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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마일-76화 (76/221)

< 『국내편 - 076』 >

『국내편 - 076』

-축하한다! 역시 네가 괴물은 괴물인 모양이다!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고맙다.”

-싱거운 놈. 어떻게 된 놈이 신인 주제에 20승을 거두고도 고작 한다는 말이 그게 전부냐? 인터뷰도 참 멋대가리도 없고. 자고로 진짜 슈퍼 스타가 되려면 팬들을 열광시킬 수 있는 퍼포먼스가 필요한 법이야. 조금만 더 부드럽게, 팬 서비스를 하면 지금보다 2배는 더 많은 팬들이 너에게 미칠 거다! 제발, 실력에 어울리는 퍼포먼스도 좀 배워라!

“엉뚱한 소리 하려면 전화 끊는다.”

-지혁아! 나 드디어 콜업 됐다!

“정말?”

듣던 중 가장 반가운 소리다.

1년도 되지 않아서 메이저리그로 승격을 했다는 건 굉장한 일이다.

장형수의 재능과 실력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메이저리그에서 선수 육성을 어떻게 하는지 최상호 코치나, 박호찬 선배를 통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빠르다 하더라도 내년 후반기는 되야 승격을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장형수는 포수다.

전체적으로 경기를 조율할 줄 알아야 하는데, 영어 실력이 썩 훌륭하지 않은 장형수였기에 언어 문제도 발목을 잡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당연하지! 이제부터 나도 메이저리거다! 흐흐흐!

“얼마나 남았지?”

-뭐가?

“게임수.”

-정확하게 21게임 남았다. 운이 좋으면 절반 정도는 출전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요즘 주전, 백업 할 것 없이 포수들 상태가 완전히 꽝이거든. 그러니 오죽하면 빈둥빈둥 놀고 있는 날 불러들였겠냐. 흐흐!

익살스러운 웃음 속에 행복감이 가득 느껴졌다.

말과 다르게 트리플A의 시즌이 끝나고 난 장형수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힘든 훈련을 받고 있다고 했다.

더욱이 밀워키 브루어스에서 4라운드에 지명을 했을 정도로 장형수는 구단 내에서 꽤나 주목하는 선수 중 하나였다.

장형수의 말처럼 빈둥빈둥 놀게 내버려 둘 수가 없는 선수다.

“기회는 왔을 때, 확실하게 잡아야 한다는 건 너도 알 테니까 딱히 다른 말 하지 않을게. 부상만 조심해라. 잘 보이겠다는 생각에 무리를 하면 그 즉시 부상이다. 그것만 조심해라.”

-걱정마라. 아! 그리고 우리 구단에서도 널 영입하려고 준비 중이라고 하던데, 너 우리 구단으로 올 생각 없냐? 고등학교 때처럼 너랑 나랑 환상의 호흡으로 메이저리그를 장악하는 거야! 어때? 땡기지?

장형수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밀워키 브루어스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구단이 아니다.

타 구단들에 비해 경쟁력이 높지 않았고, 내가 이적을 생각해볼 정도로 매력적인 구단도 아니다.

그나마 지금까지 내 인생 최고의 절친이라 할 수 있는 장형수가 소속된 팀이라는 게 유일한 무기라면 무기가 될 수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한참이나 부족했다.

만에 하나라도 장형수가 트레이드라도 당해버린다면?

내 입장에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적 문제는 시즌 끝나고 차근차근 생각해볼 거다.”

-그래, 너야 어차피 오라는 곳도 많은데 무슨 걱정이겠냐? 부러운 놈. 어쨌든 20승 다시 한 번 축하한다. 이왕이면 남은 경기도 다 이겨서 역대 최고의 신인으로 그 어떤 놈도 네 기록에 도전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려라.

“그래. 너도 열심히 하고. 좋은 소식 기다릴게.”

-흐흐. 기대해라. 올 시즌이 끝나기 전에 홈런도 터트리고, 내 실력도 확실하게 보여줘서 내년부터는 시즌 시작과 동시에 주전으로 안방을 꿰차고 말테니까!

자신감 넘치는 장형수의 말을 듣고 10분 정도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 전화를 끊었다.

이제 장형수도 메이저리거가 됐다.

나 역시 올 시즌을 끝으로 메이저리그로 진출을 한다.

그 전에 국내 무대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이 우선이다.

이제 내게 남아 있는 경기도 얼마 되지 않았다.

전반기에 비해 후반기는 정말 빠르게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게임수가 전반기에 비해 적은 것도 이유 중 하나겠지만, 전반기와 다르게 4일 휴식 후, 선발 등판을 하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지난 것이 가장 컸다.

25경기 만에 20승을 달성했고, 앞으로 남은 경기는 4경기였다.

그리고 현재 페넌트 레이스 2위를 고수하고 있는 대전 호크스였기에 갑작스럽게 연패의 늪에 빠지지 않는 이상, 가을 야구는 당연시 여겨지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대전 호크스와 계약을 할 때만 하더라도 가을 야구에 대한 기대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가을 야구를 준비해야 할 정도로까지 성적이 치솟는 바람에 은근한 욕심이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한국 시리즈 우승!

지금과 같은 성적으로 2위로 페넌트 레이스를 마치면 충분히 한국 시리즈 우승까지도 넘볼 만했다.

설령, 우승을 못한다 하더라도 한국 시리즈와 같은 대경기에서 선발로 나선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큰 경험과 추억 거리가 될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당장 내게 남아 있는 4경기에서의 승리가 꼭 필요하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 잠시 멈췄던 마무리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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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혁 21승과 동시에 단일 시즌 탈삼진 기록 갱신!》

《대전 호크스 막판 추격전! 선두 광주 피닉스와 2게임 차!》

《후반기 최고의 활약을 선보이고 있는 우용탁! 36호 홈런!》

《22세이브 달성! 특급 마무리 오주영!》

《KKK! 차지혁, 250탈삼진 돌파!》

《대전 호크스! 광주 피닉스와 공동 선두!》

《운명의 장난처럼 대전 호크스와 광주 피닉스의 마지막 격돌이 리그 1위를 가린다. 그 선봉에 23승에 도전하는 차지혁!》

10월 3일, 토요일이 되자 신광주 구장에는 엄청나게 많은 야구팬들로 인해 주변 교통이 마비가 될 정도로 혼잡한 상황이 벌어졌다.

현재 리그 공동 선두에 서 있는 광주 피닉스와 대전 호크스의 리그 마지막 3차전의 첫 번째 격돌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대전 호크스와 광주 피닉스는 모두 6경기씩 남겨둔 상황이다.

이런 살 떨리는 선두 경쟁 속에서 두 팀은 거짓말 같은 리그 마지막 3차전을 준비해야만 했다.

실질적으로 이번 3차전의 승자가 누구냐에 따라 리그 1위의 윤곽이 가려진다 할 수 있었다.

이런 중요한 시합에서 대전 호크스의 팬들은 다소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보나마나 오늘 광주 피닉스가 완전히 깨지겠지! 하하하하!”

“당연하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차지혁이 선발로 나오는 경기잖아!”

“광주 피닉스 타자들 아마 지금쯤 똥 씹은 표정으로 덜덜 떨고 있을 걸?”

“야야, 오죽하면 광주 피닉스 장성열 감독이 에이스 양동호까지 로테이션을 바꿨겠어?”

“졸라 치사한 인간이지! 차지혁 상대로 승산이 없다 싶으니까 오늘 등판해야 하는 양동호를 내일로 미루고, 오늘 이상한 놈 선발로 올렸잖아!”

“그러게 말이야! 젠장! 오늘 양동호 털어버리면 2차전, 3차전까지 다 스윕해버릴 수 있었을 텐데!”

대전 호크스의 원정 팬들이 삼삼오오 모여 시끄럽게 떠들자, 광주 피닉스의 팬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접근했다.

“시방 뭐라고 씨부렸냐?”

얼굴은 평범하게 생겼지만, 말투가 사나운 광주 피닉스의 팬들로 인해 대전 호크스 원정 팬들은 서둘러 자리를 피해버렸다.

이런 모습은 경기장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선두 경쟁이 워낙 치열하다보니 양 팀 팬들의 감정적인 대립도 꽤 격렬해진 거였다.

여기저기서 팬들의 응원가가 울려 퍼졌다.

잔뜩 달아오른 모습이 분위기만 보면 꼭 한국 시리즈를 앞둔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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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마이 볼!”

높이 치솟은 타구를 3루수 메이슨 발레타가 좌우로 손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안정적인 자세로 타구를 잡아내는 메이슨 발레타를 바라보며 나는 왼쪽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와아아아아아아!

원정 팬 관중석에서 거대한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시즌 23승과 더불어 1986년 선동영이 세운 시즌 최다 완봉승인 8승을 뛰어넘는 9승의 고지에 올라섰다.

최종 스코어 2:0으로 승리하면서 대전 호크스는 공동 선두의 자리에서 광주 피닉스를 밀어내며 단독 선두가 됐다.

마운드에 서 있는 나를 향해 모든 선수들이 달려 나왔다.

페넌트 레이스 단독 1위에 올랐다는 사실에 모두 들떠 있었다.

“헤이~ 차! 완봉승 축하해!”

메이슨 발레타가 내미는 공을 받아들었다.

메이슨 발레타가 건네준 오늘의 공 역시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기념구가 될 거다.

시즌 9번째 완봉승 기념구였으니 아버지가 흐뭇하게 웃으며 매일 같이 닦을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축제 분위기가 살짝 가라앉으며 오늘의 수훈 선수 인터뷰가 시작됐다.

-차지혁 선수! 23승과 단일 시즌 최다 완봉승 신기록 축하드립니다! 우선 소감부터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여자 아나운서가 건네주는 마이크를 받아들고는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응원해주신 모든 팬여러분들께 가장 먼저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오늘 승리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함께 경기를 한 야수들과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고 더그아웃에서 파이팅을 불어 넣어준 모든 선수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오늘의 승리는 저 혼자 해낸 것이 아닌 모든 선수들이 하나가 되어 이뤄낸 결과물입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경기는 아주 중요한 경기였습니다. 공동 선두인 광주 피닉스와의 시즌 마지막 3차전의 첫 번째 경기로 패배했을 때의 후유증이 굉장히 컸을 겁니다. 그에 따른 부담감은 없으셨습니까?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 경기는 대단히 중요했고, 당연히 그에 따른 부담감도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최대한 평소처럼 편안하게 공을 던지려고 노력했습니다. 제 공을 믿었고, 등 뒤를 지켜주는 야수들을 믿었기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경기로 인해 평균 자책점이 0.53으로 1993년 선동영 선수가 기록한 0.78보다 낮습니다. 로테이션 상으로 본다면 차지혁 선수는 10월 8일, 시즌 마지막 경기에 선발로 등판할 예정입니다. 올 시즌 차지혁 선수에게 최악이었던 9월 18일, 7이닝 3실점 경기가 반복된다 하더라도 선동영 선수의 기록은 경신할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 남은 경기 자신 있으십니까?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경기를 끄집어내는 아나운서로 인해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9월 18일은 창원 타이탄스와의 원정 경기였다.

그날따라 몸이 물 먹은 솜처럼 영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결국 7이닝 동안 6개의 피안타와 2개의 볼넷으로 3실점을 하며 마운드를 내려오고 말았다.

최다 피안타 경기였고, 무엇보다 홈런까지 맞아버린 날이었다.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기록에 연연해서 투구를 하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서 팀을 위해 공을 던질 뿐입니다.”

-이미 트리플 크라운(다승, 탈삼진, 평균 자책점)을 달성하였고, 신인왕과 시즌 MVP 0순위 후보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는데, 소감이 어떠십니까?

아무리 확실시되는 일이라 하더라도 아직 시즌이 끝나지 않았다.

여기서 아나운서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하면 그 자체만으로도 다른 선수들을 무시하게 보일 수 있었다.

“시즌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방금 질문은 시즌이 끝나고 말씀처럼 제가 정말 정상의 자리에 오른다면 그때 대답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전 호크스를 페넌트 레이스 1위로 이끈 주역으로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정말 난감한 질문만 골라서 하는 아나운서였다.

“오늘 페넌트 레이스 단독 선두에 오른 건 모든 선수들이 하나가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아직 시즌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당장 내일과 모레 있을 광주 피닉스와의 2, 3차전을 승리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혹시라도 또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을 할까 싶어 서둘러 인터뷰를 끝내려고 할 때였다.

쏴아아아아!

“꺄아악!”

등 뒤로 몰래 다가온 선수들이 내 머리 위로 차가운 얼음물을 쏟아버렸다.

곁에 서 있던 여자 아나운서는 다음 질문에 대한 생각밖에 머릿속에 없었는지, 다른 아나운서들처럼 미리 자리를 피하지 못해서 옷 일부가 물에 젖고 말았다.

젖은 옷을 신경질적으로 털어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아나운서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고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즌 23승, 그리고 페넌트 레이스 단독 선두.

아주 기분 좋은 날이었다.

< 『국내편 - 076』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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