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082』 >
『해외편 - 082』
“헤이~! 마이 베스트 프랜!”
반가운 목소리다.
커다란 목소리와 함께 훈련장으로 들어서는 녀석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다시 튜빙을 이어갔다.
“어이~! 친구! 이역만리에서 고생하던 친구가 왔는데, 환영은 못해줄망정 소 닭 보는 듯 한 그 태도는 도대체 뭐야! 가장 먼저 찾아왔는데 이거 정말 너무 섭섭하네!”
불만스럽게 소리치는 녀석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러졌다.
“거의 다 끝나가니까 조그만 기다려.”
반갑다.
너무 반가웠다. 그렇다고 하던 운동을 멈출 순 없었다.
“젠장! 1년 만에 먼 미국에서 친구가 날아왔는데도 매일 하는 운동이 우선이라 이거냐?”
불만을 토해내는 녀석의 말을 즐겁게 들으면서도 튜빙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튜빙이 모두 끝날 때까지 녀석도 불만을 멈추지 않았다.
“언제 온 거야?”
기둥에 묶어 둔 튜빙을 내려놓으며 웃는 얼굴로 녀석을 향해 물었다.
“오늘 아침에 도착했다.”
퉁명스러운 대꾸에 피식 웃고는 다시 물었다.
“시차 적응은 되는 거냐?”
“사람들이 시차, 시차하면 별 것도 아닌 걸로 유세떤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막상 겪어보니 와~ 이거 사람 잡더라. 아침에 도착했는데, 미치겠더라. 머리는 멍하지, 몸에 힘은 없지, 결국 낮에 푹 자고 일어나니까 살만하더라.”
“저녁은?”
“내가 먹었겠냐? 돈 잘 버는 친구가 있는데! 최고급 한우 등심으로 배터지게 먹으려고 굶고 왔으니까 얼른 나가자!”
“1년 전과는 좀 변한 것 같다?”
“너도 미국와 보면 안다. 마이너리거가 얼마나 힘든지!”
“엄살은.”
마이너리거라도 급이 다르다.
적지 않은 계약금을 받아놓고 없는 척 했다간 진짜 배를 쫄쫄 굶어가며 야구하는 마이너리거들에게 몰매 맞을 일이다.
물론, 장형수가 실제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힘들게 야구를 하는 마이너리거들 앞에서 저렇게 행동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녀석은 그런 놈이 아니니까.
“아버지랑, 어머니는?”
“집에 계시지.”
“너 씻을 동안 인사 드려야겠다. 지아는?”
“지아? 글쎄, 학원에서 아직 안 왔을 거 같은데?”
“우리 깍쟁이 지아를 못 보는 건가?”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장형수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고등학교 때 종종 집에 놀러왔던 장형수는 부모님에게도 살갑게 잘 대하는 녀석이었다.
더불어 지아와도 꽤 사이가 좋았다.
지아 말에 따르면, 야구 밖에 할 줄 모르는 재미없는 오빠랑은 차원이 다르다나 뭐라나.
어쨌든 둘은 꽤 죽이 잘 맞았다.
훈련장을 나가자 제법 큼지막한 보따리가 3~4개나 놓여 있었다.
“뭐야?”
“미국에서 그냥 올 수 있어야지. 아버지, 어머니, 지아 선물이다. 참고로 넌 바라지 마라. 난 나보다 돈 많이 버는 놈에게 선물을 사줄 정도로 형편이 넉넉하지 않으니까! 흐흐흐!”
“걱정마라. 나도 나보다 돈 적게 버는 놈에게는 선물 같은 거 바라지도 않으니까.”
“와~ 1년 만에 차지혁 많이 변했네! 이제 돈 좀 버니까 마음이 여유로워 농담도 술술 나오나 보다?”
장형수의 말에 어깨를 으쓱 거리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정말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라는 존재가 이렇게 반가울 줄은 나도 몰랐다.
종종 전화를 할 때와는 확실하게 마음이 달랐다.
“아버지! 어머니! 미국에서 형수가 왔습니다!”
집으로 들어서며 쩌렁쩌렁하게 외치는 장형수의 모습은 고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뭐, 그래봐야 1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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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할 구단은 정한 거냐?”
장형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 중이야.”
“너 양키스에서 1억 5천만 달러 오퍼(offer) 넣었다고 하던데, 진짜 사실이냐?”
너무나도 유명해진 이야기라 놀랍지도 않았다.
인터넷을 1분만 뒤져봐도 뉴욕 양키스에서 나에게 5년 계약에 1억 5천만 달러를 제의했다는 기사가 수십 개가 넘었다.
“맞아.”
“그런데 양키스를 깐 거야?”
“생각 중이라니까.”
장형수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소주잔을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술을 잘 먹지도 못하고, 웬만해서는 잘 마시지 않는 나와는 다르게 장형수는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부터 종종 술을 먹었었다.
“양키스가 1억 5천만 달러 오퍼 던졌으니 웬만한 자질구레한 구단들은 다 떨어져 나갔겠네.”
정확했다.
양키스가 정식으로 1억 5천만 달러를 제안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메이저리그의 모든 구단들이 이적 협상을 제안 해왔었다.
일부는 직접적으로 계약 금액을 제시하기도 했었는데, 최저 금액이 8천만 달러였고, 보통 1억 달러 수준에서 왔다갔다 했다.
그런데 뉴욕 양키스에서 대놓고 1억 5천만 달러를 제안하자 그보다 적은 액수를 제안한 구단들이 하나, 둘 빠지기 시작해서 지금은 9개 구단만이 적극적으로 이적 협상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어차피 이적 협상이야 이제 시작이니까 넉넉잡고 한 달 정도 남았다고 보고. 크으~! 역시 술은 소주가 최고라니까. 속 시원하게 말 좀 해봐. 나라도 좀 대리만족을 느껴보자. 어디어디 남았냐?”
장형수의 눈빛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렸다.
자신의 일은 아니지만, 정말로 날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은 것인지 상당히 궁금해했다.
어차피 숨길 이유도 없었고, 장형수에게는 말해도 나쁠 것 같지 않아 순순히 대답을 해주었다.
“양키스, 보스턴, 에인절스, 텍사스, 디트로이트, 콜로라도, 샌디에이고, 다저스, 세인트루이스. 알다시피 양키스가 가장 먼저 제안을 해왔고, 나머지 구단들도 제안을 준비 중이라고만 들었다.”
내 대답에 장형수가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 넌 행복하겠다. 돈도 돈이지만, 메이저리그에서 명문 구단이 즐비하잖아? 정말 부럽다.”
메이저리그 명문 구단.
확실히 모든 선수들이 부러워할 일이긴 했다.
특히, 세계 최고의 구단이라고까지 부르는 뉴욕 양키스는 야구 선수, 야구 선수의 꿈을 가진 사람이라면 입단하고 싶어하는 구단 1순위다.
그 외에 보스턴 레드삭스, LA다저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Saint Louis Cardinals) 역시 명문 구단이다.
그 외에 매년 우승 후보로서 명문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디트로이트와 에인절스 역시 굉장히 매력적인 팀이다.
텍사스는 상당히 부유한 구단이라 큰 돈을 들여 좋은 선수를 영입만 했다 하면 이상하게 선수들이 죽을 쓰는 저주에 걸린 팀으로 인식이 깊었다. 그래도 항상 우승을 노려볼 정도로 전력이 화려한 팀인 건 분명했다.
콜로라도와 샌디에이고는 세계적인 갑부 구단주로 인해 어마어마한 자금력을 갖춘 부(富)팀이라, 몇 년만 시간이 지나면 메이저리그를 호령할 강팀으로 군림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명문으로 갈 것인가?
매년 우승을 꿈꿔 볼 수 있는 강팀으로 갈 것인가?
차후 메이저리그에 우뚝 서게 될 부유한 팀으로 갈 것인가?
이적에 대한 선택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
“젠장! 밀워키에서 돈 좀 써보지.”
장형수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구단을 들먹이며 다시 소주를 들이켰다.
“내가 너라면 무조건 명문 구단으로 간다.”
장형수의 말에 내가 빤히 그를 바라봤다.
큼지막한 등심 덩어리를 기름장에 찍어 입안에 우겨넣은 장형수가 말을 이었다.
“미국에서 실제로 명문 구단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해. 아무리 강팀이라 하더라도 명문 구단의 인기와 저력을 따라갈 순 없거든. 솔직히 말해서 너 정도면 돈이야 어디든 비슷비슷할 것 아냐?”
틀린 말은 아니다.
황병익 대표는 대략 6~7년 계약에 연봉 3천만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순수 연봉만 따지면 1억 8천만 달러에서 2억 1천만 달러 수준이다.
너무 무리한 요구가 아니냐는 내 우려와 다르게 황병익 대표는 현재 내 성적과 실력이면 충분히 리그 최정상급 에이스의 연봉을 받아야만 한다고 단언했다.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투수 중 최고 연봉자는 워싱턴 내셔널스(Washington Nationals)의 에이스 루카스 지올리토(Lucas Giolito)로 2026년 3300만 달러를 받았고, 2027년에는 3500만 달러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타자 중 최고 연봉자는 텍사스 레인저스의 바이런 벅스턴(Byron Buxton)이고, 2026년부터 2028년까지 3700만 달러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처음 이적 협상을 준비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아시아 최고 계약으로 메이저리그에 입성했던 다나카 마사히로보다 조금만 더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다행인지 뉴욕 양키스에서 비슷한 수준을 제시했고, 그걸 기점으로 경쟁이 시작되니 이미 연봉에 대한 욕심은 크게 부릴 생각이 없었다.
중요한 건 어느 구단이냐 였다.
당연한 소리지만, 우승 경쟁력이 없는 구단은 내 머릿속에 없었다.
콜로라도나 샌디에이고가 나를 비롯해 우승 경쟁력을 갖춘 선수들을 올 시즌 영입한다는 조건을 내세우면 모를까, 나 한 사람만 영입하고 만족한다면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하더라도 계약서에 사인을 할 생각이 없었다.
“너나 나나 메이저리거가 최종 꿈이 아니잖아?”
야구 선수의 최종 꿈.
그건 당연히 우승의 주역이 되는 거다.
“돈에 구애받지 않는다면 두 번 고민할 것 없이 무조건 우승 가능성이 큰 팀으로 가라. 내가 너라면 항상 우승 후보라 불리는 디트로이트나 에인절스도 좋지만 이왕이면 양키스나 세인트루이스로 간다. 우승 경험이 많은 명문 구단은 포스트시즌처럼 단기전에 말도 안 되는 힘을 드러내거든. 특히, 세인트루이스를 봐. 항상 아슬아슬하게 와일드카드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면서도 근 10년 동안 무려 3번이나 우승을 했잖아? 우승을 향한 세인트루이스의 집념과 정신력은 진짜 메이저리그의 모든 구단들을 통틀어 최고다! 나라면 그 정신이 무엇인지 꼭 한 번 경험하고 만다! 내가 너처럼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면 무조건 세인트루이스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가을 야구에 무지막지하게 강해서 가을 좀비라 불리는 세인트루이스는 내셔널리그 3대 명문 구단(LA 다저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으로도 유명하다.
실력과 명문이라는 타이틀을 모두 갖춘 매력적인 팀인 건 사실이다.
여기에 끈끈하기로 소문난 선수들의 유대 관계 또한 내게 큰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확정된 건 하나도 없다.
이적 마감 시한이 한참이나 남았기에 메이저구단들끼리 서로 눈치작전을 펼치고 있어,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되려면 한 달은 족히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네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나도 그냥 국내에 남아서 딱 1년만 국내 무대에서 뛰고 메이저리그로 직행하는 거였는데!”
그냥 해보는 말이었다.
내가 국내에 남는다고 했을 때, 누구보다 걱정을 했던 게 바로 장형수였다.
메이저리그의 시스템을 하루라도 일찍 경험해야 성공하지 않겠냐며 날 설득까지 했었을 정도였다.
만약, 다시 1년 전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장형수는 국내가 아닌 메이저리그의 문을 두드렸을 게 확실했다.
“어쨌든 축하한다! 이왕이면 이번 이적 협상 제대로 대박 터트려서 확실하게 날개 달고 메이저리그로 입성해라!”
진심으로 내 성공을 축하해주는 장형수였다.
“내년에 그라운드에서 만나자.”
“걱정 마라! 네 메이저리그 첫 번째 피홈런 주인공은 내가 될 테니까! 흐흐흐!”
맥주 한 잔을 따라 건배를 하는 사이 핸드폰이 울렸다.
“누구야? 여자 친구냐?”
장난스러운 장형수의 말을 흘려들으며 핸드폰 액정을 확인했다.
“응?”
“왜? 누군데?”
장형수에게 핸드폰 액정을 보여주고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선배님, 어쩐 일로 이 시간에 전화를 주셨습니까?”
“박호찬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곁에 있던 장형수가 우렁차게 외쳤고, 그 목소리에 내가 살짝 눈을 찌푸리며 재빨리 말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고등학교 동기랑 함께 있습니다. 장형수라고, 현재 밀워키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있는 녀석입니다.”
-아, 장형수! 국내 최고의 포수 유망주! 나도 이야기 많이 들었다. 귀국했나 보네?
“예. 오늘 귀국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전화까지 주셨습니까?”
-널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서 전화 했어.
“저를요?”
-너도 잘 아는 사람이다. 유혁선! 혁선이가 널 좀 만나고 싶다고 하네.
< 『해외편 - 08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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