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53화 (53/221)

< 『국내편 - 053』 >

『국내편 - 053』

“주천이가?”

내 물음에 핸드폰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무리하게 훈련하다가 문제가 생겼나봐. 벌써 수술 날짜까지 다 잡혔다고 하던데?

“수술을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하데?”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는데, 주천이가 스스로 원했다고 하더라고. 너도 알잖아? 투수들에게는 굉장히 매력적인 수술이라는 걸.

매력적인 수술?

난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의 몸은 어떠한 경우라도 인위적으로 다루지 말아야 한다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칼이다.

멀쩡한 몸에 칼을 대는 건 정말 최악의 수단이다.

아무리 모범적인 사례가 많다 하더라도 수술이라는 걸 쉽사리 결정할 문제는 아니라 여겼다.

-혹시 또 알아? 주천이도 수술 전보다 구속이나 구위가 더 좋아질지?

장난스런 장형수의 말에 내 눈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토미존 수술로 성공한 선수들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것만 보고 수술을 결정하는 건 정말 위험한 도박이야. 수술에 성공한 선수만큼 실패한 선수도 많다는 게 그 증거니까.”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최근 10년간 성공사례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사실이잖아? 미국에서는 일부러 멀쩡한 팔을 수술하는 투수들까지 있을 정도야. 나도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는 하지만, 그만큼 간절하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전혀 모르는 소리가 아니다.

장형수의 말처럼 구속에 대한 갈증과 맹목적인 욕심으로 인해 멀쩡한 팔을 수술하는 극단적인 투수들도 있었다.

토미존 수술 이후, 구속이 올라간 선수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구속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수술대에 오르는 것이다.

과연 옳을까?

절대 아니다.

적어도 난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모험을 하는 선수들 중 정말 자신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이는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토미존 수술로 구속이 오른 투수들은 수술이 성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후 피땀을 흘릴 정도로 재활에 성공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멀쩡한 팔을 수술한다는 건 이미 정신부터 틀려먹었다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었다.

수술을 할 정도라면 차라리 이를 악물고 훈련을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다.

-너는 괜찮냐?

“뭐가?”

-너 요즘 보니까 장난 아니던데? 시즌 초부터 그렇게 많은 이닝을 던져서 괜찮냐? 오늘, 아니 날짜가 지났으니 어제겠구나. 어쨌든 4경기에서 35이닝을 던졌잖아?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단순 계산상으로만 따져도 24경기만 선발로 등판해도 210이닝이잖아? 미쳤네. 설마 너 1년, 2년만 반짝 야구 할 생각은 아니지?

“내가 혹사라도 하고 있을까봐?”

내가 피식 웃으며 묻자 장형수가 익살스럽게 웃었다.

-하긴, 몸 관리의 달인이라 불리는 차지혁인데 내가 별 걱정을 다 했네. 흐흐!

잠시 잠깐의 영광을 위해 몸을 혹사할 정도로 난 어리석지 않다.

오늘 경기를 위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투구를 한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적어도 나는 그런 선택의 순간을 철저하게 외면할 준비가 되어 있다.

-너는 벌써 4승에 4월 최우수선수가 유력할 정도로 정상을 향해 수직으로 내달리는데, 나는 언제쯤 마이너리그를 벗어날지 기약조차 할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하아~!

“트리플A 팀에서 주전 마스크 쓰고 있는 놈이 참 팔자 좋은 소리 하고 있네. 너보다 나이도 훨씬 많은 포수들이 더블A나 싱글A에서 뛰는 거 보면 미안하지도 않냐?”

-내가 왜 걔네들한테 미안해? 프로 선수는 실력이 곧 경쟁력인데! 나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걸 내가 미안해 할 필요는 없잖아?

“미국물 먹더니 뻔뻔해졌네.”

-햄버거랑 피자만 먹어봐라. 속만 니글니글 거리는 게 아니라 몸 전체가 니글니글 거린다. 너도 나중에 와보면 알겠지만, 진짜 여기서는 함부로 고개 숙이면서 저 자세로 나가면 무시만 당하더라. 좀 뻔뻔해질 필요가 있더라. 이게 다 형님이 먼저 경험한 소중한 자산들이니까 나중에 유용하게 써먹고 밥이나 거하게 한 끼 사면된다. 흐흐흐!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니가 알긴 뭘 알아? 경험해보지 못한 놈은 절대 알 수 없는 특급 비밀이야!

“내 주변에 메이저리거가 둘이나 된다.”

-아! 최상호 코치? 그런데 또 한 명은 누구야?

“박호찬 선배.”

-박호찬 선배? 이 새끼! 넌 도대체 무슨 짓을 하기에 레전드라 불리는 선배들한테만 야구를 배우는 거야? 나쁜 새끼! 안 그래도 실력도 좋은 놈이 코치까지 좋으면 다른 평범한 놈들은 어떻게 야구 하라고! 너처럼 이기적으로 야구하는 놈들 때문에 나처럼 평범하게 야구하는 놈들이…….

장형수의 시끄러운 목소리를 더 듣고 있을 필요가 없었기에 끊겠다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잠을 자려고 했지만,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벌컥 열리며 지아가 들어왔다.

“오빠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뜬금없는 소리에 슬쩍 시계를 바라봤다.

어느덧 밤 12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무슨 소리야? 그리고 너 내일 학교 안 가? 12시가 지났는데 아직까지 안자고 뭐해? 너 엄마한테 이른다.”

“나 원래 늦게 자거든! 그것보다도 이 여자 누구야?”

지아는 최신형 테블릿pc를 내 앞에 내밀었다.

테블릿pc 화면에는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는 내 모습과 전광판 속에 예쁜 여자가 두 손으로 하트를 만들고 있는 장면이 사진으로 찍혀 있었다.

기억에 있다.

8회 말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연습 투구를 하고 포수가 2루로 송구를 하는 걸 지켜보다 우연찮게 전광판에 잡힌 여자를 잠시 바라봤다.

예쁜 얼굴 때문에 시선이 멈췄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팬이겠지. 나 모르는 여자야. 나 오늘 서울에서 시합하고 내려왔다. 피곤하니까 그만 좀 자자.”

“단순한 팬이라고? 모르는 사이라고?”

“그럼 내가 어떻게 알아?”

“이건 어떻게 설명 할 건데!”

지아가 화면을 넘기자 이번에는 경기가 끝나고 사인볼을 던져주는 내 모습과 그걸 받아들고 좋아하는 여자의 모습이 또 다시 사진으로 아주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

사인볼을 저 여자가 받았던가?

나는 모르는 일이다.

그냥 무작위로 사인볼을 관중들에게 던져줬을 뿐이다.

그 중 하나가 우연찮게 여자의 손에 들어갔을 뿐인데, 문제는 이런 내 말을 지아가 믿어줄 것 같지 않았다.

“이걸 보고도 오리발을 내밀 수 있을까?”

다시 화면이 넘어갔다.

이번에는 음료 세례를 받고 나에게 안겨 있는 아나운서와 그 모습을 굉장히 화가 난 얼굴로 노려보고 있는 여자가 사진에 찍혀 있었다.

모든 사진들이 하나 같이 나와 여자를 위주로 작정하고 찍은 것 같았다.

“언제부터 정혜영하고 만났어?”

“정혜영?”

“흥! 여전히 오리발을 내밀겠다?”

“정혜영! 나이는 20살! 한국대학교 신입생! 그것도 수석 입학! 대전 명화여고에서 3년 동안 전교 1등을 놓친 적도 없고, 전국 등수도 1, 2등을 밥 먹듯이 했던 수재라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보지? 이미 인터넷에 쫙 깔렸거든! 정말 사람들 말처럼 오빠가 정혜영 때문에 대전 호크스와 계약을 한 거야? 아빠랑 엄마도 이 사실을 알아?”

“…너, 소설 쓰냐?”

내 말에 지아는 더 이상 거짓말 할 생각하지 말라며 날 귀찮게 했고, 어쩔 수 없이 힘으로 방에서 내쫓을 수밖에 없었다.

쾅쾅쾅쾅!

“이 멍청아! 여자 함부로 사귀지 마! 너처럼 야구 밖에 모르는 바보는 이용만 당할 수 있다고! 여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오빠 네가 몰라서 그래! 오빠는 딱 호구야! 더군다나 정혜영은 얼굴도 예쁘고, 머리도 좋으니까… 너 같은 야구 바보는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지고 논단 말이야!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여자는 여자가 잘 안다니까!”

방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내지르는 지아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잠을 자려고 했지만, 도저히 신경이 쓰여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결국, 컴퓨터를 켰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와 정혜영이라는 여자가 애인 사이라는 말도 안 되는 추측성 기사나 인터넷 글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특히, 한 기사가 이번 일을 의도적으로 부풀리며 확대시키고 있었다.

“조희근?”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히는 거대 신문사인 조성일보의 조희근이라는 기자였다.

기사에 달린 댓글들은 대부분 말도 안 되는 억지 추측이다, 의도적으로 차지혁의 스캔들을 조장하고 있다, 또 조성일보가 소설 쓰고 있다며 비난하는 댓글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식의 댓글도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괜히 곤란해지겠는데?”

나야 어차피 언론과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였기에 신경 쓸 것도 없는 해프닝일 뿐이었지만, 정혜영이라는 여자는 입장이 달랐다.

일반인이고, 지극히 평범한 여대생이다.

인터넷에서 약간 유명세를 타긴 했지만, 지금처럼 스캔들과 같은 기사에 등장해서 좋을 것 하나 없었다.

무엇보다 여자로서 좋지 않은 상황에 휘말려 곤란하게 될 건 뻔한 일이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이잉.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해보니 황병익 대표였다.

무엇 때문에 이런 늦은 시간에 전화를 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여보세요?”

-자는 걸 깨운 게 아닙니까?

“아닙니다. 기사 때문에 전화하셨죠?”

-차지혁 선수도 보셨군요. 그게 참… 아니라는 걸 압니다만, 워낙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다보니까 확실하게 확인을 해둬야 할 것 같아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하게 됐습니다. 오늘 서울 원정 시합까지 하고 늦게 집에 도착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오늘부터 5일 동안 휴식일이잖습니까. 그것보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추측성 기사를 작성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물음에 황병익 대표가 가볍게 웃었다.

-차지혁 선수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이 워낙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지금 차지혁 선수에 관한 모든 행동 하나, 하나가 대단한 관심사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선수 입장에서는 귀찮고 신경 쓰이는 일이겠지만, 팬이 없는 스타는 없는 법입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굳이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번 일은 간단하게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는 걸 해명해두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거창하게 반박 기사를 내면 여자분에게도 실례가 될 수 있으니 간단하게 해명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알아서 해주세요.”

이런 일을 해결해주는 게 에이전시였기에 나는 황병익 대표에게 모든 걸 맡겨두고는 통화를 마치려고 했다.

-아! 그리고 4월의 선수로 수상이 확실하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너무 당연해서 크게 놀랍지도 않으시죠? 어쨌든 프로 데뷔 첫 달에 이달의 선수로 선정된 점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승승장구하길 바라며, 에이전시 대표로서 차지혁 선수의 모든 편의를 최대한으로 맞춰드릴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황병익 대표와의 통화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4월의 선수로 수상이 된다는 말에 살짝 마음이 들뜨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프로 데뷔 첫 달부터 너무 많은 것들을 이루는 것 같아 너무 일이 잘 풀리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이 정도로 만족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내가 쌓아야 할 경력은 무수히 많았고, 그걸 이루기 위해선 현실에 안주하기보단 더 노력해서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운동선수는 현실에 만족하는 순간 기량이 하락하기 시작한다.

은퇴 직전까지 꾸준히 노력해야 하는 게 운동선수의 숙명이다.

우선 올해 목표는 신인왕, 1점대의 평균자책점, 200이닝을 소화하는 거다.

다승왕과 MVP는 나만 잘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미련을 갖지 않으려고 생각 중이었다.

원하는 목표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꾸준히 활약할 수 있도록 체력을 더 길러야 하고, 컨디션 조절에 힘써야 한다.

구속과 구위, 제구력은 말할 것도 없다.

무엇보다 하반기까지 시합에 써먹을 수 있을 수준으로까지 체인지업을 던질 수만 있게 된다면 내 목표는 충분히 이룰 수 있게 된다.

오늘 있었던 경기를 다시 한 번 머릿속에서 되풀이해보며 천천히 잠에 들었다.

“이건 또 뭐야?”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검색하던 지아가 벌떡 일어났다.

오늘 차지혁과 인터뷰를 한 미모의 아나운서가 차지혁 선수는 현재 만나고 있는 여자 친구가 없다는 말을 자신에게 직접 했다는 짧은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기사 내용 중에는 차지혁 선수가 멋있다느니, 나이는 어리지만 믿음직스러울 정도로 듬직하다는 투로 말을 해놔서 누가 봐도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기사 내용도 문제지만, 지아를 더 신경 쓰이게 만드는 건 음료 세례를 받은 직후, 자신의 오빠에게 찰싹 안겨 있는 사진이었다.

음료에 젖은 상의로 인해 풍만한 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난 자극적인 사진과 우연찮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차지혁의 시선이 충분히 오해를 살만한 구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김하연? 스물다섯? 와~! 이 노망난 할망구가 어디서 교태를 부리는 거야!”

지아는 바드득 이를 갈아붙이며 기사에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 『국내편 - 053』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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