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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마일-60화 (60/221)

< 『국내편 - 060』 >

『국내편 - 060』

“연락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차지혁 선수.”

35살이라고 했던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과 함께 악수를 해오는 성대준 대표였다.

작은 키에 왜소한 체격이었지만, 어깨를 당당하게 펴고 있는 모습이 꽤 인상적으로 보였다.

스폰서 제의를 해온 울이라는 업체의 대표와의 만남은 생각보다 편안하게 이뤄졌다.

“우선 저희 울에서 차지혁 선수에게 제시한 계약 내용입니다.”

성대준 대표가 건네는 서류를 황병익 대표는 곧장 나에게 건네줬다.

계약 기간은 10년이었고, 계약금 또한 1억으로 달라진 내용이 없었다.

추가 사항으로 적혀 있었던 수익금 0.3%의 분배도 여전했다.

애초부터 계약 내용에 이끌렸던 것이 아니라 대충 훑어보고는 성대준 대표에게 물었다.

“제가 대표님과 만나보려고 했던 건 어디까지나 국내 브랜드라는 점 때문입니다. 유명 업체들이야 어차피 제가 아닌 다른 유명한 스포츠 스타들이 광고를 해주니 저까지 그 틈바구니에 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계약 조건이야 저보다는 이쪽에 계신 YJ에이전시 대표님과 하셔야 할 겁니다. 제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저에게 협찬을 해주실 품목들 특히, 글러브, 야구화, 의류를 과연 신생 업체인 울에서 얼마나 만족스러운 품질로 보장을 해주실 수 있느냐입니다. 오늘 이 부분에 대해서 확실하게 답변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내 말에 성대준 대표는 테이블 위에 가방 하나를 올려놨다. 그렇지 않아도 들어오면서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야구 가방이 꽤 궁금증을 유발하고 있었다.

“저희 울에서 시제품으로 만든 야구 물품입니다. 가방을 시작해 속에 담겨져 있는 모든 제품들이 저희가 직접 생산한 것들입니다. 제가 아무리 떠들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선 차지혁 선수가 직접 확인해보십시오.”

확인해보라는 말에 곧바로 가방부터 살펴봤다.

야구화와 글러브, 배팅 장갑과 수비 장갑, 야구양말부터 시작해 스포츠 언더웨어와 츄리닝에 일반 의류와 런닝화까지 제법 많은 품목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글러브였다.

글러브는 전문적으로 글러브만 취급하는 업체가 아니라면 좋은 제품을 찾기가 힘들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희 울에서 만든 글러브는 최고급 송아지 가죽만을 사용해서 제작을 했습니다. 때문에 단가가 비싸다는 것이 단점이지만, 어차피 저희가 주력으로 판매할 제품이 아니고 철저하게 주문 제작으로만 취급할 품목입니다.”

“굉장히 좋습니다.”

진심으로 글러브의 품질이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우선 가벼웠다.

무거운 글러브를 좋아하지 않는 내 취향을 알고 만든 것인지, 원래 가벼운 글러브를 만들겠다고 생각한 것인지 몰라도 무게만큼은 확실히 합격점을 주기에 충분했다.

가죽도 말처럼 최고급 송아지 가죽을 사용한 듯 보였고, 내피도 두툼해서 공을 잡았을 때의 충격 흡수력이 좋아 보였다. 더불어 제대로 길을 들이기 이전임에도 글러브가 쫀쫀하다 느껴졌으니 제대로 길을 들이면 상당히 손에 착 감길 것 같았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글러브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어 보였다.

두 번째로 확인한 품목은 당연히 야구화였다.

일명 쇠징이라 부르는 스파이크는 오래 신고 있을수록 발에 피로감이 쌓이면서 몸 전체에 무리를 주기에 상당히 중요했다.

실질적으로 글러브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선수들도 꽤 많았다.

발 사이즈도 이미 알아놨는지 신어보니 발에 딱 맞았다.

역시 스파이크도 상당한 품질을 자랑하듯 마음에 들었다.

“글러브와 마찬가지로 야구화도 주문 제작 품목으로만 생산할 예정입니다.”

단가가 비싸다는 뜻이다.

어차피 내 입장에서는 관계없는 일이라, 그러려니 넘겼다.

“스폰서 계약을 하시면 그 즉시 차지혁 선수에게 딱 맞는 글러브와 야구화를 제작할 예정입니다. 지금 제품들은 어디까지나 시제품일 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글러브와 야구화를 만들어 드리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말투의 성대준 대표였다.

자신들의 제품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듯 보였다.

실제로도 자부심을 가질 만한 제품이기도 했다.

이후로도 살펴본 제품들이 모두 상당한 품질을 자랑하고 있었다.

다른 유명 업체들이 이 정도의 품질을 만들지 못할까?

아니다. 어디든 만들고자 하면 충분히 만들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다만, 단가가 비싸기에 특정 품목으로 일부 제품만 만드는 거다.

“저희 울은 타사 제품보다 값싸면서도 고급스러운 제품 이미지로 시장에 나왔습니다. 실제로도 구매자들의 만족도가 상당히 높다는 조사도 있었습니다.”

성대준 대표는 하나의 서류를 내 앞에 내밀었고, 난 그걸 대충 훑어보고 말았다.

어차피 내가 본다고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내가 확인하고 싶은 건 어디까지나 울이라는 대표의 사람이 누구인지, 나에게 제공해줄 야구 관련 제품들의 품질이 얼마나 좋은지를 확인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슬쩍 황병익 대표를 바라보자 줄곧 침묵하고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울의 입장은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울의 제품은 시장에서 1%도 제대로 팔리지 않는 신생 업체로 인지도도 없고, 이미지도 없는 업체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아직까지 홍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품질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패션의류 업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이미지 파워입니다. 품질은 그 다음입니다. 설마 이런 것도 모르시고 이쪽 시장에 뛰어드신 겁니까?”

“알고 있습니다.”

살짝 위축된 성대준 대표에게 황병익 대표는 여전히 냉정한 시선으로 말했다.

“울의 이미지를 쌓기 위해, 기업 홍보를 위해 저희 차지혁 선수와 스폰서 계약을 하시려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렇다면 울에서 제의한 이런 계약 조건은 터무니없는 내용이라는 걸 아시리라 믿겠습니다.”

쫘악! 쫘악! 쫘악!

황병익 대표는 계약 내용의 서류를 거침없이 찢어버렸다.

나도 놀랐고, 성대준 대표도 놀랐다.

놀란 성대준 대표가 발끈해서 붉어진 얼굴로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할 때, 황병익 대표가 먼저 말을 이었다.

“차지혁 선수에게 스폰서 제의를 해온 업체는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습니다. 소위 업계 1, 2위를 다투는 세계적인 기업들도 차지혁 선수에게 스폰서 제의를 했고, 계약 기간 3~4년에 계약금만 수십억을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차지혁 선수 본인의 뜻에 따라 이 자리가 성사된 것입니다. 솔직한 제 입장을 말한다면 울이라는 업체와 이런 자리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라 여깁니다. 자, 이제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보죠. 울에서 차지혁 선수에게 해주실 수 있는 최선이 무엇입니까?”

“모쪼록 좋은 결과가 있길 바라겠습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논의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대준 대표는 황병익 대표와 악수를 하고는 나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팬으로서도 항상 차지혁 선수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최다 이닝 무실점 신기록을 세우신 것 축하드립니다. 연승 기록을 이어나가지 못해서 아쉽습니다만, 무패 기록만큼은 꼭 달성하길 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마치고 성대준 대표가 떠나자 황병익 대표가 날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계약을 하겠습니까?”

“대표님 생각은 어떠세요?”

“우선 울이라는 업체의 기술력은 상당히 좋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시장에서도 구매자들의 만족도가 높은 건 사실입니다. 또한, 아직까지는 회사 지분의 90%이상이 성대준 대표에게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홍보와 마케팅만 제대로 이뤄지면 충분히 국내에서는 인지도를 쌓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아까는 그렇게까지 궁지로 몰아붙이셨죠?”

“사실이기도 하고, 이쪽 패션의류 업계에서는 홍보와 마케팅이 가장 중요한 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장 중요한 부분을 앞으로 차지혁 선수가 모두 담당해야 하는데, 이 정도면 아무리 스폰서 제의라고 하더라도 확실하게 누가 우위에 있는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성대준 대표의 상황이 그렇게까지 좋은 것도 아닙니다. 이대로 변변한 홍보나 마케팅이 이뤄지지 않으면 1년도 제대로 버티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성대준 대표에게 있어 차지혁 선수는 하늘이 내려준 동아줄과 같은 존재입니다. 사실, 그가 차지혁 선수에게 스폰서 제의를 해놓고도 그것이 성사될 거라 믿었을 확률은 1%나 될까요? 아마 로또를 맞은 심정일 겁니다.”

“정말 그렇게까지 생각하겠습니까?”

황병익 대표가 피식 웃었다.

“차지혁 선수는 본인 스스로의 가치에 대해서 정말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관심을 받고 있는 스포츠 스타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차지혁 선수입니다. 스포츠계뿐만 아니라 웬만한 스타 연예인이라 하더라도 차지혁 선수보다 인지도나 관심이 적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더 차지혁 선수는 유명한 선수가 될 예정이죠. 본인 스스로가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 대중들의 관심을 많이 받고 있는지 자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명인이 걸치고 있는 옷, 신발, 악세사리가 괜히 불티나가 팔리는 게 아닙니다. 차지혁 선수가 울과 계약을 하고 그들의 제품을 입고 다니기 시작하면 울로서는 수십 억을 들여 TV광고를 한 것보다도 몇 배는 더 큰 효과를 얻게 됩니다. 앞으로는 그런 계산을 해야 합니다.”

야구 밖에 모르고 살았다.

앞으로도 야구만을 보고 살고 싶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어떤 야구 선수였는지가 중요했다.

세계 최고의 야구 선수로 기억되고 싶을 뿐이다.

“전 모르겠습니다. 그냥 지금처럼 야구만 하면서 살 생각입니다. 그 외적인 부분들은 대표님이 저를 대신해서 계산해주셨으면 합니다.”

내 말에 황병익 대표가 가만히 날 바라봤다.

“지금 제게 무슨 말을 한 건지 알고 있습니까?”

“예. 재계약을 제시한 겁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제가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언제나 항상 대표님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제가 믿을 수 있는 에이전시로 영원히 기억되길 바랄 뿐입니다. 가능하겠습니까?”

황병익 대표가 크게 숨을 토해냈다.

내 말에 감정이 크게 흔들렸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버지도 황병익 대표는 믿을 수 있다며 재계약을 하는 게 어떻냐고 말한 적이 있었다. 다만, 미리 말을 할 필요는 없으니 계약 기간이 끝나갈 시점에 말을 하라고 했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니 조심하라는 뜻이었다.

오늘을 통해 알았다.

내 단순한 치기심에서 시작된 울이라는 업체와의 만남을 황병익 대표는 아주 꼼꼼하게 준비하고 치밀하게 협상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대놓고 말하며 내 이익을 위해서 협상을 벌였다.

황병익 대표가 성대준 대표에게 언급했던 스톡옵션(stock option)이나, 그 외의 경제 용어들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것이 모두 날 위한 이익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이만하면 믿을 만하지 않을까?

지금까지도 나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날 위해 투자를 한 황병익 대표였다.

국내 최고라 불러도 손색없는 최상호 코치를 담당 코치로 붙여줬고, 실력 좋은 영어 과외 선생님과 알게 모르게 나와 가족들의 편의까지 신경을 써준 사람이다.

더불어 내가 해외가 아닌 국내로 진출함으로써 황병익 대표는 엄청난 수익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평불만 한 번 하지 않았고, 날 대함에 있어 소홀함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더 이상 뭘 더 바랄까?

“제가 에이전시 일을 시작하면서 가졌던 뜻이 하나 있습니다.”

황병익 대표가 한참 만에 말을 꺼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가만히 기다렸다.

“선수를 사람으로 대하자. 선수를 돈으로 대하면 내 판단이 흐트러진다. 선수에게 진심을 다해서 그를 위해 서포트(support)를 하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다행입니다. 아직까지 그 뜻을 이어나갈 수 있어서 말입니다. 만약, 제가 초심을 잃었더라면 차지혁 선수의 마음을 얻었겠습니까? 재계약은 계약 기간이 끝날 시점에 다시 논의를 하겠습니다.”

“예?”

“저도 사람입니다. 그래서 전 제가 변할 것을 두려워합니다. 재계약을 한다 하더라도 2년 단위로 할 생각입니다. 제가 변하지만 않는다면 2년이라는 기간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의미 없다.

황병익 대표가 지금처럼만 해준다면 굳이 내가 다른 에이전시와 계약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계약 기간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대표님의 뜻 잘 알겠습니다. 그럼 2년 마다 저녁 한 끼는 항상 대표님과 마주 앉아서 먹어야겠군요.”

“하하하하! 2년에 한 번씩 제가 가장 근사한 저녁을 대접하겠습니다!”

< 『국내편 - 060』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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