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편 - 071』 >
『국내편 - 071』
예전과 달라진 이벤트 대회는 원하는 선수라면 누구나 참가가 가능했다.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다보니 반드시 올스타에 뽑힌 선수가 아니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참가를 할 수 있단 소리였다.
그렇다보니 야구장을 찾아온 관중들에게는 풍성한 볼거리가 제공되고 있었다.
강속구왕은 말 그대로 최고의 강속구를 던지는 선수를 뽑는 대회다.
투수, 야수 할 것 없이 누구나 참가가 가능했고, 5번 공을 던져 최고 구속을 기록으로 삼았다.
-문재설 선수! 147Km를 기록했습니다! 대구 블루윙즈의 주전 3루수인 문재설 선수 대단합니다! 고등학교 시절 투수를 했던 선수는 역시 다르군요! 이번에는 강북 바이킹스의 다니엘 그린 선수입니다! 전반기 7승을 거둔 다니엘 그린 선수는 굉장히 빠른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로 유명합니다! 현재까지 1위를 기록하고 있는 프레디 에르난데스 선수의 157Km를 뛰어 넘을 수 있을지 주목해보시기 바랍니다!
다니엘 그린은 곧바로 공 5개를 던졌다.
최고 구속은 156Km를 기록하며 2위에 머물렀다.
이후로도 많은 투수, 야수들이 강속구를 자랑하기 위해 공을 던졌지만, 프레디 에르난데스의 157Km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서서히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161Km가 나왔습니다!
전광판에 명확하게 찍혀 있는 161Km의 구속에 경기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관중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마운드 위에 서 있는 흑인 선수는 올 시즌 인천 돌핀스에서 야심차게 영입을 해온 엔서니 로위키였다.
현재 국내의 모든 투수들 가운데 평균 구속이 가장 빠르기도 했다.
“역시 괴물은 괴물이네. 몸도 제대로 풀리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161Km를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거냐.”
나와 같이 올스타에 선정된 정현우 선배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확실히 구속은 빠르다.
긴 팔과 유연한 몸은 엔서니 로위키의 최대 장점이었다.
하지만, 강속구 투수라면 피해갈 수 없는 제구력 문제가 엔서니 로위키에게도 있었다.
방금 던진 161Km의 공도 포수가 살짝 몸을 일으켜서 잡아야 했을 정도로 형편없는 제구력을 갖고 있었다.
제구력만 제대로 잡히면 리그를 초토화 시킬 선수라는 평가가 있었지만, 어디 그런 투수가 한둘인가?
-또 다시 161Km가 나왔습니다! 연속으로 무시무시한 강속구를 던지는 엔서니 로위키 선수입니다!
5번의 기회 중 4번을 160Km가 넘는 공을 던졌다.
특히, 마지막에 전력으로 던진 공이 164Km가 나오면서 엔서니 로위키가 얼마나 빠른 공을 던지는지를 모두에게 똑똑히 알려주었다. 물론, 포수가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높게 뜬 공으로 인해 제구력도 얼마나 최악인지도 알게 해주었고 말이다.
이어 3명의 선수들이 차례로 공을 던졌지만, 이미 164Km의 벽을 뛰어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다음 선수는… 국내 최고의 좌완! 대전 호크스의 차지혁 선수입니다!
내 차례가 되었다.
사회자의 소개에 관중들이 열광적으로 목청껏 소리를 내질러댔다.
그 함성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귀가 얼얼할 정도였다.
“가볍게 165Km짜리 하나 던지고 와라. 강속구왕 상금이 500만 원이다. 상금 타면 형이랑 오늘 고기 먹자. 알겠지?”
정현우 선배가 내 엉덩이를 툭 치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피식 웃고는 마운드로 향했다.
-차지혁 선수! 공을 던지기 전에 각오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내게 내밀었다.
“팔이 빠져라 던져보겠습니다.”
내 말에 관중들이 즐겁게 웃으며 환호를 보내줬다.
사회자 역시도 재밌다는 듯 웃으며 국내 최고의 에이스가 팔이 빠져서야 되겠냐며 팔이 빠지기 직전까지만 던져달라며 내 농담을 받아줬다.
불펜에서 충분히 몸을 풀어뒀기에 당장이라도 빠른 강속구를 던지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무리를 할 생각은 없었다.
이틀 뒤에 벌어지는 올스타전 선발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야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쇄애애액.
퍼어엉!
첫 번째로 던진 공이 한 가운데 스트라이크 존을 관통하며 포수 미트에 박혔다.
슬쩍 전광판을 바라보니 154Km가 찍혀 있었다.
관중들의 환호와 아쉬움이 뒤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두 번째 공을 던졌다.
156Km가 나왔다.
세 번째 공은 157Km가 나왔고, 네 번째로 던진 공이 159Km가 나오자 관중들이 열광적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어느새 관중석에서는 160이라는 단어가 한 목소리처럼 터져 나오고 있었다.
마지막 다섯 번째 공.
심장의 울림이 커졌다.
관중들의 환호성에 맞춰서 리듬을 타듯 심장 박동이 이뤄지고 있었다.
무리하지 않겠다고 했던 마음이 한 번만 전력으로 던져 보자라는 마음으로 서서히 바뀌어가고 있었다.
내가 던질 수 있는 최고의 구속이 얼마나 될까?
나조차 모른다.
경기 중에도, 연습을 할 때에도 투구 밸런스가 깨질 것을 걱정해 무리를 해서 던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딱 한 번만 던져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강해지자, 미트를 벌리고 있는 포수의 존재가 서서히 시야에서 작아졌다.
어두운 장막이 눈앞을 가로 막고 있는 것만 같았다.
깨부숴버리고 싶다는 심정으로 천천히 와인드업을 하고 온 몸의 힘을 모조리 끌어 올렸다.
손가락 끝에서 뜯어낼 것처럼 실밥이 채였다.
쇄애애애애애액!
퍼어어억!
어두운 장막이 와장창 깨지자, 시야가 확 밝아졌다.
앉은 자세 그대로 굳어 있는 포수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미트는 여전히 활짝 벌어져 있었다.
공이 없다.
툭. 데구르르르르.
2중, 3중으로 꼼꼼하게 막아 놓은 포수 뒤쪽 그물망에 걸려있던 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물망 뒤쪽에 앉아 있는 남자 관중은 입을 쩍 벌린 상태로 얼어붙어 있었다.
완전하게 엉뚱한 곳으로 공이 날아간 거다.
얼굴이 화끈 거릴 정도로 창피함이 몰려들었다.
엔서니 로위키가 던진 공보다도 더 형편없는 제구력이었다.
구속이 얼마나 나왔나 싶어 전광판을 바라보니 아무런 수치도 표시가 되어 있질 않았다.
-방금 차지혁 선수가 던진 공은 스피드건에 이상이 생겨 구속 측정이 제대로 이뤄지질 않았습니다. 하지만, 방금 던진 공은 엔서니 로위키 선수가 던진 공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빨랐던 걸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측정이 이뤄지지 않았으니 차지혁 선수는 다시 한 번 공을 던져주시길 바랍니다.
사회자의 말에 잔뜩 흥분했던 마음이 급격하게 식어가며 헛웃음이 나왔다.
평소와 다르게 흥분한 내 자신을 자책했다.
무엇보다 말도 안 되는 공을 던졌다는 사실이 가장 부끄러웠다.
명색이 투수라는 놈이 이게 무슨 추태란 말인가?
사회자가 건네주는 공을 받아서 황급히 포수 미트를 향해 던지곤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155Km가 나왔고, 결국 최고 구속은 159Km로 기록되며 엔서니 로위키에 이어 2위에 머물렀다.
삐빅!
코건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스피드건을 바라봤다.
103MPH
코건은 가만히 스피드건을 바라봤다.
방금 던진 공의 구속이 103마일이었다.
충분히 놀랄 일이지만, 그렇게까지 경악스러운 일은 아니다.
트리플A에서 공을 던지는 투수들 중에는 103마일 이상을 던지는 괴물들도 있었고,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도 해봤다.
던질 수 있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디로 던지느냐, 원하는 곳으로 던질 수 있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100마일이 넘어가는 공을 던질 수 있음에도 트리플A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투수들은 원하는 곳으로 공을 던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빠른 공을 던져도 포수 미트에 정확하게 넣지 못하면 소용없다.
그런 의미에서 방금 마운드에서 말도 안 되는 곳으로 공을 던진 투수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공을 던지는 투수라 단정할만했다.
하지만, 코건은 다른 때와 다르게 강렬하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차지혁의 어깨가 저렇게까지 강할 줄이야.”
서둘러 마운드를 내려오는 차지혁을 바라보는 코건의 얼굴이 서서히 흥분으로 물들었다.
차지혁은 다른 투수들과 다르다.
평균 95~96마일의 공을 원하는 곳에 던질 줄 아는 투수였다.
제구력이 상당히 뛰어나면서도 빠른 강속구를 던질 줄 알았다.
가끔은 100마일의 공을 던지며 모두를 흥분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103마일의 공을 던졌다.
엄청나게 빠른 공을 던질 줄 알면서도 자신이 컨트롤 가능한 공만 던진다는 의미다.
중요한 건 이제부터다.
시즌 초만 하더라도 차지혁의 평균 구속은 94마일이었다.
그런데 서서히 구속을 올렸다.
시즌 중반이 되면 날씨가 따뜻해져서 모든 투수들의 구속이 올라가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차지혁은 조금 더 특별했다.
시즌 초부터 100마일을 던졌던 투수다.
그러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평균 구속이 늘어났고, 제구력에도 전혀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단순히 구속을 올리는 게 아니라, 제구가 되는 강속구를 던지는 거다.
평균 구속 95~96마일의 공을 제구해서 던지는 선발 투수는 메이저리그에도 흔하지 않다.
그런데 더 대단한 건 차지혁은 자신이 던질 수 있는 빠른 공을 지속적으로 컨트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당장 올 시즌 후반기만 되도 차지혁의 평균 구속이 얼마나 더 늘어날지 알 수 없단 점이다.
만약, 차지혁이 100마일의 공을 제구한다면?
방금 던졌던 103마일의 공을 제구한다면?
믿겨지지 않을 놀라운 기록들이 펼쳐지게 된다.
메이저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투수로 이름을 남길 수 있게 된다.
“총력을 기울여야겠군.”
코건은 차지혁에 대한 가치를 대폭 수정했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무조건 잡아놓고 봐야 한다.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었다.
현재 가치보다 미래의 가치가 더 높아질 투수가 바로 차지혁이었다.
돈 아끼다가 후회를 하는 어리석은 짓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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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속구왕에 이어서 제구왕 대회가 벌어졌다.
제구왕은 홈 플레이트에 마련되어 있는 25분할 되어 있는 작은 판넬을 마운드 위에서 사회자가 지정해주는 숫자를 정확하게 맞추면 됐다.
딱 공 하나만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번호 사이즈는 정교한 제구력을 갖추지 못하면 1구만에 탈락을 해버릴 정도로 난이도가 높았다.
지금까지 단 한 명도 모든 숫자를 맞춘 적이 없었다.
작년 제구왕도 고작 9개를 성공시켰을 뿐이었다.
제구왕 대회에도 많은 선수들이 참가를 했다.
제구에 자신이 있는 투수들도 많았고, 관중들 앞에 자신의 얼굴을 자랑하고자 참가를 한 선수들도 있었다.
대다수의 선수들은 2개에서 4개를 맞추고 탈락하고 말았다.
나름 제구력이 좋다 평가 받는 투수들이라 하더라도 6개를 넘기기가 쉽지 않았고, 정말 리그 최상위라 칭찬 받는 투수조차 7개의 벽을 넘기지 못했다.
강속구왕에 이어 제구왕에도 참가를 했다.
투수로서 승부욕도 있었고, 무엇보다 나를 보기 위해 비싼 티켓값을 지불하고 찾아왔을 관중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참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로는 14번을 맞춰주세요!
사회자의 말에 마운드에 서서 판넬을 바라봤다.
01 02 03 04 05
06 07 08 0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14번이면 정중앙인 13번의 바로 우측이었다.
딱히 어려울 것 없다 여기면서 공을 던졌다.
쇄애액.
터엉!
약간은 아슬아슬하게 공이 14번 번호를 뚫고 들어갔다.
조금만 어긋났어도 실패를 했었을 정도로 위험한 순간이었다.
던지고 나서야 이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심리적인 압박감이 생각보다 심했다.
-제구력이 좋기로 소문난 차지혁 선수였기에 1구는 무난하게 성공했습니다! 그럼 두 번째로 22번을 맞춰주세요!
생각보다 부담감이 커졌다.
타자를 상대로도 부감감을 갖거나, 긴장하지 않았는데 22번을 맞추라는 사회자의 말에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름 제구력이 좋다 평가를 받고 있으니 최소한 5번은 맞춰야 한다는 생각에 집중해서 공을 던졌다.
14번을 맞췄을 때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22번의 번호를 깔끔하게 뚫어버렸다.
이어서 사회자의 요구에 맞춰서 2번, 7번, 10번까지 연속으로 성공시키며, 평균 이상의 성공률을 만들 수 있었다.
-여섯 번째 번호는 13번으로 하겠습니다!
한 가운데에 위치한 13번을 맞춰달라는 요청에 가볍게 호흡을 하고는 공을 던졌다.
터- 엉!
아슬아슬하게 13번의 번호를 뚫고 공이 들어갔다.
약간 위쪽을 맞아서 자칫했으면 그대로 튕겨져 나왔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대단합니다! 차지혁 선수가 6구를 성공시키며 현재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유한결 선수의 뒤를 바짝 쫓고 있습니다! 일곱 번째 공을 성공시키면 유한결 선수와 타이 기록을 지니게 됩니다! 자, 이번에는 25번을 맞춰주세요!
6구를 성공하고 나자 더 이상 부담감도, 긴장감도 없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강속구왕 대회에서 창피를 당했던 기억을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담감 없이 편안하게 공을 던졌고, 공은 의외로 아주 깨끗하게 25번의 번호를 뚫어버렸다.
이후로도 사회자의 요청대로 공을 던졌고, 추가로 3개의 공을 더 성공함으로써 10개를 성공시켜 제구왕 1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제구왕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컴퓨터 제구력이라 불리는 강북 바이킹스의 정상민 투수가 11개로 나를 2위로 밀어냈기 때문이다.
“2위만 했네?”
정현우 선배가 나를 바라보며 히죽거렸다.
“저보다 잘 던지는 투수들이 많다는 걸 알았으니 더 노력해야겠습니다.”
“…….”
진심을 다한 내 말에 정현우 선배의 표정이 돌덩이처럼 굳을 뿐이었다.
< 『국내편 - 07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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