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편 - 066』(수정) >
『국내편 - 066』
161Km의 공을 던졌다.
여전히 원하는 코스로 공을 던지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패스트볼(passed ball)이 되거나, 스트라이크 존에서 완전히 빠지는 볼이 되지는 않았다.
그저 한 가운데로 몰리는 것만 막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1회 말, 창원 타이탄스의 3번 타자 배형진에게 결정구로 161Km의 강속구를 던지면서 공 8개로 이닝을 마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오자 모든 선수와 감독, 코치들이 박수를 쳐주었다.
“자자! 이제 한 점 내자!”
주장인 정현우 선배가 힘차게 파이팅을 외치며 2회 초, 공격을 시작했다.
5번 타자 그랜트 커렌부터 시작된 공격은 허무하게도 삼자범퇴로 끝이 나고 말았다.
2회 말, 창원 타이탄스의 공격을 막기 위해 마운드로 향하자 황대훈 선배가 다가왔다.
“스캇 데이비스는 빠른 볼에 강한 타자다. 변화구 위주로 가자.”
슬쩍 창원 타이탄스 더그아웃을 바라보자 벌써부터 스캇 데이비스가 대기 타석에서 배트를 힘차게 돌려대고 있었다.
바람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올 정도로 파워풀한 모습이었다.
타율은 0.267로 높지 않았지만, 홈런은 24개로 현재 리그 1위와 단 한 개 차이로 2위를 내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흔히 말해 걸리면 넘어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스캇 데이비스는 투수들에게 있어 요주의 타자였고, 대다수의 투수들은 변화구 위주의 유인구로 그의 타율을 깎아 먹고 있었다.
“누가 더 강한지 한 번 시험해보고 싶습니다.”
“뭐?”
“패스트볼(fast ball)에 강하다고 투수인 제가 패스트볼을 안 던질 순 없잖습니까? 그러니 이번에 한 번 확인을 해보겠습니다. 내 공이 더 강한지, 스캇 데이비스의 배트가 더 강한지.”
승부욕이 생겼다거나, 스캇 데이비스를 얕잡아 봐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나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는 빠른 강속구다.
그런데 상대 타자가 패스트볼에 강하다고 피한다?
나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는 짓이다.
더욱이 메이저리그를 목표로 두고 있는 나였다.
메이저리그에는 스캇 데이비스보다 더한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리그였으니, 스캇 데이비스조차 넘어서지 못하면 메이저리그에 갈 자격조차 없었다.
승리한다면 어느 정도의 격차가 있는지, 패배를 한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냉철하게 분석해서 더욱더 노력을 하면 되는 일이다.
황대훈 선배는 가만히 날 바라보다 물었다.
“자신은 있는 거냐?”
“물론입니다. 전 제 공을 믿습니다.”
“그래, 그럼 됐다. 투수인 너와 포수인 내가 믿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냐? 얼마든지 던져봐.”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황대훈 선배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나 역시 마운드에 올라섰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스캇 데이비스가 타석에 들어왔다.
거의 2m에 달하는 큰 키에 육중한 체형은 국내의 모든 타자들 중 가장 거대했다.
존 휴즈가 국내의 타자들 중 손에 꼽힐 정도로 작은 체격이라면, 반대로 스캇 데이비스는 가장 큰 체격이었다.
너무나도 극과 극을 달리는 창원 타이탄스의 두 용병 타자들이다.
초구는 몸 쪽을 찌르는 포심 패스트볼을 던졌다.
스캇 데이비스는 주심의 스트라이크 선언에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배트를 두 번 휘두르고 다시 들어왔다.
두 번째 공은 바깥쪽 낮은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포심 패스트볼을 던졌고, 스캇 데이비스는 기다렸다는 듯 배트를 휘둘렀다.
딱!
1루 방향 관중석으로 들어가는 타구에 스캇 데이비스는 다시 타석에서 벗어나더니 맹렬하게 배트를 휘둘러댔다.
타이밍이 조금 늦었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는 듯 배트 스피드가 조금 더 빨라진 것 같았다.
이제 3구다.
스캇 데이비스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변화구로 유인구를 던질 거라고 예상하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순 없지만, 스캇 데이비스는 타격 자세부터 배트를 쥐고 있는 모습까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4번 타자의 자존심일지도 모른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타자들은 삼진을 당하더라도 배트를 짧게 쥐는 법이 없다고 했다.
미국 태생인 스캇 데이비스는 짧은 시간이지만, 메이저리그에서 중심 타선을 맡았던 적도 있으니 그에 따른 자존심이 무척이나 셌다.
실제로도 국내에서 변화구 유인구에 속절없이 당하면서도 배트를 단 한 번도 짧게 쥔 적이 없을 정도로 스캇 데이비스는 자신의 자존심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그게 자존심인가 싶지만 말이다.
던져준다.
이번이 승부구다.
스캇 데이비스의 파워를 구위로 누를 수 있는지를 확인해보는 거다.
3번 타자였던 배형진에게 던졌던 160Km가 넘는 제구력을 배제한 포심 패스트볼이 아니라, 내가 던질 수 있는 최고의 포심 패스트볼을 던져준다.
코스는 몸 쪽으로 정했다.
아무리 자신이 있어도 한 가운데를 던져주는 건 바보나 할 짓이니까.
공을 힘껏 움켜쥐고 그대로 힘껏 던졌다.
쇄애애애액!
날아오는 공을 향해 스캇 데이비스가 보란 듯이 웃음을 지으며 배트를 휘둘렀다.
내가 포심 패스트볼을 던질 줄 알았다는 듯 맹렬하게 풀 스윙을 했다.
따- 악!
공이 높이 떠오르며 내 눈 앞에서 순식간에 머리 위로 넘어갔다.
‘설마?’
황급히 고개를 돌리니 중견수인 김추곤 선배가 뒤로 달리고 있었다.
홈런임을 예상한 듯 1루를 향해 느릿하게 달리는 스캇 데이비스는 오른팔까지 치켜 올리고 있었다.
저런 모션을 취한다는 건 흔히 말하는 히팅 포인트(hitting point)를 제대로 때렸다는 뜻이다.
타자는 스스로 친 타구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안다.
이건 홈런이고, 이건 안타라는 걸 누구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러니 현재 스캇 데이비스의 퍼포먼스는 홈런이라는 걸 수많은 관중과 TV를 지켜보는 시청자들에게 대놓고 알리는 거였다.
관중들의 함성과 탄성이 교차됐고, 양 팀 더그아웃에서는 모든 선수들이 얼굴을 내밀고 타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꽤 높은 지점까지 떠올랐던 공은 담장을 넘어갈 것만 같았다.
‘첫 번째 피홈런인가?’
나 역시 홈런이라고 예상할 때였다.
퍽.
높이 떠오르며 당장이라도 담장을 넘겨버릴 것만 같았던 타구는 워닝 트랙(Warning track)에서 잡히고 말았다.
1루를 막 밟으려던 스캇 데이비스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멈춰섰고, 김추곤 선배는 자신의 글러브에 타구가 들어왔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이라도 시켜주려는 듯 공을 꺼내들며 유격수인 박상천 선배에게 송구했다.
함성을 질렀던 관중들은 탄성을 뱉어냈고, 탄성을 지르던 관중들은 함성을 터트렸다.
타구가 마지막에 힘을 잃고 떨어진 거다.
나는 구위로 스캇 데이비스의 파워를 눌렀다는 사실에도 난 전혀 기쁘지 않았다.
안심할 수 없다.
상대는 메이저리그를 호령하는 괴물 타자가 아닌 국내 리그의 용병 타자일 뿐이다.
‘메이저리그였다면 홈런이다.’
변명할 여지가 없는 홈런이다.
내 구위가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결코 웃을 수 없는 일이다.
구속을 끌어 올리면서 구위 역시 더 높여야만 한다.
메이저리그에서도 괴물 같은 타자들을 상대로 쉽게 홈런을 맞지 않는 투수가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오늘 확실하게 깨달았다.
-스캇 데이비스 선수 홈런임을 확신했습니다만, 결국 마지막에 타구가 힘을 잃고 중견수 김추곤 선수의 글러브에 잡히고 말았습니다.
-화면에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대로 맞았어요. 노리고 배트를 돌렸다는 뜻이죠. 스캇 데이비스 선수도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패스트볼을 제대로 타격했다는 걸 알기에 홈런을 의심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담장을 넘기지 못했다는 건, 차지혁 선수가 던진 포심 패스트볼의 구위가 굉장하다는 걸 입증한 거예요. 스캇 데이비스 선수조차 홈런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차지혁 선수의 구위를 과연 국내의 그 어떤 타자가 홈런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전반기 동안 피홈런이 하나도 없는 차지혁 선수입니다. 그 이유를 방금 스캇 데이비스 선수가 확실하게 보여준 것 같습니다.
스캇 데이비스를 구위로 누르고 나니 이후 타자들을 상대로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공을 던질 수 있었다.
결국, 3회 말까지 오로지 포심 패스트볼로만 창원 타이탄스의 타선을 완벽하게 막아버렸다. 투구수도 고작 28개 밖에 되지 않았다.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는 동안, 3루 쪽 관중석에 두 젊은 남자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설마 오늘 퍼펙트 하는 거 아냐?”
“퍼펙트?”
“그래! 오늘 차지혁 컨디션 작살나잖아? 이런 날 퍼펙트 게임 달성하는 거지!”
“그래도 그렇지, 퍼펙트가 쉽게 나오겠어?”
“너 차지혁 모르냐? 데뷔전도 그렇고, 5월 25일 완봉승에서도 피안타 딱 하나만 맞았었잖아. 저번 경기에서도 8이닝까지 던졌지만 역시 피안타는 하나 밖에 없었고!”
“하긴, 차지혁은 매 경기마다 퍼펙트를 기대하게 만들긴 하지.”
“내 말이 그 말이야! 오늘 3이닝 동안 직구만 던졌잖아? 4회부터 커브 섞어주고, 컷 패스트볼까지 던지면 퍼펙트가 나올 수도 있지!”
벌써부터 퍼펙트 게임을 말하는 관중들의 목소리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야구는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아무리 구위가 뛰어나도 운이 나쁘면 안타를 맞기도 하고, 수비수 실책도 생기기 마련이다.
더욱이 고작 3회가 끝났을 뿐이다.
아직까지 6이닝을 더 던져야 하는 나에게 퍼펙트 게임은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따- 악!
-우와아아아아아아!
볼 것도 없이 타구가 총알처럼 좌측 담장을 넘어가버렸다.
“결국은 하나 날려버리네!”
메이슨 발레타가 환하게 웃으며 베이스를 돌았다.
앞서 2안타를 맞은 프레디 에르난데스는 졌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애꿎은 로진백만 주물러대고 있었다.
3타수 3안타, 1홈런.
완벽하게 메이슨 발레타가 프레디 에르난데스를 짓눌러버린 경기다.
스코어는 2:0.
6회 1사 상황에서 2실점은 선발 투수로서 결코 부끄러운 성적이 아니다.
아쉽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잘 던진 경기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프레디 에르난데스는 패전 투수의 위기에 몰려 있었다.
창원 타이탄스의 투수 코치가 마운드에 올랐고, 프레디 에르난데스와 짧은 대화를 하고는 다시 내려갔다.
에이스의 자존심을 생각해서라도 7회까지는 맡겨 둘 생각인 거다.
더욱이 다음 타석은 2타석 연속 삼진을 당한 장태훈 선배였다.
야구는 기세가 올랐을 때, 정신없이 상대를 몰아쳐야 한다.
프레디 에르난데스는 메이슨 발레타에게 오늘 하루 정신없이 얻어맞았고, 홈런까지 줬다.
살짝 흥분해 있을 거라는 걸 생각하고 신중하게 타격에 임하면 얼마든지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
만약, 장태훈 선배가 국내 최고의 타자라고 모두가 인정할 때의 기량이었다면 분명 연타석 홈런도 기대해 볼만했을 거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부웅!
“스윙! 타자 아웃!”
바운드가 될 정도의 볼에 꼴사납게 스윙을 하며 3연타석 삼진을 당한 장태훈 선배였다.
“으아아아아악!”
고함을 내지르며 장태훈 선배가 들고 있던 배트로 홈플레이트를 내려쳤다.
배트가 부러지면서 하필이면 파편 조각 하나가 창원 타이탄스의 포수 유현민의 마스크 안으로 들어갔고, 비명과 함께 포수 마스크 사이로 핏물이 흘러내렸다.
갑작스런 상황에 모두가 놀라며 경기가 중단됐다.
창원 타이탄스의 몇몇 선수들이 장태훈 선배에게 거칠게 말을 했다.
그 상황에서 무조건 참아야 했을 장태훈 선배는 지지않고 욕설을 했고, 순식간에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지면서 분위기가 험악하게 변해버렸다.
결국, 장태훈 선배는 퇴장을 당해 경기장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눈 아래가 찢어지면서 유현민은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고, 포수가 바뀌고 나서야 경기가 다시 이어졌다.
“태훈이 이 새끼는 왜 진상을 부려서 분위기만 흐려놓고 지랄인지!”
팀 내 가장 고참인 서영준 선배의 말에 더그아웃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타석에 들어선 그랜트 커렌은 초구부터 자신을 향해 공이 날아오자 배트를 집어던지고는 마운드를 향해 달려갔다.
누가 봐도 보복성 투구였다.
또 다시 벤치 클리어링 사태가 벌어졌고, 경기가 중단되고 말았다.
< 『국내편 - 066』(수정)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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