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편 - 062』 >
『국내편 - 062』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카메라 플래쉬가 쉬지 않고 터졌다.
경기장 한 쪽에 임시로 마련한 인터뷰 장소에는 많은 기자들과 관계자들이 모여 있었다.
더불어 경기가 끝났음에도 경기장을 빠져나가지 않은 많은 관중들까지 모든 시선을 내게로 향하고 있었다.
-우선, 국내 프로 야구의 새로운 기록을 달성하신 점에 대해서 대단히 축하드립니다.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기자의 말에 나는 곧바로 마이크를 들고 기자들이 아닌 관중들을 향해 말했다.
“항상 응원을 해주시는 모든 야구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응원해주시고, 격려해주시는 팬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모자를 벗고 정중하게 팬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여기저기서 박수소리와 함께 함성이 나왔다.
내 이름을 크게 연호하는 이들도 있었고, 휘파람을 불며 축하한다거나, 고생했다는 말을 해주는 관중들도 있었다.
“신인 후배 투수의 기록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묵묵히 제 등 뒤를 지켜준 대전 호크스 선배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의 기록은 제가 아닌 대전 호크스 전체의 기록입니다. 선배님들, 그리고 감독님과 코치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어서 더그아웃에 모여서 인터뷰 과정을 지켜보는 대전 호크스 선수들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관중들이 대전 호크스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관중들의 외침이 잦아들 때를 기다렸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에 처음 발을 디딘 신인 투수로서 최다 이닝 무실점 기록을 세웠다는 점에 있어서는 굉장히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모습을 꾸준히 보여줄 수 있는 선수가 될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하겠습니다.”
대단한 기록을 세운 소감치고는 너무 밋밋했기 때문인지 몇몇 기자들의 표정에는 실망감이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마이크를 사회자에게 넘겼고, 사회자는 다시 한 기자의 질문을 받았다.
-아쉽게도 메이저리그 최고 기록을 코앞에 두고 실점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회자가 건네주는 마이크를 받아들고 대답했다.
“크게 실망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제 프로에 데뷔를 한 신인 투수입니다. 지금까지 마운드에 선 날보다 앞으로 서야 할 날이 훨씬 더 많이 남아 있습니다. 기록에 연연하지 않고 열심히 공을 던지다보면 언제고 메이저리그 기록을 넘어서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차지혁 선수는 역대 그 어떤 신인 투수보다도 충격적인 데뷔전과 동시에 57.1이닝 연속 무실점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습니다. 더불어 오늘 경기까지 총 81개의 탈삼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앞으로 2경기 안에 역대 최연소 100탈삼진 기록과, 최소 게임 100탈삼진 기록을 동시에 달성하게 됩니다. 기록을 의식하고 계셨습니까?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전 기록에 연연해서 공을 던지진 않습니다. 또, 그럴 정도로 여유를 부릴만한 투수가 아닙니다. 매 경기마다 어떤 타자를 상대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공을 던질 뿐입니다. 기록이라는 건 결국 누군가에 의해 깨지기 위해 기록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세운 기록도 결국은 다른 투수가 깰 수 있다 생각합니다. 저는 항상 꾸준하게 팀을 위해, 그리고 야구팬들께 즐거운 경기를 보여드리려고 마운드에 오르는 투수로 기억되고 싶을 뿐입니다.”
-올 시즌 강력한 신인왕 후보이자, MVP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습니다. 신인왕과 MVP를 동시에 수상하는 선수로는 2006년 유혁선 선수 이후 두 번째입니다. 어떠십니까? 신인왕과 MVP를 동시에 수상할 자신이 있으십니까?
“너무 이른 예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경기는 굉장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 6승 무패의 기록으로 압도적인 1위로 다승왕을 달리고 있습니다. 더불어 평균자책점도 오늘 경기의 실점을 포함한다 하더라도 0.155로 다른 투수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탈삼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트리플 크라운에 대한 욕심은 없으십니까?
“타이틀에 대한 욕심보다는 로테이션에 맞춰 꾸준히 선발로 등판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타이틀에 대한 질문은 노코멘트하겠습니다. 아직 리그 초반입니다. 벌써부터 타이틀을 언급하는 것은 경솔하다 생각할 뿐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꾸준하게 선발로 등판하며 매 경기마다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기자들과의 인터뷰는 확실히 즐겁지 않았다.
-내년부터 메이저리그로 갈 거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속 시원하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내년의 일을 지금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고 계시다시피 메이저리그의 많은 구단에서 이적에 대한 협상을 에이전시로 제안해 오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시즌 중이고, 올 시즌을 어떻게 마치느냐에 따라 결과가 바뀔 수 있을 정도로 미래의 일은 제가 예측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지금 전 대전 호크스의 투수이고, 올 시즌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는 오직 대전 호크스만을 위해 마운드에서 공을 던진다는 사실입니다.”
-대전 호크스의 모기업에서 차지혁 선수의 바이아웃 금액을 상향 조정 할 거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저는 모르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적에 대한 질문도 더 이상 받지 않겠습니다. 저는 협상가가 아니라 야구 선수입니다. 협상은 에이전시에서 담당하는 일입니다.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에이전시로 직접 연락하시길 바랍니다.”
불쾌했다.
이적이라는 문제는 굉장히 민감했기에 섣부르게 꺼내선 안 되는 부분이었다.
더욱이 시즌 말도 아니고, 초기부터 이적 문제를 대놓고 꺼내는 기자와는 두 번 다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김하연 아나운서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어떤 정신 나간 기자의 질문에 나는 구단 관계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더 이상 인터뷰를 진행해야 할 의무감도,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최다 이닝 무실점 기록에 대한 축하 인사와 소감을 모두 말했으니 오늘 이 자리에 선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 셈이다.
내 신호를 받은 구단 관계자가 눈치껏 움직여줘서 인터뷰를 끝낼 수 있었다.
더그아웃으로 향하는 나를 향해 질서를 지키던 기자들이 중구난방으로 질문을 퍼부었지만,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피곤하지? 원래 기자들이 저래. 그래도 기자들하고 사이가 나쁘면 피곤해지니까 적당하게 지내는 척이라도 보여. 아니면, 확실하게 우군이 될 수 있는 기자를 만들거나.”
정현우 선배가 히죽 웃으며 그렇게 조언해줬다.
선수들 가운데 기자를 좋아하는 이들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자들이 싫다하더라도 베테랑 선수들은 친밀하게 지내는 기자가 한, 두 명 정도는 꼭 있었다.
‘우군이 될 수 있는 기자라면.’
한 명 있다.
차동호 기자다.
혹시나 싶어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차동호 기자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한국 신기록 세운 것 축하합니다.
앞으로도 꾸준한 모습 기대하겠습니다.
언제 시간 되면, 간단하게나마 인터뷰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차동호 기자라면 날 곤란하게 만들 질문이나, 예민한 부분을 건드릴 사람이 아니었기에 시간되면 연락을 하겠다는 답장을 보내주고는 샤워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고 짐을 챙겨 나오자 뜻밖의 사람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축하해요.”
강하영이었다.
프론트 직원이라 얼굴을 마주하는 날은 많았지만, 서로 특별한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고, 더욱이 나에게 대시를 했던 여자였던만큼 단 둘이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내겐 껄끄럽기만 했다.
“감사합니다.”
간단하게 인사만하고 지나치려고 하자, 강하영이 앞을 막아섰다.
“내가 그렇게 싫은 가요?”
“예?”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항상 밝게만 보이던 얼굴이 슬픈 표정을 하고 있으니 어울리지도 않았고, 무엇보다도 괜히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내가 왜 싫은지 말해줄 수 있어요?”
싫은 이유?
딱히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냥 지금 여자를 사귄다는 것 자체를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선수 생활을 하려면 지금만큼 중요한 시기도 없었다.
더군다나 하이에나처럼 날 노리는 기자들에게 괜한 먹잇감을 던져주고 싶지도 않았다.
외롭지 않냐는 지아나, 장형수의 말에 여전히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언제고 나도 좋은 여자를 만나 부모님처럼 행복한 가정을 꾸려야겠지만, 그 시기가 지금은 아니었다.
“준비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길게 설명할 필요 없다 여겨 그렇게 대답했다.
똑똑한 여자라면 알아들을 거고, 그렇지 않다면 엉뚱한 소리로 날 귀찮게 하겠지.
강하영이라면 당연히 전자일 거라 여겼다.
“그럼 차지혁 선수가 준비가 될 동안 기다려도 되요?”
이건 생각해보지 못한 대답이다.
그러냐며 순순히 물러날 거라 여겼던 내가 너무 바보 같았나?
“그건…….”
“기다릴게요. 나 기다릴 수 있어요.”
강하영은 내 대답보단 자신의 결심만 말했다.
“기다릴 테니까 기회만 줘요. 내가 차지혁 선수의 곁에 남을 수 있는 여자인지 그걸 확인할 수 있는 기회만 줘요. 내 부탁… 들어 줄 건가요?”
지아야, 이럴 때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거야?
지금 난 그 누구보다도 지아가 간절하게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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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네.”
에바는 차지혁 선수가 57.1이닝으로 최다 이닝 무실점 기록을 마쳤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정말 좋은 투수고, 멋진 투수였기에 에바도 어느 순간부터 차지혁의 경기를 꼬박꼬박 챙겨보고 있었다.
오늘도 차지혁은 다른 때와 다르지 않은 강력한 구속과 구위를 주무기로 상대 타자들을 압도했다.
5회까지 퍼펙트한 경기를 진행시키며 TV를 지켜보는 내내 가슴 떨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6회부터 분위기가 살짝 변했다.
상대팀 타자들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자 투구수가 서서히 늘어났고, 결국 8회에 실점을 하고 말았다.
“실투만 아니었어도 2루타를 맞진 않았을 텐데.”
타점을 허용했던 좌측 펜스를 직격하는 2루타는 명백한 실투였다.
투수라면 절대 피해갈 수 없는 실투.
컷 패스트볼이 밋밋하게 들어가면서 한 가운데로 몰린 공을 타자가 작정하고 때렸던 거다.
오히려 차지혁 입장에서는 투런 홈런을 맞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었다.
그렇게 실점을 한 차지혁은 8회까지 마운드를 지켰고, 9회에는 다른 투수에게 마운드를 물려주며 시즌 6승을 챙길 수 있었다.
차지혁의 인터뷰를 지켜보던 에바는 핸드폰 벨이 울리자 액정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에바! 방금 차지혁 선수 경기 봤어?
“응. 아쉽더라.”
-진짜 아쉬워. 하필이면 거기서 2루타를 맞을 줄 누가 알았겠어? 상대팀 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타자가 너무 미운 거 있지?
“혜영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거야.”
-그렇겠지. 그런데 한 편으로는 잘 됐을지도 몰라. 솔직히 표현은 안했어도 차지혁 선수 본인 스스로 얼마나 부담이 심했겠어? 나라면 아마 제대로 공도 던지지 못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정말 대단한 선수인 건 맞나봐. 에바도 그렇게 생각하지?
“물론이지. 차지혁처럼 잘 던지는 투수는 메이저리그에도 그렇게 흔하질 않아. 정말 좋은 투수야. 그런데 이런 말 하려고 전화 한 거야?”
-아! 내가 너무 흥분했나봐. 다른 게 아니라, 에바 너희 학교 교환 학생 프로그램 좀 알아봐 줄 수 있어?
“교환 학생?”
-응. 가능하면 나도 내년 즘에 교환 학생으로 가볼까 싶어서. 유학을 가면 좋은데, 아빠가 혼자 유학 가는 건 절대 안 된다고 해서… 에바처럼 2년 정도 교환 학생 프로그램이 있으면 딱 좋을 것 같아.
“알아 볼 수 있어. 그런데 왜 갑자기 미국으로 가겠다는 거야?”
-응? 에바를 보니까 나도 괜히 다른 나라에서 공부하는 것도 좋을 것 같고…….
“그리고?”
-그리고 뭐…….
우물쭈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정혜영의 음성에 에바는 마침 TV에서 차지혁 선수의 메이저리그 이적 관련 인터뷰를 확인하고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설마 차지혁 선수가 메이저리그로 이적할지도 모르니까 따라가려는 건 아니겠지?”
-무, 무슨 소리야! 그리고 차지혁 선수랑 나랑 무슨 사이라고 내가 미국까지 따라가겠어? 에바도 참! 어쨌든 교환 학생 프로그램 좀 잘 알아봐줘. 대신 내가 맛있는 밥 사줄게!
서둘러 통화를 끊어버리는 정혜영으로 인해 에바는 자신의 예감이 왠지 맞을 것 같았다.
“혜영이 이렇게 무모했었나?”
에바는 정혜영이 참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그녀의 말처럼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데 미국까지 따라가서 뭘 하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공부를 하겠다는 목적이 있지만 말이다.
정혜영의 인생이니 그녀가 알아서 잘 선택하겠지라고 생각하며 에바는 TV를 끄려다 차지혁이 내년부터 메이저리그에서 뛸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이왕이면 자신이 응원하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뛰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다.
“정말 멋진 일이 될 텐데.”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유니폼을 입고 공을 던지는 차지혁을 상상하니 에바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 『국내편 - 062』 > 끝
ⓒ 독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