데 코딱지만 한 대한민국의 선수 하나가 제프의 이력에 상처를 내려고 했다.
“우리가 너무 성급했어요.”
테일의 말에 제프가 눈을 찌푸렸다.
반박은 하지 못했다.
이적 협상이 시작되기도 전에 1억 5천만 달러를 제시한 건 분명 성급했던 실수였다.
덕분에 자질구레한 메이저구단들이 떨어져 나가긴 했지만, 문제는 자금력에서 절대 밀리지 않고, 자존심마저 빳빳하게 세운 구단들이 본격적으로 영입전쟁을 준비 중이라는 사실이다.
“어차피 부딪쳐야 할 놈들이야.”
제프는 애써 그렇게 대꾸하고는 한 선수의 파일을 바라봤다.
퍼펙트 제프라는 자부심 가득한 별명을 더럽힐 유일한 선수, 차지혁의 사진을 바라보는 제프의 눈초리가 곱지 않았다.
물론, 당장이라도 자신이 내미는 계약서에 사인만 해준다면 이 정도의 일이야 웃으며 넘어가고 앞으로 그 누구보다 친근하게 지낼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제안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뉴욕 양키스라는 명문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도 없는 이 동양의 투수는 나날이 제프의 신경을 긁어대고 있었다.
“틈이 없어. 틈이.”
여자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많은 돈을 원하지도 않았다.
명예에 대한 갈망도 보이지 않았으며, 술도 마실 줄 몰랐고, 도박이나 마약과 같은 것들과는 아예 접한 적조차 없었다.
그나마 공략해볼 수 있는 부분이라면 야구에 대한 열정과 가족이었다.
야구 열정에 대한 부분은 충족시켜 줄만한 시스템은 솔직히 뉴욕 양키스라고 특별하게 내세울 것이 없었다.
오히려 다른 구단들이 훨씬 더 훌륭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그나마 확률이 높은 가족들을 공략하려고 수차례나 노력을 기울였던 제프였다.
결과는 차디찬 냉대였다.
보통 뉴욕 양키스라는 이름으로 선물을 보내면 아주 극소수를 제외하면 감격하며 고마워했다.
하필이면 차지혁의 가족은 극소수에 해당했다.
뇌물 따윈 받지 않겠다면서 내용물에 대한 호기심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부모라는 인간들도 그랬고, 15살짜리의 여동생조차 맹랑하기 짝이 없었다.
더불어 차지혁 역시 에이전시를 통해 한 번만 더 쓸때없는 짓을 하면 뉴욕 양키스에게는 협상 기회조차 주지 않을 것이라고 무섭게 경고를 보냈다.
이런 경우가 아예 없었던 제프가 아니었기에 재빠르게 정중히 사과를 하며 차지혁의 마음을 풀었지만, 속에서는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온갖 욕이 다 쏟아져 나왔었다.
뉴욕 양키스의 스카우트 팀장인 자신에게 이런 모욕감을 줄 수 있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는 메이저리그의 스타 플레이어뿐이었다.
고작 동양의 작은 나라의 투수 따위가 자신에게 이런 모욕을 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참아야만 했다.
구단주가 반드시 차지혁을 영입해오라는 말은 몇 번이나 전했기 때문이다.
이번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제프는 지금까지 쌓아온 양키스에서의 신뢰가 상당부분 손상될 수밖에 없었다.
무조건 이적 협상을 성공시켜야 한다.
이 한 가지의 절대 명제가 제프를 괴롭히고 있었다.
“텍사스 쪽에서는 2억 달러를 준비 중이라고 하더군요.”
2억 달러?
그깟 돈이 중요한 게 아니다.
제프가 보기에 차지혁은 돈 따위에 움직일 인간이 아니었다.
만약, 돈이 중요했다면 이렇게 머리를 싸매며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
양키스 구단주는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텍사스가 2억 달러를 부르면, 자신들은 2억 3천만 달러를 주를 준비도 되어 있었다.
최소한 돈으로는 메이저리그의 그 어떤 구단과도 싸울 자신이 있었다.
이번 협상의 관건은 차지혁의 마음을 잡는 사람이 승리한다.
문제는 어떻게 마음을 잡느냐다.
“마음을 움직여야해. 마음을.”
제프의 중얼거림에 가만히 생각을 하던 테일이 입을 열었다.
“비버트에게 칼럼을 부탁하는 건 어떨까요?”
“칼럼?”
“양키스가 얼마나 대단한 팀인지, 그리고 그런 팀에서 차지혁을 얼마나 원하는지, 차지혁이 오면 양키스가 어떤 성적을 내게 될지에 대한 기대와 희망에 찬 칼럼을 부탁하는 거죠. 뉴욕포스트(New York Post)에서 대대적으로 칼럼을 작성한다면 그걸 보는 차지혁도 그렇고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 모두 자부심을 갖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칼럼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지혁이 뉴욕 양키스로 갈 것이라고 예상 할 테고, 차지혁도 그런 사람들의 바람을 아예 무시하진 못할 것 같기도 하고요.”
테일의 아이디어에 제프는 가만히 턱을 매만졌다.
생각해보니 나쁘지 않은 시도였다.
다른 구단이라면 모를까, 뉴욕 양키스 아닌가?
더욱이 칼럼을 쓸 비버트 역시도 그저 그런 기자가 아니라 뉴욕포스트의 전문 칼럼리스트다.
한국에서는 유명하지 않을지 몰라도, 미국에서는 결코 영향력이 없다 할 수 없는 비버트였으니 그로 인해 이런저런 기사들도 양산 될 가능성이 컸다.
“당장 비버트에게 전화를 해야겠군!”
작은 희망이 꿈틀거리는 제프였다.
< 『해외편 - 08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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