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56화 (56/221)

< 『국내편 - 056』 >

『국내편 - 056』

-마운드를 내려가는 차지혁 선수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피로해보입니다. 1회 초, 광주 피닉스를 상대로 26개의 공을 던졌습니다. 무사 만루 상황까지 갔었던 걸 감안하면 결코 많은 공을 던졌다고 할 순 없습니다만, 정신적인 피로감은 상당했을 겁니다.

-무사 만루 상황에서 한승철 타자를 삼진으로 처리하고, 공이 뒤로 빠지는 사이 홈 쇄도를 하던 김지호 주자를 잡아내면서 순식간에 2아웃 상황으로 만들어 위기를 극복하나 했으나, 이후 윤호섭 타자를 상대로 7구까지 가는 접전 끝에 볼넷을 주며 다시 만루 상황에 처했죠. 제가 볼 때, 볼넷을 주지 않는 차지혁 선수가 볼넷을 줬다는 의미는 오늘 제구력에 확실히 문제가 있다는 걸 명확하게 보여준 것 같네요.

-그렇습니다. 차지혁 선수는 오늘 이전까지 있었던 4경기에서 112타자를 상대하는 동안 고작 2개 밖에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다섯 타자 만에 볼넷을 주고 말았습니다. 특히, 오늘 컷 패스트볼이 손에서 자꾸 빠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죠. 파울로 판정이 나긴 했지만, 한승철 타자에게 맞았던 공도 포심 패스트볼이 아니라 컷 패스트볼일 가능성도 있어요. 어쨌든 2사 만루 상황에서 사이먼 데이비 타자를 힘겹게 좌익수 뜬공을 잡아내며 실점을 막기는 했습니다만, 글쎄요. 오늘 경기는 앞서 있었던 차지혁 선수의 경기들과는 확실하게 다를 것 같네요.

-이제 1회 말, 대전 호크스의 공격이 시작되겠습니다.

“몸이 무거운 거냐?”

송진욱 투수 코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왔다.

“컨디션이 그렇게 나쁜 건 아닙니다.”

“그럴 때가 있다. 컨디션이 좋아도 내 마음대로 공을 던지지 못하는 날도 있고, 컨디션이 나빠도 생각 외로 좋은 공을 던질 때가 있지. 투수의 몸은 예민해서 단순히 컨디션만으로 단정 지을 수가 없다.”

“그런 것 같습니다.”

학창 시절에도 이런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솔직히 당황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내 생각과는 다르게 자꾸만 공이 손끝에서 제대로 채이지 않았다.

평소와 다르지 않게 공을 던지고 있음에도 이러니 솔직히 짜증도 났다.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 원인인지 모르니, 해결책을 찾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제구력 좋은 투수가 제구가 안 되는 날에는 그날 시합을 망칠 수밖에 없다. 구위가 좋은 투수가 떨어진 구위로 타자를 상대하면 그 역시 난타를 당한다. 지금 네 경우는 어떤 경우냐?”

제구력과 구위.

어느 쪽이 더 문제가 있냐 묻는다면 당연히 제구력이다.

스트라이크 존을 내 마음대로 공략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오늘은 주심마저 성향이 나와 맞질 않았다. 상당히 빡빡했다.

평소라면 주심 성향에 맞춰서 조금 더 공을 밀어 넣어보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정교한 제구력이 따라주지 않으니 그렇지 않아도 적극적으로 타격을 하는 광주 피닉스의 타자들이었기에 자칫 난타를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생각보다 볼이 많이 발생하고 있었다.

“제구력이 조금 더 신경 쓰입니다.”

구위는 나쁘지 않았다. 나쁘더라도 신경 써서 던지면 억지로라도 끌어올릴 수 있다.

하지만, 제구력은 다르다. 어떤 노력을 한다 하더라도 오늘 당장 정상적으로 회복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다만, 구위를 끌어올리자면 힘이 많이 들어가고, 제구력이 더 떨어진다. 동시에 체력적인 부담도 심해진다. 그러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구위다.

“그렇다면 구위로 승부를 봐라. 네 구위라면 쉽게 안타를 내주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리고 오늘 한계 투구수는 90구다. 90개를 넘어가면 곧바로 교체할 테니 그 점을 염두 해두고 투구해라. 내가 봤을 때, 지금 네 상황은 컨디션 문제보다는 체력적인 문제가 더 크다.”

“예? 체력은 괜찮습니다만?”

송진욱 투수 코치가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는 괜찮다 느끼겠지만, 네 공을 보면 안다. 네 체력이 아무리 좋아도 프로 무대에서 꾸준히 로테이션에 맞춰 선발 등판한다는 건 단순히 체력이 좋다고 소화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몸이 적응을 해야 하는데, 넌 지금 적응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거기에 매 경기 100구가 넘어가는 많은 공을 던졌다는 점도 문제겠지.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감독님과 상의를 한 적이 있었다. 내 마음만 같아서는 100구로 투구 제한을 걸어두고 싶지만, 완봉 페이스의 투수를 무조건 끌어내리기가 쉽지 않았기에 널 지켜봤던 거다. 앞으로도 완봉 페이스의 경기에서는 일부러 널 교체하진 않겠지만, 그 외의 경기에서는 100구 투구 제한을 걸어둘 생각이다.”

적응을 해야 한다는 말에 최상호 코치와 박호찬 선배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타자와 투수, 어느 쪽이 더 체력적인 부담감을 느낄 것 같다고 생각하는지 말해봐라. 사람들은 거의 매일 경기에 나서야 하는 타자들이 더 부담스럽다 여길 테지만, 실제로 체력적인 부담이 더 큰 건 투수 쪽이다. 특히, 많은 이닝을 소화해야 하는 선발 투수의 경우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일정 간격으로 유지되는 로테이션에 몸이 적응하지 못하면 체력적인 부담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투수는 공 하나를 던지기 위해 온 몸의 힘을 발산한다. 그렇게 100번 공을 던지면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고갈될 수밖에 없다. 피로는 휴식을 통해 지울 수 있어도, 몸의 균형과 정력은 단순히 휴식한다고 회복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적응이 필요한 거다. 몸이 스스로 일정한 패턴을 반복하며 신체의 균형과 정력을 회복하는 거지. 특히, 투수들의 경우 전체적으로 일정한 바이오리듬을 형성해야 하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게 아니다. 너도 프로에 가면 느끼겠지만,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너만의 바이오리듬을 완성해야 로테이션에 맞춰 꾸준히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거다.’

‘대부분의 투수들은 이십대 초중반보다 이십대 후반에 더 쉽게 공을 던지지. 언뜻 생각하면 이해가 가질 않지? 힘이 펄펄 나는 이십대 초중반의 체력이 더 강한 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실제로 많은 투수들은 이십대 후반에 로테이션을 더 쉽게 소화하지. 패턴이야. 오랜 시간 일정한 패턴을 반복한 투수들의 몸은 알아서 그렇게 조절이 되거든. 이건 직접 경험을 해봐야 아는 부분이라 더 이상의 설명은 어려워. 지혁이 너도 곧 알게 될 거다. 체력은 얼마든지 혼자 만들어 낼 수 있는 부분이지만, 투수의 몸은 차근차근 만들어야 하는 부분이다. 그러니 되도록 꾸준히 로테이션을 소화해라. 선발 투수의 몸이 되도록 만들어야한다.’

당시에는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확실하게 이해가 갔다.

오늘 컨디션과 체력에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몸이 미묘하게 틀렸다.

원인도 없었고, 해결책도 없었다.

“선발 투수가 2, 3점 실점한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부담 없이 자신 있게 구위로 승부를 해라.”

송진욱 투수 코치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감독에게로 향했다.

4경기 무실점.

내가 무실점, 평균자책점 0점에 집착을 하고 있었을까?

일부러 의식을 하진 않았겠지만, 어느 정도 염두해 두고 있었을지는 모른다.

내가 아무리 화려한 커리어를 완성하고 싶다 하더라도 시즌 내내 평균자책점 0점을 기록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허황된 꿈이다.

연속 안타를 맞지 않아도 홈런 한 방만 맞아도 끝이다.

내가 과연 시즌 내내 그 어떤 타자에게도 홈런을 허용하지 않을까?

그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난 고졸 신인 투수다.

다른 고졸 신인 투수들처럼 비슷한 성적을 기록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두고 싶은 건 사실이다.

고졸 신인 투수가 프로 첫 시즌에서 20승에 평균 자책점 1점 대만 유지해도 거의 깨지지 않을 기록으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후우…….”

깊게 숨을 토해내며 왼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오늘 제구력보다는 구위로 승부를 보라는 송진욱 투수 코치의 말대로 마운드에서 공을 던진다.

1회에 너무 많은 공을 던졌다.

26개나 던졌으니 앞으로 내가 던질 수 있는 여유분의 공은 64개뿐이다.

공격적인 투구 스타일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마저 버리면 그건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된다.

이럴 때는 칠 테면 마음껏 쳐보라는 식으로 던져준다.

내 공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 없으면 절대 던질 수 없다.

마운드에 서는 투수는 절대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자신의 공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두려워하거나, 피하거나, 요행을 바라면 절대 안 된다.

그건 정면으로 승부를 해오는 타자에 대한 예의 또한 아니다.

“아! 아쉽다!”

“아우! 그게 잡히네!”

“꼭 이런 날에는 바람도 안 불어요!”

장태훈 선배의 타구가 펜스 바로 앞에서 중견수에게 잡혔다.

타구가 날아가는 순간 모두 벌떡 일어나서 더그아웃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던 선수들이 아쉬운 탄성을 내질렀다.

“야수들! 확실하게 수비해!”

수비 코치가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글러브를 챙겨드는 야수들에게 소리쳤다.

조영천 수비 코치 곁에는 송진욱 투수 코치가 나란히 서 있었다.

이건 야수들에게만 하는 소리가 아니다.

나에게도 하는 말이다.

수비를 믿고 자신 있게 공을 던지라는 뜻이다.

몸을 일으켜 마운드로 향하자 1회의 아슬아슬했던 투구에도 불구하고 홈 관중들이 크게 환호성을 내질러줬다.

-차지혁! 차지혁!

열광적으로 내 이름을 부르며 응원을 하는 팬들에게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게 뭘까?

노련미 넘치는 베테랑 투수의 타자와의 수 싸움?

정교한 제구력을 바탕으로 타자를 요리하는 모습?

화려한 변화구로 무장한 현란함?

팬들이 무엇을 원하든,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걸 보여준다.

고졸 신인 투수만이 가질 수 있는 호전적인 투구!

베테랑 타자를 상대로 절대 물러나지 않고 젊은 패기!

오늘만큼은 기교가 넘치는 사냥꾼이 아니라, 맹수를 상대로 같은 맹수마냥 달려드는 거침없는 사냥꾼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운드에 올라서서 로진백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장난치듯 던졌다.

새하얀 분말가루가 허공에서 연기처럼 흩날렸다.

팡팡!

“던져!”

황대훈 선배가 포수 미트를 치며 외쳤다.

송진욱 투수 코치에게 어떤 말을 들었는지, 평소보다 힘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대전 호크스의 주전 포수인 황대훈 선배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은 선수였다.

리드도 뛰어난 편이 아니고, 타격도 평균 이하였으며, 블로킹이나 송구도 딱히 평균 이상이라고 부르긴 힘들었다.

그러나 한 가지 장점은 있었다.

믿음.

투수가 마운드에서 마음껏 공을 던질 수 있게 만드는 믿음이 있었다.

포수를 믿고 던질 수 있다는 건 굉장히 큰 장점이다.

쇄애애애액!

퍼엉!

“좋아! 좋아!”

제구력에 신경을 쓰지 않으니 확실히 구위가 한층 좋아졌다.

연습투구가 끝나자 타석에 타자가 들어섰다.

국내 10개 구단 중 가장 강력한 하위 타선을 보유한 광주 피닉스의 7번 타자 이준태.

빠른 배트 스피드로 빠른 볼에 강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파워가 부족해서 시즌 내내 10개의 홈런을 넘겨본 적이 없는 타자다.

우선 1구로 포심 패스트볼이다.

한 가운데만 아닌, 스트라이크 존에만 넣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힘껏 공을 던졌다.

쇄애애애액!

딱!

역시나 1회처럼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배트를 휘두르라는 작전이 유지되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배트가 밀리면서 타구는 힘없이 2루수인 정현우 선배의 앞으로 굴러갔고, 안정적인 캐치와 송구로 이어지며 1구만으로 1아웃을 만들어냈다.

왼손을 주무르며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는 이준태의 모습이 유독 눈에 크게 들어왔다.

광주 피닉스의 8번 타자는 이동경으로 주전 포수로서 파워는 있었지만, 정교함이 떨어졌다.

낮게 던지자는 생각으로 역시나 포심 패스트볼을 던졌다.

퍼엉!

미트에 박혀 들어가는 파열음이 천둥처럼 들렸다.

“스트라이크!”

주심의 선언과 함께 관중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전광판을 바라보니 156Km가 찍혀 있었다.

오늘 경기에서 가장 빠른 구속이었다.

타석에 서 있는 이동경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배트를 꽉 비틀어 쥔 모습이 한 방 시원하게 날려버리고 말겠다는 욕심이 보였다.

치겠다면 줘야지.

어차피 오늘은 구위로 타자를 찍어 누르기로 한 날이잖아.

와인드업을 하며 포수 미트를 향해 공을 뿌렸다.

딱!

“마이 볼!”

3루수 메이슨 발레타가 자신 있게 소리치며 내야에 높이 뜬 공을 쉽게 잡아냈다.

“차! 오늘 공 죽이는데?”

메이슨 발레타가 나를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희미하게 웃어주고 다음 타자를 상대했다.

9번 타자 백성홍 역시 2구만에 내야 땅볼로 아웃이 되고 말았다.

1회 26개나 던져 아웃 카운트를 잡았던 것과는 비교가 될 정도로 2회에는 고작 5개만 던져서 이닝을 마무리했다.

관중들의 박수 세례를 받으며 더그아웃으로 들어갔고, 송진욱 투수 코치가 잘 했다며 어깨를 두드려줬다.

< 『국내편 - 056』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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