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편 - 070』 >
『국내편 - 070』
“올스타전?”
“응. 티켓이 비싸기는 한데, 구하면 구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거든.”
에바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만약, 차지혁을 보기 위해서 가는 올스타전이라면 차라리 TV로 편안하게 보는 게 낫질 않겠어? 어차피 선발로 등판한다 하더라도 2이닝 정도 던지고 내려 갈 텐데, 굳이 비싼 돈 주고 경기장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싶어.”
“그런가?”
야구 자체를 좋아하는 정혜영이었지만, 지금은 오로지 차지혁 한 사람만의 팬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그렇다고 대전 호크스에 대한 애정이 식은 건 아니다.
다만, 공부하느라 바쁜 시간을 빼가며 볼 수 있는 경기가 차지혁 선발 경기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음 주에 집에 한 번 갔다 와야 할 것 같아.”
“미국?”
“응. 다음 학기면 한국 생활도 끝이 나니까 조금씩 정리를 해야 할 일들도 있고. 작년 여름 방학 때 집에 갔다 온 이후로 가보질 못해서 가족들이 보고 싶기도 하거든.”
“하긴, 1년이나 집에 못 갔으면 정말 가고 싶겠다. 그래, 에바 말대로 나도 집에 내려가서 TV로 올스타전을 봐야겠다.”
사실, 웃돈을 줘가며 티켓을 구할 생각이었던 정혜영은 이내 깨끗하게 포기했다.
에바가 함께 간다면 모를까, 혼자서 올스타전에 갈 수는 없었다.
“혜영, 교환 학생 프로그램을 알아봤는데 아쉽게도 내년에는 한국 쪽에서 교환 학생을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유럽 쪽 몇몇 학교만 자리가 나왔다고 해.”
“아… 그래.”
“미안, 혜영.”
“아니야! 에바가 나한테 미안할 이유가 어딨어? 알아봐 준 것만 해도 난 정말 고마워. 고마워, 에바.”
고맙다 말은 하면서도 정혜영의 실망한 얼굴이 에바는 안쓰럽게만 보였다.
“미국에는 언제 가?”
“다음 주 화요일.”
“화요일? 21일이네. 아침 비행기야?”
“응. 아침 비행기.”
“언제쯤 오려고?”
“2주 정도 있다가 올까 생각 중이야.”
“조심해서 잘 갔다와.”
21일 화요일, 에바는 최소한으로 짐을 줄였음에도 개인 물품과 가족들에게 줄 선물과 한국 음식 등을 꼼꼼하게 챙기다보니 커다란 여행용 캐리어를 두 개나 꾸려서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아침 시간임에도 공항으로 향하는 공항 버스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탑승하고 있었다.
버스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다시 한 번 비행기표를 확인했다.
필라델피아로 향하는 직항편이 없었기에 에바는 뉴욕으로 가서 그곳에서 마중을 나올 아버지의 차를 타고 필라델피아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작년에도 이렇게 다녔고, 반대로 필라델피아에서 한국으로 올 때에도 같은 방법을 이용했다.
필라델피아에서 가까운 직항기가 있는 공항은 뉴욕과 워싱턴인데, 워싱턴보다는 뉴욕이 직항편이 많아 저렴하고 편안하게 이용할 수가 있었다.
공항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린 에바는 캐리어 카트를 찾아 움직였다.
“오늘이 귀국하는 게 맞아?”
“맞아요! 몇 번이나 확인을 한 거란 말이에요!”
“아침인 것도 확인했고?”
“선배! 도대체 몇 번을 묻는 거예요! 다른 곳에서도 기자들 나와 있는 거 못 봤어요?”
“그건 아니지만… 지금쯤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안 보이니까 그러지. 도대체 어디로 나간 거야? 설마, 벌써 차를 타고 떠난 거 아냐?”
“그럴 수도 있죠.”
“젠장! 아침부터 이게 무슨 고생이야.”
카메라를 손에 든 남자와 여자가 투덜거리며 에바의 곁을 지나갔다.
한국어는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지만, 듣는 건 드문드문 가능했기에 남자와 여자가 누군가를 만나려다 실패했다는 것만 얼핏 알 수 있는 에바였다.
캐리어 카트를 찾아 움직이던 에바는 왼팔로 끌고 오던 캐리어가 무언가에 걸려 덜컹거리더니 손잡이가 부서져버렸다.
“왜 하필이면…….”
에바는 손잡이가 부서져서 꼴사납게 바닥에 넘어져버린 캐리어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오래 쓰긴 했다.
한국으로 올 때, 집에서 가져온 캐리어로 10년도 훨씬 넘은 거였다.
정말 먼 곳으로 가는 걸 제외하면 쓸 일이 없는 캐리어라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더니 기어이 사고를 치고 만 거다.
손잡이 부분이 완전히 부서져서 커다란 캐리어를 낑낑 거리며 들고 가야 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해지는 에바였다.
새로운 캐리어를 구입하자니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에바는 조금만 고생하자는 심정으로 어떻게든 멀쩡한 캐리어에 손잡이가 부서진 캐리어를 올려서 끌기로 결심했다.
캐리어 카트까지만 가면 된다.
그러면 힘든 일은 없다고 여기며 에바가 힘들게 캐리어와 고군분투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주변에서 몇몇 사람들이 에바의 모습을 보고 도와주려다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에바의 외모에 부담을 느끼는 남자들도 있었고, 어쩔 수 없이 비행기 시간이 촉박해서 아쉬운 발걸음을 내딛는 남자들도 있었고, 외국인이라는 사실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돌아서는 남자들도 있었다.
내용물을 꽉꽉 채운 대형 캐리어는 그 무게만 30kg가 넘었다.
에바가 낑낑거리고 있을 때였다.
“도와드릴까요?”
에바가 반색하며 음성이 들려온 곳을 바라봤다.
“도와주시면 정말 감사…….”
남자는 큰 키에 탄탄한 체격을 갖고 있었다.
눈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짙고 큰 선글라스에 모자까지 깊게 눌러쓴 남자였지만, 눈썰미가 좋은 에바로서는 남자의 얼굴을 한 눈에 알아 볼 수가 있었다.
“차지혁 선수?”
“…절, 아세요?”
당황한 남자의 음성에 에바가 피식 웃었다.
“당연히 알죠. 제가 차지혁 선수의 팬이니까요.”
“다른 사람들은 못 알아본다고 했는데…….”
자신을 알아봤다는 사실에 당황한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차지혁의 모습에 에바는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마운드 위에서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태연하게 자신의 공을 묵묵하게 던지던 차지혁의 모습과는 확실하게 다르게 느껴졌다.
“걱정 마요. 다른 사람들은 쉽게 알아보지 못할 거니까요.”
“그렇죠?”
말투가 미묘했다.
다른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에바, 자신은 한 눈에 알아봤으니 차지혁의 음성이 의심스러운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영어를 잘 하시네요?”
“아, 감사합니다.”
뭔가 모를 뿌듯함마저 느껴지는 차지혁의 음성이었다.
에바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에 살짝 웃음이 나왔다.
한국인들은 과할 정도로 영어에 집착을 했고, 영어를 잘한다고 칭찬하면 세상에서 가장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차지혁의 모습은 에바에게 있어 그 역시 야구장 밖에서는 평범한 한국인이라는 걸 알게 해주었다.
“손잡이가 완전히 부서졌네요? 이런 상태라면 도착해서도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카트가 있으니까 괜찮아요. 뉴욕에서 아버지가 마중을 나올 테니까 집까지 가지는 건 문제 없어요.”
“뉴욕에 살아요?”
“아뇨, 집은 필라델피아에요. 한국에선 직항기가 없어서 뉴욕으로 가야 해요.”
“뉴욕에서 필라델피아까지는 얼마나 걸려요?”
“차로 2시간 30분 정도면 갈 수 있어요.”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또 2시간 30분이나 차를 타려면 상당히 피곤하겠어요.”
“어쩔 수 없죠. 그런데 차지혁 선수, 보기보단 말이 많네요?”
에바의 말에 차지혁이 미안하다며 대답했다.
“미안합니다. 영어에 능숙해지려면 대화를 많이 해야 한다고 해서요. 귀찮았다면 다시 한 번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그런데 공항에는 무슨 일이죠?”
“조금 전에 입국했어요. 광고 촬영 때문에 아프리카에 다녀왔거든요.”
“아… 그래서 그랬구나.”
“예?”
차지혁이 무슨 뜻이냐는 듯 에바를 바라보자 그녀가 곧바로 답했다.
“조금 전에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누굴 찾아다니는 것 같더라고요. 그게 차지혁 선수가 아닌가 싶어서요.”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기자들을 좋아하지 않죠?”
“아무래도 그렇죠.”
쓰게 웃는 차지혁의 모습에 에바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기자들의 도를 넘는 행위는 똑같았다.
물론, 좋은 기자들도 있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관심사를 모으기 위해 과장되거나, 교묘하게 말을 돌려서 기사를 작성하는 일들이 허다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에바는 차지혁의 스캔들 기사를 바로 곁에서 보질 않았던가?
정혜영이 그 일로 얼마나 피해를 봤는지 잘 알기에 그녀 역시 기자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카트가 저쪽에 있네요.”
차지혁이 먼저 움직여 카트를 끌고 왔다.
손잡이가 부서진 캐리어와 멀쩡한 캐리어를 잘 올려놓자, 에바가 고맙다며 인사를 했다.
“도움 준 것 정말 고마워요.”
“아닙니다.”
차지혁이 그렇게 대답하고는 몸을 돌리려고 하자, 에바가 급히 그를 불렀다.
“차지혁 선수!”
“예?”
“혹시 괜찮다면 전화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
“예?”
에바의 요구에 차지혁이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여자 쪽에서 직접적으로 전화번호를 물어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서양인이라는 걸 떠올리고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며 안정을 찾았다.
“오늘 일을 꼭 보답하고 싶어요. 제 번호를 준다 하더라도 어차피 연락 안하실 거잖아요?”
확신에 찬 에바의 말에 차지혁은 아니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분명 에바의 말처럼 그녀가 연락을 하라며 전화번호를 알려줬어도 연락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굳이 보답을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요.”
“저도 크게 보답을 할 순 없어요. 간단하게 식사 한 번 대접할 수밖에 없고요. 그리고 차지혁 선수에게 꼭 소개시켜 주고 싶은 친구가 있거든요.”
“제게 소개시켜 주고 싶은 친구요?”
“그건 비밀이에요. 하지만, 차지혁 선수도 알고 있는 사람이죠. 궁금하지 않나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금발 미녀가 웃으며 묻자 차지혁은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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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나라든 프로 스포츠에 있어 올스타전은 축제다.
각 팀을 대표하는 스타들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올스타전은 야구에 조금 밖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조차 크게 기대를 하게 만드는 날이다.
잠실에서 펼쳐지는 2026년 프로 야구 올스타전은 7월 26일을 시작으로 30일까지 무려 5일간 펼쳐진다.
예전만 하더라도 이틀 만에 끝이 났던 올스타전이었다.
그러던 것이 2022년부터 기간이 파격적으로 늘어났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7월에 열리는 IBAF 챔피언스 리그에 참여하는 팀들의 휴식 기간을 보장하기 위함이다.
국내에서 편안하게 휴식을 보낸 구단들과 다르게 미국이라는 먼 나라에서 챔피언스 리그에 참석을 하고 돌아온 구단의 선수들의 체력과 컨디션을 회복시켜주기 위함이었다.
이를 두고 많은 말들도 있었다.
이전처럼 2일 동안만 올스타전을 벌이고, 나머지 기간을 휴식일로 정하면 선수들이 더욱더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KBO에서는 올스타전이라는 특수를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다.
즉, 수익 창출에 눈이 먼 행태였지만 중요한 건 팬들이 즐거워하니 선수들도 딱히 반대를 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올스타전 기간 동안 펼쳐지는 다채로운 행사와 축하 공연도 예전에 비해 눈부실 정도로 화려해졌다.
더불어 많은 조명을 받지 못한 퓨처스 리그의 선수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기 위한 노력도 많아졌다.
늘어난 기간을 채우기 위해 퓨처스 리그 선수들을 대상으로도 홈런왕, 번트왕, 강속구왕, 제구왕, 런닝왕 경쟁이 펼쳐졌다.
2군에서 땀을 흘려가며 운동하는 퓨처스 리그 선수들로서는 올스타전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니 좋은 행사였고, 야구팬들 입장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선수를 알 수 있는 자리가 되니 충분히 즐거웠다.
26일과 27일 동안 펼쳐진 퓨처스 올스타전이 끝나고 28일이 되자 본격적으로 프로 선수들의 올스타전이 시작됐다.
“정말 팬입니다! 차지혁 선수가 던지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속이 후련한지 모릅니다! 후반기에도 전반기처럼 시원시원한 강속구를 던져주시길…….”
28일, 29일 동안에는 무려 3시간 동안이나 사인회가 있었다.
거기에 올스타 투표 탑10에 뽑힌 선수들은 추가로 1시간 동안 포토존에서 팬들과 사진도 찍어야만 했다.
물론, 선수 자유 의지에 의해 거부할 수도 있었지만, 어떤 간 큰 선수가 거부를 할 수 있을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팔이 떨어져 나가라 사인을 해야 했고, 팬들과 사진도 찍어야만 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양은혜요.”
수줍어하는 여학생의 이름과 함께 사인을 해서 공을 건네줬다.
두 손으로 공을 꼭 쥐고는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모습을 보니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생겨났다.
가만히 앉아서 3시간 동안이나 사인을 하려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팬들을 위한 서비스라는 걸 생각하면 결코 얼굴을 찌푸릴 수가 없었다.
힘들었던 사인회가 끝나고 첫 이벤트 대회인 강속구왕 선발전이 시작됐다.
< 『국내편 - 070』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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