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편 - 059』 >
『국내편 - 059』
5월 8일 금요일 대전 한밭 야구장.
“사람이 엄청나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정혜영의 말에 에바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 수업만 마치고 곧바로 KTX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온 에바와 정혜영이었다.
오후 3시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한밭 야구장 주변에 몰려 있었다.
경기 시작까지는 아직 2시간이나 남아 있었지만, 벌써부터 열기는 대단했다.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정말 특별한 날이었다.
“아빠!”
정혜영은 약속 장소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50대 중반의 남자를 향해 달려갔다.
“정말 오후 수업은 없는 거지?”
“내가 설마 아빠한테 거짓말까지 하고 야구장에 찾아왔을까봐?”
“그렇지. 내 딸이 그럴 리가 없지. 흠흠!”
정영석은 혜영이 어떤 딸인지 잘 안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에바, 인사드려. 우리 아빠야.”
“안녕하세요.”
“그래요. 반가워요. 한국말을 할 줄 아는 모양이네?”
정영석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서양 미녀가 한국어로 인사를 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인사만 할 줄 알아.”
정혜영이 대신 말을 해주었고, 그러냐며 정영석은 어쨌든 대전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말을 하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미모와 지성까지 갖추고 있는 딸, 혜영과 눈이 저절로 돌아가는 외국 미녀 에바가 뒤를 따라오자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정영석이었다.
정영석은 곧바로 야구장 입구로 향했고, 안내원에게 3장의 티켓을 보여줬다.
남자 안내원은 눈부신 금발 미녀인 에바의 모습에 넋을 잃었다가 이윽고 정혜영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지혁 선수와 스캔들이…….”
“지금 뭐라고 했나?”
낮은 음성으로 사납게 눈을 치켜뜨고 자신을 노려보는 정영석의 모습에 남자 안내원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정영석은 못 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는 야구장으로 들어섰다.
“망할 놈들!”
야구장으로 들어서는 정영석이 화가 난 음성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정혜영은 자신의 아빠가 왜 그러는지 알기에 그저 미안해 할 뿐이었다.
자신이 돌발 행동만 하지 않았어도 벌어지지 않았을 일들이었기에 모든 잘못이 자신에게 있는 것만 같았다.
기분이 상한 정영석이 딸과 그 친구인 에바를 데리고 간 곳은 중앙 탁자석 중에서도 그 위치가 정 가운데였다.
“아빠! 여기 표 어떻게 구했어? 여긴 돈 있어도 진짜 구하기 힘들다고 하던데?”
정혜영의 놀란 표정에 정영석이 목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김 사장 조카가 대전 호크스 프론트 직원이라 어렵게 구했다.”
실제로 정영석은 딸과 그 친구가 대전까지 야구를 보기 위해 온다는 말에 온갖 인맥을 모조리 동원해서 어렵사리 구한 티켓이었다.
특히, 오늘과 같은 날에는 정상가격의 몇 배의 웃돈을 준다 하더라도 구하기 쉽지 않았기에 정영석은 놀라워하는 딸에게 어깨에 힘을 팍팍 줄 만했다.
“점심은 먹고 온 거냐?”
“서울역에서 간단하게 먹었어. 그리고 아직 경기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먹기는 그렇잖아? 이따가 경기 시작하면 그때 치맥이나 먹죠 뭐.”
“치맥?”
정영석은 다 큰 딸, 더욱이 남자라면 누구나 훔쳐볼 정도로 예쁘고 똑똑한 딸이 술을 먹는다고 하니 기분이 썩 즐겁지만은 않았다.
그렇다고 어엿한 성인이 된 딸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면 괜히 간섭한다며 자신을 피할까 제대로 말도 못하고 끙끙거렸다.
정혜영과 에바는 이른 시간부터 야구장을 찾아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관중들의 모습에 오늘 경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4이닝까지만 막으면 기록이라고 했지?”
에바의 물음에 정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4회 초 공격까지만 막으면 선발 투수로는 46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을 달성하게 되고, 8회 초 공격까지 막으면 국내 최다 이닝인 50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이야. 정말 엄청난 기록이지!”
정혜영은 자신이 기록을 달성하는 선수마냥 흥분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반면, 에바는 딱히 큰 감정이 없었다.
신인 투수가 데뷔와 동시에 46이닝, 50이닝을 연속으로 무실점 한다는 것이 분명 대단하고 놀랍기는 했다.
그러나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59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이 존재했기에 그 놀람 정도가 약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메이저리그에다 자국 선수도 아니다보니 더욱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혜영뿐만 아니라 야구장을 찾은 관중들 대다수가 오늘의 기록을 기대하고 있었으니 괜히 메이저리그와 비교를 할 필요가 없다 여겨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빠! 오늘 차지혁 선수가 기록을 달성 할 것 같아?”
“물론이지! 오늘 자치혁은 9회까지 완봉승을 거둘 거다!”
확신, 믿음이 가득한 정영석의 대답에 정혜영이 기분 좋게 웃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지난 경기에서 1회부터 흔들렸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인지 괜히 신경이 쓰였다.
더군다나 그 이유가 자신 때문인 것 같아 더욱 마음이 불편해지는 정혜영이었다.
‘차지혁 선수! 반드시 기록을 달성하길 바랄게요!’
두 손을 꼭 모아 기도하는 정혜영의 모습에 에바는 피식 웃고 말았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마운드에는 언제나처럼 담담한 표정의 차지혁이 서 있었다.
고졸 신인 투수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의 아우라가 느껴지는 거대한 기세는 대전 호크스 팬들에게 있어 황홀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반대로, 상대팀 원정 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주눅이 들어야만 했다.
차지혁은 초구부터 불같은 강속구를 던졌다.
156Km의 강력한 포심 패스트볼에 대전 한밭 야구장을 찾은 팬들이 박수를 치고, 휘파람을 불고, 소리를 질러대며 열광했다.
두 번째 공은 명품이라 불리고 있는 차지혁표 파워 커브로 타자는 두 눈을 멀뚱히 뜨고 스트라이크를 내주고 말았다.
세 번째 공은 다시 한 번 포심 패스트볼을 던졌는데, 타자를 유인해 내기에 딱 좋은 높이의 볼로 헛스윙을 이끌어내며 첫 번째 타자부터 3구삼진이라는 인상적인 피칭을 보여줬다.
“그것 참! 시원시원하단 말이야! 으하하하!”
정영석은 손에 들린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키며 기분 좋게 웃었다.
차지혁의 투구를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타자의 배트를 어떻게든 유인하기 위해 볼질을 하지 않는 투수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차지혁은 모든 야구팬들이 좋아할만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불같은 강속구를 던져대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선수였다.
대다수의 야구팬들은 투수의 정교한 제구력이나 화려한 변화구보다는 거침없는 강속구를 좋아한다.
그게 투수의 가장 큰 매력이고, 장점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물론, 정교한 제구력과 화려한 변화구도 좋다.
하지만, 그 둘 보다는 강속구가 우위에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안타를 많이 치는 타자보다 홈런을 시원시원하게 날려대는 타자를 좋아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첫 타자부터 산뜻하게 3구삼진으로 잡아낸 차지혁은 2번, 3번 타자마저도 내야 뜬공과 삼진으로 잡아내며 1회 초를 깔끔하게 막아냈다.
이걸로 43이닝 무실점 행진이 이어졌다.
1회 초임에도 불구하고 마운드를 내려오는 차지혁을 향해 기립 박수를 쳐주었다.
차지혁의 시원시원한 투구와 다르게 대전 호크스의 타선은 욕이 나올 정도로 한심했다.
“에라이! 멍청한 놈! 그 따위로 방망이질을 할 거면 당장 야구 때려쳐!”
야구를 볼 때면 누구보다 다혈질로 변하는 정영석의 모습에 정혜영은 조심스럽게 에바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에바는 정영석의 모습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가족은 필리스의 광팬이다.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과격하고 폭력적인 팬들이 많은 팀이 바로 필리스다.
오죽하면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뽑은 가장 불쾌한 팬 1위라는 불명예를 얻기도 했다.
에바 스스로 자신은 그렇게까지 과격하다고 여기지 않았지만, 가족들과 함께 야구를 볼 때면 선수를 향해 온갖 욕설과 비난을 하는 가족들의 모습에 정영석의 비난 정도야 귀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대전 호크스의 1회 말 공격이 끝나자 2회 초, 인천 돌핀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차지혁이 마운드에 올라섰다.
홈팬들의 열렬한 응원 속에서 차지혁은 인천 돌핀스의 중심 타선을 상대로 또 다시 삼자범퇴로 막아내며 훌륭하게 자신의 역할을 마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가 버렸다.
“44이닝이다! 으하하하하하!”
정영석은 어느덧 두 잔째 맥주잔을 비우며 웃고 있었다.
정혜영과 에바도 곁에 나란히 앉아서 맥주를 홀짝거리며 치킨을 먹었다.
2회 말에는 2개의 안타가 나왔지만, 모두 단타에다 걸음이 느린 타자들이라 결국 점수를 올리지 못하고 공격이 끝나고 말았다.
3회 초, 다시 마운드에 오른 차지혁은 하나의 안타를 맞기는 했지만, 나머지 타자들을 다시금 불같은 강속구로 잠재워버렸다.
“45이닝 타이 기록이다!”
홈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떠들어대며 소란을 피웠다.
타이기록을 수립했으니 그것만으로도 대전 호크스 팬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행복할만했다.
기쁨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대전 호크스의 공격이 끝나버렸고, 차지혁이 모습을 드러내자 모든 관중들이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지혁! 차지혁! 차지혁! 차지혁!
한 목소리가 되어 차지혁의 이름을 연호했다.
그 속에는 정영석과 정혜영도 섞여 있었다.
에바만이 홀로 얌전하게 앉아 맥주잔과 치킨을 들고 있을 뿐이었다.
“스윙! 타자 아웃!”
주심의 우렁찬 외침과 동시에 대전 한밭 야구장이 떠나갈 것처럼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아아!
46이닝.
새로운 기록을 달성한 차지혁이었다.
인천 돌핀스의 타자는 분하다는 듯 방망이를 내던지며 진상을 부렸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담담하게 더그아웃으로 걸어 들어가는 차지혁만을 두 눈 가득 담을 뿐이었다.
뜨거워진 열기를 대전 호크스의 타자들은 여전히 이어가질 못했다.
찬물을 끼얹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4회 말 공격은 3타자가 연속으로 삼진을 당하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줬다.
다른 때였다면 온갖 욕과 비난을 퍼부었을 정영석도 얌전하기만 했다.
마운드에 차지혁이 섰기 때문이다.
“자, 47이닝으로 가자!”
정영석은 새로 사온 시원한 맥주마저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일어서서 차지혁의 투구를 지켜봤다.
첫 번째 타자를 내야 땅볼로 잡아내고, 두 번째 타자가 친 타구가 외야 깊숙한 곳으로 날아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정영석은 맞잡은 손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을 줬다.
“그렇지! 너 이 새끼! 오늘 전 타석에서 삼진 당해도 좋다!”
펜스에 몸을 부딪혀가면서까지 타구를 잡아낸 외야수를 향해 정영석이 소리를 쳤다.
최소 2루타, 발 빠른 주자였기에 3루타까지도 내줄 수 있었던 타구를 눈부신 호수비로 잡아낸 대전 호크스의 외야수였다.
마지막 타자를 상대로 차지혁은 다시 한 번 삼진을 잡아내며 이닝을 마쳤다.
“이제 3이닝만 잘 넘기면…….”
새로운 기록이다.
한국 프로 야구에 새롭게 기억될 신기록!
대전 호크스 타자들이 아웃을 당하든 말든, 이제는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듯 관중들은 차지혁의 투구만을 기다렸다.
6회에도 차지혁은 인천 돌핀스의 타자들을 무기력하게 만들며 마운드를 지켜냈다.
그리고 7회가 되었을 때, 차지혁은 2개의 단타를 맞으며 위기에 처했지만 자신의 기록이 이대로 깨질 수 없다는 듯 놀라운 피칭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160Km.
차지혁은 위기의 순간 또 다시 160Km의 강속구로 인천 돌핀스 타자들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고대하던 8회 초가 시작되었다.
이제 남은 아웃 카운트는 3개.
1개면 아쉽게도 역대 2위의 기록자로 남게 되고, 2개면 공동 1위에 이름을 올린다.
모든 관중들은 당연히 홀로 당당히 빛날 수 있는 3개의 아웃 카운트를 원하고 있었다.
“아웃!”
유격수 박상천이 그림 같은 수비로 몸을 날려 타구를 잡아냈다.
“아웃!”
2루수 정현우가 머리 위로 넘어가는 타구를 악착같이 쫓아가서 몸이 뒤집혀 가면서까지 타구를 잡아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기립하고 있던 관중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마지막 3번째 아웃 카운트는 다른 누구도 아닌 차지혁 본인 스스로 해결했다.
쇄애애애액!
부- 웅!
퍼- 어엉!
전광판에 찍힌 161Km의 포심 패스트볼에 방망이까지 놓쳐가며 헛스윙 삼진을 당하는 타자였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지금까지 대전 한밭 야구장에서 들어보지 못한 거대한 함성이었다.
대기록을 달성하고도 더그아웃으로 무덤덤하게 걸어가는 차지혁의 모습에서 에바마저 저절로 몸을 일으켜서 박수를 쳤다.
-차지혁! 차지혁! 차지혁! 차지혁! 차지혁!
관중들의 외침이 끊이질 않았다.
나와라, 차지혁!
관중들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인천 돌핀스의 선수들의 수비조차 방해하는 거대한 외침에 기다렸던 차지혁이 더그아웃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차지혁은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관중들을 향해 정중하게 모자를 벗어 허리를 숙였다.
국내 프로 야구에서는 보기 드문 커튼 콜이었다.
8회 말, 대전 호크스의 공격이 끝나고 9회 초가 되었을 때 마운드는 차지혁이 아닌 다른 투수에게로 넘어가 있었다.
그럼에도 관중들은 차지혁의 이름을 불렀다.
차지혁 대신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관중들의 거대한 열기에 흥분했는지, 기가 짓눌렸는지 제대로 된 투구를 하지 못하고 실점을 했고, 9회 말 공격에서 대전 호크스는 여전히 무기력한 공격력으로 패배를 하고 말았다.
대전 호크스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을 떠나는 관중들의 얼굴엔 만족감이 가득했다.
자신들의 에이스가 신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신기록은 아직도 유효했다.
그거면 충분했다.
< 『국내편 - 05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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