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편 - 057』 >
『국내편 - 057』
“저 자식 장난 아니네.”
임태현은 마운드에서 거침없이 공을 던져대는 상대팀 선발 투수, 차지혁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오늘 광주 피닉스의 타격 작전은 간단했다.
초구부터 과감하게 자기 스윙을 해라.
선발 투수인 차지혁은 공격적인 피칭으로 극단적일 정도로 스트라이크 비율이 높았기에 대다수의 공이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온다 여기고 힘껏 배트를 휘두르는 게 감독의 작전이었다.
1회 선두 타자인 김지호부터 작전이 들어 먹혔다.
이후, 행운의 안타와 기습 번트까지 이어지며 4경기 35이닝 동안 무실점을 기록하고 있는 차지혁을 상대로 무사 만루의 더할 나위 없는 기회를 만들었다.
결과적으로는 무사 만루 상황에서 1점도 점수를 내지 못하면서 기회를 날려버렸지만, 오늘 경기의 승부는 자신들에게 확실하게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지, 제구력도 이전 경기들보다 떨어졌다.
거기에다 오늘 심판인 양수혁 주심은 스트라이크 존이 짜기로 유명했다.
여러 가지로 광주 피닉스 타선에 도움이 될 일이었다.
그런데 2회 초 공격부터 상황이 변했다.
“무식하게 집어넣는데… 저걸 못 날리겠단 말이야.”
박성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구위가 좋아도 너무 좋아.”
임태현은 3회 초 타석에서 배트가 밀렸던 상황을 떠올렸다.
묵직해도 너무 묵직했다.
국내 투수들 중에서는 저 정도의 구위를 낼 수 있는 투수가 다섯 손가락도 넘지 못했다.
“저건 뭐… 돌직구를 뛰어넘는 강철직구네.”
누군가의 말에 임태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머릿속에서 한 사람의 투수가 떠올랐다.
레럴 페이루.
샌프란시코 자이언츠의 에이스 투수인 레럴 페이루가 던지는 포심 패스트볼의 구위가 오늘 차지혁이 보여주는 것과 아주 흡사했다.
2년 전, IBAF 챔피언스 리그에서 맞붙었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에이스 레럴 페이루는 알고도 칠 수 없는 포심 패스트볼로 광주 피닉스 타선을 완벽하게 잠재워버렸다.
당시 임태현도 3타수 무안타로 내야 땅볼과 내야 뜬공으로 허무하게 아웃되고 말았었다.
작정하고 배트를 휘둘렀음에도 불구하고 밀렸다.
빠른 구속에 상당히 묵직한 구위까지 얹혀진 레럴 페이루의 포심 패스트볼은 타자에게 있어 살인무기 그 자체였고, 이게 바로 메이저리그 에이스의 공이라는 걸 확실하게 보여줬다.
그런데 오늘 차지혁의 포심 패스트볼에서 레럴 페이루의 살인무기가 떠올랐다.
딱!
“또 떴다.”
타구가 적당한 높이로 떠올랐다가 유격수 글러브 안으로 쏙 들어갔다.
“정말 대단한 놈이네. 제구가 안 되니까 힘으로 기를 죽이네.”
박성훈이 고개를 저으며 글러브를 들고 모자를 고쳐썼다.
“1회에 어떻게든 점수를 냈어야 했는데…….”
임태훈은 작게 중얼거리며 글러브를 집어 들었다.
1회 무사 만루 상황에서 어떻게든 점수를 내면서 차지혁을 완전히 흔들어 놨어야 했다.
어느덧 6회 말이 되었지만, 차지혁은 더욱더 펄펄 날고 있었다.
-차지혁 선수 대단합니다! 1회 26개의 공을 던지며 무사 만루의 위기까지 몰렸었습니다만, 2회부터는 광주 피닉스 타선을 꽁꽁 묶어두고 있습니다. 강영수 해설위원께서는 지금까지의 차지혁 선수의 투구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를 하십니까?
-차지혁 선수는 어째서 투수의 구위가 중요한지를 증명하고 있네요. 2회부터 차지혁 투수는 이전까지의 정교한 제구력 위주가 아닌 구위 위주로 스트라이크 존으로 공을 던지고 있죠. 지금까지 던진 구종별로 포심 패스트볼이 54구, 컷 패스트볼이 13구, 파워 커브가 11구로 압도적일 정도로 포심 패스트볼의 비율이 높아요. 스트라이크와 볼의 비율도 극단적일 정도로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공이 많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 피닉스 타자들은 2회부터 고작 4개의 안타밖에 뽑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건 그만큼 차지혁 선수의 포심 패스트볼의 구위가 타자들을 압도하고 있다는 뜻이죠.
-소위 알고도 못 친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우선 오늘 차지혁 선수의 포심 패스트볼은 평균 구속이 155Km일 정도로 굉장히 빠르죠. 이 정도의 빠른 강속구를 안타로 만들어내려면 그만큼 빠른 배트 스피드와 파워를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실질적으로 광주 피닉스 타자들의 타구를 보면 아시겠지만, 대다수가 내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죠. 명백하게 힘에서 압도를 당하고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겠죠.
-거기에 오늘 5개의 삼진을 잡고 있는 차지혁 선수의 결정구는 모두 파워 커브였습니다. 오늘 경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차지혁 선수는 스트라이크 존을 걸치고 지나가는 정교한 제구력을 가진 파워 커브로 삼진을 잡았습니다만, 오늘은 모두 바운드가 될 정도로 큰 낙차의 커브를 구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점이 광주 피닉스 타자들에게는 또 대단히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요. 차지혁 선수의 파워 커브는 국내 모든 투수를 통틀어 가장 빠른 구속을 자랑하죠. 오늘도 여전히 빠른 구속의 파워 커브를 구사하고 있는데, 다른 점이라면 낙차폭이 상당히 크다는 거죠. 다만, 제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볼을 던지고 있음에도, 다른 때와는 다르게 적극적인 자세로 공격을 해오는 광주 피닉스 타선으로 인해 유인구로서 아주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네요.
-무엇보다 오늘 차지혁 선수의 투구 모습은 정말 시원시원한 것 같아서 제 가슴이 다 뻥 뚫리는 기분입니다.
-신인 투수다운 패기 넘치는 투구라고 할 수 있겠죠.
78구. 남은 공은 12구.
이변이 없다면 7회가 마지막 이닝이 될 가능성이 컸다.
더 던지라고 한다 하더라도 이제는 슬슬 힘이 빠지고 있었기에 무리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아직 0:0의 팽팽한 균형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광주 피닉스의 선발 투수 양동호는 3년 전부터 광주 피닉스의 에이스로 평균 16승 이상을 꾸준히 달성해주고 있는 좋은 투수다.
오늘도 대전 호크스를 상대로 아주 훌륭하게 마운드를 지켜내고 있는 중이었다.
따악!
맑고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타구가 그대로 펜스를 직격했다.
메이슨 발레타는 빠르지 않은 주력으로 2루까지 죽기 살기로 뛰어 헤드퍼스트 슬라이딩(headfirst slide)까지 해가며 2루타를 만들어냈다.
2루 베이스를 밟고 서서 전쟁에서 승리한 병사처럼 양손을 번쩍 들며 포효하는 모습이 재밌게 보였다. 물론, 광주 피닉스 입장에서는 짜증나겠지만.
무사 2루 상황에서 장태훈 선배가 타석에 자리를 잡았다.
타율은 0.286에 홈런 5개를 기록 중인 장태훈 선배는 올 시즌 부활에 성공하는 것이 아니냐는 기분 좋은 예측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무엇보다 백유홍 감독이 용병 타자인 그랜트 커렌과 함께 1루 수비를 번갈아가며 지명 타자로도 출전을 시켜주고 있었기에 장태훈 선배로서는 타격에만 집중할 수 있는 날들이 더 많기도 했다.
양동호는 메이슨 발레타에게 2루타를 허용하고 나자 굳은 표정으로 장태훈 선배에게 공을 던졌다.
1구는 낮은 볼, 2구는 높은 볼, 3구는 낮은 스트라이크, 4구는 몸 쪽 스트라이크를 던지며 2스트라이크 2볼 상황을 만들었다.
유인구냐, 승부구냐의 갈림길에서 양동호가 선택한 건 유인구였고, 장태훈 선배는 스크라이크 존 외곽을 살짝 빠져 나가는 슬라이더를 힘들이지 않고 그대로 밀어 쳤다.
1루 라인을 타고 외야 깊은 곳까지 굴러가는 타구로 인해 2루에 있던 메이슨 발레타가 홈으로 들어왔고, 장태훈 선배가 다시 2루까지 나가며 대전 홈팬들의 열광적인 환호성을 받았다.
“발레타 나이스!”
“2루타 굿굿!”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메이슨 발레타를 향해 선수들이 하이파이브를 했고, 그 대열에 나 역시 손을 내밀고 있었다.
“헤이~ 차! 오늘도 승리투수가 되라고!”
나를 향해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메이슨 발레타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5번 타자 그랜트 커렌이 우익수 앞에 떨구는 단타로 1, 3루 상황을 만들었다.
6번 김추곤 선배가 유격수 땅볼로 병살타를 만들고 말았지만, 3루에 있던 장태훈 선배가 득점에 성공하며 6회 말 공격에서 2점을 냈다.
2점차 리드 속에서 7회 초, 마운드를 지키기 위해 더그아웃을 빠져나왔다.
7회 초, 광주 피닉스의 타선은 7번 타자 이준태부터 시작됐다.
초구는 과감하게 한 가운데 포심 패스트볼을 던졌다.
154Km의 구속이 확실하게 힘이 빠졌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2구로는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컷 패스트볼을 던졌는데 이준태의 배트가 공 아래를 타격하며 3루 선상을 타고 빠르게 날아갔다.
딱!
-와아아아아!
메이슨 발레타가 라인을 타고 빠져나가는 공을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유연하게 몸을 날리며 잡아냈다.
바닥에 깔았던 몸을 벌떡 일으키며 총알 송구로 1루를 향해 달리던 이준태를 잡아냈다.
엄청난 호수비에 나는 메이슨 발레타를 향해 글러브 박수를 보내줬고, 그는 손가락 하나를 세워 흔들며 씨익 웃었다.
안타라 여겼던 공이 호수비에 걸려 아웃 당하자 광주 피닉스의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았다.
그런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8번 타자 이동경은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은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 이동경이 나를 상대로 한 일이라고는 내야 뜬 공과 삼진 밖에 없었다.
퍼엉!
“스트라이크!”
초구로 포심 패스트볼로 바깥쪽 스트라이크를 던져주고, 2구로는 무릎보다 아래로 떨어지는 포심 패스트볼을 던졌다.
볼이 되어야 할 공을 이동경이 스윙을 하면서 고맙게도 공 2개로 2스트라이크 노볼 상황을 만들 수 있었다.
타임을 외치고 타석에서 벗어나 배팅 장갑을 다시 한 번 풀었다 조이는 이동경이었다.
타자 박스 바닥 흙을 스파이크로 정성스럽게 고르는 준비 과정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타석에 들어설 때나 할 행동을 뒤늦게 하는 이동경의 모습에 살짝 짜증이 났다.
‘몸 쪽으로 바짝 붙이는 포심 패스트볼?’
황대훈 선배도 이동경의 행동이 신경 쓰였는지 위협구에 가까운 공을 요구해왔다.
다른 때라면 그대로 던졌을 공이었지만, 오늘은 제구가 마음대로 이뤄지지 않았기에 고개를 저었고, 황대훈 선배도 내 상황을 이해했는지 바운드성 파워 커브 사인을 줬다.
오늘 삼진을 잡는데 효자 노릇을 하고 있는 파워 커브였다.
광주 피닉스 타자들이 적극적으로 타격을 해오는 바람에 생각 외로 큰 효과를 보고 있는 중이었기에 이번에도 기대감을 갖고 자신 있게 공을 던졌다.
부- 웅!
배트가 허공을 갈랐고, 홈 플레이트를 맞고 튀어 오른 공을 황대훈 선배가 재빨리 주워서는 이동경을 태그아웃 시켰다.
연속으로 삼진을 당하자 이동경은 더그아웃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헬맷을 집어던지며 신경질을 부려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마지막 타자라 할 수 있는 백성홍을 상대로 4구만에 삼진을 잡아내며 길고도 힘들었던 5번째 선발 등판 경기를 마칠 수 있었다.
2:0이라는 넉넉하지 못한 점수 차이에서 마운드를 불펜으로 넘겼고, 8회 1실점을 했지만, 올해부터 마무리로 마운드를 책임지고 있는 안주민 선배가 9회를 깔끔하게 막아내면서 2:1의 아슬아슬한 승리를 챙길 수 있었다.
선발 투수로 등판해 7이닝, 7피안타, 7탈삼진을 기록했다.
다른 경기에 비해 피안타가 많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실점으로 이어지진 않았기에 나쁘다고 할 만한 경기 내용은 아니었다.
1회 초만 하더라도 오늘 경기가 제대로 꼬일거라 여겼던 것이 송진욱 투수 코치의 조언으로 인해 완전히 풀릴 수 있었던 거다.
-차지혁 선수, 오늘 승리투수가 되신 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오늘 승리로 5승을 챙기셨고, 현재 다승 1위 자리를 확실하게 지키게 되었습니다. 소감 부탁드립니다.
“오늘 투구 내용은 확실하게 제가 신인 투수라는 걸 느낀 경기였습니다. 1회부터 위기 상황에 처했고, 운이 좋게도 무사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1회를 마치고 오늘 경기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송진욱 투수 코치님께서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송진욱 투수 코치님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오늘 승리는 결코 없었을 겁니다. 오늘 승리는 송진욱 투수 코치님 덕분입니다. 코치님 감사합니다.”
모자까지 벗어 정중하게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후, 이런저런 인터뷰가 이어졌고 언제나처럼 담담하게 단답형의 대답만을 했다.
그리고 인터뷰가 끝나고 카메라 불이 꺼지자, 아나운서가 나에게 작게 속삭였다.
“차지혁 선수, 오늘 경기 정말 멋졌어요.”
나에게 속삭이듯 말을 한 아나운서는 엊그제까지 인터넷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김하연 아나운서였다.
“네.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나를 주시하고 있을 기자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기 싫어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몸을 돌릴 때였다.
“여기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김하연 아나운서가 깨끗한 야구공 하나를 내게 건넸다.
굳이 사인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기에 곧바로 사인을 해주었고, 김하연 아나운서는 고맙다며 살짝 웃었다.
“다음 경기도 기대할게요.”
“네.”
서둘러 자리를 피했지만, 역시 그날도 내 승리와 함께 인터넷에는 야구공에 사인을 해주는 내 모습과 사인볼을 받아들고 좋아하는 김하연 아나운서의 모습이 대문짝만하게 찍혀 기사화되어 있었다.
“야! 사인을 왜 해! 으이구! 이런 바보가! 그렇게 당하고도 또 당하고 싶어서 사인을 해줬어? 솔직히 말해봐? 이 할망구 좋아해? 그런 거야? 어디 여자가 없어서 이런 노인네를 좋아하는 거야! 젊고 싱싱한 여자들이 눈에 안 들어와? 차라리 내 친구 중 괜찮은 애 소개시켜 줘? 이 여자 소문이 얼마나 더러운지 알기나 하는 거야!”
그날 저녁, 지아는 내 방에 들어와 무려 1시간 가까이 날 비난하고는 제 방으로 돌아갔다.
정말이지 여러 가지로 힘든 하루였다.
< 『국내편 - 057』 > 끝
ⓒ 독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