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편 - 058』 >
『국내편 - 058』
“차지혁 선수 기록입니다.”
김태열 팀장이 건네주는 파일을 열어본 유정학 단장은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고졸 신인 투수가 개막전 선발부터 시작해서 5경기 모든 선발 경기를 승리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5경기 연속 무실점이라는 점과 그 중 3경기는 완봉승을 거뒀다는 사실이다.
아직 놀라기엔 이르다는 듯 김태열 팀장이 추가 설명을 시작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현재 차지혁 선수는 3가지 기록에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3가지 기록이라고요?”
유정학 단장은 다시 한 번 자료를 확인했다.
하나는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하나는 알겠군요. 최다 이닝 무실점 기록 아닙니까?”
“맞습니다. 현재 차지혁 선수는 42이닝 무실점 기록 중입니다. 종전 최고 기록은 2012년에 광주 피닉스의 선발 투수 서용재 선수가 7경기 동안 기록한 45이닝 무실점 기록입니다. 앞으로 3이닝이면 타이기록을 세우게 되고, 4이닝이면 새로운 신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제가 알기로 최고 기록은 선동영 선수의 49이닝 아닙니까?”
“한국 최고 기록은 1986년과 1987년에 걸쳐 광주 피닉스의 선동영 선수가 세운 49.2이닝이 맞습니다. 하지만, 선동영 선수는 당시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세운 기록입니다. 순수하게 선발로만 등판해서 세운 기록으로는 서용재 선수의 45이닝이 최장기 기록입니다.”
김태열 팀장의 자세한 설명에 유정학 단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졸 신인 투수가 데뷔와 동시에 한국 최고 기록을 갈아치워 버릴 판이었다.
이건 도저히 말이 되질 않았다.
그나마도 서용재 선수는 7경기에 걸쳐 45이닝을 채웠다.
그런데 차지혁은 고작 6경기 만에 기록을 세워버릴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두 기록은 뭡니까?”
“단일 시즌 최소 경기 100탈삼진 기록과 역대 최연소 100탈삼진 기록입니다.”
“아!”
이 기록이라면 유정학 단장도 잘 알고 있는 기록이다.
바로 대전 호스크가 배출한 최고의 투수, 유혁선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유혁선 선수의 기록이죠?”
“그렇습니다. 우선 단일 시즌 최소 경기 100탈삼진은 2012년 유혁선 선수가 12경기 만에 100개의 탈삼진을 기록했고, 최연소 100탈삼진 기록 또한 유혁선 선수로 당시 만19세 2개월 24일이었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현재 차지혁 선수는 5경기에서 58개의 탈삼진을 기록하고 있으며, 차지혁 선수는 생일도 10월 16일생이라 아직 만으로 19세도 되지 못했습니다. 제 예상으로는 최소 12경기 이전까지 100개의 탈삼진 기록을 세울 것으로 예상되니 로테이션 등판 날짜를 따져본다면 늦는다 하더라도 대략 10번째 선발 등판일인 5월 31일이나, 11번째 등판일인 6월 5일 이전에는 기록을 세울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게 되면 최소 경기와 역대 최연소 기록을 한꺼번에 세우게 됩니다.”
“그렇군요.”
유정학 단장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문득, 국내 프로 야구가 이렇게 호락호락했었나 싶은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차지혁이 가지고 있는 스팩을 떠올린다면 국내의 수준이 낮다고 하기 보단 차지혁의 수준이 워낙 높다 보는 게 옳았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욕심을 냈던 선수였으니.’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메이저리그 구단에서도 수천만 달러를 보장했던 선수가 국내에 남았으니 어찌보면 지금의 기록들이 당연한 결과물일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당장 메이저리그의 에이스 투수가 국내로 온다고 차지혁과 같은 기록을 낼까?
그건 또 다른 문제다. 그러나 다른 국내의 투수들보다는 가능성이 높다는 건 인정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던 유정학 단장은 이윽고 고개를 흔들었다.
차지혁이 어떤 기록을 세우던, 중요한 건 현재 차지혁으로 인해 자신의 처지가 상당히 난처해졌다는 사실이다.
“12월이 되면 몇 개나 되는 구단에서 협상을 진행해올 것 같습니까?”
김태열 팀장은 여전히 얼음인간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현재만 하더라도 절반에 가까운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협상에 뛰어든 상태입니다. 차지혁 선수가 큰 부상을 당하지 않는 이상 연말에는 대부분의 메이저리그 구단에서 차지혁 선수의 YJ에이전시에 접촉을 할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한 선수를 잡기 위해 모든 구단이 나선다?
듣도 보도 못 한 일이다.
“재계약은… 힘들겠지요?”
유정학 단장의 물음에 김태열 팀장이 대답을 할 필요도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차지혁과의 재계약.
아니, 정확하게는 계약 내용 변경이다.
현재 대전 호크스의 모기업인 태광그룹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차지혁과 계약 내용을 변경하라는 지시가 떨어진 상태였다.
무슨 뜻이냐면 차지혁을 350억이라는 헐값에 팔지 말라는 소리다.
처음 차지혁과 계약을 할 때만 하더라도 태광그룹은 차지혁의 바이아웃 금액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고졸 신인 선수를 350억에 팔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여겼다.
그런데 데뷔전과 동시에 돌풍에 광풍을 일으키고 있는 차지혁의 몸값 350억은 너무 낮다는 이야기가 모기업 임원들에게서 흘러 나왔고, 실제로도 메이저리그 구단은 물론 일본 구단에서도 적극적으로 이적 협상에 달려드니, 바이아웃 금액을 높이라는 지시가 떨어진 거다.
유정학 단장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미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계약 내용을 변경하려면 선수와 에이전시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동의를 해줄 리가 없었다.
그런 사실을 모기업에 전달했음에도 막무가내였다.
최소 600억.
모기업에서 책정한 차지혁의 바이아웃 금액이다.
유정학 단장으로서는 현재 그 문제로 인해 머리가 지끈 거릴 정도였다.
“방법이 없겠습니까?”
유정학 단장의 물음에 김태열 팀장은 고개만 저었다.
이건 불가능한 일이다.
당장 바이아웃 금액을 350억에서 모기업이 바라는 대로 600억으로 올리면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원성이 엄청나게 커진다.
무엇보다 이적료의 25%를 수령하는 차지혁 선수 본인에게도 악영향을 미칠 일이다.
돈에 눈이 멀었다는 비난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
더불어 낮은 바이아웃 금액으로 인해 모든 메이저리그 구단과의 관계를 좋게 쌓아나가고 있는 YJ에이전시로서도 미치지 않고서야 자신들과 선수의 평가를 하락시킬 이유가 전혀 없었다.
“후우…….”
모기업에서는 극단적으로 계약 내용을 변경하지 않으면 차지혁의 선발 출전 자체를 제한하라는 최악의 방법까지 제시하고 있었다.
이 역시도 모기업의 미친 짓에 불과했다.
이미 차지혁은 자신의 가치를 충분하다 못해 넘치도록 증명하고 있었다.
출전 제한을 한다고 그의 가치를 낮게 평가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소모품인 어깨를 보호하며, 선수 스스로도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으니 이적 협상을 준비 중인 메이저리그 구단들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반대로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차지혁이 너무 많이 선발로 등판할 것을 걱정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멍청한 인간들!’
모기업의 임원들은 야구를 모른다.
그들은 오직 돈만 안다.
야구가 좋아서, 야구를 사랑하고, 발전을 위해서 구단을 인수하고 운영하는 게 아니다.
기업 이미지를 쌓기 위해 야구 구단을 운영할 뿐이다.
더불어 상당한 액수의 이익도 내고 있었으니 알토란 같은 광고 활동이라 보면 된다.
그런데 기업이다 보니 의외의 수익에 욕심을 부리기 시작한 거다.
하긴, 당장 350억이라는 이적료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불하겠다며 선수와 이적 협상을 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를 해오는 메이저리그 구단이 열을 넘어가니 누구라도 욕심을 부리지 않을 수가 없을 거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차라리 기업 이미지를 생각해서 최대한 차지혁으로 광고 효과를 보는 쪽이 이득이고, 보기에도 좋아 보인다.
되지도 않는 욕심을 부려봐야 기업 이미지와 구단 이미지만 시궁창으로 빠트린다.
“제가 한 마디 드려도 되겠습니까?”
김태열 팀장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유정학 단장으로서는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 얼른 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시하십시오. 모기업 임원들의 말은 나몰라라 무시하시고, 올 시즌 가을에도 야구를 할 수 있도록 올 여름 트레이드 시장에서 총력을 동원하시는 게 단장님이 사는 길입니다. 프로 야구 구단은 대전 호크스를 제외하고서라도 9곳이나 됩니다. 차지혁 선수와 계약을 이끌어내고, 10년 넘게 하위권을 맴돌던 팀을 가을 야구판에 넣고, 최고의 선수를 최고의 리그로 이적 보내면 그것만으로도 단장님은 어디서라도 탐을 내는 단장이 됩니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모기업의 임원들의 개소리 따윈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
유정학 단장은 김태열 팀장의 과격한 말에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한 참 만에 목청껏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김 팀장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군요. 좋습니다! 김 팀장의 말처럼 그렇게 하겠어요. 대신, 김 팀장도 나를 전력으로 도와줘야 합니다.”
“그게 제가 하는 일입니다.”
“그렇죠. 하하하! 그럼, 당장 무엇부터 하는 게 좋겠습니까?”
“당장 여름 트레이트 시장에서 부족한 포지션의 선수들을 얻어야 합니다.”
“생각해 놓은 선수들이 있습니까?”
“우선 1순위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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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다른 건 몰라도 팬레터는 좀 읽어! 인터넷이 발달한 이 시대에 이렇게 손수 한 장의 팬레터를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시간을 들였겠어? 오빠가 힘들게 연습 했는데 그걸 감독이나 코치들이 봐주지도 않는다고 생각해봐! 기분 좋겠어?”
아침을 먹고 훈련장으로 가려는 내 앞을 지아가 막아섰다.
내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지아는 큼지막한 쇼핑백을 내 손에 떠넘기고는 신발을 신었다.
“엄마! 나 학교 갈게!”
조심히 잘 다녀오라는 어머니의 인사를 받으며 지아는 마지막으로 날 향해 손가락으로 쇼핑백을 가리키고는 작은 주먹을 들어보였다.
“다 읽어! 성의를 생각하란 말이야! 성의를! 하여간 인간이 야구만 잘 했지 인간이 덜 됐어! 하긴! 너 같은 인간이 아날로그적 감성을 알기나 하겠어!”
돌아서서 현관문을 나가는 지아의 모습을 보며 나는 한 마디를 해주고 싶었다.
네가 한 번 읽어봐.
쇼핑백에 들어가 있는 수백 통의 팬레터를 보고 있자니 벌써부터 눈이 피로해지는 기분이었다.
지아의 말처럼 팬레터를 쓰기 위해 얼마나 고민하고, 시간과 정성을 들였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게 수백 통이라고 생각하면 읽기도 전에 질려버릴 수밖에 없다.
인터넷이라는 쉽고 편한 수단을 내버려두고 왜 이런 고생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신발장 옆에 쇼핑백을 다시 내려놓고 현관문을 나서려다 그래도 하루에 몇 개만이라도 읽어보자는 심정으로 대충 손을 넣어 집히는 대로 들고 가방에 쑤셔 넣었다.
야구 선수의 훈련은 생각보다 힘들다.
겉으로 보기에 야구 선수의 몸매는 다른 스포츠 선수들에 비해 자유분방해 운동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나, 실제로 야구 선수들은 상당한 훈련을 한다.
다만, 매일 같이 경기를 해야 하다 보니 체력 유지를 위해 먹는 양도 많고, 특정 부위만 집중적으로 훈련하다보니 보이기론 딱히 멋진 운동선수처럼 보이지 않을 뿐이다.
어깨 강화 운동과 한창 집중적으로 훈련 중인 체인지업의 제구력을 가다듬고 나서야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내일 모레 6번째 등판을 하기 때문에 무리하게 운동을 할 수가 없어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휴식을 하는 김에 아침에 들고 온 팬레터가 생각나 곧바로 가방에서 팬레터를 꺼내왔다.
-사랑하는 차지혁 선수께!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투수 차지혁 선수 보세요!
-노히트노런의 주인공 차지혁 선수에게 보내는 열두 번째 편지!
-차지혁 선수처럼 되고 싶은 중학생입니다!
-35년 대전 호크스의 야구팬입니다.
-안녕하세요, 차지혁 선수.
팬레터의 제목부터 각양각색이었다.
여성 팬인 듯 편지 봉투부터 예쁘게 꾸민 것부터, 그냥 평범한 편지 봉투에 대충 휘갈긴 글씨체까지 팬레터를 보낸 팬들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팬레터가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직접 쓴 손 글씨로 자신의 팬심을 보여주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나씩 팬레터를 읽었다.
우선 내용물은 평균 2장 정도였다.
많이 쓴 사람은 5장까지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2장을 넘지 않았다.
내용들도 거의 대부분 비슷비슷했다.
노히트노런 경기에 대한 칭찬, 현재 성적에 대한 찬탄, 꼼꼼히 기록한 경기 기록, 앞으로의 개인 활약과 대전 호크스의 페넌트 레이스 우승, 훗날 메이저리그에 대한 언급까지 솔직히 크게 다른 내용이 별로 없었다.
물론, 몇 줄씩 팬레터를 작성한 본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크게 기억할만한 부분이 없는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하나의 팬레터가 눈에 띄었다.
안녕하세요, 차지혁 선수.
저는 한국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정혜영이라고 합니다. 혹시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4월 27일 잠실 선발 등판에서 본의 아니게 차지혁 선수에게 물의를 일으켰던 여대생입니다.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는 여자였다.
덕분에 스캔들 사건에 휘말렸고, 무엇보다 김하연 아나운서로 인해 지금까지도 심심찮게 인터넷에서 대중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편지의 내용은 대부분 사과였다.
분명, 정혜영으로 인해 내가 시끄러운 일에 휘말리게 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걸 정혜영이 이렇게까지 사과를 할 필요가 있는 건가 싶었다.
정말 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할 사람들은 추측성 기사를 멋대로 올려댄 기자들이었으니까.
편지를 쓰기로 한 이유는 내가 5월 3일 경기에서 1회부터 흔들렸고, 7이닝 밖에 소화하지 못한 이유가 자신 때문인 것 같아 너무 미안해서라고 했다.
내 입장에서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고, 신경도 쓰지 않았던 일이지만, 정혜영은 달랐던 모양이다. 이렇게 편지까지 쓴 걸 보면 말이다.
“뭐라고 답장이라도 해야 하나?”
다른 건 몰라도 괜한 오해로 신경을 쓰고 있을까 싶어 마음에 걸렸다.
짧게라도 그쪽이 미안해할 일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렇다고 똑같이 편지를 하자니 귀찮았고, 남들 다 하는 인터넷에 대놓고 말할 수도 없었다.
“다음 경기에서 잘 던지면 알아서 안심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는 다 읽은 편지를 다시 한 곳에 모아두고는 훈련을 이어나갔다.
< 『국내편 - 058』 > 끝
ⓒ 독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