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63화 (63/221)

< 『국내편 - 063』 >

『국내편 - 063』

“그래서? 찍 소리도 못하고 그냥 왔다고?”

“그건 아니고 내 상황을 설명했지.”

“어쨌든 결론은 같잖아? 기다린다며? 그러라고 했다며?”

심장을 옥죄어오는 것 같은 칼날 같은 지아의 눈초리가 부담스러웠다.

“기다리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했어.”

이 점은 확실하게 짚고 넘어 가야 한다.

난 분명 기다리지 말라고 확실하게 말을 했다.

“그래서 대답도 들었고?”

“나중에 내가 준비가 되면 기회만 한 번 달라고 하던데?”

“그래서?”

“난 기다리지 말라고만…….”

퍽!

지아의 작은 주먹이 복부를 가격해왔다.

갑작스런 주먹질이었지만, 아프거나 고통은 딱히 없었다.

“인간아! 그게 기다려도 좋다는 뜻이잖아!”

“난 분명 기다리지 말라고 했다니까.”

“기회를 준다며?”

“준다고는 안 했어.”

“안 준다고 한 것도 아니잖아?”

“난 분명히 기다리지 말라고…….”

“답답한 소리 하고 있네! 아홉 번 거부해도 한 번 허락하면 그 한 번을 전부로 받아들이는 게 여자야! 기다리지 말라고 했으면 기회도 없을 거라고 똑바로 말을 했어야지! 왜 거기서 확실하게 대답을 안 해서 희망을 갖게 만들어! 기다리지는 마라, 하지만 기회는 줄 수도 있다. 너를 기다리게 만드는 건 내 양심상 어쩔 수 없이 거부하지만, 내가 준비가 되었을 때, 다시 나에게 대시를 하는 건 네 마음이니 마음대로 해라! 이렇게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어?”

그게 그렇게 해석이 가능 한 건가? 이해할 수 없었다.

“내일이라도 다시 말할까?”

“미쳤냐! 얼마나 덜 떨어지게 보이고 싶어서? 아니다! 차라리 그렇게 해라. 나 완전 덜떨어진 놈입니다라고 광고하고 다녀라! 혹시 아냐? 저런 덜떨어진 야구 바보를 내가 왜 좋아했을까? 하면서 물러나게 될지도.”

꼭 말을 해도 저렇게까지 해야 할까?

보아하니 30분 정도는 설교를 늘어놓을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괜히 지아에게 말을 한 것 같았다.

차라리 그냥 모르고 넘어가도록 할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지아는 잔소리를 할 거란 내 예상과는 다르게 방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낯선 지아의 모습에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지만, 시끄러운 잔소리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편안하게 휴식을 할 수 있어 나쁘지 않았다.

책장에서 야구 관련 서적을 집어 들었을 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우리 집에서 내 방문을 저렇게 함부로 벌컥 열 수 있는 권한은 오직 지아 한 사람 밖에 없었다.

‘그럼 그렇지.’

지아 성격에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리자 지아가 대뜸 나에게로 책 한 권을 던졌다.

툭.

“뭐야?”

“읽어! 책이라도 읽어서 연애가 어떤 건지, 여자 마음이 어떤지 좀 느껴! 꼭 다 읽어라. 내가 검사한다.”

그 말을 남기고 지아는 방을 나갔다.

손에 들린 책을 바라봤다.

늑대와 여우의 밀당.

뾰족뾰족하게 생긴 남자와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는 눈을 가진 여자의 모습이 그려진 순정 만화였다.

“내가 왜 이걸 읽어야 하지?”

살짝 짜증이 났지만, 지아의 말이 떠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남자가 어떤 남자인 줄 알아? 돈 잘 버는 모태솔로 동정남이야, 그런 남자들은 속이 시커먼 여우같은 년한테 홀랑 넘어가서 치마폭에 휩싸여서 가족도 나몰라라 하다가 결국은 늙어서 버림 받거든! 오빠가 딱 그 짝이야! 제발 야구에만 매달리지 말고 연애도 좀 하고, 달달한 드라마도 좀 보고, 여자가 동물인지 제대로 파악 좀 해!’

옛말에도 있다.

집안에 여자가 잘 못 들어오면 폐가망신을 면하지 못한다고.

물론, 남자도 마찬가지다.

“후우…….”

그렇다고 방에서 혼자 여자들이나 보는 순정만화를 보고 있어야 한다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

《슈퍼 루키 차지혁! 한국 프로 야구 역대 최연소(만18세 7개월 9일) 100K 달성!》

《기록 파괴자 차지혁! 단일 시즌 최소 경기(9경기) 100탈삼진으로 새로운 기록 작성!》

《4월에 이어 5월에도 이달의 선수상을 거머쥔 신인 투수 차지혁!》

《10전 8승 무패! 괴물보다 더 괴물 같은 투수!》

《국내 프로 야구 리그를 초토화 시키고 있는 슈퍼 루키 차지혁!》

《차지혁의 투구를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드는 관중들! 한국 프로 야구의 넘버원 흥행 보증 수표임을 입증하다!》

《차지혁 선발 경기 암표로 얼룩지다!》

《6월 5일 차지혁 선발 등판 경기, 역대 최고 시청률 기록!》

《차지혁 관련 상품 물량 부족으로 대기자만 수천 명!》

《차지혁을 메인 모델로 내세운 국내 스포츠 업체 ‘Woool' 한 달 사이 매출 600%로 폭발적인 성장세 기록!》

《광고 업계, 차지혁과 계약하면 대박이라며 차지혁 모시기에 혈안!》

“자동차 광고요?”

“신형 SUV차량인데…….”

“저 면허도 없습니다.”

“유명 프랜차이즈 피자 업체의 광고로…….”

“저 웬만해서는 피자 잘 먹지 않습니다.”

“이번에 분양 예정인 서울 마포에 위치한 대형 아파트 광고 모델로…….”

“아파트 광고죠? 저보고 차라리 마약광고를 하라고 하세요.”

“라면 광고는…….”

“한국 사람이 밥을 먹어야 힘을 쓰지 않을까요?”

“식품 업체에서 즉석 밥 광고 제안을…….”

“그거 한참 전에 만들어 놓고 먹는 건데 건강에 좋지 않겠죠?”

“건강 식품 광고가 들어왔는데…….”

“허위 과장 광고가 많다면서요?”

“은행에서 광고 모델로…….”

“요즘 은행 이자는 형편없는데, 대출 이자는 엄청나죠?”

“핸드폰 광고는…….”

“2년도 못 쓰는 핸드폰을 굳이 광고할 필요가 있습니까?”

“가구 업체에서…….”

“대부분 값비싼 수입산 가구죠? 이왕이면 국내 업체가 좋을 것 같습니다.”

“스포츠 음료 광고…….”

“음료가 아무리 좋아도 물보다 좋겠어요?”

“생수 CF가 들어왔는데…….”

“물은 끓여 먹는 게 제일 좋지 않나요? 우리 집은 항상 어머니가 보리차나, 옥수수차를 끓여서 먹고 있어서 생수는 영 먹기 불편하던데요. 저번에 대표님도 우리집 물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하셨잖아요? 설마 어머니 기분 좋으라고 빈말 하신 겁니까?”

황병익 대표는 졌다는 듯 더 이상 광고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았다.

광고를 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광고들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욱이 광고를 찍으려면 무조건 7월 휴식월에만 가능한데, 일정을 맞추기도 쉽지 않아 이왕이면 광고는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게 내 개인적인 바람이었다.

광고료의 단가가 엄청나게 올랐다는 말은 들었다.

웬만한 톱스타보다 더 비싼 몸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내가 당장 돈이 필요한 일이 없었다.

부모님도 운동에 방해가 되는 광고라면 굳이 찍을 필요가 있냐는 식으로 말씀을 하셨고,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더군다나 스폰서 계약을 체결한 울로부터 순이익금의 7%를 받기로 되어 있었고, 계약금과 여유자금으로 사들인 주식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었기에 돈에 대한 절실함이나, 간절함도 없었다.

이건 아버지의 철칙이기도 했다.

사람은 생활을 함에 있어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만 돈을 지니고 있으면 된다.

어차피 대부분의 사람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재벌이 될 수 없고, 설령 재벌이 된다 하더라도 그 돈을 다 쓰지도 못하고 지키기에 급급해서 인생을 여유롭게 살지 못한다고 했다.

맞는 소리다.

돈이라는 건 절대적으로 상대적인 부분이다.

스스로 만족을 하지 않는 이상 절대 만족할 수 없는 귀물이기에 나는 아버지로부터 돈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듣고 자랐다.

“대표님.”

황병익 대표가 슬쩍 날 바라봤다.

그 기분을 모르는 건 아니다.

황금알을 낳아줘야 할 오리가 파업을 하고 있으니 오죽 속이 상할까.

그렇지만 황병익 대표가 정말로 날 미워한다거나, 원망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내가 울과 스폰서 계약을 하면서 황병익 대표도 회사 돈과 개인 돈을 상당부분 들여 울의 주식을 사뒀기 때문이다.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는 주식만 팔아도 넉넉히 4배 이상은 이익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모델료를 많이 주는 기업의 광고보다는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광고로 알아봐 주세요.”

“공익 광고를 말하는 겁니까?”

“예.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그런 광고면 더 좋습니다.”

이 역시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향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가졌을 때부터 해외의 불우한 소년을 위해 매달 5만원씩의 후원금을 내고 계셨다.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변변한 교육도 못 받고, 건강을 위협하는 생계 속에서 하루, 하루를 고달프게 살아가는 소년을 위한 일이지만, 그 이면에는 남을 도움으로써 뱃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내가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후원이었다.

낯선 아이의 사진을 보며 흐뭇하게 웃던 부모님의 모습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후원을 받는 아이가 주기적으로 감사의 편지와 사진을 보내올 때마다 부모님을 그 편지와 사진을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셨고, 나와 지아 역시 낯선 땅에서 우리 부모님에게 아버지, 어머니라 부르는 낯선 형과 동생들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해외와 국내를 통틀어 십여 명이 넘는 아이들을 후원하고 계셨고, 나에게도 금액에 연연하지 말고 남을 도우라고 하셔서 매달 상당한 액수의 돈을 기부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내가 후원을 해주기 시작한 사진으로만 본 아이들이 나에게 ‘후원자님’이라며 편지를 써주고 있었다.

낯선 땅에서 얼굴 한 번 대면한 적 없는 아이들이 나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 위해 삐뚤빼뚤 손으로 편지를 써서 보낸 걸 보면 괜히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야구 외엔 아는 것이 없지만, 이 세상은 모든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사는 곳이라는 건 안다.

내가 후원해준 아이들이 자라나서 야구를 보며 팬이 될 수도 있고, 혹은 훌륭한 야구 선수가 될 수도 있다. 또, 그 아이들의 자식들 또한 야구를 보며 자랄 수도 있다. 그렇게 더 많은 사람들이 야구를 좋아해주면, 차지혁이라는 위대했던 투수가 있었다는 것도 널리 알리는 일이니 단순하게 본다면 나를 위한 일이기도 했다.

“…부끄럽네요.”

황병익 대표가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대답했다.

“예?”

“세상을 훨씬 많이 살았음에도 차지혁 선수가 생각하는 것의 반도 따라가질 못하니 부끄럽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야구 외에 아는 게 뭐가 있다고 그러세요. 그리고 칭찬을 하시려면 아버지와 어머니를 칭찬하세요.”

“당연히 아버님과 어머님 두 분은 칭찬 받아 마땅합니다. 이토록 바르게 자식을 키운다는 게 어디 쉬운 줄 아십니까? 우리 아들놈을 생각하면… 에휴!”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깊은 숨을 토해낸 황병익 대표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어쨌든 차지혁 선수의 뜻이 뭔지 잘 알았으니 그쪽으로 광고를 알아보겠습니다. 국내든, 해외든 상관은 없는 겁니까?”

“이왕이면 국내가 좋지만, 딱히 고르진 않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차지혁 선수라면 너도나도 환영할 겁니다.”

“그러면 저야 좋죠.”

황병익 대표는 너무 많은 곳에서 광고 제의를 할까봐 걱정이라며 웃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일에 시간을 투자하는 거라면 최대한 많은 시간을 쓸 용의가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이번 올스타전 선발 투수 부문에서 압도적으로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전체 투표수에서도 2위와의 격차가 2배가량 나고 있습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벌써부터 감독님이 올스타전에 출전을 할 거냐고 묻더군요.”

2020년부터 올스타전 투표 방식이 변경되어 투수는 선발, 중계, 마무리 부문으로 모든 투수를 대상으로 팬 투표를 실시하고 있었다.

투표 순위에 따라 올스타로 선정되어 올스타전 출전이 가능해지지만, 선발 투수들의 경우 아무리 2이닝에서 3이닝을 던진다 하더라도 로테이션에 따라 경기에 지장을 줄 수 있기에 감독들은 이 부분을 신경 써서 로테이션을 새로 짜야만 했다.

만약, 내가 올스타전에 출전을 한다고 하면 올스타전이 열리는 7월 30일 공을 던지기에 페넌트 레이스 후반기가 시작되는 8월 1일에는 선발로 등판을 할 수가 없게 된다.

휴식기를 거쳐 등판하게 되니 8월 4일이 선발 등판일이 되는 셈이다.

문제는 1일이 아닌 4일에 등판을 하게 되면 후반기 전체 일정에서 1경기를 덜 치르게 된다는 점이다.

대전 호크스에서 확실한 승리 카드이자, 흥행 카드인 내가 1경기를 더 뛰느냐, 못 뛰느냐는 감독과 구단 입장에는 꽤 민감한 사안이었다.

“현재 대전 호크스의 성적을 감안한다면 차지혁 선수가 한 경기를 더 선발로 등판하느냐, 못하느냐가 가을 야구로 가느냐, 못 가느냐로 판가름이 날 수도 있으니 그렇겠군요.”

현재 대전 호크스의 성적은 4위다.

눈부신 성장세고, 그 일등 공신은 당연히 나에게 있었다.

성적만 놓고 본다면 현재 나는 8승 투수일 뿐이다.

하지만, 선수단 전체를 이끌어 가는 힘이 있었다.

에이스라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도 훌륭하게 선발로 등판했고, 많은 팬들의 관심이 나를 통해 대전 호크스 전체에게도 이어졌기에 선수단의 사기와 긴장감도 덩달아 높아졌기에 그것이 좋은 경기력으로 이어졌다.

결정적으로 현재 프로 야구 순위가 워낙 팽팽했기에 만약, 후반기 막판에도 지금처럼 팽팽하게 순위를 유지한다면 확실한 1승 카드를 쥐고 있으냐, 없느냐는 분명 큰 변수로 작용할 확률이 컸다.

“그래도 우선 올스타전은 출전해야죠.”

팬들이 직접 뽑아주는 영광스러운 명예다.

그런 명예를 그냥 넘길 순 없었다.

< 『국내편 - 063』 > 끝

ⓒ 독고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