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편 - 079』 >
『국내편 - 079』
멍하니 포수 미트를 바라보던 존 휴즈가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고는 타자 박스에서 물러났다.
짧게 잡았던 배트를 더욱더 짧게 쥐곤 가열차게 스윙을 하는 존 휴즈. 하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처음 타석에 들어섰을 때의 자신감 있던 모습과는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162Km.
전광판에 찍혀 있는 구속을 확인하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가운데로 몰리는 공이기에 타자가 작정하고 노리면 못 칠 공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타자도 초구부터 한 가운데로 160Km가 넘는 포심 패스트볼을 던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다.
자주 써먹을 순 없어도, 한 번씩을 대놓고 스트라이크 카운트를 잡거나, 타자의 기를 죽이기에 아주 효과적인 공이다.
빠른 공을 대비해서 배트를 짧게 쥐고, 스윙 스피드를 높인 존 휴즈를 상대로 던진 2구는 파워 커브였다.
평소보다 10Km는 느려진 파워 커브로 시즌 후반부터 10Km 내외로 속도 조절을 할 수 있었기에 타자의 허를 찌르는 공으로 그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3구는 고민할 것도 없었다.
짧게 쥔 배트, 그리고 상대적으로 왜소한 체격. 무엇보다 2스트라이크 노볼이라는 극도로 불리한 볼 카운트에 그 어떤 투수보다 공격적인 피칭을 하는 나였으니 바깥쪽을 걸치는 컷 패스트볼이 제격이다.
시즌 내내 가장 많은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아낸 공인만큼 타자들이 가장 까다롭게 여기며, 그만큼 대비를 하는 공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역으로 공을 한 개 가량 스트라이크 존 밖으로 뺀다.
후웅!
퍼엉!
“스윙! 타자 아웃!”
아슬아슬하게 배트를 스치며 포수 미트로 들어가는 공에 존 휴즈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넣었다면 커트가 되었을 공이 바깥으로 빠지는 바람에 헛스윙이 되고 만 거다.
첫 타자를 3구삼진으로 잡아내자 관중들의 열광적인 환호성에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존 휴즈가 떠난 타석에는 창원 타이탄스 부동의 2번 타자 강민수가 들어섰다.
강민수는 1번 타자 존 휴즈가 주자로 루상에 나가면 4할에 육박할 정도로 안타를 만들어내는 집중력이 굉장히 높았다. 반대로, 주자가 없을 때에는 2할 초반에 머물 정도로 집중력이 떨어지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부웅!
시원스럽게 돌아가는 배트를 농락하듯 공은 급격하게 뚝 떨어지며 포수 미트로 쏙 들어가버렸다.
파워 커브에 제대로 속아버린 강민수는 잔뜩 독이 오른 모습으로 나를 노려보다 등을 돌렸다.
몸 쪽, 바깥 쪽, 낮은 코스로 이어진 파워 커브 퍼레이드였다.
135Km에서 125Km를 왔다갔다 하는 구속의 차이에 강민수는 철저하게 당하고 말았다.
3번 타자 배형진, 올 시즌 2할 8푼 6리에 32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만족스러운 성적표를 받아든 타자다.
타율에 비해 타격 센스는 떨어졌지만, 올 시즌 홈런왕에 올라선 4번 타자 스캇 데이비스를 피하려는 투수들이 미리 승부를 자주 해주는 덕분에 타율과 홈런 수가 높은 타자였다.
딱!
오늘 경기에서 처음으로 공을 맞춘 타자가 됐다.
하지만, 높은 코스의 제대로 맞추지 못해 내야에서 높이 뜨고 말았다.
결국, 유격수 박상천 선배가 콜 플레이와 함께 안정적으로 공을 잡아내며 1회 초 공격을 깔끔하게 삼자범퇴로 막아냈다.
“나이스!”
“멋쟁이!”
“수고했다!”
더그아웃으로 돌아오자 모든 선수들이 나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내가 내려온 마운드에는 창원 타이탄스의 에이스, 프레디 에르난데스가 아닌 손태민이 올라가 있었다.
“1차전을 포기하겠다니, 어떻게 보면 참 대단한 선택이다.”
허벅지 부상으로 오늘 경기에서 제외된 장근범 선배가 못 마땅하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말처럼 창원 타이탄스의 양종호 감독은 1차전에 팀 내 에이스인 프레디 에르난데스를 선발로 올리지 않았다.
4선발과 5선발을 왔다 갔다 했던 손태민을 1차전 선발 투수로 등판시켰다.
올 시즌 9승을 올린 손태민이었지만, 극단적으로 말해서 포기했다고까지 할 수도 있는 투수 선택이었다.
대신, 2차전부터 4차전까지 1, 2, 3선발 투수가 줄줄이 투입되며 실질적으로 2차전부터 승수를 쌓겠다는 양종호 감독의 계산인 거다.
그에 따른 비판은 오로지 감독의 몫이다.
어차피 단판 승부가 아닌 7차전까지 준비가 되어 있는 한국 시리즈다.
어떻게든 먼저 4승만 쌓으면 우승을 하게 되는 시리즈의 특성상 양종호 감독의 작전을 나쁘다 말할 순 없었다.
오히려, 양종호 감독의 이런 선택을 창원 타이탄스 팬들은 열렬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오늘 확실하게 점수 내서 창원 타이탄스 놈들 내일 기가 질려버리게 만들어 버려!”
오주영 선배의 외침에 선수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파이팅을 외쳤다.
하지만, 의외로 오늘 손태민의 상태가 굉장히 좋았다.
퍼엉!
“스트라이크! 아웃!”
몸 쪽, 바깥 쪽 할 것 없이 구석구석을 아주 날카롭게 찌르는 정교한 제구와 시즌 최고 구속에 근접하는 구속이 심상치 않았다.
올 시즌 최고의 컨디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손태민의 투구는 훌륭했다.
딱!
메이슨 발레타의 타구가 유격수 앞으로 힘없이 굴러가며 이닝이 끝나고 말았다.
삼진 하나에 땅 볼 두 개.
무엇보다 7개 밖에 던지지 않은 투구수는 오히려 나보다 한 개가 적었다.
스스로도 만족스러웠을까?
마운드를 내려오는 손태민의 얼굴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손태민은 이미 창원 타이탄스에서 2번 우승을 맛본 적도 있는 선수였다.
당연히 한국 시리즈에서 승리 투수가 된 적도 있었다.
경험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잔뜩 긴장하고 부담감을 느끼고 있을 대전 호크스 타자들보다 훨씬 유리했다.
어쩌면 오늘 경기가 생각만큼 쉽게 승부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2회 초, 창원 타이탄스의 선두 타자는 올 시즌 홈런왕 타이틀을 거머쥔 스캇 데이비스였다.
51개의 홈런을 터트리며 무시무시한 파워를 자랑한 스캇 데이비스다.
고의사구도 가장 많은 타자였기에 투수들이 제대로 승부를 했다면 홈런 개수가 60개를 넘겼을 거라는 평가를 받은 타자기도 했다.
변화구에 약점을 가지고 있는 스캇 데이비스에게 초구부터 파워 커브를 던졌다.
아니나 다를까, 눈에 들어오는 공이면 초구라 하더라도 거침없이 배트를 휘두르는 공격적인 성향대로 시원스럽게 배트를 휘둘렀다.
부웅!
헛스윙을 한 스캇 데이비스가 비웃음과 함께 날 바라봤다.
무슨 의도인지 뻔했다.
정면으로 승부를 해오길 바라는 거다.
나로서는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처음부터 굳이 힘을 뺄 필요도 없다.
틱!
포심 패스트볼이라 여겼던 건지, 2구로 던진 컷 패스트볼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파울이 되고 말았다.
3구는 유인구로 파워 커브를 던졌지만, 배트가 나오질 않았고, 다시 한 번 던진 컷 패스트볼이 3루수 정면으로 굴러가며 쉽게 아웃 카운트를 잡아냈다.
이어진 5번 유현민과 6번 이영태는 각각 2루수 땅볼과 중견수 플라이로 잡아내며 2회를 끝낼 수 있었다.
공수가 교대되고 선두 타자로 우용탁 선배가 타석에 섰다.
후반기에 가장 뜨거웠던 타자.
후반기만 놓고 보면 충분히 MVP급 활약을 한 타자가 바로 우용탁 선배다.
전반기 9개였던 홈런이 후반기에만 무려 39개로 늘어나며 전체 48개의 홈런으로 커리어 하이를 기록한 우용탁 선배는 대전 호크스 최고의 트레이드 선수로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런 우용탁 선배조차도 손태민의 제구에 꼼짝없이 루킹 삼진을 당하며 더그아웃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어진 그랜트 커렌과 김추곤 선배도 각각 중견수 플라이와 1루수 정면 타구에 1루를 밟아보지도 못하고 아웃을 당했다.
3회 초 마운드에 오른 나는 10개의 공만 던지곤 마운드를 내려왔다.
선두 타자를 투수 앞 땅볼로 잡아냈고, 나머지 두 타자는 삼진으로 잡아냄으로써 3이닝 동안 26개의 투구수와 함께 4개의 탈삼진을 기록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런 압도적인 투구 내용을 나뿐만 아니라 손태민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3회에도 손태민은 2개의 삼진과 함께 하나의 뜬공으로 대전 호크스의 타선을 완벽하게 봉쇄하며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숨 막히는 투수전을 보여줬다.
좌익수 플라이 볼과 두 개의 삼진으로 4회를 마친 나에게 손태민은 도전이라도 하듯 마찬가지로 2개의 삼진과 하나의 땅볼로 마운드를 지켜냈다.
5회에는 삼진 하나에 유격수 땅볼과 좌익수 플라이 볼을 만들어 낸 나와 다르게 손태민은 3타자 연속 삼진이라는 놀라운 호투로 창원 타이탄스 원정 팬들을 열광의 도가니 속으로 빠트렸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나와 손태민 모두 5회까지 퍼펙트 게임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었다.
6회에 마운드에 올라간 나는 손태민이 잔뜩 끓어 올린 분위기 속에서 차분하게 공을 던졌고, 결국 3타자 연속 삼진으로 홈 팬들의 환호로 야구장을 흔들어 놨다.
대전 호크스 홈 팬들의 기에 주눅이 들었는지, 손태민은 7번 타자 박상천 선배에게 8개나 되는 공을 던지며 간신히 아웃 카운트를 하나 잡아냈지만, 8번 타자 황대훈 선배에게는 초구에 안타를 맞으며 아쉽게도 퍼펙트 게임이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이후 두 명의 타자를 각각 땅볼과 플라이 볼로 잡아내며 역시 무실점으로 6회 말, 대전 호크스의 타선을 꽁꽁 묶는 것에는 성공을 했다.
7회 초, 마운드에 올라선 나는 주변 공기가 변했음을 깨달았다.
적막감과 고요함이었다.
양팀의 떠나갈 듯 한 응원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관중들의 환호성과 야유도 들려오지 않았다.
침묵 속에 시작된 7회 초 투구는 1루수 땅볼, 3루수 땅볼, 중견수 플라이 볼을 기록하며 끝이 났다.
관중들의 박수 소리만 들렸다.
중년 남자들의 거침없는 응원 목소리, 젊은 여성들의 환호 소리, 아이들의 천진한 응원 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박수만 있을 뿐이었다.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니 선수들 역시도 박수만 칠 뿐 말 한 마디 건네 오지 않았다.
퍼펙트 게임까지 남아 있는 아웃 카운트는 6개.
올 시즌 그렇게 운이 없었던 퍼펙트 게임이 다시 한 번 한국 시리즈 1차전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있었다.
74구.
7회까지 정말 이상적이라 부를 만큼 적은 투구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7회까지 공을 던지다보니 힘이 살짝 떨어진 건 사실이지만, 아직까지는 구위가 떨어졌다고 볼 순 없었다.
체력도 충분해서 제구력에도 문제가 생길 염려 또한 없다.
7회 말, 손태민은 2번 타자 조문석 선배부터 상대를 시작했다.
그 역시 여전히 떨어지지 않은 구위와 체력을 밑바탕으로 오늘 눈부시다 불러도 좋을 정교한 제구력으로 다시 한 번 조문석 선배를 삼진으로 잡으며 마운드 위에서 처음으로 기합을 터트렸다.
이어진 3번 타자 메이슨 발레타와의 승부에서는 끈질긴 승부 끝에 9구만에 볼넷으로 출루를 시키고 말았지만, 이어진 우용탁 선배에게 낮게 떨어지는 컷 패스트볼을 던져 유격수 땅볼로 병살타를 만들어내며 7회까지도 실점하지 않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8회가 되어 마운드에 올랐다.
여전히 야구장 분위기는 고요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내 등 뒤를 지키고 있는 야수들을 바라보니 너나 할 것 없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표정들로 서 있었다.
퍼펙트 게임 중인 투수의 수비, 한국 시리즈 1차전, 무득점의 무능력한 공격력.
삼박자가 아주 골고루 갖춰진 부담과 중압감은 야수들에게서 여유를 티끌만큼도 남겨놓지 않고 있었다.
“후우우우.”
천천히 호흡을 뱉어내며 긴장감도 뱉어냈다.
부담감도 털어버렸고, 퍼펙트 게임 중이라는 생각도 머릿속에 지워버렸다.
기록에 연연하면 결국 깨지고 만다.
한 순간, 타자 한 명, 한 명 마다 최선을 다해서 던지면 자연적으로 기록도 따라 온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난 내가 던질 수 있는 최고의 공만 던진다.
마지막으로 창원 타이탄스의 타자들은 모른다.
아직 나에게는 또 다른 무기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는 딱딱한 표정의 황대훈 선배의 얼굴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다.
악몽. 평생 따라다닐 비난.
데뷔전 퍼펙트 게임을 노히트노런으로 바꿔버린 황대훈 선배의 결정적인 포구 실수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오늘 만약 또 다시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한다면?
황대훈 선배에게는 인생 최악의 날이 되고 만다.
다른 그 어떤 야수들보다 황대훈 선배의 긴장감이 크게 느껴졌다.
마운드 위에서 황대훈 선배에게 사인을 보냈다.
오른쪽 어깨를 가볍게 문지르는 사인.
이번 이닝부터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새로운 무기를 보여주겠다는 사인이다.
황대훈 선배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타석에 선 창원 타이탄스의 4번 타자 스캇 데이비스의 눈빛이 매서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출루하겠다는 의지가 강렬했다.
하지만, 허락하지 않는다.
투수인 내가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쇄애애액!
휘이익.
부웅!
“스, 스윙! 타자 아웃!”
스캇 데이비스가 타석에서 경악한 얼굴로 포수 미트를 바라보다 이어서 날 쳐다봤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니, 믿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를 나는 태연하게 마주 보다 황대훈 선배가 돌려주는 공을 가볍게 캐치했다.
‘어째서 경기에서 사용하지 않는 거냐? 지금 네 수준이면 충분하다.’
‘의미 있는 경기에서 결정적인 비수로 사용하고 싶습니다.’
최상호 코치에게 말했던 것처럼 지금부터 나는 창원 타이탄스 타자들에게 비수를 던질 생각이다.
서클 체인지업(Circle Changeup).
1월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갈고 닦은 비장의 무기다.
135Km에 이르는 구속이 파워 커브의 구속과 겹치면서 타자 입장에서는 재앙이 될 것이라고 최상호 코치가 호언장담을 했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스캇 데이비스 이후 타석에 선 유현민과 이영태 모두 파워 커브와 체인지업을 전혀 구별하지 못하며 허망하게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8이닝 퍼펙트!
이제 남은 아웃 카운트는 단 3개였다.
< 『국내편 - 07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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