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편 - 069』 >
『국내편 - 069』
-라이언 칼! 연장 12회 말, 끝내기 투런홈런으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Detroit Tigers)와의 승부를 다시금 원점으로 돌려놓습니다! 이로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Cleveland Indians)는 라이언 칼의 극적인 투런홈런에 힘입어 1차전의 패배를 설욕하며 22일 마지막 3차전으로 2026년 IBAF 챔피언스 리그의 최종 승자를 가리게 되었습니다.
“와~ 저 사람 힘 엄청 센가보다.”
라이언 칼의 끝내기 투런홈런 영상을 바라보던 지아가 갑자기 날 빤히 바라봤다.
“왜?”
“오빠, 저런 괴물들하고 야구 할 수 있겠어?”
“그러려고 매일 운동 하잖아.”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저런 괴물들하고…….”
지아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주스 줄까?”
“고마워.”
부엌으로 가는 지아를 뒤로하고 연속적으로 라이언 칼의 홈런 영상을 되돌리며 반복해주는 TV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확실히 지아의 말대로 라이언 칼의 홈런은 무지막지한 힘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볼이었다. 그것도 안쪽 무릎 밑으로 파고 들어오는 낮은 볼을 라이언 칼은 그대로 때려서 우측 담장을 훌쩍 넘겨버렸다.
마운드 위에 서 있는 투수는 물론,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감독조차도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헛웃음을 짓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코스의 볼을 오로지 힘 하나로 걷어 올려버린 거다.
괜히 메이저리그의 홈런 타자가 아니었다.
지아의 말대로 저런 괴물과 승부할 수 있을까?
승패를 떠나서 해보고 싶다는 승부욕이 생기기는 했다.
이기든, 지든 당당하게 정면으로 대결을 벌여보고 싶었다.
“자.”
지아가 건네는 오렌지 주스를 받아들며 고맙다고 말을 하자 지아가 옆에 앉으며 물었다.
“다음 주에 올스타전이지?”
“30일.”
오늘이 21일이니, 앞으로 9일 남았다.
프로 야구의 축제인 올스타전이다.
이번 올스타 투표에서 선발 투수 부문 1위에 전체 선수 1위까지 거머쥔 나였다.
2위와의 표차이가 2배 이상이 날 정도로 압도적인 득표율이었다.
“올스타전에 나가는 소감이 어때?”
“별거 없어.”
간단하게 대답하고 주스를 꿀꺽꿀꺽 마셨다.
어머니가 직접 오렌지를 사서 갈아 놓은 주스라 그런지 맛이 일품이었다.
“니가 그럼 그렇지.”
지아는 뭘 바라겠냐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국민 배우 송강우와 광고를 찍었을 때에도, 국민 여동생이라 불리는 박혜영과 다정하게 광고 촬영을 했을 때에도 딱히 별다른 느낌이 없었던 걸 지아는 인정할 수 없다며 며칠 동안이나 날 괴롭혔었다.
“아프리카는 어땠어?”
지아가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대충 물어왔다.
유니세프 후원 광고 촬영을 위해 아프리카에 갔다가 오늘 아침에 귀국을 한 상태였다.
아프리카에서의 촬영은 솔직히 충격적이었다.
TV 후원 광고로만 보던 모습을 실제로 접하니 정말 머릿속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됐다. 더불어 그 사람들에게 미안한 기분도 들었고.”
“응?”
지아가 TV에서 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지아야, 너도 네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를 꼭 기억하면서 살아야만 해.”
지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프리카에서 본 기아와 난민들의 모습은 끔찍했다.
내가 몸 건강하게 대한민국이라는 평온한 나라에서 마음 따뜻한 부모님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며, 행운인지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뭐, 뭐하는 거야!”
내 손을 탁 쳐내며 지아가 날 노려봤다.
빨갛게 달아오른 볼이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걸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지아는 15살의 소녀일 뿐이다.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속으로는 나를 얼마나 걱정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꼬맹이가 부끄러운가… 윽!”
“헛소리하고 있네! 흥!”
내 옆구리를 사정없이 꼬집고는 제 방으로 서둘러 올라가는 지아의 모습을 보며 나는 흐뭇하게 웃고 말았다.
아프리카까지 갔다 와서 몸 컨디션이 좋지 않았기에 휴식겸 소파에 늘어져서 TV를 돌리던 와중에 핸드폰이 울렸다.
놀랍게도 올해 들어 단 한 번도 개인적으로 연락을 한 적이 없었던 백유홍 감독이었다.
“예, 감독님. 차지혁입니다.”
-아프리카는 잘 갔다 왔나?
“예, 잘 다녀왔습니다.”
-참 대단하군. 남들은 상업 광고를 하나라도 더 찍으려고 할 텐데 자네는 전혀 반대의 길을 가고 있으니 말이야.
뜬금없이 이런 말이나 하려고 전화를 한 것이 아님을 잘 알기에 나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실은 자네에게 중요하게 의논을 하고자 하는 일이 있네. 내일 별다른 일정이 없다면 한 번 만나는 게 어떻겠나?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그러면 내일 보겠네.
“예.”
무슨 일일까?
단 한 번도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온 적이 없었던 백유홍 감독이 이렇게까지 연락을 해왔다는 점이 보통 일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잠시 이유를 생각하다 이내 머리를 흔들며 궁금증을 털어냈다.
내가 아무리 생각을 한다고 하더라도 알 수 없는 문제였다.
“내일 만나보면 알겠지.”
다시금 TV 채널을 돌려보다 끝내 선택한 건 역시나 야구 관련 프로그램이었다.
@
똑똑똑.
“차지혁입니다.”
“들어오게.”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뜻밖에도 백유홍 감독을 찾아온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백유홍 감독과 마주앉아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유정학 단장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단장님.”
내가 인사를 건네자 유정학 단장이 웃으며 인사를 해왔다.
역시나 아프리카에 잘 갔다 왔냐는 안부 인사였다.
“단장님께서 계신 줄 몰랐습니다. 먼저 대화 나누실 때까지 훈련장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내가 방을 나가려고 하자 유정학 단장이 급히 날 막았다.
“백 감독님과 함께 차지혁 선수를 기다린 겁니다. 나갈 필요 없으니 이쪽으로 앉으세요.”
유정학 단장의 말에 내가 백유홍 감독을 바라봤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 앉으니 유정학 단장과 백유홍 감독은 서로 눈치만 살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 나에게 할 말이 있다는 건데,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미루고만 있으니 지켜보는 내가 답답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먼저 입을 열 수가 없어 가만히 기다리니 이윽고 유정학 단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른 게 아니라, 차지혁 선수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편하게 말씀 하셔도 됩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기에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유정학 단장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마음을 확실하게 다잡았는지 말을 했다.
“차지혁 선수의 후반기 등판 일수를 조정했으면 합니다.”
“예?”
후반기 등판 일수를 조정한다는 말은 확실히 의외였다.
전반기 동안 철저하게 5선발 로테이션을 지켰다.
덕분에 체력적인 부담도 덜했고, 그 결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그런데 후반기에 등판 일수를 조정한다는 건, 날 한 번이라도 더 선발로 올리겠다는 말이고 그건 곧 로테이션에 변화를 주겠다는 뜻이다.
선발 등판이 늘어나는 건 나쁘지 않았지만, 로테이션 일정이 꼬이거나, 적절한 휴식을 할 수 없다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신인 투수니까 구단에서 시키는 대로 한다?
그런 구시대적 발상에 강압적인 태도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우선 이유부터 묻겠습니다. 왜 제 등판 일수를 조정하겠다는 뜻입니까?”
“전반기 선발로 활약했던 오주영 선수를 후반기 마무리로 돌리고, 불펜 투수였던 서유민 선수를 선발 로테이션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서유민 선수에게 로테이션 일정을 꼬박꼬박 지켜서 등판 시키는 일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그럽니다.”
힘들 것 같다?
더 정직하게 말해서 승률을 높이기 위해 확실한 카드를 쓰겠다는 뜻이다.
오주영 선배는 전반기 동안 평균자책점 3.57에 6승을 거뒀다.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선발의 한 축을 맡기기엔 충분했다.
물론, 작년보다는 떨어진 성적이고, 후반기 체력 저하로 올 시즌도 걱정을 사고 있기는 했지만, 오주영 선배가 선발 로테이션에서 빠진다는 건 생각보다 큰 손해였다.
서유민 선배는 전반기 동안 불펜 투수로서 안정적인 활약을 보여줬고, 무엇보다도 선발 투수들이 컨디션 난조 등으로 일찍 강판을 당하면 가장 먼저 등판해서 여러 이닝을 책임져주는 롱 릴리프(long relief)의 역할을 톡톡하게 해주었었다.
오주영 선배의 빈자리를 꿰차기엔 그리 나쁜 카드가 아니었다.
결국, 드래프트를 통해 확실한 마무리 투수였던 안주민을 내보낸 것이 이런 식으로 선발 로테이션에 변화를 주게 된 셈이다.
선수단 관리는 오로지 유정학 단장의 몫이니 누구도 관여할 수가 없는 부분이다.
감독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좋든 싫든 단장이 만들어 놓은 선수단 내에서만 기용이 가능했다.
그게 감독의 역량이고, 역할이다.
“선발 등판 일수는 어떻게 조정하시겠다는 뜻입니까?”
내 물음에 유정학 단장이 백유홍 감독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이제 네 차례라는 듯 한 신호였다.
신호를 받은 백유홍 감독이 두 장의 달력을 내게 건네줬다.
두 장의 달력은 8, 9, 10월까지 존재했고, 거기엔 각각 다른 날짜에 붉은 색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첫 번째 달력에는 8월에 6번, 9월에 6번, 10월에 2번 붉은 색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두 번째 달력에는 8월에 5번, 9월에 6번, 10월에 1번 붉은 색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두 달력의 차이점을 알겠나?”
백유홍 감독의 물음에 나는 차분하게 달력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차이점을 발견했다.
“예. 알겠습니다. 첫 번째 달력은 로테이션에 관계없이 등판 일수로 4일 휴식을 줬고, 두 번째 달력은 전반기와 마찬가지로 로테이션에 맞춰서 선발 등판 일을 표시한 것 아닙니까?”
“맞네.”
페넌트 레이스는 9일 동안 연속으로 경기를 하고 하루를 쉰다.
1선발의 경우 1일 선발로 나오면 다음 등판 일은 6일이 된다. 그리고 세 번째 등판일은 12일이 된다. 4일 휴식으로 따지면 11일이 등판 일이 되지만, 5선발이 11일에 등판하니 12일로 밀리게 되는 셈이다.
즉, 휴식일이 하루 늘어나게 되는 거다.
하지만, 로테이션에 관계 없이 4일 휴식에만 맞추면 11일이 세 번째 등판 일이 되는데, 유정학 단장과 백유홍 감독은 이 점을 노리고 있는 거였다.
이렇게 로테이션을 꾸릴 경우 당장 나만 하더라도 2경기가 늘어난다.
더불어 2선발과 3선발에도 영향을 미친다.
즉, 상대적으로 위력적인 투수들이 경기 수가 늘어나니 팀 전체의 선발진의 힘이 강화되는 셈이다.
반대로 4, 5선발 투수의 경우 보장되어 있던 경기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어진다.
실제로 몇몇 구단은 확실한 네 명의 선발 투수에 한 명의 불확실한 선발 투수를 끼워 맞춰서 로테이션이 아닌, 휴식일에 맞춰 선발로 마운드에 올리고 있기도 했다.
더욱이 후반기에는 거의 모든 구단들이 확실한 투수들로 새롭게 로테이션을 꾸린다.
그러니 현재 나에게 보여주는 선발 등판 일정은 꼼수도 아니고, 나쁘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투수들에게는 확실한 4일 휴식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내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다.
이미 올 시즌을 끝으로 메이저리그로 이적이 확실시되는 상황이었기에 한 번이라도 더 선발 등판을 하는 게 내게도 좋았다.
국내 팬들을 위해서도 좋고, 내 개인의 성적 욕심을 부리기에도 좋았다.
하지만, 아무리 좋아도 한 번에 승낙을 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에이전트와 상의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말에 백유홍 감독은 살짝 눈만 찌푸렸다.
내 의도를 모르지 않는 다는 듯 날 바라보는 눈빛이 아주 날카로웠다.
유정학 단장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선발 등판 일수를 조정하는 건 구단이 아쉬워서 하는 일이기에 내게 뭐라고 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
“좋은 방향으로 결론을 내려줬으면 좋겠군요.”
유정학 단장의 말에 나는 알겠다는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올스타전에서 선발 등판이라고 했나?”
“예.”
내 대답에 백유홍 감독이 입맛을 다셨다.
정말 길어야 3이닝 밖에 던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쨌든 선발로 공을 던지는 바람에 페넌트 레이스 후반기가 시작되는 8월 1일에는 다른 투수를 선발로 올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몇몇 올스타로 뽑힌 각 팀의 에이스 투수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올스타전에서 등판을 하지 않기도 했다.
어차피 올스타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타자들이다.
투수들은 예외적이다 싶을 정도로 오래 던져야 3이닝이고, 보통은 1이닝에서 2이닝이면 마운드를 내려가야 하기에 많은 빛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역대 올스타전에서 투수가 MVP를 탄 경우는 고작 3번 밖에 없었다.
그 외에 41번은 모조리 타자들의 몫이었다.
이러니 투수들로서는 올스타전에서 굳이 무리를 하면서까지 마운드에 오를 이유가 없었다.
나로서는 MVP라는 타이틀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생에 최초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국내 무대에서의 올스타전이었기에 꼭 등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절대 무리하지 말게.”
백유홍 감독의 말에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을 하고는 10분 정도 이런저런 잡담을 하다가 방을 빠져나왔다.
곧바로 황병익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협상은 내가 아닌 에이전트의 몫이었다.
< 『국내편 - 069』 > 끝
ⓒ 독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