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편 - 075』 >
『국내편 - 075』
-차지혁 선수! 시즌 18승을 올렸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후반기 성적만 놓고 본다면 6연승입니다. 앞으로 남아 있는 선발 일정에서 절반만 승리한다 하더라도 20승의 고지에는 쉽게 올라설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대단한 건 지금까지 21경기 선발 등판 중 단 한 번의 패배도 기록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8승 무패. 이제는 차지혁 선수가 선발 등판하는 것 자체가 매번 새로운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더불어 오늘 경기까지 7번 완봉승을 기록하면서 1986년 선동영 선수가 세운 한 시즌 8번 완봉승 기록까지는 단 한 경기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차지혁 선수가 새로 작성한 기록들만 하더라도…….
“에바! 또 이겼어!”
TV를 지켜보던 정혜영이 어린아이처럼 폴짝폴짝 뛰며 좋아했다.
“정말 대단하네.”
이제는 더 이상 감탄도 나오질 않는 에바였다.
차지혁의 투구는 나날이 진화하는 것 같았다.
신인 투수가 던지는 공은 알려지지 않았기에 타자들에게 위협적이라고 하지만, 이미 차지혁은 모든 구단에서 가장 경계하는 투수 중 하나가 되었고, 모든 분석이 끝난 상태다.
그럼에도 타자들은 못 치고 있었다.
이유야 뻔하다.
말 그대로 알고도 못 치는 투수가 되어버린 상황이다.
오죽하면 차지혁이 등판하고 난 이후의 모든 기사들은 차지혁이 국내용이 아니라고 말할 정도였다.
몇몇 기사들은 차지혁에게 양심이라는 게 있다면 내년 시즌에는 반드시 메이저리그로 진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에바! 다음 주 목요일에 대전 내려가는 거 알고 있지?”
정혜영의 물음에 에바는 기억하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혜영이 갑작스럽게 에바에게 달려들었다.
“다시 한 번 고마워, 에바! 덕분에 차지혁 선수와 만날 수도 있었고, 정식으로 시합에 초대도 받았잖아.”
차지혁과의 만남.
정혜영은 아직도 그날의 감격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8월 20일이었다.
점심을 먹자는 에바의 말에 아무런 생각도 없이 약속 장소에 나갔다가 차지혁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에바에게 차지혁과의 일을 알게 되었고, 세 사람은 그렇게 점심 식사를 함께 했다.
고작 2시간 밖에 되지 않았던 짧은 점심 식사였지만, 정혜영에게는 너무나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 승리 축하 문자를 보내야지!”
정혜영은 핸드폰으로 차지혁에게 승리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전화번호까지 교환하고 간단하게 안부 정도를 물을 정도로 친분을 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축하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연신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는 정혜영의 모습에 에바는 고개를 저었다.
“혜영, 이제 막 경기가 끝난 차지혁 선수잖아. 답장이 그렇게 일찍…….”
“왔다!”
에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혜영의 핸드폰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고맙다고 답장이 왔어!”
고맙습니다.
누가 봐도 형식적인 답장이었지만, 정혜영은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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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이잉.
문자가 왔다는 핸드폰 진동에 액정 화면을 바라봤다.
답장 고마워요!
오늘 경기 너무 수고하셨어요. 일찍 푹 쉬시고, 다음 경기도 파이팅!
8일, 대전 한밭 야구장에서 에바와 함께 꼭 응원할게요!
뭐라고 답장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등 뒤로 그림자 하나가 스윽 나타났다.
“뭐야, 뭐야? 문자에서부터 느껴지는 이 달달함은 뭐야? 혹시, 여자 친구 생겼냐?”
정현우 선배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 너한테 뭘 바라겠냐?”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정현우 선배가 날 한심하다는 듯 바라봤다.
“내일 휴식일이라 오늘 몇 명하고 한 잔 하기로 했는데, 같이 가자.”
“저는…….”
“오늘은 빠질 생각 하지 마. 술 먹으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적당하게 한 두 시간 정도만 자리 지켰다가 가.”
평소처럼 빠질까 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오늘 야수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완봉승까지 갈 수 없었기에 고맙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가자!”
정현우 선배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강남의 고급 술집이었다.
“이런 곳에 자주 오십니까?”
“자주는 아니고 가끔!”
화려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에 향수 냄새가 풀풀 풍기는 예쁜 여자 종업원들이 손님방을 들락거리는 고급 술집의 분위기는 내 예상과는 너무 다른 곳이라 오늘의 결정에 후회를 하기에 충분했다.
“이쪽입니다.”
나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이는 키가 크고 잘 생긴 남자 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며 도착한 방에는 이미 6명이나 되는 선수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현우 왔네. 어? 지혁이도 왔네?”
가장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장근범 선배였다.
“빠지려고 하는 걸 끌고 왔습니다.”
“잘 왔다. 오늘 완봉승 한다고 고생 많았다. 지혁이는 술 안하니까… 음료수 한 잔 할래?”
“맥주 한 잔 정도만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맥주 한 잔 해라.”
내가 장근범 선배가 따라주는 맥주를 받는 사이, 정현우 선배는 이미 다른 선수로부터 양주를 받고 있었다.
“모두 잔 들고, 오늘 지혁이 18승 축하의 의미로 한 잔 하자!”
어쩌다보니 내 18승 축하 자리가 된 것 같았다.
시원하게 맥주 한 모금을 하고 잔을 내려놓자, 곁에 앉아 있던 건장한 체격의 선수 우용탁 선배가 말을 했다.
“이적할 팀은 정한 거냐?”
평소에는 과묵했지만, 할 말은 하는 성격인 우용탁 선배였다.
트레이드로 대전 호크스의 유니폼을 입은 지, 2달도 되지 않았지만 동기와 선후배들이 팀에 있었기에 어울리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국내에 10개 구단이 있지만, 실제로 상당히 많은 수의 선수들이 친분 관계를 맺고 있었고, 한 다리 걸치면 모두 아는 사이라고 할 수 있었기에 트레이드나, 이적으로 인해 외로움을 느낄 일은 거의 없다 할 수 있었다.
7월에 트레이드를 통해 대전 호크스에 합류한 선수들 대부분이 팀에 적응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시즌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알아볼 생각입니다.”
“메이저리그의 모든 구단들이 이적 경쟁을 한다면서? 소문에는 1억 달러 이상이라고 하던데? 사실이야?”
부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며 묻는 김추곤 선배였다.
1억 달러.
국내 선수들에게는 꿈도 꿔보지 못할 천문학적인 돈이다.
“대충 그렇다고는 들었지만, 정확하게는 에이전트만 알고 있습니다.”
방안의 모든 선수들이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고, 눈빛은 모두 부러움이 가득했기에 부담스러운 이야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 뜻을 알아차린 건 역시 눈치 빠른 정현우 선배였다.
“어차피 지혁이는 애초부터 메이저리그를 가야 할 놈이었으니까, 이제 똑바로 제 길을 가는 거지. 다른 건 몰라도 메이저리그에 가서도 지금처럼 자신 있게 네 공을 던져라. 너 자체가 한국 야구의 자존심이라는 걸 잊지 말고. 알겠지?”
“알겠습니다.”
정현우 선배의 의도대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나에 대한 관심을 접어두고 대전 호크스의 가을 야구에 대한 이야기, 다른 선수나 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2시간 정도 선수들끼리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하다 장근범 선배가 와이프가 기다린다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재빨리 나 역시 일어났다.
술집을 나오자 장근범 선배가 택시를 잡기 전 나에게 말했다.
“지혁아, 네 최대 단점이 뭔지 알아?”
내가 말없이 장근범 선배를 바라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넌 사교성이 너무 없어. 선배나 동기들하고 친하게 지내. 네가 아무리 올 시즌을 끝으로 내년부터 메이저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한국인이잖아? 선수 생활 끝나고 야구계를 떠날 거 아니라면 적당하게 친분도 쌓으면서 지내라. 한국은 누가 뭐라 하더라도 아직까지도 인맥으로 돌아가는 사회야. 네가 팀 막내인데 선배들이 널 왜 어려워하는 지 한 번쯤은 생각을 해봤으면 좋겠다. 이건 메이저리그에 가서도 마찬가지야. 야구는 절대 혼자 하는 경기가 아니라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더욱이 메이저리그에서는 야수들의 도움이 없으면 결코 좋은 성적을 낼 수 없을 거다. 널 위해서라도 다른 선수들과 친하게 지내는 방법을 생각했으면 한다.”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고 택시를 타고 떠나는 장근범 선배였다.
사교성.
노력을 하려고 해도 쉽게 되질 않는 부분이었다.
딱히 나 스스로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을 정도로 폐쇄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지도 않았으니 결국은 나에게 문제가 가장 큰 건 사실이었다.
더욱이 팀의 막내라는 걸 생각하면 내 행동이 선배들에게는 분명 좋게 보이지 않았을 건 분명했다.
외롭지 않다고 다른 선수들과의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
이건 분명 틀린 거다.
“야구보다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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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호크스 홈구장 대전 한밭 야구장.
“오늘도 역시 꽉꽉 들어찼네.”
차동호 기자는 야구장을 가득 채운 관중들을 바라봤다.
30전 21승 9패.
후반기 페넌트 레이스가 시작되고 난 이후의 대전 호크스의 성적이다.
무려 7할에 이르는 승률을 자랑하며 어느덧 1위 광주 피닉스와의 승차를 2게임 차이로 바짝 뒤쫓고 있었다.
후반기 시작과 동시에 13연승을 기록한 대전 호크스의 기세는 대단했다.
오늘 경기를 포함해서 앞으로 남아 있는 경기 수는 33경기.
승률 5할만 받쳐준다면, 가을 야구를 충분히 할 수 있는 대전 호크스였다.
가을 야구, 포스트 시즌은 모든 구단과 야구팬들이 가장 기대하는 시리즈다.
페넌트 레이스 1위의 성적도 영광된 자리지만, 포스트 시즌에서의 우승은 한 단계 위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최고의 영예라 부를 수 있다.
특히 2007년 이후 가을 야구를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대전 호크스에게 올 해는 19년 만에 찾아온 절호의 기회였다.
국내 최강의 선발진을 갖추었고, 물 방망이라 불리던 타선도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현재 대전 호크스 팬들의 열기는 대한민국 최고라 불리는 부산 샤크스보다 더 뜨거웠다.
홈경기는 말할 것도 없고, 원정 경기마저도 고정적으로 수천 명의 팬들이 몰려다닐 정도였다.
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에 보답하듯 대전 호크스는 매 경기마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높은 승률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페넌트 레이스에서 2위로만 올라서도…….”
한국 시리즈 우승까지도 넘볼 수 있는 대전 호크스다.
무적의 방패라 불리는 차지혁이 선발로 등판하면 우선 1점 이내로 상대 팀을 꽁꽁 묶을 수 있다.
타선에서 어떻게든 1~2점만 점수를 내면 승리한다는 공식이 있을 정도였으니 대전 호크스가 한국 시리즈에만 진출하면 차지혁으로 인해 2승은 쉽게 챙길 가능성이 컸다.
-차지혁! 차지혁! 차지혁! 차지혁! 차지혁!
관중들이 한 목소리로 차지혁이 이름을 불렀다.
홈경기든, 원정 경기든 대전 호스크의 팬들은 구름처럼 몰려다니며 차지혁을 연호했다.
지금까지 한국 프로 야구 역사상 이처럼 열광적인 응원을 받은 선수는 없었다.
한국 프로 야구 레전드라 불리는 선수들조차 매 경기마다 이런 광적인 응원은 받아본 적이 없다.
어느 팬의 말처럼 차지혁은 이미 대전 호크스의 심장이자, 자랑이며, 레전드였다.
인천 돌핀스의 1회 초 공격을 막기 위해 차지혁이 마운드에 올라서자 대전 호스크의 팬들이라면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두 기립해서 우레와 같은 박수로 응원을 시작했다.
가슴이 떨렸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차동호는 자신의 가슴이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정작 관중들의 응원을 받는 차지혁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상태로 태연하게 공을 던지고 있었다.
쇄애애애액!
퍼- 엉!
포수 미트에서 발생되는 파열음이 가슴까지 시원하게 만들었다.
시즌 22번째 경기, 19승 도전 경기, 타석에 타자가 들어서면서 경기가 시작됐다.
< 『국내편 - 07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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